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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띤 오색 무지개, 삶을 일구는 녹색 찬가
- 이도연론
권대근
문학박사, 하북미술대학 객좌교수
I.
릴케는 “사물은 인간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했다. 세계는 처음부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새로운 문장이 된다. 시는 바로 그 ‘다음 문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눈앞의 사물을 단순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재의 떨림과 시간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이다. 이도연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사물의 다음 문장이다》를 읽으면서 평자는 먼저, 시란 결국 사물 속에 잠들어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을 깨우는 행위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도연 시인은 자연과 사물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사물의 침묵 속에서 다음 문장을 듣는다. 꽃이 지는 자리에서 희망을 읽고, 바람의 결 속에서 인간 존재의 흔들림을 포착하며, 일상의 작은 풍경 속에서 삶의 본질을 길어 올린다. 그녀는 자연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졌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순수와 체험을 시적으로 변환할 수 있는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다. 특히 세계를 상관물로 치환하여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은 그녀의 시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든다. 사물은 그녀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존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며 또 다른 자아다.
무엇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인 《나는 사물의 다음 문장이다》는 이도연 시세계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 ‘사물’은 눈앞에 놓인 현실이자 자연이며, ‘다음 문장’은 그것을 넘어 생성되는 새로운 의미다. 사물은 멈춰 있지만 시는 그 안에서 움직인다. 돌멩이 하나에도 시간이 스며 있고, 낙엽 하나에도 생의 윤회가 숨어 있으며, 찻잔 속 흔들리는 물결에도 인간 존재의 고독과 희망이 출렁인다. 시인은 그 미세한 떨림을 언어로 건져 올린다. 결국 그녀에게 시란 사물의 침묵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며, 존재의 이면에 숨겨진 문장을 끝없이 이어가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인생백년의 기로에 서서 하나하나 배워 가면 좋은 일이 반드시 내 곁을 지켜준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이론적인 ‘왜’에 대한 해답에도 창조적인 ‘어쩐지’에 대한 심상을 살려나가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그녀의 시작 태도를 잘 보여준다. 시창작은 단순한 감상의 기록이 아니라 삶과 존재를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민들레 홀씨처럼 척박한 자리에서도 다시 뿌리내리려는 의지, 화려하지 않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생명을 밀고 나가려는 생의 태도는 그녀의 시편 곳곳에 녹아 있다.
시의 숲을 헤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평자는 사물의 내면으로 스며드는 한 인간의 고독한 사유와 조우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학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존재론적 질문을 품고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시인의 내밀한 경험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도연의 경험은 언제나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사물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통해 세계를 읽는다. 따라서 그녀의 시에서 사물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이며,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통로다.
본래 시란 자동화된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예술이다. 익숙함 속에 잠든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물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도연의 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빛난다. 그녀는 오래 바라보고, 천천히 느끼며, 사물의 침묵 속에서 미세한 숨결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숨결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그렇기에 그녀의 시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생성이다. 하나의 사물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문장이 태어난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나는 어린 시절 민들레 꽃이 지고 나면 솜털처럼 바람 따라 저 멀고도 가까운 어느 곳이든지 현실에 연연치 아니하고 적당한 자리 잡아 잘 살아가는 민초의 민들레 홀씨가 되고자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진술 속에는 삶을 향한 겸허한 태도와 존재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담겨 있다. 그녀는 거창한 구호보다 작은 생명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며, 화려한 수사보다 진실한 떨림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이도연 시인이 찾고자 하는 것은 거대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 속에 숨겨진 생명의 온기이며, 존재의 다음 문장이다. 그녀는 시를 통해 세계를 다시 읽고, 삶을 다시 쓰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 문장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문장이 이어지고, 하나의 사물이 침묵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의미가 피어난다. 동편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듯 그녀의 시 또한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길어 올린다. 이도연 시의 정체를 찾아나서는 길은 그래서 행복하다. 그녀는 오늘도 사물의 침묵 앞에 귀를 기울이며, 아직 쓰이지 않은 다음 문장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II.
슈바이쳐는 <나의 생애와 사상>에서, “나는 처음에 아프리카로 갈 때, 세 가지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다. 오르간 예술을 체념하는 것, 애착이 깊은 대학교수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 경제적 독립을 상실하고 앞으로의 생계를 친구의 원조에 의뢰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들을 희생하려 했을 때 아브라함과 같은 운명이 나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희생을 면제받았다. 파리 바흐협회에서 선물 받은 페달 달린 열대지대 피아노와 열대기후에도 태연한 건강을 유지하므로 나는 오르간 연주 기술을 잃지 않았다. 대학의 강사로서의 활동은 체념했지만 그 대신 많은 대학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서 보상은 충분했다. 경제적 독립은 잠시 어려웠으나 지금은 오르간 연주와 저술에 의해서 다시금 회복할 수가 있었다. 이미 한번 버린 삼중의 희생을 모두 면제받은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실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험이었다.”고 썼다. 슈바이처는 기존의 성공적인 삶을 뒤로하고, 의학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희생을 각오하니 희망이 찾아오더라는 감동적인 고백이다.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이순신의 어록을 떠올리게 하는 슈바이츠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존경하며 원조자이기도 했던 프로이엘과의 우정까지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로서 그 대가를 지불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학문을 위해서 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도연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을 에세이문예사에 맡기겠다고 한 데서 이도연의 마음 속에 있는 무엇을 각오한 듯한 결기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기에서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 이길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의 전장에서 싸워 싸울 것이며, 어떠한 희생을 치러더라도 단연 우리 국토를 지킬 것이다.”라고 한 영국의 수상 처칠의 결연한 도전 같기도 하고, 들뢰즈의 아장스망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도연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과 순수를 노래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거친 삶 속에서 타자의 실체를 알리고자 했고, 자신을 위협하는 많은 사회적 기제들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탐색하며, 오랜 시간 동안 시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녀의 시는 동일성의 원리에 따른 불변의 가치를 지향하기보다는 차이의 원리에 따른 생성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어 삶의 전반을 타고 흐르는 시적 인식은 들뢰즈의 ‘주변부 타자의 담론’으로 채워져 있다. 차이를 가치화하는 인문적 사유의 흔적들인 셈이다.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었던 과정을 애정의 눈으로 살펴본다.
바람은 선을 긋는다
이곳과 저곳,
멈춤과 떠남 사이
나는 그 경계에 서 있다
아직 오지 않는 차,
그 차를 향해 시간은 길게 늘어지면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이 희미해진다
유리창 너머 스치는 얼굴들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름을 품고
그저 바람의 방향을 듣는다
경계는 늘 흐릿해서
어쩌면 나도 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기다림이 내 몸의 무게를 덜어내면
시간은 서서히 투명해진다
바람 위의 그 차가
오늘은 나를 태워줄까
<바람의 정류장> 전문
이도연의 「바람의 정류장」은 ‘정류장’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존재론적 경계의 장소로 변환시키며, 기다림과 부유(浮遊)의 정서를 섬세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에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 ‘멈춤과 떠남’을 구분 짓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제시된다. 화자는 그 경계 위에 선 존재로 등장하는데, 이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삶의 상태, 혹은 정체성과 미래 사이에 놓인 인간의 불안한 실존을 암시한다. “아직 오지 않는 차”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희망 변화 구원 같은 상징적 의미를 띠며, 그 차를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화자는 점차 현실적 무게를 벗어간다. 특히 “기다림이 내 몸의 무게를 덜어내면 / 시간은 서서히 투명해진다”는 구절은 기다림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존재를 비물질화하고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외부 풍경을 통해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현대 서정시의 미학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 시의 미덕은 설명을 절제하면서도 이미지 중심으로 정서를 환기한다는 데 있다.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 누군가의 발자국이 희미해진다”거나 “유리창 너머 스치는 얼굴들” 같은 표현은 지나감과 소멸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현대인의 고독과 유동적 삶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또한 마지막 연의 “바람 위의 그 차가 / 오늘은 나를 태워줄까”는 끝내 확정되지 않은 질문 형식으로 남아 있어 시적 여운을 깊게 만든다. 목적지보다 ‘떠날 수 있을까’라는 가능성 자체에 초점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기다림의 본질을 존재의 유예 상태로 형상화한 시라 할 수 있다. 다만 일부 표현은 다소 관념적으로 흐를 위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바람 정류장 차라는 상징적 사물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희망을 균형 있게 구축하였다.
낡은 티셔츠의 주름 사이
묵은 여름이 다시 스민다
식은 땀 냄새가 몸의 기억을 흔든다
회전의 심연, 세탁통의 별들 속에서
나는 돌고, 헹구어지고, 지워진다
거품의 입김이 내 이름을 덮는다
무언의 물이 나를 건너갈 때
하루의 그림자가 희미해진다
깨끗해진 것은 옷일까
말갛게 사라진 나일까
탈수의 진동 끝에서
나는 한 겹의 바람이 되어
물의 기억 속으로 스며든다
<물의 기억> 전문
이도연의 <물의 기억>은 일상의 사물인 세탁기와 낡은 티셔츠를 통해 존재의 소멸과 정화, 그리고 자아의 흔들림을 탐색한 작품이다. 시는 “낡은 티셔츠의 주름 사이 / 묵은 여름이 다시 스민다”라는 감각적인 이미지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티셔츠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시간과 육체의 기억을 저장한 매개체로 기능한다. 특히 “식은 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는 과거의 체험을 현재로 소환하며, 몸의 기억이 물질 속에 침잠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회전의 심연, 세탁통의 별들”이라는 표현은 세탁기의 반복 운동을 우주적 이미지로 확장시키며, 세탁 행위를 단순한 청결의 과정이 아니라 존재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의식처럼 형상화한다. “나는 돌고, 헹구어지고, 지워진다”는 구절은 물리적 세탁과 함께 자아의 흔적까지 씻겨나가는 감각을 드러내며, 현대인의 소진된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의 가장 큰 성취는 ‘물’을 단순한 정화의 상징이 아니라 기억과 소멸을 동시에 품은 존재로 형상화한 데 있다. “무언의 물이 나를 건너갈 때 / 하루의 그림자가 희미해진다”는 구절은 물이 언어 이전의 힘으로 인간 존재를 통과하며 삶의 흔적을 지워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특히 “깨끗해진 것은 옷일까 / 말갛게 사라진 나일까”라는 자기 반문은 세탁이라는 일상적 행위 속에서 자아의 공허와 존재론적 불안을 끌어올리는 핵심 장치로 작동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한 겹의 바람”이 되어 “물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데, 이는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끊임없이 씻기고 흩어지며 순환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암시한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생활 세계의 익숙한 사물을 통해 존재의 흔적과 소멸의 감각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로, 감각적 이미지와 철학적 사유가 조화롭게 결합되었다.
산골 굽이굽이 저 멀리 능선
평화로운 농가 지붕 위 제일 높은 곳
따사로운 태양 하늘 이불 삼아
머리카락 날리는 바람 가락에
흥겨워 훌러덩 옷을 벗는다
반갑다고 내리비치는
햇살 집어삼키며 하늘 쳐다보니
푸른 도화지에 그린 그림 화가가 따로 없네
구름 이동이 도심에서는
총알 같은데 이곳 산골은 미동이 없네
- <시간의 주름> 전문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는 ‘시간의 주름’이란 시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의 주름에서 ‘주름’은 들뢰즈의 개념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철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를 넘어,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의 개념들은 문학, 예술, 정치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과도 긴밀하게 접속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특히, 그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은 ‘주름Fold’은 생물학적 개체화 과정과 깊이 연결될 수 있다. 들뢰즈는 주름Fold 개념을 통해 실체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며, 이는 주름져 있으나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의 구조를 의미한다. 시적 화자가 해석한 인과 구조의 공간성과 시간성에서 우리는 주름을 발견할 수가 있다. 시적 화자가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둘 수가 있다. 평화로운 삶이 향기롭게 익어가는 원인을 물론 자연에서 찾지만, 자연도 시공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는, 물론 시적 화자의 느낌이겠지만, 이런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주름’ 속에 녹여내는 시적 태도는 예사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주름’은 그냥 그대로 주름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을 관조하는 시인의 주관에 의해서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과되기 때문에 비로소 시가 숨을 쉬는 것이다.
이 시는 산골에서 작동하는 자연의 이법을 구름의 양상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어떤 경우에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현실태’로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과성의 원리를 보여준다. ‘머리카락 날리는 바람 가락에 흥겨워 훌러덩 옷을 벗는다’라는 움직임은 ‘가능태’가 아니라 ‘현실태’다. 이 시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형식도 알아야겠지만, 그 작품의 내적인 논리체계뿐만 아니라 작품 외적인 것도 부분과 전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푸른 도화지에 그린 그림 화가가 따로 없네’하는 대목인데, 이 부분만 해석하면, 시인이 자연의 내면과 처절하게 대면한다고 볼 수 있지만, 다시 이어지는 ‘구름 이동이 도심에서는 총알 같은데 이곳 산골은 미동이 없네’라는 시구에서 볼 때, 이 시는 자연현상을 인간중심으로 표방하고 있다고 하겠다.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욕망이 무의식 밖으로 나올 때 언어기호의 껍질을 쓰고 나오는데, 시인은 도시와 산골의 하늘이 주는 격차를 ‘시간의 주름’으로 의미화하여 사물의 움직임을 적확히 읽어내고 있다.
하늘보다 더 파아란 바닷물
흰 물거품 되어 바위섬 간지럼 태우듯
많이 맞아서 멍이던
내 등 살짝 스치며 물러난다
좋은지 싫은지 내색도 없이
몽글몽글 탱글탱글
나는 낮이고 밤이고 침묵모드
파도 타고 잔잔히 와도
세차게 내 볼을 쳐도
나는 샤이보이 말이 없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게
놀아주는 것이 고마운 게지
어느 때고 힘들면 내 등물 치며 놀아라고
고개조차 안 들고
납작 엎드려 있어온 천년 세월
지각변동이 없는 한
나는 언제나 그 자리
붙박이장으로
너만 기다릴께
- <그 자리에> 전문
이 시는 서정적 자아로서 시인이 아니라 역사적 자아로서 시적 화자가 갯바위와 파도의 공생관계 그대로 ‘갯바위’의 관점에서 쓴 체험시다. 이 시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시점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 자리에’라는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사유의 기저에는 ‘붙박이장’이란 구체어가 있는데, 이 어휘는 시인의 행복론을 이해하는 데 키워드로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가 전인적 작가시점을 잡는 추세이지만 시인은 객체 지향 존재론을 배운 까닭으로 주체를 내려놓고 갯바위라는 객체가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긍정이 내재된 마음과 육체가 겪게 되는 경험의 모든 양상은 행복이다. 행복해지는 길은 인식의 변화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 아닌가. ‘지각변동이 없는 한’ 이란 단서를 달고 자신의 단심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은 언제나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시를 쓰는 것은 일종의 ‘희망적 삶에 대한 기도’다. 이도연의 시작행위는 마음의 본질에 집중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확립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어느 때고 힘들면 내 등물 치며 놀아라고’라는 어구로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는다. 상호주의라는 세상사의 작동원리도 시적 화자의 무한 헌신에 덮어버려진다. 시인은 갯바위라는 자연과 교감하는 자신의 행위 본질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사고와 감정의 질적 변화, 즉 ‘그 자리’에서 자신의 운명적 행위를 다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확실하다.
달빛보다 먼저
일자 내 몸 니은으로 만들며
새벽5시
창문의 커텐을 걷어내고
준홍이 아침밥 햇볕에 말아 먹이고
아침마다 시도하는 탈영토화
집 바깥 정류소에서 버스 기다리면
상큼한 바람을 지나가며 손 흔들고
힘차게 중천으로 올라오는 태양은
붉은 홍조로 목례를 한다
덩달아 일어서는 내 안의 음표들
몸속 스위치 ‘온’ 으로 놔두면
일터의 내 손 쉴 새 없구나
나비가 춤을 추듯
시집살이 내 삶도 깃털처럼 가벼워라
에브리데이
내 몸은 악기처럼 리듬을 탄다
사는 건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지
- <내 몸속에 리듬이 산다>, 전문
위의 시를 보면, 이도연 시인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삶의 기준을 ‘숙제’에 두는 게 아니라 ‘축제’에 두고 있다. 이 시에서 보이는 주요한 특질의 하나는 시의 중간에 보이는 ‘에브리데이’라는 어휘다. 매일 ‘시집살이 내 삶도 깃털처럼 가벼워라’라고 하는 긍정의 코드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간다, 긍정적 마인드가 삶의 세계관으로 삽입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녀는 삶의 긍정 아이콘이다. 위 시는 시적 화자의 ‘탈영토화’가 빛나는 작품이다. 시인은 반인간적인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도 숙제의 삶을 축제로 전환하기 위해 자신이 주어진 일에 몰입한다. ‘몸속 스위치 ‘온’ 으로 놔두면 일터의 내 손 쉴 새 없구나’라는 데서 소임에 충실한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이 긍정의 마인드란 공간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도연의 시는 현실만족에 대한 긍정성을 드러내는 데 그 특성이 있다. ‘달빛보다 먼저 일자 내 몸 니은으로 만들며’ 등의 비유적인 시어로 인한 효과는 시에 긴장미를 부과하고 있으며 ‘덩달아 일어서는 내 안의 음표들’이라는 묘사를 병용해서, 관념과 구체어를 중층으로 배치해서 문학성을 잘 견인해내고 있다. 시적 화자는 헌신과 희생을 드러내어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기보다는 힘든 가사일과 출근해서 하는 일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긍정은 ‘내 몸에 리듬이 산다’ 라는 함축적인 시의 제목에서 엿볼 수 있다.
이십대,
세상을 몰랐다.
철없이 사랑에 빠져
하나는 둘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둘에서 셋이 되고,
가족은 늘었지만
일도 많아졌고
나를 돌볼 시간은 줄었다.
나는 묻는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였을까.
앞만 보고 달리다
나를 잃었다.
흘러가는 세월 속,
문득 올려다본
희망의 별
오십을 넘긴 나이에
대학의 문을 열었다.
학비는 많았지만,
행복한 미래를 위한 땀이라면
기꺼이 흐릴 수 있었다.
힘든 일을 해도
마음은 기뻤다.
꿈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는 언제나 빛나는 별이 있었다.
마침내,
어둠을 밝히며
희망이라는
빛나는 별빛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희망이란 빛나는 별> 전문
이도연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중요한 특질의 한 모습에는 미래에 대한 시적 화자의 확신에 찬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있다.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묻어난다는 건 이 때문이다. ‘이십대/ 세상을 몰랐다’는 시의 첫구절은 살면서 난 생채기 많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부로서 출산과 육아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전통적 삶에서 겪는 여성의 현실을 잘 나타내는 이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사상에 그 핵심이 있다. ‘앞만 보고 달리다 나를 잃었’지만 그녀는 ‘흘러가는 세월 속,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희망의 별’을 발견한 것이다. ‘꿈이 있었기에’ 언제나 기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어구는 부사 ‘마침내’다. 마침내 볓빛이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으면서 어둠을 물리치는 그녀의 인생학적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시의 마지막 연에 앉은 ‘빛나는 별빛’이란 시구는 시적 화자의 긍정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적 자아로서 시인이 써나가는 시의 특징 중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시인의 진솔함이 사유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이도연 시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생의 진한 극복의지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포지티브 마인드는 ‘에브리데이’ 언제나 모든 시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이런 보편성,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착한 시인으로서 독자에게 사랑받음을 담보해 주는 것이리라.
이박 삼일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남자가 세운 계획에
편안하게 동행이 된다
설레는 꿈을 안고
첫코스는
삼십 년 전의 해인사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사찰 주변의 고목들
나무도 늙어가는 것이
현 세태를 반영한다
평일의 한산함
간혹 사람들이 다니는데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유모차에 신이 난 반려견들
주인의 친자 같네
인구 절벽시대
갈수록 태산이다
<적요> 전문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콜리지는 “시인이란 우리가 단지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종합적 마술적인 힘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능력을 서로 혼합하여 그것들을 용해시켜 조화적 통일의 정신을 방산한다”고 기술했다. ‘적요’라는 제목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적요’라는 관념에서 오는 상상 때문이다. 적요는 단순한 정적 안정성을 주는 게 아니라 미래의 불안을 안겨준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노령화와 저출산의 문제를 담고 있어 사회비판적 성격을 띤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밖을 산책하기보다는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현실의 적시를 통해 그녀는 사회적 문제를 던진다. 시적 화자는 결혼으로 성인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걸 말해준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가 전도되어도 사회는 사람으로 넘쳐나야 한다는 논리다. 애완견이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도연 시인은 이런 진리를 ‘적요’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간혹 사람들이 다니는데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한다’라는 어구는 내용적으로는 거리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간접화의 한 방법이면서 비판의 무한한 확장이다. 형식적으로는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변한 건 없어도 주변에 고목이 많다는 말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애둘러 짚어보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 시는 직설적이면서 한편으로 간접적이다. 뭉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애틋하고 간절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서 역동적인 사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적막함에 쌓인 산사를 돌아보며 느끼는 현실에 대한 소회가 사회적 문제의 적시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작가정신을 볼 수 있고, 시인의 저항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래 세대에게도 꿈 많은 희망이 오길’ 바라는 시인의 기도는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기여가 출산이 아니라서 이런 시가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팔십년대 초반
여기저기 아이들의
웃고 울고 하는 소리 들리고
서로 시소를 타겠다고
다투기도 하였다
미끄럼틀 먼저 내려가겠다고
밀치기도 하고
그곳에서는
그네를 밀어주는 친구도
새로운 학부형도 만날 수 있었다
이천년대 지금은
승용차 놀이터가 되어
그 시절 추억거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빼곡한 차량들
주차장에도 길가 인도에도
줄지어 섰다
그 시절 아이들
야생마처럼 생동감 넘쳤는데
지금은 색색의 자동차만 한가득
아이들 빠져나간 자리에 불 뿜는 열기만
지구를 뜨겁게 데운다
- <어린이놀이터> 전문 -
문학을 가리켜 인생 탐구니 인간 탐구니 하는 말은 삶의 방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학이 인생의 표현인 이상 인간 삶의 방향성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시 역시 인생과 마찬가지로 방향성과 목적성이 주어진다. 이 시는 이도연 시 중에서 대표적인 의식지향의 시다. 항상 주부의 입장에서 현상을 이해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그녀는 사회의 중심 또는 역사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이 작품 <어린이놀이터>에서 시적 화자가 주시하는 바는 어린이놀이터에 어린이가 없다는 데 있다. ‘어린이놀이터’는 역동적 사회의 상징이며 동시에 희망의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녀는 필십년대 초반의 놀이터 풍경과 지금의 대조를 통해 변해버린 가치, 달라진 세상에 대한 아쉬움을 ‘어린이놀이터’란 제재로 활용해서 잘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시의 최대 관심은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아이들이 거리에 넘쳐나야 한다.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인은 아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동차만 가득한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를 고발하며, 미래사회의 행복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동차를 타고 희희낙락 진주하고 있는 현실을 우려의 시각으로 지켜본다. 놀이터의 본질회복을 설파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겠다. ‘아이들 빠져나간 자리에 불 뿜는 열기만 지구를 뜨겁게 데운다’는 이 시의 결말부에서 시인의 생태적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미래를 잊은 듯한 우리 기성세대들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면서, ‘불 뿜는 열기’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있다. 서글픔에 더 접근하기 위해 저항의 뜻으로 ‘지구를 뜨겁게 대운다’라고 묘사하였지만, 시인은 늘 우리 사회의 정체와 고장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슬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또는 저항적으로 추적하는 모습에서 작가다움을 보여준다. 이 시는 ‘팔십년대 초반’과 ‘이천년대’라는 공간적 대조를 통해 달라진 사회 풍경을 보여준 데서 문학적 성취가 최고조로 발휘된다. 이로써 이도연 시인은 시 속에 저항정신을 담음으로써 투철한 시정신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둔철산 자락 암자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세가 험준하다
자동차도 힘던지 누렁지 냄새를
풍긴다
고소함을 뒤로 하고
어미와 새끼들이 도로를 질러
뒤뚱뛰뚱 아기들이 풀숲으로 간다
어미가 연신 주변을 살핀다
휴
잘 지나가는 팔형제 꿩 가족 어린새끼들
무사히 세상나들이
새들의 대가족이 부럽다
사람들은 계속 자연을 힘들게 하고
아이는 안 낳아
경제를 시름 위에
얹구나
젊은 여성들이 봐야 할
위대한 행진
장하다
나무들 사이 잡풀 무성한 숲속을
어미 따라 가는
어린 새끼들
- <꿩가족 나들이>, 전문
이도연이 사회를 보는 문제적 시각은 ‘꿩가족 나들이’라는 시에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의 식세계를 이루는 또 하나의 바람직한 숨결은 새들의 ‘대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를 담아내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젊은 시절의 대가족 제도 하에서 품었던 아름다운 추억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녀에게는 강한 것 같다. 그러기에 꿩가족의 나들이는 그녀의 눈을 뜨이게 하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행간에 놓인 ‘젊은 여성들이 봐야 할 위대한 행진’이란 시구는 그녀의 세계관을 소환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대다수 시들이 사회적 문제를 우려하는 데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인이야말로 문제제기를 통해 ‘희망적 대안’을 황홀하게 만나는 작가다. 시가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그녀의 시는 ‘사회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는 데서 이도연 시의 강점이놓여 있다. ‘아이는 안 낳아 경제를 시름 위에 얹구나’라는 벼랑 같이 느껴질 정도의 비판적 사유가 녹아든 어구를 시 공간 적재적소에 놓을 때까지 그녀는 저항성의 감각 촉수를 수없이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인생살이 롤러코스터 같아
곳곳이 위험 천만
위로는 전선줄 자동차 비행기
아래로 하수구 가스배관
눈뜨고 감을 때도 내 살을 꼬집어
자연이 주는 공기 햇볕 바람 비
감사함에 오늘을 연다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인 장애
전쟁 고통사고 화재사고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해운대 모래알 같아
장애를 지혜롭게 이겨낸 선수들의 축제
패럴올림픽
몸 정신 한계를 극복한 선수들의
힘찬 도전은
진정한 열정과 용기의 상징
4년마다 패럴올림픽
인생의 진정한 챔피언이
탄생하는 날
영웅의 날갯짓에 눈을 켜고
두 손 모아 손벽 치는 우리는
멋진 시민
- <패럴림픽과 멋진 시민>, 전문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패럴림픽에서 멋진 시민이란 화두를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는 타자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그녀의 평상심이 작동 결과다. ‘인생살이 롤러코스터 같아’ ‘눈뜨고 감을 때도 내 살을 꼬집어’라는 표현은 그녀의 시적 문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 형상화의 표본이다. 어떻든 그녀의 시는 인문학적 사유로 공감을 주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향기를 지닌다. 그 향기는 타자성을 드러내는 내면의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한다. 시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시 속에 투영되기에, 향기가 난다. 패럴림픽에 대한 관심은 대표적인 타자성의 실천을 의미한다. 마지막 결구 ‘인생의 진정한 챔피언이 탄생하는 날 영웅의 날갯짓에 눈을 켜고 두 손 모아 손벽 치는 우리는 멋진 시민’이란 대목은 이도연에 있어서 삶의 진실과 타자의식의 지향이 같음을 증명한다.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달고 살아가는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우리-되기와 맞물려 무위인의 멋을 한껏 우려낸 결과라 하겠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멋진 시민의 조건을 넌지시 말한다. 시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경계하고 있다. 위의 시 말고도 여러 시를 보면,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부산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산모퉁이 돌고 돌아가는 길
산의 중턱을 깍아
길을 낸 산복도로
앞에 바로 보이는 부산역은
그림의 떡
인생선배들이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
계단도 많고 오르막 내리막
좁은 길 천지
유일한 금고분소마저
사라져 가는 아쉬움에 할 말을 잃는다
저 아래 은행들도 문을 닿는다
이곳에는 약국도 없다
그나마 금고의 분소가 있어
산복도로의 주민들이 편리하였는데
그마저 세월 흐름 속 경기침체 속
사라져 버리니
산복도로 유일한 금융기관
사업비 운영비를 아껴 할 수는 없었는지
폐소의 아쉬움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네
- <금고분소> 전문
‘산복도로 유일한 금융기관/ 사업비 운영비를 아껴 할 수는 없었는지/ 폐소의 아쉬움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네’로 끝나는 이 시를 감상하는 쾌미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산복도로 주민들의 아쉬움과 불편함을 설정해서 노래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희망 그 자체가 아니라 희망이 절망이 되는 것이 구체화되고, 금고 부재가 가져오는 데미지가 얼마나 소시민에게 큰지 그 충격을 시적 언어로 잘 피력하였다. 시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어두운 삶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애환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한 시적 태도다. 감히 이 시 <금고분소>는 멋진 시라고 평한다. 이 시의 문학성은 역설적인 관점이 주는 반전의 맛에서 나온다. ‘은행도 문을 닫고 약국도 없는 곳’에 있던 ‘유일한’ 금융기관인 금고분소가 사라지는 데 착안하여, 시인은 시를 전개해 나가면서 하늘에 널린 것이 ‘근심’인데, 얼마나 근심거리가 많았으면, ‘할 말을 잃는다’라고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서 ‘사업비 운영비를 아껴 할 수는 없었는지’라는 시구는 더욱 안타까움을 부채질한다. 구체적인 행위 묘사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인 결말부 마지막 행간에 놓인 ‘폐소’가 주는 절망이 산복도로 사람들을 더욱 슬퍼 보이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이 공익적 기여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시인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희망’을 찾기 위하여 ‘절망’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이 현실인식의 치열성을 보이면서도 방법론과 기교의 다양한 층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제5집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봄 소풍 갈 때쯤
가슴이 설렜다
엄마가 무슨 반찬을 싸줄까
과일은 어떤 것일까
용돈은 얼마일까
할머니 엄마 눈치를 살짝 살펴본다
별일 없으면 그래 오늘은 조금 인심이 좋을 듯
할머니 꼬쟁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종이돈이 살짝 아른거린다
엄마의 부엌에는 맛나는 반찬냄새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생각하니
마음은 벌써 구름을 탄다
계란후라이 넣어 만든 김치김밥
단무지를 둘러싼 하얀 쌀밥
아이 좋아라
과일이랑 동그랑땡땡
남아도는 음식들
우야노
지구가 몸살 앓것다
- <그때와 지금>, 전문
시인은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 이도연은 시인이기 이전에 이미 사회복지 업무를 맡고 있다. 약자 편에서 일을 하는 것이 의식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싶다.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을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일터다. 인생 선배들이 반듯하게 생을 영위하도록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들에 열정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다. 시 <그때와 지금>에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생태적 의식이 빛나는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 어떤 시보다도 이 시는 시인의 생태적 합리성이 빛나는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도연의 시는 <그때와 지금>에서 알 수 있듯이 진솔한 감정으로 짜여진 천이다. 시인은 다양한 인간관계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인연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한 필의 비단을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풍족한 생활의 여유에서 오는 낭비적 요소에 지구의 몸살을 걱정하는 데서 우리는 결코 생태계 복원의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으로 치환하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누구나 인간의 한계를 느낀다. 다만 그 상황에서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고통에서 더 큰 고통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시기에 맞는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시인은 후자의 사람이다. ‘그때와 지금’에서 그녀의 건강한 생명력을 보면서 새로운 의욕과 활기를 되찾고 싶어한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독특한 미적 효과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열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대조하면서 사회적 인식을 보다 깊게 가져가는 시인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십대의 꿈 많은 시절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는 나는 철부지였다
사랑이란 두 글자에 현혹되어 하나가 둘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둘이 셋이 되고
가족이란 이름 하에 또 다른 환경의
시댁 식구들과 친해지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 세월 속에 가족은 늘어만 갔다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더라
앞만 보고 가다보니
나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눈 감고 귀 막고 세월을 흘러보내니
모든 것이 좀더 나아지더라
무엇을 배우기는 배우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학교를 가자
늦깍이 50대 초반에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무엇인가 내 삶에 생기가 돋았다
어둠이 뚫어지는 것이다
학비 천만 원 투자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못 하랴
배움의 길에 돛을 올렸다
집안 일 혼자 다 한다고 새벽 5시 기상했지만
지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꿈이 있기에 나의 자리에는 언제나
밝은 빛이 찾아 오더구나.
- <어둠을 이겨내는 빛>, 전문
‘어둠을 이겨내는 빛’이란 시에는 그녀의 달려온 역사가 숨쉬고 있고, 전기적 삶의 숨결이 물결친다. ‘자전적’이라는 시의 특성은 만학도로 대학을 졸업하고 희망을 본 승리적 삶의 흔적으러 감동을 견인한다. 이 시는 시인의 준열한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집안 일 혼자 다 한다고 새벽 5시 기상했지만 지치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힘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인은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르다고 느끼며 늦게라도 대학을 가고, 도전의 삶을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던지고자 한다. 이 시는 희망의 찬가를 고생 끝에서 찾아낸 것이어서 감동을 준다. 우리 주부의 아픈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시 역시 첫 석 줄의 문장이 대단히 중요하다. 원래 글의 서두 기능은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데 있다. 어떤 시보다도 이 시는 서두 기능에 있어서 완벽성을 보인다고 하겠다. ‘눈 감고 귀 막고 세월을 흘러보내니 모든 것이 좀더 나아지더라’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의 바깥에 있는,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현실을 이 시는 극명하게 보여준다. 만약 도전이 없었다면, 화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공간에서 아웃사이더화되어 그녀 역시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여 타자로 변해갔을 것이다. 자신의 거처를 잃고 자신의 영토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세계의 어둠을 건뎌내고 그것을 뚫고 역설적이게도 희망의 빛으로 승화시켜낸 삶에서 과거의 고난은 산산히 부서져 버리고, 아픔 역시 치유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 시는 문학적 가치는 물론 성취도 빛난다고 하겠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구겨진 것이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아스팔트 위
주름이 움퍽 패인 곳도 있다
나무에도 동그란 나이테
가방도 들고 다니다 보면 굴곡진 것이 있다
사용하는 볼펜도 살짝 금이 가기도 하지
하늘의 구름층도 주름처럼 보인다
할머니 부모님 이마에도 연속 주름이
들뢰즈의 주름을 공부하고 나니
세상 모든 곳에 주름이
나름의 독특한 의미를 보여주네
<주름> 전문
이도연 시는 이 시는 존재의 ‘공생적 다원성’의 시작을 보인다. 즉 인간 중심주의적 사유가 아닌 ‘주름’ 같은 생명적 네트워크 질서 속에서 쌓여가는 존재의 의의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물론 여기 시작에는 순간의 형이상학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관조할 때 살아나고 붙들려고 할 때 사라지는 무지개 같은 성질의 것으로서 진리를 계시하고 암유한다. 피천득은 수필을 가리켜 ‘천자연적’이라고 말했다면, 이도연은 시를 가르켜 ‘구름 저쪽의 별’이라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구름 저쪽의 별은 현실 이상의 현실 창조를 의미한다. 이름하여 희망의 노래다. 시적 화자인 서정적 자아의 시각도 예사롭지 않지만 시의 언어 구조 또한 매우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어 단연 눈길을 끈다. 시도 하나의 유기체임을 전제할 때, 이 시는 유기체의 잘 짜여진 구조가 통일성을 가져와 그 속에 내재된 질서가 하나의 리듬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하늘의 구름층도 주름’처럼 보인다는 대목이다. 구름의 변화 양상을 주름으로 의미화한 것이다. 세상의 변화와 생성의 결과를 ‘주름’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볼 때, 시인의 사상은 언제나 철학적 인식에 가깝게 다가와 있다. 이로써 그녀는 시공의 결절과 굴곡을 ‘주름’이란 개념으로 풀어내어 현대시가 중시하는 상징성을 되찾아내고 있어, 시의 맛을 더욱 배가한다. 이 시인은 일상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눈길을 두어 삶의 의미, 즉 사물의 형상에서 진리를 추구하려 함으로써 시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다.
마당 한쪽
키 큰 나리가 먼저 웃고
인동초는
초여름부터 한여름 끝까지
제 자리 푸르게 지켜낸다
하얀 백합 한 송이
담장 곁에서 입을 열면
붉은 백합도 따라 웃는다
비 몇 번 지나간 뒤
풀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깻잎 잎맥마다
햇빛 냄새가 배어난다
장마가 물러간 저녁
잔디 틈 태양광 전등 하나
먼저 불을 밝힌다
부엉이 눈빛 같은 불빛 아래
꽃들은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
늦은 바람 지나간 자리
젖은 잎사귀들이
한 방향으로
가만히 몸을 기울이고 있다
-<꽃비정원> 전문
<꽃비정원>은 일상의 정원을 생명의 교감과 조화의 공간으로 형상화한 서정시이다. 시는 “키 큰 나리가 먼저 웃고”라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시작하여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공동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인동초, 백합, 깻잎, 잔디 등 다양한 식물들은 서로 다른 개성과 시간을 지닌 채 등장하지만, 시 속에서는 경쟁이나 충돌 없이 하나의 생태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하얀 백합 한 송이 / 담장 곁에서 입을 열면 / 붉은 백합도 따라 웃는다”는 구절은 색채 대비를 통해 생명의 화답과 공명의 순간을 아름답게 드러낸다. 또한 장마와 비, 저녁과 바람 같은 계절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시는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성장 과정을 유기적으로 담아낸다. 이 작품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섬세한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생활 서정의 미덕을 잘 보여준다.
‘꽃비’는 시인의 호다. 이 시의 미학적 성취는 화려한 수사보다 절제된 이미지와 감각적 묘사를 통해 정원의 생명성의 환기를 통해 시인의 삶을 보여주는 데 있다. “깻잎 잎맥마다 / 햇빛 냄새가 배어난다”는 표현은 시각과 후각을 결합한 공감각적 이미지로, 자연의 생동감을 독자의 감각 속으로 직접 끌어들인다. 또한 “잔디 틈 태양광 전등 하나 / 먼저 불을 밝힌다”는 장면은 인간의 인공적 요소마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로 배치되며, 정원의 저녁 풍경에 은은한 정서를 더한다. 마지막 연의 “젖은 잎사귀들이 / 한 방향으로 / 가만히 몸을 기울이고 있다”는 결구는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서로 기대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연대와 겸허한 삶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꽃비정원」은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생명의 평화와 공존의 철학을 길어 올린 작품으로, 서정성과 생태적 감수성이 깊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연둣빛 봄은
들녘마다 새순을 밀어 올리는데
붉은 화마는
산과 마을을 검게 삼켜 간다
할머니도 아저씨도
물통 하나 들고 불길 앞에 선다
그러나 바람은
사람의 손보다 빠르고
불꽃은 도깨비 춤처럼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지친 마음들 위로
연기만 자욱한 날들
그래도 사람들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
“살아야지”
작은 말을 건넨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새싹 하나 돋아나듯
희망도 그렇게
상처 틈에서 자라는 것일까
검게 탄 산비탈 아래
재 묻은 흙을 밀치고
어린 풀잎 하나가
연둣빛 손끝을
조용히 들어 올린다
<희망의 싹은 돋아나고> 전문
<희망의 싹은 돋아나고>는 산불이라는 현실적 재난을 소재로 하여 절망 속에서도 끝내 생명을 밀어 올리는 희망의 본질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는 “연둣빛 봄”과 “붉은 화마”라는 선명한 색채 대비를 통해 생명과 파괴의 충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봄이 새순을 밀어 올리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산과 마을은 불길에 휩싸이며, 인간의 삶터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한다. 특히 “할머니도 아저씨도 / 물통 하나 들고 불길 앞에 선다”는 구절은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삶을 지키려는 평범한 인간들의 공동체적 의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바람은 / 사람의 손보다 빠르고”라는 표현에서 인간의 무력감이 드러나며, 불길은 “도깨비 춤처럼” 산등성이를 넘어가면서 자연 재난의 광폭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실감나게 형상화한다. 이 시는 단순한 재난의 기록을 넘어, 인간이 상실 앞에서 어떻게 서로를 붙들고 살아가는가를 서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미학적 중심은 절망 이후에도 끝내 살아남는 생명의 회복력에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 ‘괜찮다’ /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소박한 위로와 연대가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마지막 연의 “재 묻은 흙을 밀치고 / 어린 풀잎 하나가 / 연둣빛 손끝을 / 조용히 들어 올린다”는 결구는 이 시 전체의 정서를 응축하는 핵심 이미지다. 풀잎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상처 이후에도 다시 살아나려는 존재의 의지이며, 희망의 은유다. 시인은 거창한 선언 대신 작은 생명의 움직임을 통해 희망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절제된 표현 방식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재난과 상처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의 지속성과 인간적 연대를 통해 희망을 회복해내는 건강한 서정시다.
III.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언어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선택하는 제재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과 가장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사물의 다음 문장이다’의 화두는 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코드화된 어휘다. 특히 이도연의 시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 좋다. 시는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현실적 요소에 필수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때 그 지점에서 비로소 시가 문학이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첫 장에서 다른 장으로 나아가면서 다른 많은 변화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면서 시적 형상화도 원숙해졌다. 이런 변화는 시인의 시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결과라 하겠다.
이도연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인가? 네 번째 시집 탐구를 마치면서, 그녀의 시는 삶의 존재 이유이며, 삶의 희망을 부르는 노래였다고 말하고 싶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현실인식의 치열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집의 특징이라면, 작가정신으로써 시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는 현실의 왜곡상을 폭로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작가의 적극적인 의도가 드러나 있어 많은 공감을 준다. 시인은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문제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시적 형상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크고 화려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문제를 지적하고 희망의 빛을 찾아가는 서민적 삶의 태도도 좋았다. 시의 내용, 시의 자료라고 할 만한 것들은 전부 훌륭했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내용 또는 자료가 예술적 형태를 지닐 때 우리는 비로소 시라고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상상력에 의한 언어 이미지로 표현해야만 원초적 생명이 깃든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 세계의 혼돈을 밝히고, 잠자고 있던 여러 가지 정서에 불을 질러 상상의 연소작용을 하는 것이다. 시 쓰기를 ‘문제의 발견’ ‘희망의 찬가’로 여기는 분이니까 이도연 시인은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를 써낼 것으로 본다.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다섯 번째 시집 발간을 위해서, 시의 낭만주의와는 객관적인 거리를 가졌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냉정해지면, 더 나은 구조나 시어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무이기도 한 ‘저항성’을 유지하면서도 불완전한 사회에 대한 긍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유지하려는 시인의 밝고 하얀 세계관에 큰 박수를 보낸다. 시의 긴장성과 애매성에 대한 치열한 도전도 곧 뒤따르리라 본다. 무엇보다도 이 시집에 드러나고 있는 이도연 시인의 타자에 대한 연민, 시인의 길에서 갖는 반성적 성찰과 기도, 희망의 전도사를 자처한 모습 등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인으로서의 다양한 노력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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