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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황학수 [1877.7.20~1953.3.12]
•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 서훈년도 : 1962
공적개요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 군인
○대한제국 군인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에 임명
○한국광복군사령부 총사령대리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임
대한제국군, 독립군, 광복군으로 활동한 황학수
-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친 참 군인 -
한 시 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盡忠報國‘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중국 항주의 서호(西湖)에 가면 악비(岳飛)의 묘가 있다. 악비는 송(宋)나라의 무장(武將)으로 금(金) 나라가 침략하였을 때, 이를 물리친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악비를 ‘구국의 영웅’이자 ‘충신’으로 칭송하고 있고, 그의 무덤이 있는 서호변에 ‘악왕묘(岳王廟)’를 세워 놓았다.
黃學秀(1877 – 1953)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악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중국 송나라 때 악비의 어머니가 그의 등에다가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었고, 악비는 이를 잊지 않아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남자는 남자다운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니 대의(大義)를 알도록 공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황학수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고, 어머니의 가르침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황학수는 1877년 서울 화동에 부친 황두연(黃斗淵)과 모친 홍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고, 호는 몽호(夢乎)라고 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었지만, 자라기는 충북 제천에서 자랐다. 서울의 시국이 어수선 하자 그의 아버지가 부인과 함께 가족들을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이라는 산골로 피난시켰다. 삼화동은 행정구역으로는 단양군에 속해 있지만, 생활권은 제천이었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10여 년 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아버지의 바람은 혼란한 시국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하게 사는 것이었지만 황학수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진충보국’, ‘대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던 때문이었다. 16살 때인 1894년 아버지는 서울에서 책방을 경영하는 정희섭의 딸과 결혼을 시켜 안정된 생활을 바랬다. 그러나 그해에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제천에도 휘몰아치자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救國을 내세우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동학군에 참가한 것이다.
그가 동학군에 참여하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아버지가 극구 만류하였고, 서울에 있던 장인까지 나서서 만류하였다. 동학군에서 나오긴 하였지만, 외세가 조국을 침략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제가 1894년 경복궁을 침입한 ‘갑오변란’이 일어난 데 이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895년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군인으로
황학수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생도를 모집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신식군대의 지휘와 훈련에 필요한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1896년에 설립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설립 직후 고종의 아관파천이 일어나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러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무관학교가 다시 설립되어 생도를 모집한 것이다. 황학수는 무관학교에 응시하였다.
당시 무관학교의 경쟁률은 대단했다. 200명 모집에 1,700명이나 응시할 정도였다. 지원자가 많았던 것은 무관학교가 대한제국의 육군사관학교였다는 점도 있었지만, 무관의 품계가 다른 직종에 비해 높았던 데도 요인이 있었다. 학도의 선발은 2단계 시험을 거쳤다. 1차로 300명을 선발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어전시험을 실시하여 최종적으로 200명을 선발하였다. 황학수는 1·2차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무관학교는 1898년 7월 1일 개교하였다. 황학수는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 6개월 과정의 교육을 받았다. 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였고, 교육 도중 44명이 탈락하고, 졸업 때에 이르러서도 30여명이 탈락할 정도였다. 1900년 1월 金學韶· 張然昌· 朴容俊 등 128명과 함께 졸업하였다. 이들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졸업식은 고종황제가 대원수 자격으로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황학수는 무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 처음에는 친위제1연대 제1대대에 견습생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하였다. 시위대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직후인 1897년 3월에 창설된 것으로 황실의 경비를 주요 임무로 하는 황실호위부대였다.
황학수는 강직하고 충성스런 군인이었다. 李容翊과 관련된 그의 행동에서 그러한 면을 볼 수 있다. 이용익은 고종의 측근으로 황실의 재정을 관리하면서 시위대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용익은 정부대신들로부터 많은 시기와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보신각 앞에 모여 연일 이용익에 대한 배척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황학수는 대대장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독자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종로에 나가 이용익의 배척운동을 막았다고 한다.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군중을 해산하는 행위는 군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처벌을 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상관이 곤경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처벌을 돌보지 않고 상관의 위급상황을 해결한 것이다.
의병을 진압해야 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때 군부협판 이희두가 경북 일대의 ‘土匪’를 진압하라는 지시와 함께 안동진위대 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각지에 의병들이 봉기하자 대한제국 군대의 일부가 동원되어 이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황학수는 이들이 ‘토비’가 아니라 ‘의병’임을 알고,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칙령이라며 그의 사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황학수는 안동지위대에 부임하여 두 가지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관할 각 구역에 고시하여 ‘토비’의 귀화를 권유하였고, 다른 하나는 병졸들에게 ‘토비’를 사살하지 말고 생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귀화 및 생포한 ‘토비’들은 그의 재량으로 모두 석방하였다. 상부의 명령없이 석방하는 것은 군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부하들이 상부에서 이들을 석방하는 것을 알게 되면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며 반대하였지만 황학수는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황학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밀고나가는, 즉 자기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이용익 사건 때만 해도 동료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황학수는 곤경에 처한 상관을 구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자 혼자서 병력을 동원해 이용익을 구한 것이다. ‘토비’를 석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군법을 위반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또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풀어준 것은 이들이 토비가 아니라 ‘의병’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을 당하자, 황학수는 군복을 벗었다. 일제와 대한제국 군부는 군대를 해산하면서 여러 가지로 회유하였다. 장교들에게는 군수를 지원하던지 아니면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라는 권유를, 그리고 하사 이하 사병들에게는 복무기간에 따라 恩級을 주었다. 그렇지만 황학수는 이를 뿌리쳤다. 그리고 제천으로 내려갔다.
서간도에서 서로군정서를 재건
황학수는 제천으로 내려간 이후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할 때까지 송학면에서 지내는 동안 지방유지들과 함께 보명학교를 설립했다. 서당에 다니며 성장한 그가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설립한 것이다. 보명학교는 1911년 제천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해방 후에는 동명학교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그의 삶에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있었다. 육군무관학교 동기생들의 모임에 갔다가 서울에서 김학소를 만난 것이다. 김학소는 군대해산 직후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동기생들 중 상당수가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그곳이 지리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다는 말을 들었다. 황학수는 자신도 만주지역으로 가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작정하였다.
황학수는 군자금을 마련해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독립군을 양성하려면 적지 않은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오대산에서 금광을 시작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산만 모두 탕진했다. 이 무렵 3·1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군자금을 마련하지 못하였지만 맨손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학수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김학소를 찾아갈 작정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에 도착하여 김학소의 소재지를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방향을 바꾸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상해에는 3월 1일 독립을 선언한 후 4월 11일 그 독립국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임시의정원의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1919년 11월 군무부 참사로 임명된 이래 주로 군무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군무부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주관하고 있었다. 총장과 차장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던 노백린과 김희선이었다. 군무부에서는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있었다. 육군무관학교는 임시정부의 육군사관학교였다. 황학수는 도인권과 함께 교관으로 활동하며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지만, 1920년 12월 3기생을 배출한 이후 재정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그동안 수소문하던 김학소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김학소는 백두산 서쪽 무송현에서 흥업단 부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만주로 향했다. 북경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는 각 지역 독립군단이 모여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군사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군사통일회의는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노선에 반대하여 만주를 비롯한 각 지역에 있는 독립군들을 통일시켜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그의 발길은 여기서 잠시 멈추었다. 황학수는 박용만과 함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단체의 통일을 모색하였다.
그가 다시 만주로 향한 것은 군사통일회의가 결렬되고 나서였다. 그러나 김학소는 만주에 없었다. 청산리대첩 이후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한 것이다. 길림성 화전현에 이르러 서간도지역의 대표적 지도자로 서로군정서 독판을 지낸 이상룡을 만났다. 그로부터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자유시로 이동하였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학수는 김학소를 찾아가는 것을 단념하였다. 김학소의 소식을 알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이상룡이 그를 붙잡았던 때문이었다. 당시 이상룡은 부독판이었던 여준과 함께 서로군정서의 재건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상룡은 1921년 5월 황학수를 참여시킨 가운데 중앙총회를 개최하고 이탁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하여 서로군정서를 재건하였다. 황학수는 재건된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에는 북경에 있는 박용만을 추천하였다.
황학수는 이탁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고, 군무부장을 겸임하면서 군사조직을 재건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년들을 군적에 등록하게 하고, 각 지역에 별동대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 그가 총사령관으로 추천하였던 박용만이 일제에 항복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로 인해 조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측의 모략일 거라며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그는 군사부장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를 떠났다.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대일항전
황학수는 다시 북만주로 향했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다. 방랑이나 다름없이 북만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 마적단에게 체포되어 위험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서로군정서에 치포되었다가 풀려난 마적단 중의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본 덕분에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가 발검음을 멈춘 곳은 액목현의 武致河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崔南表라는 사람을 만나 그곳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김학소와 연락이 닿은 것이 이 무렵이었다. 김학소는 자유시참변을 겪은 후 북만주로 돌아와 신민부를 결성하고, 그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황학수는 흑룡강 연안을 돌아 신민부 본부가 있는 中東線 二道河子에 도착하여 김학소를 만났다. 1926년이었다. 1919년 김학소를 찾아 압록강을 건너 상해· 북경· 서간도를 거쳐 7년만에 김학소를 만난 것이다. 김학소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의 활동처를 찾게 되었다.
황학수는 신민부에서 주로 군사분야를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당시 신민부는 관할구역의 자치행정을 담당하는 기구와 더불어 군사활동 기구로 군사부·참모부가 있었는데 그는 참모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군사부 위원장은 金佐鎭, 참모부 위원장은 羅仲昭가 맡고 있었다. 황학수는 이미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과 군사부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신민부의 軍區를 확대시키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청년들을 군적에 편입시키고, 이들을 독립군의 기본대오로 편성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활동으로 신민부의 군구가 敦化를 비롯하여 동만주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황학수가 돈화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김학소가 일제에 피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신민부가 북만주 일대에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1927년 2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경찰이 합동으로 韋河縣 石頭河子에 있던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중앙집행위원장 김학소를 비롯한 12명의 간부를 체포한 것이다. 김학소의 피체는 황학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급히 본부로 돌아왔다.
김학소가 피체된 이후 신민부는 향후 활동방향을 놓고 대립하여 두 파로 갈리게 되었다. 김좌진 등은 이러한 희생을 계기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고 하였고, 민사부위원장 崔灝 등은 우선적으로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키자고 한 것이다. 결국 12월 개최된 총회에서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로 분화되고 말았다.
황학수는 김좌진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래 신민부에 참여하기까지 줄곧 군사활동과 관련한 일을 해왔던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일을 추진하였다. 하나는 관할구역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마적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김좌진과 함께 마적단 본부를 찾아가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국내진입을 위한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압록강에서 강계를 거쳐 평양까지, 백두산에서 함경·강원·경상도의 산맥을 따라 전라도까지, 두만강을 건너 종성을 경유하여 북청까지 이르는 루트를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을 때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되어 각각 관할구역을 정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3부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황학수는 김좌진 등과 신민부 대표로 참여하였다. 여러 차례 회의가 열렸지만 통합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의 대립을 보이다가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통합을 추진하던 세력들은 각각의 노선에 따라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황학수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3부통합회의가 결렬된 후 황학수는 洪震· 李靑天 등과 생육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五常縣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무렵 김좌진이 암살되는 일이 일어났다.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이 김좌진을 암살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졌고, 생육사와 김좌진이 중심이 되었던 한족총연합회 세력이 통합을 이루었다. 이들이 1930년 7월 위하현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것이다. 황학수는 위원장 홍진과 더불어 부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이후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부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독당은 긴급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군사활동을 개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각 군구에 있는 청장년들을 소집하여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한국독립군은 당의 군대였다. 총사령관은 이청천이었고, 황학수는 金昌煥과 함께 부사령관에 선임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군과 합작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만주지역에는 중국인들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자위대· 구국군 등 각종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황학수는 총사령관 이청천과 협의, 길림구국군과 합작을 추진하였다. 당시 길림구국군은 東寧縣에 있었고, 王德林이 사령관이었다.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은 합작하기로 하고, 합작한 부대의 명칭을 中韓聯合討軍이라고 하였다.
한중연합군을 편성한 후, 황학수는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2월 柴世榮부대와 함께 鏡泊湖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급습하여 일본군 1개 대대를 거의 섬멸시킨 전과를 거두었다. 유명한 경박호 전투였다. 이후에도 한중연합군은 四道河子 전투(1933. 3월)· 東京城 전투(1933. 6월) 등을 비롯하여 大甸子嶺에서 일본군 73연대인 飯塚聯隊를 거의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황학수는 사도하자 전투를 치른 후,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과 계속되는 전투로 병력보충이 긴급해진 한국독립군에서 그에게 병력을 모집토록 한 것이다. 황학수는 관할구역의 여러 군구를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집하였다. 이때 한국독립군이 합작하였던 중국군에게 무장해제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1933년 10월 吳義成부대가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 이청천 이하 300여명을 체포 구금한 것이다. 이 사건은 대전자령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대립이 한 원인이 되었지만, 오의성부대에 참모로 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서기 周保中의 음모도 있었다고 한다. 오의성이 주보중의 음모임을 알고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모두 석방하였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 대부분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 대리
한국독립군이 오의성부대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항학수는 沙河子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학수는 이탁과 함께 은거하였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거지가 노출되었고, 일제에 투항한 청년이 찾아와 황학수와 이탁에게 투항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황학수는 만주를 떠나 임시정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총사령관 이청천을 비롯하여 吳光鮮· 公震遠 등은 군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청년들을 데리고 남경으로 향하였다.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을 추진하던 김구로부터 중국관내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고 출발한 것이다. 황학수도 이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를 찾아 나섰다.
황학수는 이탁과 헤어져 혼자서 중국관내로 향하였다. 농민복으로 변장하고 營口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다. 동지들의 소식을 수소문하던 중 일제경찰에 발각되어 쫓기게 되었다. 綏遠省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만을 듣고, 包頭로 향했다. 천여리 길을 걸어 포두에 도착하였지만 동포를 만날 수 없었다. 북경에서 달랑 3원만 가지고 출발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포두까지 왔지만, 동포도 만나지 못하고 임시정부를 찾아갈 방도도 없었다. 좌절에 휩싸인 그는 죽을 생각으로 황하로 향했다.
죽을 작정을 할 정도로 좌절에 휩싸였던 그는 되살아났다. 황하로 가던 중 길가에서 교포를 만난 것이다. 당시 포두에는 趙秉準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서간도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경 80여명을 인솔하고 포두로 와 교외에 배달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황학수는 그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임시정부를 찾아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긴 여정과 고난의 행군 끝에 1938년 2월 長沙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와 합류하였다. 만주를 떠난지 4년만이었다.
황학수는 상해를 떠난 지 17년만에 다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군사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임시정부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군대를 편성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한다는 계획 하에 군무부에 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이들로 하여금 군사정책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황학수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광복군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1939년 임시정부가 綦江(기강)에 도착하였을 때 황학수는 자신이 선두에 서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해 나갔다.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있던 기강이나 重慶에는 군인이 될 만한 청년들이 없었다. 황학수는 일본군 점령지역에 이주해 있는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로 하고, 曺成煥 등과 군사특파단이란 이름으로 일본군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는 西安으로 갔다.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환갑이 된 나이에 최전방에 나간 것이다. 황학수는 서안을 거점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초모활동은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청년들을 포섭하여 데리고 나오는 활동을 말한다.
황학수가 서안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중경에 정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를 설립한 것이다. 우선 임시정부에 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총사령부를 설립하고, 병력을 모집한다는 계획이었다.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후 총사령부를 서안으로 옮겼다. 총사령부를 서안으로 이전하면서 서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황학수가 총사령 대리를 맡게 되었다. 총사령과 참모장은 중국군사위원회와의 관계를 위해 남아 있었다. 이로써 광복군을 창설한 후 병력을 모집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황학수가 맡게 되었다.
황학수는 서안시내 二府街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였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단위부대의 편성이었다. 중경에서 온 인원과 그동안 초모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이어 1941년 1월 서안에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대장 나월환)를 편입시켜 제5지대로 편제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모두 4개 지대의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황학수는 부대편제를 갖춘 후, 이를 기반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그 방법은 각 지대 단위로 징모분처의 임무를 부여하고, 활동지역을 나누어 초모활동을 하도록 한 것이다. 모두 6개의 징모분처를 조직하고, 북쪽으로는 내몽고지역인 포두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강서성 上饒에 이르기까지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초모해 온 한인청년들은 일정한 기간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여 광복군에 편입토록 하였다.
황학수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최전방에 나가 광복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국광복에 대한 희망과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과 신념을 대원들에게 불어 넣었다. 그는 광복군총사령부에서 발행하는 《광복》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국광복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왜구가 신라를 침략하였을 때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도운 것과 임진왜란 때 중국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한중연합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을 예로 들면서 한ㆍ중양국이 합작하면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하였다.
황학수는 미일전쟁의 발발을 예견한 군사전문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1941년 6월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군사력 및 그것이 태평양연안에 배치된 상황을 각종 자료와 지도를 통해 분석하고, 미일간에 충돌은 피할 수 없다며 미일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이었다.
1942년 황학수는 중경으로 철수하였다. 중국군사위원회가 서안에 있는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이전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황학수는 고급참모로 광복군에서 직책을 맡기도 하였지만, 주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중경에 있는 한인들의 생활을 담당하는 생계부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고, 한국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황학수는 일평생을 군인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군인으로, 임시정부의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서간도에서 서로군정서를 재건하고 참모장과 군무부장으로, 신민부의 참모부 위원장으로,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 부사령으로, 광복군 총사령 대리로 활동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서 뛰어난 지휘관이자 전략가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독립운동가로서 황학수가 갖고 있는 특별한 점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였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근현대사에서 황학수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