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91
4월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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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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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8W1mg1fUJQ
(김용덕 야고보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4145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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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전례 지침에 따르면, 긴 수난 복음을 봉독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의 권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기가 길고, 따라서 봉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강론을 짧게 하거나 생략하라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수난기 내용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수난기 자체가 가장 좋은 강론이기에, 강론을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골고타 언덕에서 종료된 예수님 수난 여정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반자 유다, 겁쟁이 헤로데, 애매한 총독 빌라도, 대사제 가야파, 겁쟁이 베드로,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 손수건으로 그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결박된 그분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군사들,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지킨 성모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사도 요한...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성주간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 수난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길을 바로 내 삶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적극적인 증인입니까? 아니면 그분 수난 여정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변두리 관찰자입니까?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수치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라도 벌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그들은 주황색 망토를 걸치게 했습니다. 주황색 망토는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하나 들려드렸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존귀하신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들고 계시던 갈대를 빼앗아 거룩하신 그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뱃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내 말 한마디면 저따위 한갓 말단 병사들 순식간에 쓸어 엎어버릴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기적의 능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결박을 풀어버리고 둘러서 있는 적대자들 한 방에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경멸과 조롱을 깊은 침묵 속에 묵묵히 견뎌내셨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는 수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왕직의 참된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직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악 앞에서도 침묵으로 견뎌내시는 왕직입니다. 그분의 왕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인간의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봉사로써 인간을 다스리시는 사랑의 왕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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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AJlGTkDa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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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 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1열왕 1,40)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 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2사무 6,20)
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23)
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 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마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 그 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렁텅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 우선 당신을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가 한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 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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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고통당하는 종이다.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수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과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때 참으로 신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신비,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쪽 강도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에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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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다 알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 뒤에 부활과 승천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말은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이라는 결말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해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전례는 부활 신앙 안에서 거행해야 합니다. <성주간 예식을 해마다 반복하다보니, 마치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고, 그런 느낌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서 형식적으로, 또 의욕 없이 성주간을 지낼 때도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더욱 능동적으로 성주간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주간 예식을 해마다 반복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어떤 수난을 겪으셨는지, 그리고 그 수난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묵상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고, 반복해서 되새겨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의 부활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 후의 이야기는 짧게 기록하고, 수난 이야기는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우리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해마다 재연하는 것은 단순히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회개’로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가 완성되고 구원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주간 예식을 거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의 부활은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누구든지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탈락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가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는 거요?‵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루카 19,29-32)
여기서 ‘아무도 탄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종교적 순결’을 상징합니다. 오직 메시아만을 위해서 준비된 나귀라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즈카르야서에 있는 예언을 실현하신 일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l
“그리고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루카 19,35-36)
제자들이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친 것은, 아직 어린 나귀여서 안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길에 겉옷을 깔아 놓은 것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2열왕 9,13)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당장 세우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9,11)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37-40)
제자들은 즈카르야서의 예언이 실현된 것을 직접 보면서 기뻐하였고,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는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것인데, 원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온 순례자를 환영하는 사제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인사말에 임금님이라는 말을 넣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메시아를 환영하는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에 평화’는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게 되었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찬양이 듣기 싫었는지,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환호와 찬양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돌들’을 ‘모든 피조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르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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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1년 8월 3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 했습니다. 2001년 10월에 시작된 전쟁이 20년 만에 끝났습니다. 미군은 텔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의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가니’는 먼저 외국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통령도 도망갔고, 정부의 관료들도 모두 도망갔습니다. 수도인 카불 공항은 외국으로 도망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에 매달려서 도망가려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는 탈레반에게 넘어갔고, 행정조직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자치정부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무능과 부정부패에 물든 아프가니스탄 행정부는 탈레반에게 국가를 넘겨주었고, 국민들도 도망간 국가지도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국민을 외면하고 가족들과 해외로 도망간 대통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군사대국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3일이면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키이우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제재제로 러시아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명분 없는 전쟁에 자녀들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도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끝가지 수도인 키이우에 남아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의 의회에 화상으로 연설하면서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한다면 역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호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는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배반이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스승인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발이 두려워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서로 원수였던 헤로데와 빌라도는 친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바로 십자가의 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어머니,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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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보' 같은 당신 모습>
동유럽 국가 간 전쟁,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이성을 향한 혐오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듣게 됩니다. 이 사회현상 은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긴장과 갈등, 역지사지의 부 재, 권리 주장과 의무 준수 사이의 불균형에 젖어있음을 말해줍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의 아픔만 바라보는 것은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거나 배려하 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지도 성찰해 봅니다. 그러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성경 말씀은 어떤 길을 안내합니까? 제1독서 (이사 50.4-7)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6)며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모습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 에 관한 예언입니다.
제2독서 (밀리 26-11)에 따르면,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7-8)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무한 경쟁 시대에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도록 강요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은 그저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성경 구절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에 관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입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기(루카 2214-2356) 장면은 오늘 미사 초반에 들었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루카 19.28-40)과 대조적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찬미하며 당장이라도 왕으로 모실 기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을 비난하며 모른 체할 것입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바 보'처럼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을 향해 환호했 던 군중과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이득과 직결 될 때는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모 른 체하거나 비난하며 '마녀사냥'까지 서슴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예루살렘 군중과 닮아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고통과 수난을 겸손과 순종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2022년에도 우리의 죄즉, 이기심, 공감능력 부족, 무관심의 죄를 대신하여 '바보' 같은 모습으로 온몸을 짓누르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통과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바보' 같은 모습의 주님을 우리는 어떤 모습 으로 만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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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신호철 토마스 신부님]
<어린 나귀, 그리고 시몬>
태어나서 한 번도 등짐을 지거나 누군가를 태워 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낯선 사람들이 와서는 주인 허락도 없이 그 나귀를 끌고 가려 합니다. 왜 그러냐고 주인이 물으니 그제야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내어 줍니다. 잠시 후 어린 나귀는 생전 처음으로 어떤 사람을 등에 태우고는 큰 도시로 걸어 들어갑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나와서 손과 나뭇가지를 흔들고 환성을 지릅니다. 자기 등에 탄 사람이 누군지 알 까닭이 없는 나귀로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슨 상황인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어린 나귀는 얼떨결에 인간 구원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위대한 조연이 되었고 성경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키레네에 살던 시몬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축제일은 여느 해와는 달리 왠지 모르게 뒤숭숭하고, 백성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광기 어린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조금 전 총독 빌라도는 어떤 남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아니, 예루살렘 시민들과 지도자들이 무죄한 그에게 십자가 형을 내리라고 총독에게 요구했고, 총독은 무책임하게도 그 요구를 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형수는 지금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중인데, 이미 많은 채찍질과 머리에 쓴 가시관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몬 앞에 행렬이 다다를 즈음, 그 사형수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형수를 호송하던 병사들이 근처에 있던 시몬을 끌어내서 사형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시몬은 군중이 자기를 사형수로 오해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문도 모르고 이 사형수가 누군지도 모르는 시몬은, 정말 얼떨결에 인간 구원 역사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또 다른 위대한 조연이 되었고, 성경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 인간에 대한 주님의 구원 역사가 완성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온 천하에 드러나는 성주간입니다. 당신에게 벌어질 일을 잘 아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 옛날, 어린 나귀와 키레네 사람 시몬은 얼떨결에 조연이 되었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 부활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늘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큰 소리로 환영합시다. '돌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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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님]
< 하느님 손에 완전히 내어 맡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聖枝) 주일입니다. 이와 함께 시작되는 성주간 동안 수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과 긴밀하게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난복음을 읽는 것도 그 자체로 이미 삶의 응답이요 신앙의 행위입니다.
시몬에 관하여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루카 23,26)고 쓰여 있는데, 이는 보통 제자들의 임무를 정의하는 표현입니다. 시몬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루카 9,23)는 가르침을 따르는 모범이 됩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이 행위는 수난기의 끝에서도 반복됩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 심지어 백인대장도“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용감한 증거의 행위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개인적 파국 이상의 것으로서, 바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무서운 단죄를 초래할 것이기에,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단죄는 세상의 모든 악행, 하느님 은총에 대한 거부, 하느님을 적으로 삼는 모든 권력 등에 대한 징벌의 상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모범을 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불의와 고통도 예수님의 사랑을 질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당신의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당신 설교의 백미요,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가고, 기도하고, 고통을 참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봉헌하는 이런 맥락에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뉘우침과 회개는 하느님께서 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착한 강도는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겼고, 그 믿음은 응답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구세주로 남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선 전 생애에 늘 기도하셨는데, 이제 기도로써 당신의 삶을 마무리하시며, 아버지께 대한 깊은 신뢰를 발하십니다. 시편 31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예수님께서 행하신 기나긴 가르침의 요약입니다.
올해도 예수님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십시다. 그분의 고통과 용서, 순명과 완성의 모든 여정을 우리도 그분과 같이 겪고, 같이 나누어 당신의 더욱 충실한 제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 여정에 참여한 인물들로부터도 제자 모습을 찾아 배워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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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송봉모 토마스 신부님]
<십자가>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였다.
각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다들 커서 그런지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고 가고 있었다. 이 사람도 자기의 십자가를 열심히 지고 가려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 이 십자가가 저에게는 너무나 벅차고 무거우니 조금만 잘라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 사람의 십자가를 잘라주었다. "그래, 이만하면 되겠느냐?" 하시면서, 그 사람은 머리를 조아려 예수께 감사하다고 하고 훨씬 가벼워진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다시 예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 달라고 하였다.
언제나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제 그의 십자가는 땅에 끌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뿐하고 작아졌다. 그리하여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지고 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무거워졌다.
그는 다시 예수께 가서 마지막 부탁이니 아주 짧게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그의 부탁대로 십자가를 잘라주었는데, 이제는 하도 작아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십자가를 가지고 갔다. 그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을 보며 미련 하다고 생각하였다. "나처럼 주님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할 것이지. 자기들이 뭐 성인이라고" 하고 중얼거렸다. 한참을 걸어가니 깊은 골짜기가 나타났는데 그 골짜기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지고 온 십자가를 다리 삼아 놓고 건너갔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십자가는 너무 작아서 걸쳐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염치없지만 그는 앞서가는 예수님을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일행은 너무나 멀리 가 그의 절망적인 소리는 가 닿지도 못하고 메아리만 되돌아 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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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요섭 요셉 신부님]
<두 가지 마음>
「채근담」에서는 사람이 지닌 기본적인 성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굶주리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신의를 지킬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약하고 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제 욕심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소문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대하는 두 마음을 봅니다. 입당 예식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군중들의 기쁨과 환희를 표현합니다. 손에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며 자기들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환영합니다. 그 마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에게 ‘다윗 왕조’ 시절에 누렸던 것과 같은 영광과 번영을 가져다주시리라는 기대와 바람이 깔려 있습니다.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은 주님을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무섭게 타오릅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의 입에서는 이제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조롱, 기대를 저버린 저 무능한 이를 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아우성이 터지고, 예수님을 부르던 ‘임금’이라는 호칭은 이제 그분이 저지른 ‘죄명’이 되어 십자가 위에 못 박힙니다.
상반된 두 모습을 통해 주님을 환영하며 성지(聖枝)를 흔들던 우리. 욕심과 고집에 사로잡히면 언제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폭도가 될 수 있음을 되새깁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이 ‘실패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던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진실이 되려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신앙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성공과 욕심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 배움의 과정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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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뭇가지 성사>
올해는 수난 주일 나눔을 하지 않고 성지 주일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껏 성지주일을 수없이 지내며 성지 축성을 하고 방에 달아놓고는 왜 성지를 1년 동안 방에 달아놓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이번에 문득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성지를 걸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성지는 왜 축성하고, 왜 방에 걸어 1년을 보는 겁니까?
성지는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밟으시라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과 함께 깔은 가지지요. 주님께서 자기들 도성을 찾아오시는데 아니, 주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시는데 어찌 맨 땅을 밟고 오시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깔은 거지요.
이는 큰 축제에 관계되는 귀빈을 모시고는 입구에서부터 주행사장까지 주단/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그것을 밟고 들어오게 함과 같고, 경우는 다르지만 김 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진달래 꽃길과 같은 거겠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니까 그 가지가 거룩한 가지인 이유는 주님이 밟으신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거룩함은 주님과 닿기 때문에 거룩한 거지요. 주님께서 와서 닿든 우리가 가서 닿든 주님과 닿아야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이랄까 주일의 거룩한 의미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어하던 그 '간절한 닿음'의 의미이고, 연인의 손을 처음 잡을 때 떨면서 잡는 그런 '떨리는 닿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데 나와 상관없이 오시는 분인 듯
맨 땅을 밝고 오시게 해서는 안 되고 옷을 깔든 주단을 깔든 깔아야 주님은 내게 오시는 것이 되고 나의 옷이나 주단은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지를 깔고 옷을 까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이고 예루살렘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여는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에서 자주 이 시편을 노래하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후렴과 함께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영광의 임금님이 누구이신고. 굳세고 능하신 주님이시다. 싸움에 능하신 주님이시다."라고 노래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지를 축성하여 집에 가지고 가 자기 방에 다는 것은 한갓 장식이 아니라 그것을 볼 때마다 성사가 발생하기 위해 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뭇가지 성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거룩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집에 달았으면 우리 집 대문을 열겠다는 뜻이요
나의 방에 달았으면 나의 방 문을 열겠다는 뜻이며
나의 마음을 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을 열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은 떨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서는 아니 되고 간절하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환영의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큰 소리로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가 그들을 꾸짖으시라고 주님께 청하는데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잠자코 있으면 안 되고
돌같은 마음이거나 돌들보다 못한 마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아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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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축성하여 성당에 들고 들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례> 역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고 환영하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하늘높이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와 모욕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위에 오르셨던 바로 그분은 이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바로 그분이,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일을 예언자 이사야는 <제1독서>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고,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찬미노래로 부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부활성야 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사랑을 거절한 까닭이 아닐까!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까닭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아드님이 왔건만, 그분도, 그분의 사랑도 거절된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의 거절 때문에,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닐까! 오늘도 당신 사랑에 대한 나의 거절 때문에, 당신께서는 고통 받고 계시지는 않는 걸까요!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하도 커서, 거절당해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하도 커서, 배신을 당해도 그칠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죽기까지’ 해도 다하지 못할 사랑인가 봅니다. 사랑에는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7,34)하고 간청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용서하시는 자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이 빚어진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거절 때문이지만, 드러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통 받으셨습니다.
결국,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걸까요? 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왜 예수님을 반대한 걸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걸까요? 또 유다스와 베드로, 그분의 제자들은 왜 걸려 넘어진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배와 권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내세우다 꾸중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요구하다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가진 자로서 권세와 횡포를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작은 자들에게서 빼앗고, 힘없는 이들을 때리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것을 다스림의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하신다. 아버지를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고, 최후만찬에서는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도 섬기십니다.
참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왕으로 자처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사스런 영광을 취하기보다, 작아지고 섬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혹 우리 역시 당시의 제자들처럼, 작아지고 섬기려하지 않으려다 자칫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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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7,34)
주님!
그 어떤 모든 일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게 하소서.
그 어떤 저의 거절 때문이라도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시고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말게 하소서.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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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하는 사람들>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전경은
참으로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걸어왔던 힘겨운 길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맞아주고 있다
겉옷을 길에 펴놓고
환성을 지르며 나를 반기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의 길을 모른다
자신의 기대와 감정에 이끌려 기뻐할 뿐
나의 길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제자들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의 모든 것을 내 주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나
이들은 나를 버리고
살고자 자신의 길을 간다
배신의 입맞춤 하며
나를 팔아넘긴 가련한 제자 유다
초주검으로 피땀 흘리는 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진 제자들
힘없이 붙잡힌 나를 두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완강히 버티다
슬픔에 젖은 나의 믿음 가득한 눈빛 마주하고
가슴 찢으며 슬피 우는 베드로
더 많은 이들이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한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병사들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외쳐대는
스스로 의로움에 사로잡힌
대사제들과 원로들
자신을 군중에 묻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지도자의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제 책임 떠넘기는 추한 빌라도
소문과 흥미에 놀아나는
천박한 정치꾼 헤로데
가진 자들에게 삶을 저당 잡혀
채찍질하고 못 질하는
힘없고 불쌍한 하수인들
영문도 모른 체 끌려나와
십자가 여정의 귀한 벗이 되어준
고마운 키레네 사람 시몬
짓이겨진 나를 지켜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는 자괴감에
피눈물 흐느끼는 여인들
저주와 모독 가득한 절망으로
참회와 속죄에 담긴 희망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
처연한 평화 깃든
내 가쁜 생의 마지막 호흡에
함께 한 백인대장과 가슴을 치던 군중들
추악한 음모를 획책하는 의회 의원들 가운데
단 하나 의롭게 빛났던
내 주검을 곱게 감싸 따뜻하게 묻어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처참한 내 주검마저
곱게 보듬어 마음에 새기려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했던
착하고 고운 여인들
나는 혼자이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그러했듯
내 삶의 마지막 죽음의 길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있다
어떤 이는 나를 따르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배척하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이제 너를 내 길에 초대한다
과연 너는 왜 이 길에 함께 하려느냐
과연 너는 어떻게 이 길에 함께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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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루카 19,38)
<파스카 신비의 완성!>
오늘은 교회 전례주년 가운데에서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때인 성주간(주님수난성지주일~성토요일)의 첫 날인 '주님수난성지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고, '수난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파스카 신비의 완성'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얻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5-6/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이 거룩한 순종의 결과가 바로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여정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파스카 신비의 완성지'입니다. 우리도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지극한 겸손과 거룩한 순종' 안에 머물도록 합시다!
제13처 :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 성모님은 그 시신을 안으시고, '내 아들, 장하다!' 고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길 마지막 도착지에서도 성모님은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장하다!' 고 칭찬하시며 당신의 따뜻한 품 안에서 우리를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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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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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 것인가>
-수난기로부터 배우는 가르침-
요즘 무상無償의 선물들로 가득한 온누리 세상입니다. 대부분의 나무가 꽃나무들이라 죽은 듯 보였던 나무마다 피는 꽃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무수히 아름다운 꽃들 만발한 수도원을 찾는 이들 역시 꽃처럼 보입니다. 어제 마침 나물 캐던 자매님이 산책하는 저에게 운동하느냐 묻기에 꽃을 보러 나왔다 했고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자매님도 꽃같아요!”
나이에 상관없이 아름답게 웃는 얼굴은 꽃같습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말씀 처방전 말씀에 참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이걸 읽어 보고 웃을 때는 꽃처럼 예쁜 얼굴들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서로가 꽃’이라는 시도 풀꽃처럼 소박해서 좋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나 없을 때 너 보고 싶었지? 생각 많이 났지?
나 아플 때 너 걱정됐지? 기도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서로가 꽃이고 기도로 살 때 잘 살다가 잘 죽는 삶입니다. 어제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읽은 박노해 시인의 짧은 글도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인가 죽음 앞에 세워질 때,
나는 무얼하다 죽고 싶었는가.
나는 누구 곁에 죽고 싶었는가.
내가 죽고 싶은 자리가 진정 살고 싶은 자리이니
나 지금 죽고 싶은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을 살고 있는가.
이름 없는 수선화 꽃 무덤이 물어온다.”
내 좋아하는 곳,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평생 정주의 삶을 사는 수도자인 저에게 그대로 드러맞는 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다 주님 곁에 죽고 싶습니다. 정주의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가 죽고 싶은 자리입니다. 또 자주 일부 말마디를 바꿔 산책중 자주 부르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입니다.
“나 태어난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검은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마지막 한 구절은 거듭 되뇌이곤 합니다.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현역의 영원한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합니다.
만개한 파스카 봄철의 무수한 봄꽃들, 꽃처럼 피었다 꽃처럼 지라는 가르침을 배웁니다. “잘 살다고 잘 죽고 싶습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소원이냐 무엇이냐 물었을 때 즉시 대답하고 흡족해 했던 답변이고 지금 물어도 이처럼 대답할 것입니다. 산대로 죽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바로 오늘 루가복음 수난기의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첫째, 참 좋은 선물로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참 좋은 선물의 삶은 일치를 주지만, 그렇지 않는 삶은 분열을 줍니다. 죽음에 앞서 일치와 평화의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오늘 루카의 수난복음은 “성찬례를 제정하시다”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기신 최고의 멋진 생명의 선물이 바로 성찬례, 우리가 날마다 거행하는 미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과연 내가 세상에 남길 선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생각하는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정말 간절한 소원은 하루하루 주님과 이웃에게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떠나는 죽음이면 하는 것입니다. 짐으로 살다가 짐으로 떠나는 죽음이 아니라!
둘째, 참 섬김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수난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친히 평생 섬김의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만 있을뿐입니다. 왕처럼 군림과 권세의 왕처럼이 아닌 섬김의 종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아주 예전 이맘때쯤 낮은 자리 작은 민들레꽃을 보며 위로를 받고 쓴 시가 생각납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
이름없는 민들레꽃처럼 낮은 자리에서 활짝 열린 섬김의 삶을 사는 작은 이들을 가득 채우는 하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필리비서 그리스도의 비움 찬가의 다음 대목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참 잘 요약한 읽을 때 마다 감동을 선물하는 비움 찬가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토요일 제1저녁기도 때마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이 찬가를 부릅니다.
셋째, 참 겸손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겸손한 삶은 온유한 삶이요 진실한 삶입니다. 겸손한자 주님의 도를 배우게 하시면 온유한 자 주님의 의로움을 살게 합니다. 참 사랑은 겸손한 사랑, 진실한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기에 딱히 탓할바는 아닙니다만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베드로를 바라보는 눈길을 잊지 못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회개의 눈물이요 회개를 통해 온유와 겸손, 진실을 회복한 베드로입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란 말이 생각납니다. 권세가 있으면 아첨하고, 몰락하면 냉대하는 세상의 인심을 이르는 한자성어입니다. 진실과 겸손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시 “호산나! 호산나!”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군중들은, 후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광분狂奔하니 참 믿을 바 못되는 염량세태의 세상 인심입니다.
넷째, 참 기도의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루가복음은 물론 수난기에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이 간절하고 항구하고 열렬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모습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주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입니다. 잘 들어야 잘 기도할 수 있고 잘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비결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를 잘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더욱 날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기도의 모범입니다. 감동적인 기도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의 기운을 북돋아드렸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2.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인 임종어는 그 절정을 이룹니다. 평소 이렇게 사셨기에 이런 기도입니다. 역시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치명적인 죄이자 병이자 악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시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임종어의 기도도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참 착한 삶을 살았으면 소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수난기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보여줍니다. 선인과 악인이 혼재해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세요. 누가 진짜 이웃인지는 곤궁한 역경에 처했을 때 그대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시몬,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한 죄수, 예수님의 거룩한 임종장면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던 백인대장,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신 착하고 의로운 요셉 등 이런 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이들이 있어 염량세태에도 불구하고 살 힘을 얻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산대로 죽습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 다 잘 죽을 수 있도록, 선물로 살다가 선물로 죽을 수 있도록, 착하게 살다가 착하게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하다 죽을 수 있도록, 진실하고 겸손히 살다가 진실하고 겸손히 죽을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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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jxeosdU3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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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2, 31)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갈채와
환호 뒤에
뒤따라오는
십자가이다.
성지가지
사이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성지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답하신다.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성주간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교만을
아프게 보게 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랑의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다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십자가로
삶의 고통을
통과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다시 삶의
길을 만든다.
가장 위험한 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
자아를
깨뜨리는
십자가이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 수 없는
십자가의 진리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을 다시
살리신다.
인생이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의 배움이다.
하늘 아래
하늘나라를
보여주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삶을 알 수 없다.
사라지지 않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또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십자가로
닮아가는
삶의 성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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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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