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문선명 교주 장남의 부인이었던 홍난숙씨의 고백!
[통일교]문선명의 전 며느리 홍난숙씨 탈출기
(월간 <교회와 신앙> 199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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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98년) 8월 중순, 전 미국에 충격을 준 영문 서적이 하나 나왔다. 문선명 씨의 전 자부 홍난숙 씨가 쓴 <In the shadow of the Moons, 문씨네 그늘 아래서 - 문선명 목사 집에서의 나의 삶>(240쪽. 리틀 브라운사)이다. 이를 번역 요약한 내용을 여기 싣는다. 참고로, 문선명 씨는 한국 정통교단에서 정식 목사 안수를 받은 바 없으나, 편의상 저자가 쓴 '문 목사'란 용어를 그대로 쓴다.<편집자 주>
요란한 삐삐 소리에 선잠을 깼다. 해가 벌써 뜨고 있다는 사실이 날 겁나게 한다. 창문으로 비껴든 햇빛이 아기방의 푸른 무늬 벽지 위에 노닐고 있다. 신훈이의 요람이 놓인 마루방 밖으로 동트는 언덕의 윤곽을 가름할 수 있다. 바로 이 방에서 1985년 8월 8일 내가 첫잠을 잤었다. 삐삐를 울린 사람은 매들린이다. 황급히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나는 오전 5시 약속에 늦어졌음을 깨달았다. 요새 내가 왜 이다지 정신이 없을까? 몇 달 동안 서로 은밀히 만나 신중히 계획해온 것을 하루 아침에 망쳐 놓으려고 하는가?
나는 진홍빛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맨발로 건너 남편 침실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밤새 코카인을 흡입한 남편의 기침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지금 나의 유일한 희망은 남편 문효진(문선명의 아들)의 마약 삼매경이 오늘 아침 또 한 번 건망증을 갖다주는 것이다. 그는 몇 달째 가구와 옷, 장난감 등이 이 저택 2층 방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불과 한 주 전, 효진은 눈이 충혈된 채 신준이의, 방 한 구석에 있던 IBM 컴퓨터가 없어진 것을 알아보았다. 다섯 아이들 중 맏인 열두 살 난 딸 신준이는 이미 너무도 태연하게 나의 공모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구중 궁궐 속처럼 음모로 가득한 문씨 댁 삶을 통해 아이들 모두는 비밀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아빠, 컴퓨터가 고장 나서 고쳐야 돼요.”
신준이가 서슴없이 대답하자, 효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기 방’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 내가 그곳을 버렸기 때문이다. 거긴 그의 단독 마약 소굴이요, 카펫 위에 온통 담배꽁초와 빈 테킬라 병이 굴러다니고, 포르노 비디오가 끝없이 돌아가는 곳이다. 그가 마약을 끊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을 발견한 지난 가을부터, 되도록 거기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써왔다. 코카인을 변기 속에 흘려 버리려는 나를 그가 심하게 구타하기에, 뱃속 아기를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주먹질을 해 대면서 욕실 바닥에 흩어진 흰 가루를 줍도록 했다. 그후 그는 임신 7개월 된 여성을 구타한 몰지각한 행위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메시아’의 아들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고 되레 날 훈계하는 것이었다.
뉴욕 시 북쪽 40분 거리에 있는 어빙턴의 외딴 곳 18에이커 짜리 저택이 바로 ‘무니들’로 알려진 통일교의 세계본부 겸 창시자의 집이다. 이른바 ‘이스트 가든’이라고 불리는 이 저택은, 문 목사가 자기의 ‘신적 사명’과 지상제국의 상속자인 맏아들의 소녀 신부로 삼고자 나를 한국에서 부른 이래, 14년간 나의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열심이던 순진한 15살 여고생에 불과했던 나는 이제 자신의 삶을 되찾을 준비가 된 어엿한 여성이다. 나는 오늘 탈출하려고 한다. 결혼 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성스러운 소산인 내 자녀들을 데리고, 나를 매질하던 그 남자와 그렇게 만든 가짜 메시아 - 하나님이 지상 대리인으로 결코 택하지 않았을 문선명과 그의 아들 - 을 뒤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다.
'문 목사'를 '지금 내가 아는 사기꾼'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오로지 그런 깨달음이 하나님께 대한 내 신앙을 끝내 흔들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과정이다. 문은 하나님을 저버렸지만, 하나님은 날 버리지 않으셨다. 어린 여성을 성적 쾌락의 장난감 내지 분노의 배출구로만 삼아온 남편의 손아귀 속에서 나를 위로한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셨다. 잠든 아이들과 몇 주 동안 극비리에 챙겨온 가방들을 돌아보는 지금도 하나님은 날 인도하고 계신다. 문선명 목사에 대한 신앙은 지난 29년간 내 삶의 중심이 됐었지만, 이제 깨어진 그 믿음은 내 모성애에 견줄 바조차 못된다. 독기 서리고 밀폐된 ‘참가족’ 세계 속에서 오직 아이들만이 유일한 내 기쁨이었다. 나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도망해야만 한다.
당초 내가 큰 아이들에게 떠날 생각을 알리자, 그것이 곧 여태 즐겨온 호화로운 삶의 끝장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뒤에 남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앞으로는 대저택도, 운전기사도, 올림픽 사이즈 풀장도, 당구장도, 승마 레슨도, 사립학교와 일본어 선생도, 최고급 휴가도 없는데 말이다. 문씨 집 바깥 담 저편에서는 아이들이 ‘메시아의 참 자녀들’이라는 경배를 받지 않게 된다. 아이들에게 절하고 섬길 기회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신도들도 없을 것이다.
“우린 이제 엄마랑 작은 집에서 살래요.” 맏딸의 말은 내 소박한 꿈을 그대로 전해 받은 것이었다. 의혹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온 집안이 조용해지자 나는 저택 안의 홀과 정든 방들을 오가며 기도와 흐느낌에 잠겼다. 눈을 감으면 지난 몇달 동안 나를 사로잡던 의문이 또 떠오른다. 과연 나는 올바른 짓을 하고있나? 떠나는 것이 정말 하나님 뜻인가 아니면 실패의 징조인가? 왜 남편이 날 사랑하게끔 만들지 못했나? 왜 그를 바꾸지 못했을까? 그냥 이대로 머물러 기도하면서, 아들이 자라면 언젠가 통일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선명 목사의 생활 궤도 밖으로 떠나는 것은 곧 영적으로 버려짐을 뜻하는데, 신체적 위험도 동시에 따르지 않을까? 내가 도망가면 통일교가 날 잠재우려고 추적해 오지 않을까? 차라리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인가? 효진이 나와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던 것이 몇 번이던가. 마약이나 술을 먹고 기분 좋으면 살인 흉내도 예사로 하지 않던가. 교회 돈으로 산 진짜 총으로 나나 누구든 방해하는 자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효진의 뻔뻔스런 행위가 심지어 평소 무관심한 아버지 문 목사까지도 화나게 만든 후로 지금껏 나는 차근차근히 준비해 왔다. 네 남편의 잘못은 다 너 때문이라며 아내 자격이 없다고 문 목사가 오히려 나에게 책임을 물을 때,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도주계획에 최선을 기울였다. 결심하자마자 돈부터 챙겼고, 아이들 교육비로 따로 떼어둔 돈을 은행에서 찾았다. 시어머니(한학자)가 정기적으로 건네준 용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다. 아기 출생 기념식 때 교회서 입으라고 시어머니가 예거 부티크에서 사다준 수천 달러 짜리 옷도 그 이튿날 현금으로 바꿔왔다. 문씨네를 이미 떠나 따로 살고 있는 나의 오빠와 문 목사 맏딸인 내 올케의 도움으로 매사추세츠에 적당한 집도 하나 봐 두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날 때 부러워하던 내가 몇 년 후 같은 신세가 되는 셈이다.
과거 문의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다가 교회를 이탈한 나의 부모들을 염려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염려스러웠다. 부모님은 오빠로부터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의 도움이 늘 고마웠다. 어릴 적 서로 의견이 안맞는 일이 있을 때도 오빠는 늘 나를 도왔다. 그는 우리의 탈출 후 보호 방법을 알려 줄 변호사를 미리 찾아냈고, 탈출 당일부터 변호사의 조언이 도움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화요일에 떠난 것도, 매사추세츠 카운티 가정법원이 매주 수요일 학대받는 여성들의 배우자 접근금지령 신청을 청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5년간 아이들을 돌봐준 구미코 부부를 보호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그녀는 이트 가든 정원사인 남편과 함께 헌신적인 일본계 통일교도였다. 구미코는 몇 주 동안 내가 짐싸는 것을 보고도 침묵했다. 아무도 감히 참가족의 일원에게 질문하는 무례를 행치 못하지만, 그녀는 수년간 나의 고통을 목격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떠난 것을 발견한 문 목사로부터 그녀가 추궁당할까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떠나기 약 한 달 전, 구미코에게 남편과 둘이 어디서 살고 싶냐고 묻자, 남편 부모가 계신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구미코는 시부모가 늙고 병든 데다 남편은 독자다.
이스트 가든에서는 ‘어머님’ 한학자 씨의 허락 없이 어떤 인사 변경도 있을 수 없었다. 문 목사보다 23살이나 젊은 그녀는 보좌 배후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내 부족을 고자질함으로써 승진하려는 아첨꾼들에게 늘 둘러싸였기 때문에, 나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적은 총애나마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베이비시터를 두기보다는 나 혼자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어머님’에게 통할 듯 싶었다. ‘아버님’도 스태프 진이 너무 비대해 먹여 살리는 비용이 비싸다고 불평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베이비시터와 정원사를 한 명 덜 씀으로써 절약된다는 생각에 어머님은 기꺼이 내게 찬동했고, 피터 김 보좌관을 통해 여비를 주라고까지 당부했다. 그래서 구미코 부부는 우리가 떠나기 이틀 전에 고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기를 돌봐준 또 한 여성은 이스트 가든의 경비원 남자와 한국에서 곧 결혼하게끔 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월까지 충분히 한국 집에 머물다가 오라고 그녀에게 일렀다. 문 목사가 2,400만 달러급 독채 호화 저택과 집회소를 지은 이래, 우리는 시누이 인진 씨네 가족과 함께 19개 방 짜리 맨션을 함께 써왔다. 행운인지 하나님의 도움인지, 인진 씨네는 우리가 떠나기 전 주말에 어딘가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혹 우리가 떠날 기미를 인진 씨가 알아냈더라도 심각히 여기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애들을 데리고 잠시 사라짐으로써 효진을 겁주려나 보다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문씨 집안에서 내가 영 떠날 줄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실은 내가 그러리라 생각할 만큼 날 충분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14년간 문씨네 한 가운데 살면서 내가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물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명령하고, 나는 순종했을 따름이다. 그런 무관심이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신훈이를 깨웠다. 바로 오늘 아침, 난 지 9개월 되는 착한 애다. 아기는 내가 짧은 소매 잠바를 입히고 누나와 형들을 깨울 동안 울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매들린을 만나고 올 동안 조용히 옷을 입고 있도록 일렀다. 매들린 프레토리어스는 작년에 나의 첫 친구가 된 여성이다.
그녀는 삐삐로 연락해 가며 나의 탈주를 돕고 있다. 매들린은 10년 전 휴가차 샌프란시스코 바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홀려 통일교도가 됐다. 집에서 멀리 떠나 있는 젊은이에게 접근하여, 처음에 기분 좋은 말을 나누다가 교회 얘기로 들어가, 집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통일교의 상투적인 포교술이다. 매들린은 지난 3년간 효진을 도와 통일교 녹음설비가 있는 맨해튼센터 스튜디오에서일해 왔다. 그러면서 그의 마약남용과 불같은 성미를 지켜본 그녀는 내가 탈출계획을 털어놓자, 자진해서 돕겠다고 말했다. 물론 효진이 알면 그녀에게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남편은 이미 우리 둘 사이를 의심해 왔다. 수 주 전 우리 둘이 부엌에서 차를 마시며 몰래 얘기하고 있을 때 그가 들어와 날더러 위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매들린에겐 집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는, 만일 내가 교인 중에 누구와 사귄다면 내 손가락을 모두 분질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매들린을 만나러 갈 때, 나는 정원사와 경비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델리 가게 앞에 기다리고 서 있는 매들린을 몰래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집안 도처에 널린 감시카메라는 거의 매일 의자나 램프, 박스나 가방 등으로 가렸다. 경비원들은 내가 가구를 재배열하고 어머님 대신, 또 다른 문씨 저택인 벨베디어로 입던 옷을 간수하러 간다고 하면 아무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새 삶을 시작할 때 쓸 가구를 보관하려고 시내에 임대해 둔 임시보관소에 가곤 했다. 오늘은 거기서 나의 오빠와 매들린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빙턴과 태리타운 거리는 고요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워싱턴 어빙의 ‘슬리피 할로우’를 관광하러 온 여행객들이 오갔다. 나는 미리 약속해 둔 골목에서 매들린을 만나 그녀를 담요 아래 가린 채 집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짐을 하나씩 매들린의 차에 다 싣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오면, 오빠를 만나 매사추세츠로 떠날 참이었다. 마지막 짐을 차에 실은 후, 매들린과 나는 아이들을 모두 맨발로 데리고 몰래 아빠 침실을 지나 중앙 계단을 통해 정문 현관으로 나왔다. 짐이 빼곡한 차에 아이들을 하나씩 밀어 넣은 매들린은 자신도 좌석에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과 자신을 감춰줄 담요를 뒤집어썼다. 나는 느릅나무 고목이 늘어선 길게 굽은 드라이브 길로 차를 천천히 몰아 집 대문으로 빠져나가면서, 새로 온 경비원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스트 가든을 나와 서니사이드 레인으로 접어들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월간<교회와신앙> 99년 1월호)
김성훈 / <교회와신앙> 미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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