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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앵무새 죽이기>
미국의 여성 작가 하퍼 리가 쓴 이 영화의 원작인 『앵무새 죽이기』에서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그 자체가 이 소설의 주제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20세기 초 미국 남부지방의 백인들이 갖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지독하고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말한다. 앵무새는 한국에서 퍼진 것으로, 'mockingbird는 '흉내지빠귀'라는 이름의 새다. mockingbird는 미국에만 사는 흉내지빠귀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노래만을 불러주는 새이다.
원작은 미국에서 출판 된 흑인들에 대한 인종문제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미 고교생의 필독서이며 저널리즘과 문학적 업적 등에 주는 최고의 상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할 때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이 제목으로 불렸다. 문학작품을 가장 잘 각색한 영화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 딸 스카웃과 아빠 애티커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애티커스 역의 그레고리 펙과 딸 스카웃 역의 메리 배드헴의 뛰어난 연기일 것이다. 펙은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은 아버지이면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변호사로, 한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 로빈슨(브록 피터스 분)을 열정적으로 변호한다.
이를 통해 남부 작은 마을의 지독한 독선과 인종차별을 폭로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교훈을 통해 도덕적 용기를 가르치는 역할을 탁월한 연기력으로 소화했다. 펙은 이 영화로 1963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그해 각색상도 받았다. 배드헴은 사내아이 같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한 화자(話者)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고 있다.
이 영화는 편견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부끄러운 세계를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르네 클레망 감독의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에서 아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고발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괴상하고 무시무시한 광인(狂人)으로 상상하지만 결국은 그 아이들의 구원자가 되는 은둔적인 이웃 부 레이들리의 역할을 연기한 로버트 듀발의 영화계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그는 향후 명배우의 소질이 엿보이는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엘머 번스타인의 음악도 이 영화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각색을 맡은 극작가 호튼 푸트는 미국 남부 시골 사람들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그의 첫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관한 고발 말고도 놓칠 수 없는 주옥같은 몇 가지 메시지가 있다. 먼저 스카웃의 이웃에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무서워하는 부 아저씨(로버트 듀발 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스카웃과 오빠 젬은 그와의 접촉을 통해 그에 대한 자신들의 두려움이 아무런 근거나 어른들의 편견이 이유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른들의 편견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막판에 부 아저씨는 스카웃과 젬을 죽이려는 악당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해준다.
사진, 흑인 로빈슨을 변호하는 애티커스
두 번째는 바로 애티커스가 보여주는 민주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모습이다. 애티커스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모든 것을 강제가 아닌 설득과 대화로 해결하려고 한다. 또한 그는 새 사냥을 하려고 하는 애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흑인이나 미친 사람, 혹은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II. 완벽한 신사, 그레고리 펙
훤칠한 키, 숯 덩어리 같은 짙은 눈썹, 수려한 용모, 따스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세계 여성들을 사로잡았던 그레고리 펙은 1916년 4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졸라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샌디에고 고등학교 졸업 후 명문 UC 버클리 의대에 진학했지만, 연극에 푹 빠져 전공을 문학과 연극으로 바꾸게 된다.
펙은 1939년 대학졸업 후 뉴욕으로 건너가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기학교에 입학해 전설적인 연기지도자 샌퍼드 마이너스에게 수학했으며, 1942년 연극 <더 모닝 스타>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으로 섰다. 브로드웨이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1944년 영화 <영광의 나날들>로 영화에 데뷔를 했다. 첫 데뷔작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A. J. 크로닌의 소설을 영화화 한 두 번째 작품 <천국의 열쇠>에서 사려심 깊은 신부 역을 맡아 열연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펙은 이후 <가장 특별한 선물> <신사협정> <정오의 출격>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드디어 펙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자상하고 민주적인 아버지이자, 백인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억울하게 투옥된 흑인청년을 변호하는 데 앞장서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 역을 맡아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영화 <나바론>에서
펙은 2000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고별무대인 ‘그레고리 펙과의 대화’에 나와서 “내가 영화에 출연한 수많은 역 중 애티커스 핀치가 나와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 그 때가 내 연기 인생의 절정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100년 영화사상 100인의 영웅’중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53년 오드리 헵번과 호흡을 맞추면서 연기한 <로마의 휴일>도 펙의 영화이력 중에서 많이 언급되는 명작이다. 펙은 이 영화에서 신문기자 조 브래들리 역을 맡아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93년 타계한 오드리 헵번은 펙을 가리켜 “위대한 남자의 단순함, 단순한 남자의 위대함을 보여준 배우”라며 “우리시대의 진정한 남자였다.”라고 극찬했다. 펙은 상대 배우의 명연기를 끌어낼 줄 아는 배우였다. <로마의 휴일>을 찍을 당시 신참배우이기도 했던 헵번의 명연기도 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사진,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과
펙은 함께 연기한 헵번의 뛰어난 연기력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헵번의 이름도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포스터 제목 위에 올라가도록 영화사에 요청했다. 시큰둥한 영화사의 반응에 "헵번은 아카데미상을 탈 게 분명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훗날 나 자신이 바보가 될 수 있다."라면서 헵번의 이름을 올려주도록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의 예상대로 헵번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펙은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폭넓은 역을 맡았지만, 주로 도덕적이고 정의감 있는 인물로 많이 나왔다. 그는 실제의 사생활에서도 영화 속에서의 도덕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그대로를 보여주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1942년에 결혼한 첫 아내와 이혼 후, 1955년 프랑스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와 재혼해 평생을 함께 했다. 다른 배우들처럼 스캔들이 있을 법도 했지만 영화에서의 성실한 이미지처럼 일상에서도 아무런 구설수 없이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꾸려갔다.
영화 <빅 컨츄리>에서 비비안 리와
펙은 배우 활동 외에도 미국 영화연구소 초대 의장, 미국 암협회 회장, 미국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협회 회장, 미국 영화 TV 구호재단 이사장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각종 자선단체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잠깐민주당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월남전에 아들이 참전했지만 한편으로는 반전시위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민의 도리는 해야 하지만 잘못된 일은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소신이기도 했다. 1972년에는 월남전을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했으며, 1987년에는 고르바쵸프 치하의 소련에 가서“핵 없는 세상과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라는 취지의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펙은 말년에도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강연을 펼쳤다. 2000년 고별무대에서 했다는 아래와 같은 말은 펙의 훌륭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완벽한 영화를 만드는 꿈을 지녔었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기회가 오리라고 믿어 왔다. 이제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구애를 받지 않으며 죽음도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즐기는 일들을 할 뿐이다.”
살아있을 때에도 ‘살아있는 할리우드의 전설’로 불렸던 펙은 2003년 6월12일 새벽 4시 향년 87세로 48년 동안 해로해온 사랑하는 아내 베로니크의 손을 꼭 잡은 채 평온하게 이승을 떠났다.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배우들의 위엄 있는 아버지’, 원로배우 커크 더글라스는 ‘성실과 정직의 상징’, 그리고 원로배우 폴리 버건은 ‘완벽한 신사였다’면서 그를 애도했다.
펙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넘어가지만 ‘영원한 할리우드의 전설’로 언제나 세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펙은 시대의 진정한 스타였으며, 그 별은 영원히 저 하늘에서도 빛날 것이다. 그가 후세에 남긴 모범적인 모습과 훌륭한 인간성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III. 흑인 민권운동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이후에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백인들의 차별과 압박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인간으로서의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투표권 역시 갖지 못했다. 특히 남부지방에서의 인종차별은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끔찍했다. 흑인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결사적으로 흑백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운동과 백인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민권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흑인 민권운동은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 판결 사건’, 1955년 ‘로자 파크스에 의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그 효시로 본다. 이후 흑인들의 결사적인 민권운동의 결과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와 같은 법 제정에 따라 합법적인 탄압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흑인 사회에 가해진 억압 등에 대항하는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로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과잉 진압에 반대하는‘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이 원인이 되어 ‘LA 폭동(1992)’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따른 소요 사태(2020)’가 연이어 일어나는 등 흑백간의 갈등은 아직도 미국의 영원한 숙제로 남아있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1954)
1951년 캔자스주의 주도(州都)인 토피카에 사는 흑인 올리버 브라운은 여덟 살짜리 딸 린다가 먼로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위험한 철길을 건너 1.6km를 가야 하는 게 영 불안했다. 집에서 바로 옆에 있는 섬너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그곳은 백인학교라 언감생심이었다. 교육위원회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콧방귀만 뀌었다. 이 당시 미국은 '분리하되 평등하게'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즉,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교육에서도 이런 원칙이 고수되어 흑인과 백인은 따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연방대법원에서도 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말만 평등이었지 분리하고 불평등이나 다름없었다. 올리버 브라운은 낙심하지 않고 전미유색인연합(NAACP)의 도움을 받아 연방대법원에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흑인 12명이 동참했다. 결국 1954년 5월 17일 연방 대법원장 얼 워렌과 대법관들은 공립학교의 인종 차별은 위헌이며 모든 공립학교는 흑백 분리 교육을 시정하고 통합하라는 판결을 만장일치로 내린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의 판결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일부 주들은 흑인 밀집 지역의 흑인 학생들을 백인 전용 학교로 실어 나르면서 판결을 수용했으나 남부의 주들은 이 판결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사진, 브라운 가족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수백 년 동안의 관습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힘들다면서 대법원 판결 시행을 거부하는 주 정부들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까지도 흑인 어린이중 단 1%만이 흑백 통합 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이 판결에 대한 저항은 엄청났다. 또한 판결이 공립학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사립학교들은 적용대상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은 미국 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면 다른 부분에서도 흑백 분리는 위헌이 아니겠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이는 이어질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사태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55-56)
사진, 로자 파크스
1955년 12월 3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내의 페어Fair 백화점 재봉사로 일하던 42세의 로자 파크스는 퇴근길에 시내버스에 탔는데 흑인들이 앉는 뒷자리에 좌석이 없는 것을 보고 중간 쪽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버스에 백인 승객들이 더 올라 타자 운전사는 “깜둥이는 뒤쪽으로 가라구!”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흑인은 서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전미유색인연합회 회원이기도 한 파크스 부인은 운전사의 명령에 불응했다.
그러나 그녀는 몽고메리 시 흑백분리 조례에 위반했다고 현장에서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다. 그녀는 경찰 조사에서 로자가 앉아있던 곳이 원래 유색인 전용 좌석이란 점이 감안되어 저녁에 풀려났다. 그러나 전미유색인연합회 회원인 그녀는 이 사건에 대해서 그냥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로자의 친구인 닉슨Nixon은 앨라배마 주립대학 교수인 조앤 로빈슨Joan Robinson에게 이 사건에 대해 상의한 후 보이콧 운동을 실천에 옮겼다. 3만 5천여 장의 버스탑승 보이콧 유인물을 몽고메리 전역에 살포했다.
12월 4일에 이르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교회들에게 알려졌고 몽고메리의 흑인 교회들은 잇달아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선언했다. 흑인 교회들은 다음날인 12월 5일 하루 동안 버스 탑승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직장까지 걸어 다녔으며 버스는 대부분의 좌석이 텅텅 빈 채로 운행되었다. 첫날의 투쟁이 끝난 후 향후 투쟁 방안이 논의되면서 ‘몽고메리 진보협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에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의 목사가 뽑혔는데 그가 바로 흑인민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마틴 루터 킹이었다.
사진, 마틴 루터 킹
킹은 이렇게 외쳤다. “짐승 같은 압제의 발길에 걷어차이면서 사는 건 지긋지긋하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할 때가 왔다.” 이후 흑인들은 대대적으로 버스 보이콧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일련의 사태에 앨라배마주는 당황했다. 로자 파크스를 불법적으로 보이콧을 행하고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법정은 그녀에게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 비용을 물도록 판결했다.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 14달러라는 벌금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고 로자에 대한 판결은 흑인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여 버스 보이콧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했다. 5만에 달하는 흑인들이 버스 보이콧 운동에 동참했다.
백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도자급인 루터 킹에게도 박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음주운전 혐의로, 그다음에는 불법 보이콧운동을 공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KKK단은 시가행진을 하는 등 흑인들을 겁박했다. 이런 저런 방법들이 씨가 안 먹히자 흑인들의 집과 교회에 불을 질렀고, 킹을 위시한 보이콧운동 지도자들의 집에 폭탄이 날아들었다. 로자 파크스와 그녀의 남편은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참가자들도 해고되거나 해고 위협을 받았다. 심지어 일부 자가용을 소유해 카풀로 이 운동에 참여하던 흑인들에게 앨라배마 주정부는 자가용 면허를 말소하거나 자동차 보험을 취소하는 등의 온갖 악랄한 짓을 동원했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전 미국에 버스 보이콧 운동이 TV전파를 타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들도 무려 65%에 달하는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경제력 있는 백인과는 달리 흑인들은 대부분 버스를 이용했는데 몽고메리 버스 승객 중 75%가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인은 시내버스 고객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흑인 4만 명이 버스회사에 “엿 먹으라.”고 하면서 걸어서 출퇴근 했다. 버스 요금만큼만 받는 흑인 택시도 등장했다. 킹은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보이콧을 계속해 달라.”고 연설했고 승차거부운동은 무려 381일간이나 계속됐다.
보복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흑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NAACP와 흑인 민권운동가들은 연방대법원에 버스 안에서의 흑백분리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 똥줄이 탄 몽고메리 버스회사들이 아우성을 치자 결국 앨라배마주는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시작한 지 381일 만인 1956년 12월 21일부터 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었고 이후 흑인민권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파크스는 이 사건으로 해고되고 온갖 살해 협박까지 시달리다 1957년 남편과 함께 디트로이트로 이사해야 했다. 2005년 그녀는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유해는 생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의회의사당 중앙홀에 안치됐다.
에밋 틸 살해사건 (1955)
‘브라운 대 토피카 판결’은 흑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사건이었지만 그 다음해인 1955년에 일어난 ‘에밋 틸 린치 사건’은 흑인들을 다시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사건이었다. 시카고 출신의 흑인 소년이었던 14살의 에밋 틸이 미시시피주의 삼촌댁으로 놀러갔다가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끔찍하게 고문된 다음에 살해되어 미시시피강변에 버려진 사건이다. 틸은 시카고에서 자랐기 때문에 남부의 흑인 차별에 대해선 별로 개의하지 않았다.
사진, 에밋 틸
어머니가 극구 방문을 말렸지만 그는 미시시피주 머니시의 삼촌댁으로 놀러 갔다. 그는 물건을 사려고 한 가게로 들어갔는데 풍선껌을 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틸이 가게 주인인 로이 브라이언트의 아내인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손을 건드렸다는 것이었다. 흑인이 백인 여자에게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건 남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황도 죽은 틸이 증언할 수는 없는 일이고 백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다.나흘 뒤 로이와 동생 밀란은 미시시피 강변 숲으로 틸을 끌고 갔다.
둘은 틸이 죽을 정도까지 무수히 팬 다음 눈을 한개 도려낸 뒤 총으로 난사를 해버렸다. 강변에 버려진 그의 시체는 완전히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가 틸에게 끼어준 반지로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틸의 어머니는 장례식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한 틸의 얼굴을 그대로 공개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다.
무려 10만 여명의 장례식에 참가한 흑인들은 틸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틸의 참혹한 죽음은 당시 이런저런 흑백차별로 부글부글 끓고 있던 흑인 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체포된 범인 로이와 밀란은 재판을 받았으나 항상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이지만 전원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당연히 무죄를 평결했다. 무죄가 된 로이와 밀란은 보상금까지 받았다.
더욱이 이들은 틸을 죽인 것에 대해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무용담으로 미화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 이후 틸의 어머니 메이미 틸은 이후 흑인 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또한 그동안 남부의 흑인 차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던 북부의 흑인들이 남부지방의 지독한 흑인 차별에 대해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향후 벌어지는 각종 흑인민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2004년에 이르러 미국 법무부는 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로 하고 유해를 발굴해서 사인과 DNA 검사를 실시했다. 다만 시간이 너무 오래 경과되어 새로운 수사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틸의 시신은 새로운 관에 넣어서 다시 묻었고 옛 관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2021년 12월, 이 사건은 완전 종결되었고 영구미제사건으로 끝났다.
싯인(sit-in) 운동(1960)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촉발시키면서 로자 파크스가 뿌린 씨앗은 여기저기서 꾸준히 싹을 트기 시작했다. 1960년 2월 1일,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시에서 1960년대 내내 선풍적으로 바람을 몰고 올 ‘sit-in movement’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일종의 연좌농성을 말한다. 네 명의 흑인 대학생이 백인 전용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거부당했다. 흑인 학생들은 끝내 식당을 떠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다음날엔 23명의 흑인 학생이, 또 그 다음날엔 66명이, 또 그 다음날엔 100명 이상이, 급기야 일주일이 되는 날에는 천여 명의 흑인 학생들이 이른바 싯인 운동에 동참했다. 2주일이 지나자 이 싯인 운동은 남부 5개 주 15개 도시로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사진, 싯인 운동의 한 장면
싯인 운동의 시작은 먼저 흑인이 백인 전용식당에 들어가 앉아서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얼핏 쉽게 보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이 백인 전용식당이란 점이었다. 식당 주인이나 점원은 흑인에게 음식을 주문받기를 거부했고 흑인 운동가들은 끝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겁나는 일이었다. 당장 흑인이 백인 전용식당에 들어가면 백인들이 증오에 찬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일은 꿈도 못 꾸었다. 만약 자리에 앉는 경우 각종 기물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여러 명이 떼거리로 달려와 개 패듯 두들겨 팼다. 그리고 이들을 식당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러나 흑인 운동가들은 백인들의 이 무지막지한 폭력과 공권력의 탄압을 견디며 결사적으로 이 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이 싯인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이와 같이 백인 식당에서 일어나는 싯인 운동 말고도 일찍이 여러 곳에서 싯인 운동의 씨앗은 보였다.
1955년 1월 20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있는 리즈 약국에서 인종차별을 하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모건 주립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코어라는 단체가 이 약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들은 싯인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30분 정도 리즈 약국에 머물며 평화적으로 연좌농성을 했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지 않았고 이틀 후 결국 이 약국은 다시는 차별을 안 하겠다고 하면서 리즈 약국 싯인은 성공했다.
아무래도 남부가 아니라 북부지역이라 이나마 쉽게 문제가 풀렸을 것이다. 2년 뒤인 1957년 6월 23일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서 싯인 운동이 일어났다. 로열 아이스크림이라는 가게에서 벌어진 이 운동은 흑인 목사 더글러스 무어가 이끄는 시위대가 로열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서며 시작되었다. 그동안 여러 번 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흑인들에 대한 개무시한 것에 대해서 흑인들이 분노한 것이다. 무어 목사를 포함한 7명의 시위대는 백인 전용좌석에 일단 앉았다. 가게주인은 이들에게 백인 전용좌석이니 앉지 말라고 요구했으나 시위대는 거부했다.
결국 경찰이 달려와 이 7명은 체포되었다. 이들은 재판을 받았고 불법침입혐의로 10달러의 벌금이 판결됐다. 시위대는 더럼 카운티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심의를 거쳐 오히려 1심보다 더 무거운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무어 목사는 이후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 사건은 싯인 운동에 대한 최초의 공권력의 법적 처벌이 이뤄진 사건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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