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단독]韓, 기술 탈취범 80%가 집유… 美선 ‘경제스파이’ 간주 30년형도
박현익 기자
입력 2023-06-08 03:00업데이트 2023-06-08 08:34
[기술 유출 빨간불] ‘3나노 기밀’ 美유출 시도… 집행유예 솜방망이 처벌 8년간 유출범죄 징역형 365명 중 실형 20%뿐, 80%가 집유 풀려나 “국가손실 큰데도 양형 낮아” 지적 |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일하던 전 직원 최모 씨는 지난해 1월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로 이직을 준비하던 중 회사 기밀을 밖으로 빼돌린 혐의로 기소됐다. 그가 사진을 찍어 가져간 자료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두 기업만 대량생산에 성공한 최첨단 3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 공정 관련 내용이다.
최 씨는 인텔 이직에 한 번 실패한 뒤 다시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삼성전자의 또 다른 전 직원 김모 씨는 국내 반도체 지식재산권(IP) 개발 전문 기업으로 이직을 결심하고 최신 통신 표준 기술과 관련한 파일 총 122개를 열람·촬영해 유출한 혐의를 받았다.
각각 올해 3월과 4월 열린 1심 재판에서 최 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김 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분야를 둘러싼 각국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 유출 범죄 또한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미국, 중국 기업들의 기술 확보 전쟁이 치열한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은 지나치게 가벼워 제2, 제3의 범죄를 막을 안전장치가 헐거워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7일 대검찰청의 ‘기술 유출범죄 양형기준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년간 기술 유출 관련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365명이었다. 이 중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람은 292명(80%)이었고, 실형을 산 사람은 73명(20%)뿐이었다. 2015년 1월부터 올해 1월까지 기술 유출 관련 범죄 1심 선고 판결문 334건을 분석한 결과다.
최 씨와 김 씨 모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은 ‘초범’이고 ‘실제 피해가 없었다’는 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직과 관련된 기술 유출은 대체로 초범일 수밖에 없고 중간에 적발되므로 피해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산업 스파이’에 중형을 내리는데 우리나라가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할 경우 기업뿐 아니라 막대한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솜방망이 처벌’ 정비 시급 기술 유출 혐의 36%가 무죄 받아 징역형 받아도 평균 12개월 그쳐 美, 벌금 최대 65억원 엄정 대응 |
“반도체 업계는 전쟁터입니다. 작은 정보 하나만 경쟁사로 빠져나가도 치명적이에요. 그런데 핵심 자료 수백 개를 유출하고도 실형을 살지 않으니 또 다른 범죄 시도가 계속된다고 봅니다.”(국내 반도체 기업 임원)
국가 안보와 경제를 좌우하는 첨단기술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국내 기업들은 ‘기술 유출’ 위협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 탈취라는 중대 범죄에 대해 한국의 법과 제도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무죄 비율 36%, 유죄라도 벌금형이 26%
7일 대검찰청의 ‘기술 유출 범죄 양형기준에 관한 연구’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년간 기술 유출 관련 범죄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774명이다. 이 중 278명(35.9%)이 무죄를 받았다. 일반 형사 사건의 평균 무죄 비율이 3%인 것과 비교해 훨씬 높다는 평가다. 무죄를 선고한 주요 판결들을 보면 경쟁사에 건네기 위해 반출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거나 법에서 정한 첨단기술이 아닌 정보를 유출했기 때문에 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됐다.
설령 유죄가 인정되더라도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약하다는 주장도 있다. 8년간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496명이었다. 이 중 벌금형만 받은 이가 131명(26.4%), 평균 벌금 액수는 1233만 원이었다. 징역형 365명(일부 벌금형과 함께 선고) 중에서는 80%가 집행유예(292명)로 풀려났고, 나머지 20%만 실형(73명)을 살았다. 징역형의 평균 형량은 실형 12개월, 집행유예는 25개월로 집계됐다.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한국은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법원이 법정형 대비 지나치게 낮게 선고하고 있다”며 “양형기준 자체가 원체 낮은 데다 감경 또는 가중 사유 등을 고려하는 요소들도 현실에 뒤처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 제도 바뀌는데 뒤처지는 법원
국내외 기술 유출과 관련한 처벌 규정을 다룬 산업기술보호법은 2019년 8월 개정됐다. 국가핵심기술을 해외에 유출하려다 적발될 경우 3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한다는 법 조항이 신설됐다. 또 일반 산업기술 유출의 법정형도 국내로 유출할 때 기존 7년 이하에서 10년 이하로 강화(해외 유출은 15년 이하로 유지)됐다. 지난해 제정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에는 징역 5년 이상 20년 이하 조항이 포함됐다.
하지만 기술 유출과 관련한 양형은 2017년 5월 개정된 이후 제자리다. 국외 유출은 기본 징역 1년∼3년 6개월이고 가중처벌을 해도 최대 6년이다. 국내 유출은 기본이 징역 8개월∼2년이고, 가중 시 최대 4년이다. 산업기술보호법에 명시된 법정 최고형(국외 15년, 국내 1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실제 유죄 선고를 받더라도 집행유예 비중이 큰 것은 이처럼 양형 수위가 낮은 데다 초범이라는 점을 감경 사유로 반영하고 있어서다.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기술 유출 범죄 특성상 초범 비중이 많고 한번 발생했을 때 기업, 국가에 미치는 손실이 어마어마하게 큰데 이를 처벌의 감경 사유로 두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 미국 “국가 안보와 직결” 주요국 엄정 대응
미국은 이른바 ‘경제스파이법’을 통해 국가전략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다 적발되면 간첩죄 수준으로 가중처벌하고 있다. 법정 최고형이 징역 15년이나 피해액에 따라 30년형 이상까지도 가능하다. 벌금은 최대 500만 달러(약 65억 원)다. 영국은 기술 유출과 관련해 죄질, 피해 규모에 따라 최대 7년의 양형기준을 제시하고 있고, 가중처벌하면 법정형인 징역 10년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국내에선 대검찰청, 특허청, 산업통상자원부 등 기술안보 관련 부처들이 4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말 양형위 전문위원들도 양형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양형위는 12일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재조정할지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 유출 빨간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