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축산학과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다가 여의치 않았다.
내가 전공하려던 ‘수정란 이식’ 분야의 강원대 축산과 김정익 교수는 이미 다른 학생을 받기로 했음을 알았다.
그 학생은 나보다 실력이 월등히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축산과 선배중에 꽤 입김이 센 유명 인사라는 이름 때문인 것 같았다.
한 동안 비관을 하고 있다가, 일본 유학 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 당시 춘천에는 일본어 학원이 없었다.
혼자서 독학을 하면서 테이프를 들으면서 공부를 했다.
다행히, 일본 문부성 장학생이 되어 동경대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경대 본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떨어져 있는 동경대 농대에 들어가 석사 논문을 ‘원시 농업 경영’을 썼다.
석사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제학 분야에 물이 들어 경제학과로 가서, ‘자본주의 형성과정’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서 문제가 생겼다.
지도 교수가 없었던 나는 모교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더구나 축산학과에서는 자본주의 경제학을 가르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간 강사를 전전하면서 더러운 꼴을 수도 없이 당하고 나서, 다시는 먹물들과 어울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 강사 마저 포기하고, 몇 달을 놀다가 식구들 먹여 살릴 생각을 하니, 하늘이 노래졌다.
운이 좋아 중장비 사업을 하는 고종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중장비 임대업을 하게 되었다.
90 년대 추중반의 건설경기 호황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 이후로 프래그래머, 인터넷 쇼핑몰 마케터, 농수산물 인터넷 쇼핑몰 등 하는 일 마다 돈을 벌었다.
운이 좋았다. 선생이 안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삿갓을 방랑시인, 그리고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를 남긴 기행의 시인쯤으로 알고 있다. 김삿갓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이고, 삿갓을 쓰고 다녔기에 김립(金笠)이라고 부른다.
그의 조상은 19세기에 들어와 권력을 온통 휘어잡은 안동 김씨와 한 집안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도 이런저런 벼슬을 할 수가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익순(益淳)이고, 그의 아버지는 안근(安根)이다. 그는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벼슬이 높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평안도 선천부사로 나가 있었다.
그런데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농민군들은 가산 · 박천 · 선천을 차례로 함락시켰는데, 가산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거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 뒤 김익순은 농민군에게 항복해 직함을 받기도 하고, 또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를 잡았을 때 그 목을 1천 냥에 사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려는 엉터리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되었고, 반대로 김익순은 비열한 인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집안은 폐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적의 자손이니 그 자식과 손자들은 법에 따라 죽음을 당하거나 종이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했는데, 여기에는 안동 김씨들의 비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는 데 남다른 신경을 써야 했다. 나이든 큰아들 병하(炳河)와 작은아들 병연은 종을 딸려 황해도 곡산으로 가서 숨어 살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광주(廣州) 땅 촌구석에서 살다가 이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가 살았다는 말도 있다. 그녀의 고향은 충청도 결성(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이었지만 창피해서 친정으로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동안 먹고 사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하지 못했다.
이제는 홀로 남게 되어, 아내나 아이들에 대한 책임도 없어졌다.
이제 나는 김삿갓이 되어 인터넷에서 마음대로 글을 쓰면서 사회를 비판하고 조롱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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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