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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6사단 ‘초산 과속’의 역풍
평양 점령을 돕기 위해 서진(西進)할 필요가 없어지자 11월 15일 맥아더는 군단의 진격 방향을 바꿨다.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를 거쳐 자강도 무평리와 강계 등 서북 방향으로 올라가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러스, 116쪽) 하지만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8군 지휘하의 국군 2군단 6사단은 이미 초산에서 압록강에 도달했다. 6사단은 ‘초산 과속’으로 압록강 도달 이튿날부터 중공군의 매복 포위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는 2군단 전체의 참패로 이어졌다.
국군 6사단이 초산에 도달했을 때 전선을 보면 좌우 부대와의 보조없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매복해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에게 돌출된 6사단은 공격의 호재를 제공했다. 측후방에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6사단은 퇴로가 차단됐고 6사단을 도우려던 2군단 예하 7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군의 분리 포위 타격에 당한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달했던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보급이 두절되고 탄약이 떨어져 진퇴유곡이었다”며 사단장으로부터 휴대용 전투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 또는 소각하고 이동(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임부택, 319쪽).
6사단의 원래 주둔지는 탄광과 석회광이 있어 광산 개발이 활발했고 광물회사가 보유한 트럭이 많은 강원도 춘천과 영월 일대였다. 전쟁 후 이들 트럭을 징발해 기동력이 뛰어나 개전 초기 춘천 홍천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압록강 북진 작전에서는 홀로 앞서나갔던 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 구멍 뚫리고 퇴로 차단
크게보기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6·25 전쟁에 투입되는 중공군 병사들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원조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킨다’는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걸려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초산 과속’으로 괴멸된 6사단과 7사단, 즉 국군 2군단에 구멍이 뚫렸다. 워커와 알몬드간 지휘권 분할로 동서부 전선 사이에 80km 이상의 틈이 있는데다 두 전선 사이의 2군단 마져 무너지자 중공군은 유유히 내려와 11월 9일 원산을 점령한 뒤 미 3사단을 위로 쫓아 올렸다. 이때 멀리 함경북도까지 진격해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끊겼다. 이후 개마고원의 인공호수 장진호에서의 혹한 전투, 흥남 해상철수, 10만 피란민의 눈물 등이 이어졌다.(애플먼, 24쪽)
동부 전선에서 아군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장의 실상을 전하기는 커녕 사령관의 뜻에 부응해 북진에 가속명령을 내린 것이 11월 27일이었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 이후 잠적하듯 모습을 감췄지만 미 10군단 제1 해병사단이 함흥을 거쳐 장진호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게 전선이 늘어져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 주변 유담리 하갈우리 신흥리 등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중공군 9병단 3개군 소속 10개 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것도 알몬드가 진격 명령을 내린 27일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전투가 시작됐다.
장진호 전투 중공군(9병단 10개 사단)의 배치와 임무
중공군 | 배치 지역 | 담당 |
27군 4개 사단 | 장진호 동서안 | 제1해병 사단, 7사단 31연대 공격 |
20군 4개 사단 | 유담리 하갈우리 | 주보급로 차단 |
26군 2개 사단 | 고토리 | 후방 봉쇄 |
● 사전 ‘경고’ 무시한 댓가
중공군이 11월 27일 대공세를 시작하기 한 달 전인 10월 28일 국군 26연대(혜산진 부대)는 장진호〜흥남 사이 수동에서의 소규모 전투에서 중공군 16명을 생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124사단 박격포 부대 소속이라며 3개 사단이 북쪽에서 장진호를 향해 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즉각 도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사령부는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애플맨, 20쪽). 이미 대규모로 장진호 주변으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정보에 어두웠던 아군의 힘겨운 장진호 전투의 시련은 이때 시작됐다.
27일 공세 하루 전에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중공군 3명이 민가에 숨어 있다가 7연대 정찰대에 투항했다. 이들은 “20군의 60사단, 58사단, 59사단이 유담리에 6일간 주둔해 있었으며 2개 해병 연대가 하갈우리와 유담리 사이 덕동고개를 통과한 뒤 해병항공대의 근접지원을 피해 어두워진 후에 공격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가 대규모 작전계획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허위 정보를 전할 임무를 띠고 민가에 남겨진 미끼일 수도 있다며 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러스, 128쪽). 이 정보는 장진호 동쪽의 미 7사단 31연대에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장진호 동쪽의 참극’으로 이어졌다.(애플먼, 73쪽)
26일 밤 7연대 3대대 쪽에서도 민간인 한 명이 붙잡혀 심문을 했는데 “남서 방면으로 중공군 길 안내를 해주고 가는데, 행군 종대의 길이가 3시간 걸리는 길이였다. 말이 끄는 대포도 있었다”고 했다.
중공군 포로의 진술을 믿지 않은 것은 첫 운산전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포로는 전체 부대의 이동과 배치, 병력 수, 일부 작전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순순히 털어놨다. 백선엽 장군은 후에 국방부의 ‘전사(戰史)’를 보고 궁금증을 풀었다고 했다. 중공군 지도부가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정신교육과 함께 전투 작전의 세세한 정보도 공유해 위아래 없이 동료의식을 갖게 한 것이라고 했다.(백선엽 1권, 246쪽). 때문에 포로의 진술은 매우 값진 정보였지만 맥아더와 사령부는 줄곧 소홀히 취급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미 제1 해병사단 장진호 전투 일지
10월 26일 | 원산 상륙 하순 원산 인근 고저리, 북한군 잔당과 교전 |
11월 2〜3일 | 수동 연대봉, 중공군과 미 해병 첫 교전 |
11월 7일 | 스미스 사단장 알몬드에 부대 분산 배치 항의 |
11월 15일 | 7연대 하갈우리 집결 맥아더, 장진호 서쪽 진격 명령 |
11월 25일 | 7연대, 유담리 진입 |
11월 26일 | 5연대, 장진호 동쪽 미 7사단 31연대에 인계 |
11월 27일 | 중공군 포위 공격, 미 해병 1사단도 공격 개시 |
12월 1일 | 하갈우리 야전활주로 개통 |
12월 2일 | 덕동통로 확보 |
12월 7일 | 고토리 도착 |
12월 9일 | 수문교 건설, 황초령 통과 |
12월 11일 | 흥남 도착 |
크게보기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장진호 안내 전시관 입구에 ‘빙설 장진호’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진호 전투가 혹한의 전투였음을 전시관만 봐도 알 수 있다.
● 덕동통로, ‘폭스 힐 중대의 기적’
유담리에서 27일부터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은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할 때 퇴로는 덕동통로 한 곳 뿐이었다. 이곳 돌파 임무를 맡은 7연대 F중대(폭스힐 중대)는 5일간 덕동통로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중공군 3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며 지켰다. 폭스 중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을 때 중대원 247명 중 생존자는 6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증 동상에 걸려있었다. 바버 힐 중대장도 덕동통로를 확보한 뒤 부대가 하갈우리로 이동할 때 부상을 입었지만 차에 타지 않고 도보로 이동하다 부대와 떨어진 뒤 실종됐다.
유담리의 주력 부대가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의 부대와 합류할 수 있는 지는 사단의 존망과도 직결된 것이었고, 이는 덕동통로라는 혈로를 지키느냐에 달려 있었다.(러스, 320쪽) 이런 상황에서 나온 ‘폭스힐 중대의 기적’같은 전과는 ①혹한 속에서도 진지 배치 직후 참호를 구축하는 기본 수칙을 지킨 점 ②하갈우리 포병 부대의 지원 사격 ③덕동통로를 우회해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 주효 ④C-47 수송기를 통한 탄약 등 공중 투하 ⑤무엇보다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부대원의 사기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미 해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에서 밤에는 피리, 꽹과리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령같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갈우리를 포위해 밀집 포위한 중공군의 숫자가 많아 ‘들판 전체가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러스, 296쪽)
후퇴하는 부대가 모두 하갈우리에서 흥남 방면으로 18km 가량 떨어진 고토리에 집결한 것이 12월 7일 밤이었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18km를 이동하는데 40시간이 걸렸다.
크게보기장진호에서 흥남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황초령의 수문교를 미군들이 복구하고 있다. 큰 사진 중간 협곡에 파괴된 부분이 보인다. 출처 영문 위키
● 황초령 수문교, 공중투하로 복구 후 계곡 통과
이튿날인 8일 황초령을 넘는 첫 관문은 450m 깊이의 계곡을 연결하는 수문교 중 중공군이 폭파한 약 7m 구간을 복구해 건너는 것이었다. 다리를 복구하지 못하면 차량과 전차 야포 등 장비를 버려야했다. 7일부터 극동 공군 전투공수사령부가 C-119 수송기 8대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임시 교량 경간목을 공중 투하했다. 1t이 넘는 경간목 4개 중 두 개는 중공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중공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등 우여곡절 속에 9일 오후 사단 공병대대가 수문교 복구를 마쳤다. 대규모 교량 설비를 공중 투하해 계곡의 다리를 복구하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야간을 이용해 병력과 장비 뿐 아니라 다수의 피난민도 다리를 건너 11일 흥남에 도착했다. 유담리에서 11월 27일 중공군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한 뒤 128km를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인 뒤 약 2주 만이다. 미군은 후위 부대가 모두 수문교를 건넌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폭파해 중공군의 추격을 막았다.
중국이 제작한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장진호 수문교’(2022)의 포스터.
한 장교는 북진 명령을 받고 장진호 부근으로 전진해 가던 상황에 대해 “중공군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런 적의 진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지칠 대로 지쳤다. 도쿄 본부에서 오는 명령은 하나같이 말도 안됐다.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핼버스탬, 666쪽)
● 살인적인 추위, ‘세계 2대 동계 전투’
‘땅이 35cm까지 얼어 참호를 팔 수 없어 전투가 심할 때는 동료의 언 시신을 쌓아 방벽으로 이용하는 일까지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261쪽). 당시의 참혹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북한군이나 중공군보다 더 위협적인 건 한반도의 험한 산악과 악천후였다. 살을 에는 겨울 날씨가 미군에게는 최대의 적이었다.”(핼버스탬, 12쪽). 장진호 전투는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맞먹는 세계 2대 동계전투로 불린다.
전투 당시의 기온은 영하 37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다. 습도가 높고 강풍이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떨어졌다. 양측이 인명피해를 집계할 때 사망, 실종과 함께 ‘동사자’를 분류해 파악했다. 양측 모두 자다가 동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투 중 죽은 척하고 있으면 생사 확인도 않고 옷을 벗겨가 얼어죽었다.
크게보기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대원들이 행군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눈을 녹여 식수로 쓰고, 총기나 대포의 철판에 맨손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깡통으로 지급되는 전투 식량이 얼어 옥수수나 콩을 떼어 입에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군의관은 “수혈용 혈액과 진통제의 모르핀도 얼어, 위생병은 모르핀이 얼지 않도록 입 속에 넣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혈액은 얼어 수혈을 하지 못해 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봐야 했다”고 증언했다. 히긴스는 “동상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 동상은 많은 해병의 손가락, 발가락, 발, 다리가 절단되는 것을 의미했다”고 했다.(히긴스, 251쪽)
자동화기들은 정상보다 매우 느리게 작동했고 수류탄은 잘 터지지도 않았다. 박격포탄이나 야포 포탄에 부착하는 장약의 추진력이 약해져 포탄의 비거리가 짧아져서 아군 병력을 위협하기도 했다. 연료가 얼어 고체 덩어리가 되고 폭약을 터뜨려 구멍을 뚫은 뒤에야 참호를 파기도 했다.(러스, 294쪽)
중공군 장교도 “영하 20도는 보통이고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계속됐는데 일부는 솜옷이나 털모자를 걸쳤으나 대부분 방한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해 전투력 손실이 엄청났다”고 털어놨다.(훙쉐즈, 173쪽).
‘상감령 전투’의 상감령이 어디야?
크게보기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된 ‘상감령 전역(전투)’ 안내 표지판.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은 중공군의 참전부터 1958년 북한에서 철수 할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두 전투에 대해서는 별도의 코너를 만들어 소개한다. 상감령 전투와 장진호 전투다.
2020년 기념관을 새로 단장하면서 기념관 외부에 중국이 전쟁 시기를 구분하는 ‘1차〜5차의 전역(戰役)’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 여기에는 ‘상감령 전역’만을 따로 소개했다. 이전 기념관에서는 내부에 전쟁 당시 철원의 지형까지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상감령 전투 소개에만 하나의 전시실을 할애하다시피 했다. ‘상감령 전역 주요 전투 일람표’ ‘상감령 주요 전투 지역’ 지도 등도 있었다.
크게보기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상감령 전투 소개 코너.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이 이처럼 강조하는 상감령(上甘岭)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 국군과 유엔군이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해발 1062m) 부근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중공군 15군과 벌인 전투다. 중국은 가장 대표적인 승전이라고 선전하지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98고지와 파이크스봉, 여배우의 이름을 딴 제인러셀 고지 등을 합쳐 삼각고지라 불렀다. 삼각고지 동쪽에 저격능선(538m)이 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만 아는 명칭인 셈이다.
크게보기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혈전 상감령’ 안내문. 양측 모두 세계 전쟁 사상 유례없이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며 중공군은 땅굴 작전으로 43일 밤낮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1952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유엔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이른바 ‘쇼다운(Show Down)’ 작전을 벌인다. 유엔군의 작전목표는 오성산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삼각고지(미 제7사단)와 저격능선(국군 제2사단)이었다.
하루 최대 30만발의 포탄과 500여개 폭탄이 떨어져 두 고지의 높이가 1~2m 낮아질 정도로 치열했다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땅굴인 ‘지하 만리장성’으로 버텼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는데 상감령에도 견고한 땅굴이 구축되어 있었다. 훙쉐즈는 “상감령 전투는 땅굴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실제로 확인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413쪽)
영화 ‘상감령’ 포스터
상감령 전투는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도 전해져 중국 위문단이 전선을 찾아가 공연을 하고 위문품과 위문편지도 보내는 등 ‘상감령 열풍’이 불었다. 중국에는 ‘레이펑(雷鋒) 정신’처럼 ‘상감령 정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이다.
상감령 전투에서 저격능선 전투에 참가한 2사단 등 국군 전사자는 4830명, 중공군 전사자는 1만4867명으로 중공군이 3배 이상이다. 하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중국에서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참고문헌 |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 임부택 지음, 『낙동강에서 초산까지』, 그루터기, 1996.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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