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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1920년∼1930년 더욱 빠르고 더욱 안전하게
자동차 업체들은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며 더욱 빠르고 안전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속도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장치와 보호장비가 개발된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생산한 자동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이기 위해 각종 자동차 경주에서 경쟁을 벌였는데, 세계를 열강하게 만든 이 경주들을 통해 자동차 산업과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1920년 독일 다임러(Daimler)社, 수퍼차저(Supercharger) 채택 : 엔진에 공기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보면 크게 자연흡기(N/A)엔진과 강제흡기(Charged)엔진으로 나뉘어진다. 강제흡기 방식에서도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Super Chager이고, 다른 하나는 Turbo Charger 방식이다. Super Charger는 엔진의 구동력을 이용해서 회전력을 얻고 그 회전력을 통해 엔진으로 유입되는 공기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연료량 보정의 수반과 출력상승으로 이어진다.
1921년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 최초로 4륜 유압 브레이크를 적용한 듀센버그(Duesenberg) 모델A 발표 : 1930년대에는 누군가 듀센버그 차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부를 누릭 있음을 의미했다. 듀센버그는 당시 유럽의 메르세데스 벤츠, 이스파노 수이자, 롤스로이스 등과 견줄 만한 미국의 최고급 럭셔리카였다.
듀센버그의 첫 차인 모델 A(Model A)는 1921년 프랑스 그랑프리와 1924, 1925년 인디 500경주 우승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고, 1920년대 말 회사는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엔지니어인 프레드릭 듀센버그(Frederick Duesenberg)와 사업가인 E.L. 코드(Errett Lobban Cord)가 의기투합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모델 J인데, 1929년 첫 선을 보이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E.L. 코드의 표현을 빌면 “세상에서 네 바퀴를 가진 것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 트윈 오버헤드 캠샤프트, 32밸브의 6.8리터 직렬 8기통 엔진에서 뿜어 나오는 강력한 힘은 경주 경험과 프레드릭 듀센버그의 철저한 품질 완전주의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다른 차들에 비해 100마력이나 더 높은 265마력의 최대출력과 205km/h의 최고속도를 기록했다. 4륜 유압 브레이크에 앞, 뒤 리프 스프링을 갖춘 새시는 너무도 견고하여 새시 무게만 2통에 달했다.
1922년 유럽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오스틴 세븐을 생산시작 : 1920년대 영국의 차들은 한결같이 덩치가 크고 운전이 힘든데다가 값이 비싸서 돈 있는 사람이 아니면 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허버트 오스틴은 값싼 소형차 "오스틴 7"을 1921년에 내놓아 유럽의 자동차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차가 바로 미국의 포드 모델T와 필적 할 수 있는 영국의 포드 T형차였다. 오스턴7은 두 명의 어른과 세명의 아이들이 편히 탈 수 있는 넓은 실내와 획기적인 연료 절감을 할 수 있는 소형차였다. 엔진은 스태니 에지(Staney Edge)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차는 1939년까지 생산되어 전 세계로부터 인기를 모았고, 단번에 영국 서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여 당시 영국 최대의 베스트셀러카가 되었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위해 태어난 오스틴7은 당시 엔진 출력으로 부과되던 자동차 세금제도에 따라 10마력의 힘에 해당하는 7파운드의 세금을 내 세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작고 튼튼하며 값싼 이 차는 A모양의 섀시와 아주 작은 747cc 4기통 엔진을 얹었다. 처음에 2인승이 나왔고 곧 '박스'라고 부르는 4인승 세단도 나왔다. 세븐은 튼튼하고 싼값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고 싶어했다. 또한 이차는 프랑스에서 "심카 로랑가르(Rosengart)", 독일에서는 "BHW 딕시(Dixi)", 미국에서는 "벤텀", 일본에서는 "닷선(Datsun)"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그야말로 월드카가 되었다.
1922년 프랑스 시트로엥(Citroen)사, 855cc, 10마력의 라이트카의 5CV 발표, 소형대중차 붐을 일으킴 : 시트로앵은 푸조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이다. 시트로앵은 1919년에 설립된 회사로, 창립자 앙드레 시트로앵(Andre Citroen)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는 타고난 매뉴팩처의 기질을 타고난 이었다. 산업사회를 제대로 이해해 앙드레 시트로앵은 당시 헨리 포드의 컨베이너 벨트 대량 생산방식을 도입해 하루에 5만 발의 포탄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렇게 성장한 시트로앵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포탄의 대량생산으로 때돈을 벌며, 자동차로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1923년에는 Type C "5CV"를 선보이며 포탄판매이후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시트로앵은 5CV의 성공은 유럽 자동차 시장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유럽의 부유층들은 자동차의 기동성과 편리성을 알게 되면서 마차를 버리기 시작해, 어쩌면 초대 모터 제네레이션을 이끌었다. 시트로앵 5CV의 인기는 당시 다른 자동차 메이커가 복제품을 만들어 팔 정도에 이르렀다. 오펠은 5CV을 그대로 배껴서 색깔만 바꿔 팔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5CV는 노란색으로 판매되어 시트롱(귤)이란 별명을 얻었고, 오펠이 만들었던 카피 모델은 초록색으로 라우프프로시(청개구리)라고 불렸다. 시트로앵은 이후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하며 성장했다. 1948년에는 2CV, 1955년 파리모터쇼에서 파격적인 디자인을 한 DS를 선보이며 선전했다. 당시 선보였던 DS는 20세기부터 지금으로 이어지는 시트로앵 특유 보디 디자인의 모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2년 이탈리아 빈센찌오 란치아(Vindenzo Lancia) 란치아사, 골조(Frame)을 쓰지 않는 모노코크 구조(Monocoque Body) 무개차(open wagon, 無蓋車) 람다(Lambda) 발표 : 모노코크(Monocoque) : 모노코크는 바디와 프레임이 하나로 되어 있는 차량 구조로서, 일체구조, 단체구조, 유니트컨스트럭션, 유니타이즈드바디, 셀프서포팅바디, 프레임리스바디 등으로 부른다. 별도의 프레임 없이 바디 자체가 프레임 역할을 한다. 모노코크는 바디 자체를 견고하고 가벼운 상자형으로 만들어 그 위에 엔진이나 서스펜션, 변속기 등을 조립한다.
〈장점〉
1. 프레임 차량에 비해 중량이 가벼워 연비 효율이 좋다.
2. 실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다.
3. 원가가 저렴하다.(부품수 감소, 중량절감)
4. 제조공정의 간소화로 자동화가 가능하고 따라서 생산성이 높다.
〈단점〉
1. 프레임 차량에 비해 강성이 약하다.(프레임 차량에 비해 사고 발생시 충격에 약해 승객안전에 불리하다. 그러나 충돌 시에 앞뒷쪽의 크럼블 존이 충격을 잘 흡수해주게 되면서 운전자의 공간을 잘 확보해 주기 때문에 안정성이 프레임 차량과 거의 동일해지고 있다.)
2. 플랫폼 변경시 초기비용이 많이 든다.(뼈대와 차체가 일체식이기 때문에 다른 차량을 제작시 다른 모노코크를 설계해야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페이스리프트(외관만 살짝 수정하는 것)를 한다.)
3. 차체가 받는 힘을 고르게 분산하여 고른 강성을 유지하기 위한 설계기술이 필요하다.
4. 프레임 차량에 비해 차량의 노후화가 빠르게 진행된다.(장력이 약한 철판으로 바디를 만든 차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바디가 휘거나 비틀어질 수도 있다.)
1923년 프랑스에서 최초의 “르망 24시간”경주 개최
1924년 독일의 초소형차 몰모빌 생산. 독일의 MAN에서 디젤트럭 생산
1925년 윌터 크라이슬러(Walter P. Chrysler, 1875년∼1946년), 크라이슬러社 설립 :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중 하나인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으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 벤츠와의 합병으로 또 하나의 거대 자동차 기업인 다임러 크라이슬러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러한 크라이슬러는 1875년 4월 2일 미국 캔사즈주 시골에서 태어난 월터 크라이슬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월터 크라이슬러는 18세 되던 해 철도수리공의 견습공으로 취직되면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기계제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수리하던 그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어 뛰어난 손재주로 기계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아메리카 기관차 회사의 공장장이 되었다.
이후 뷰익(Buick)자동차 회사인 관리자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강철로 된 자동차 보디를 개발하고, 자동차 보디 전문 공급업체를 많이 사들이라고 제안하는 등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우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1916년 뷰익의 사장겸 제너럴 모터스(GM)의 부사장이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GM 전 공장의 생산관리를 맡기도 했는데, 뷰익을 제너럴 모터스(GM)에서 가장 부가가치 높은 메이커로 만들었다.
이러한 성공을 거두었던 월터 크라이슬러는 기업의 경영자이던 윌리엄 듀런트와 불화가 심해지자 1919년 회사를 떠나게 되었는데,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후 사정이 좋지 않았던 오버랜드 맥스웰 컴퍼니(Maxwell Company) 자동차 회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하여 또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월터 크라이슬러는 ‘기업 의사(Company Doctor)'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오너로써 본격적인 경영을 하게된 크라이슬러는 자신만의 차를 만들고자 하였고 결국 1924년 뉴욕모터쇼를 통해 ‘크라이슬러 6(Chrysler Six)'를 출시하였다. 이 차량은 3,300cc의 6기통 엔진을 적용하였고 비교적 조용한 정숙성과 동시에 당시 다른 차량에서 볼 수 없었던 에어크리너, 교환할 수 있는 오일 필트, 4바퀴 유압브레이크 등이 많이 이들로부터 극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고급부품을 많이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싼 것이 장점이었던 클라이슬러 6은 양산된 첫 해 32,000대나 팔리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25년 자신이 인수한 맥스웰을 자신으 이름인 ‘크라이슬러’로 바꾸게 된 월터 크라이슬러는 사업의 확정을 위해 더 많은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학 되었다. 이러한 성공으로 계속되자 사업을 보다 확장하기 위해 1928년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 플리머스, 데소토 등의 인숭 성공해 그 회사의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되어 미국내 제3의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었다.
계속된 성공 가도를 달리던 크라이슬러는 1934년 최악의 실패작으로 불리는 ‘에어 플로우(Airflow)'로 인해 경영이 악화되었지만 다음에 출시한 최신 모델로 인해 크라이슬러는 파산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듯 미국 자동차 산업에 큰 이바지를 하고 성공을 누렸던 월터 크라이슬러는 1940년 8월 18일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월터가 죽음을 맞이한 후 계속적인 합병과 인수로 그 규모를 더욱 키우게 되었으며, 1960년 머슬 카(Muscle Car)의 붐이 일어나는 바람에 생산량과 판매가 급증하여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융회사 부동산 회사를 설립하는 등 사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오일 쇼크로 인한 경영악화로 1979년 프랑스 푸조를 매각하였고, 여러 차례 부도위기를 겪었으나 리 A. 아이아코카(Lee A. Iacocca)의 경영하에 1983년 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7년부터는 AMC의 인수로 지프 디비전을 더해 SUV와 미니밴 등 RV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하였으나, 1990년대 초 새차 개발을 소홀히 하고 항공기 메이케 인수 등 전과 같은 사업 확장으로 시장점유율과 매출이 큰 폭으로 하락하여 내수시장에서 신흥 일본 메이커인 혼다에게까지 밀리게 되어 점차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의 벤츠와 합병하였고 이후 새롭게 출범함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크라이슬러를 세운 크라이슬러의 삶은 가장 미국적이었고 미국의 자본주의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925년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社, 4륜에 유효한 유압(油壓)브레이크 채택 : 최고급 프레스티지카의 세계에서 듀센버그는 모델J와 SJ로 1930년대 자동차 황금시대에 큰 빛을 더했다. 프레드와 오거스트 듀센버그형제는 경주차 엔진으로 명성을 얻은뒤 1920년 1호차를 만들었다. 듀센버그는 17년간 1천대가 조금넘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형 호화차의 황금시대인 193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빛났던 프레스티지카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듀센버그를 꼽는다. 1929년 데뷔한 듀센버그 J, 1932년에 수퍼차저를 더하면서 등장한 듀센버그SJ는 30년대 미국 프레스티지카의 챔피언이다.
1930년대 헐리우드 스타들에게는 두가지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1927년 시작된 오스카상과 화려한 듀센버그였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클라크 게이블, 게리쿠퍼, 그레타 가르보, 메이 웨스트 등이 모두 듀센버그 오너였다. 영화배우만이 아니였다. 이태리와 스페인왕 유고슬라비아 여왕, 루마니아 왕자등 여러나라의 왕과 왕족이 탔고, 신문왕 윌리엄 허스트, 사업가 하워드 휴즈도 듀센버그를 사랑했다.
명성과는 달리 듀센버그는 17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차를 만들었고 차종과 생산대수도 많지 않다. 프랑스 그랑프리 우승, 인디500 연승에 빛나는 경주차를 제외하면 1920년 선보인 A형과 1929년의 J, 1932년의 SJ 세가지이다. 그중 SJ는 J에 수퍼차저를 더한 모델이다. 대수도 A형 600대, J와SJ가 470대로 모두 1천대를 조금 넘는다.
듀센버그는 어린 나이로 1880년대 독일에서 미국 아이오와로 농업 이민온 프레드 듀센버그(Fred Duesenber, 1874∼1932)와 오거스트(August Duesenber, 1876∼1955)가 세우고 키운 메이커였다. 일찍이 기술을 익힌 듀센버그 형제는 19세기말 경기용 자전거 제작과 프레드의 잇따른 자전거경기 우승으로 유명해 졌다. 20세기가 되자 프레드 듀센버그는 위스콘신주의 램블러자동차에서 2기통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차가 힐클라임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을 계기로 프레드는 경주차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20년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1913년에는 뉴저지주에 공장을 짓고 경주차 엔진과 선박엔진을 개발했다. 1차대전중에는 항공기 엔진도 만들었다. 속도기록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은 듀센버그 형제는 경주차 엔진과 차체 제작에서 얻은 기술을 토대로 1920년 인디아나주 인디아나폴리스에서 듀센버그 자동차를 발족시키고 1호차 A형을 선보였다. 듀센버그 A형은 직렬 8기통 4천264cc 88마력 엔진을 얹었다. 미국차로는 처음으로 오버헤드 캠샤프트(OHC)를 썼고, 유압 브레이크등 첨단기술을 이용했다. 최고 시속은 136km. 당시로는 상당한 스피드였다. 이 차는 1926년까지 600대가 만들어 졌다.
경주차엔진에 자신이 있는 듀센버그형제는 1921년 프랑스 그랑프리에 출전해 우승했다. 미국차로는 첫 영예였다. 뒤이어 1924,25,27년 세 번에 걸쳐 인디500 레이스를 제패해 명성을 다졌다. 그러나 프레드와 오거스트는 기술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회사경영은 미숙했다. 20년대 중반 회사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이때 손을 뻗은 이가 그 무렵 미국 비즈니스세계에 해성처럼 등장한 오번자동차의 사장 에레트 코드였다. 코드는 듀센버그형제의 뛰어난 기술과 듀센버그의 명성을 기초로 세계제일의 프레스티지카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26년 듀센버그를 합병했다. 코드는 듀센버그형제가 마음대로 새차를 개발할 수 있로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년뒤인 1928년 열린 뉴욕 오토살롱에서 베일을 벗은 호화차가 이들의 꿈이 담긴 듀센버그J다. 직렬8기통 엔진은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DOHC) 4밸브였다. DOHC는 그 무렵 경주차와 유럽의 일부 소량생산 스포츠카에 쓰던 메카니즘이었다. 화려한 스타일링과 내장을 갖춘 듀센버그J는 6,882cc 265마력 엔진으로 최고시속 186km를 냈다. 265마력은 16기통 엔진을 쓴 캐딜락 V16의 175마력, 이스파노 스이자의 220마력에 훨씬 앞서는 출력이었다. 듀센버그J는 1932년 수퍼차저를 더한 SJ로 발전했다. 최고출력은 320마력, 최고시속은 205km로 높아졌다.
1929년 경제공항이 시작되었으나 기본값 8천500달러에 코치빌더의 손을 거치면 2만달러 가까이 되는 듀센버그J는 큰 인기를 누렸다. 경제공항속에서도 왕족과 부호, 영화배우등은 좋은차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고, 벼락부자들은 듀센버그로 재력을 과시했다. 듀센버그 J와 SJ는 이름난 코치빌더들이 차체와 내장을 꾸미는 것이 원칙이었다. 머피, 르바론, 롤스턴등이 한 대 한 대 다르게 듀센버그를 꾸몄다. 1937년까지 모두 470대(그중 SJ는 36대)가 생산되었다. 뒤에 나온 SJ는 엔진룸에서 배기 매니폴드 넷을 차체 밖으로 끌어낸 디자인이었다. '최고'를 원하는 이들은 수퍼차저를 추가했고, 일부 오너는 치장으로 4개의 배기 매니폴드를 달아 남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인기차 듀센버그SJ에는 1937년 휠베이스가 짧은 SSJ 2대가 추가 되었다. 바로 클라크 게이블과 게리 쿠퍼의 차다. 미국에서 듀센버그의 인기는 롤즈로이스를 누르는 기세였다. 더 비싼차는 부가티 하나밖에 없었다. 세계 호화차 시장의 정상에 섰으나 듀센버그와 듀센버그 형제는 멀지 않아 비운을 맞이 하게 된다. 형 프레드는 SJ가 나온 얼마뒤, 머피가 마무리한 SJ 컨버터블을 시운전하다 흙탕길에서 추돌사고를 냈다. 교통사고의 충격에서는 회복 되었으나 2주일뒤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듀센버그의 기술책임자 자리는 아우 오거스트가 이었다.
듀센버그는 경제공항을 견뎌냈으나 30년대의 불경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주원인은 모기업인 코드제국의 몰락에 있었다. 듀센버그는 1926년 에레트 코드의 도움으로 경영난을 넘기고 그의 지원으로 J와 SJ를 내놓아 명성을 얻었다. 코드는 자기성을 이름으로 쓴 코드자동차까지 창립했으나 불경기에 시달리면서 자동차에 대한 정열을 잃어갔다. 코드그룹이 1937년 도산함으로써 듀센버그도 차 만들기를 그쳤다. 2년뒤 유럽에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난 2년 뒤인 1947년, 오거스트 듀센버그는 듀센버그의 명성을 되살리려 애썼으나 헛수고로 끝난다. 세상이 크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오거스트는 79세이던 1955년 생을 마쳤다. 60년대 2세들이 또 다시 듀센버그 재건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0년대에는 레프리카 회사가 SSJ 로드스터 10여대를 만들어 화제를 뿌렸다.
미국 호화차의 대명사인 듀센버그는 17년의 짧은 역사로 막을 내렸다. 듀센버그형제는 뛰어난 엔진 설계자, 경주차와 고성능차 제작자였으나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없었다. 그들이 만든 470대의 J와 SJS는 현재 360대가 남아 듀센버그 신화의 산 증인이 되고 있다. 그 신화는 같은 계열인 오번, 코드와 묶여 미시간주 오번에 있는 오번 코드 듀센버그자동차박물관으로 되살아 났다. 세 메이커는 ACD로 약칭되며 해마다 9월 노동절 연휴에 'ACD 페스티벌'을 열어 듀센버그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 주고 있다.
1925년 미국 스터츠(Stutz)社, 겹유리에 의한 안전 윈도우 스크린 채택 : 1911년 탄생한 미국의 자동차 회사 스터츠(1911년∼1928년)의 첫번째 자동차인 베어캣은 단 5주만에 제작되어 바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11위를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6400cc의 큰배기량을 뿜어대는 베어캣은 스터츠 고유의 트랜스 액슬과 3단변속기, 원형 방풍유리등을 장착하고 있었다. 특히 이 차 고유의 모습 덕분에 당시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스포츠카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회사가 20여년 만에 문을 닫는 바람에 큰 성장을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1925년 미국 시보레(Chevrolet)사, 승차감 향상을 위하여 저압(低壓)타이어 채택
1926년 다임러(Daimler)와 벤츠(Benz)가 합병하여 다임러-벤츠(Daimler-Benz AG)社 설립 : 1883년에 K.벤츠가 설립한 벤츠와 1890년 G.다임러가 설립한 다임러가 1926년에 합병하여 설립하였다. 1928년 당시 유명하였던 고성능차 메르세데스(Mercedes)-ssk를 생산하고, 1936년 세계 최초의 디젤승용차 메르세데스 260D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항공기 엔진과 전차를 생산하였고, 1950년대부터 1965년까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업체를 흡수합병하거나 매각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1969년 승용차 부문에 진출, 유럽 최대의 트럭⋅버스 제조업체가 되고, 1970∼1980년대는 승용차 생산거점을 미국⋅남미⋅남아프리카 등지로 확대하였다. 1982년 이후 소형차 메르세데스 190의 판매를 시작, 종래의 중대형 승용차에서 소형으로 전환하는 등 변화하고 있다. 1998년 5월 미국 크라이슬러를 인수하기로 합의하였으며, 11월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병하여 다임러크라이슬러(DaimlerChrysler)가 되었고 2007년 크라이슬러를 매각한 후 다임러 AG가 되었다.
1926년 미국 캐딜락(Cadillac) 자동차에 최초로 안전유리(Shatter- resistant glass)가 장착됨
1927년 독일 오펠(Opel)社 로켓 자동차 "Rak Ⅱ" 발명, 시속 200km 기록 : 1862년 1월 21일. 독일 중서부 헤센(Hessen)주의 러셀하임(Russelsheim)에 아담 오펠(Adam Opel, 1838년∼1895년)이 재봉 기계 제조 회사를 설립하였다. 초기 오펠은 외양간엣 재붕 기계를 생산하였는데 완벽한 봉제 기계를 생산하던 오펠은 당시 크게 성공하였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자 1888년에는 외양간이었던 작업 공간에서 러셀하임의 넓은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성공에 힘입어 아담 오펠은 1886년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이라 알려져 있는 high wheel 자전거를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펠의 두 아들은 각종 자전거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함으로써 오펠이 제조한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오펠의 페니 파딩(Penny fathings)자전거의 생산은 곧 재봉 기계의 생산을 초과하기 시작했고 오펠이 사망한 1895년에 오펠사는 재봉 기계와 페니 파딩(Penny Farthings)자전거 시장에서 가장 앞선 선두주자였었다. 하지만 유럽으 자전거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오펠에서 생산한 자전거으 판매량도 줄기 시작했다.
아담 오펠은 세상을 뜨기 전에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던 내연기관 자동차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오펠이 세상을 뜨자 그의 뜻을 이어받아 아담 오펠의 다섯 아들은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동차 산업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리하여 1898년 오펠사는 작센 안할트(Saxony Anhalt)주에서 자물쇠 제조를 하고 있으면서 여러 해 동안 자동차를 만들었던 프리드리히 루츠만(Friedrich Lutzmann)과 자동차 제조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1899년 오펠사와 루추만은 오펠 자동차의 시초이자 오펠 1호차인 ‘오펠 특허차, 루츠만 시스템’(Opel Patent Motor Car, System Lutzmann)이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완전히 망했고 자동차 제조 계약은 2년후인 1921년에 해지되고 말았다. 오펠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이지만 유럽에서는 승용차와 미니버스, 소형 밴 등을 생산하는 인지도가 높은 제조사이다. 현제 오펠은 GM의 자회사지만 독립적인 경영을 하며 독자적인 차종을 개발하고 있다.
1927년 미국 포드(Ford)社 모델 T 생산을 중단하고 모델 A 발표 : 포드 모델 A는 모델 T의 후속 차종으로 4년 동안 450만 대가 팔린 차로 1928년 발표 당시 뉴욕에는 25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때 헨리 포드(Henry Ford)는 모델 A를 만들기 위해 모델T의 생산을 중단하고 거의 일년동안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포드는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면서 1903년 처음 사용하였던 모델 A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모델 A는 20년 전에 디자인 되어 19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모델 T와 완전히 다른 차였다. 유선형 펜더와 실내장식은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였고, 외관 디자인은 1919년 사장이 된 헨리 포드의 아들 에셀(Edsel)이 감독하였다. 모델 A는 강력한 4기통 엔진과 3단 기어를 장착했고, 모델 T에 장착되어 거친 길에서도 잘 견디는 것으로 입증된 트랜스버스 일립틱 스프링(Transverse elliptic spring)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그러나 1928년에는 좀 더 좋은 승차감을 위하여 유압식 쇽 업소버(Hydraulic Shock-absorber)을 장착했다.
모델 A는 350달러에서 570달러 사이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는데, 저럼한 가격은 1928년 미국의 경제불황에서도 강점이 되었다. 포드는 1929년 최고 경쟁업체인 시보레(Chevrolet) 보다 40만대 이상 더 판매했고, 1930년에는 110만대로 시보레의 두 배를 판매했다. 모델 A의 인기에 기여한 또 하나으 장점은 보디의 선택 범위가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2도어, 4도어 세단(별칭 Tudor, Fordor)과 2인승, 5인승 쿠페와 컨버터블, 그리고 전설적인 목재 장식의 우디(Woodie)라 불린 스테이션 왜건이 있었다.
1927년 영국 시그레이브 선빔 차로 시속 328km 기록 : 1910년 드디어 미국의 자동차광 바니 올드필드가 1909년 독일의 벤츠사가 만든 4기통 200마력엔진의 브릿젠 벤츠를 몰고 1910년 데이토나비치에서 시속 211.8km를 올려 비로서 휘발유차가 200kmdml 벽을 돌파 가소린자동차가 주도권을 잡기시작했다. 이렇게 1910년까지 속독록의 왕좌는 전기에서 증기로, 다시 증기에서 가소린차가 마지막에는 빼앗아 1910년부터는 완전히 가솔린판도로 변해 경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다음 목표인 시속 300km도전에서는 영국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7년 영국의 귀족 핸리 시그레이브경(Sir Henry Segrave)이 영국 메이커인 선빔자동차가 만든 12기통 1000마력의 선빔으로 이해 3월 29일 미국 데이토나비치서 시속 300km를 돌파 327.98km를 기록했다. 1910년부터 속도기록장경기소는 미국 데이토나비치로 이동했다. 16km거리의 딱딱하면서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수많은 휴양인파들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시그레브경의 300km는 곧이어 400km라는 새로운 도전을 끌어 들였다. 그로부터 5년후인 1933년 과거 일곱 번이나 기록을 세웠던 영국의 말컴 캠벨의 아들인 도날드 캠밸(Donald Campbell)이 성공했다. 400km부터는 자동차엔진으로 불가능했다. 캠벨은 V형 12기통에 수퍼차저가 달린 36,500cc 급 2300마력의 롤스로이그 비행기엔진을 얹은 불루버드(Bluebird)를 만들어 테이토나비치에서 439.12km를 기록 캠벨가와 불루버드는 속도기록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9년 미국 캐딜락(Cadillac), 싱크로매시 기어박스(Synchromesh Gearbox)를 세계 최초로 개발. : 변속기 시프트레버 움직임에 따라 원하는 기어끼리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것이 슬라이딩매시와 콘스탄트매시 그리고 콘스탄트매시를 발전시킨 싱크로매시다. 슬라이딩매시는 카운터 샤프트 상의 기어가 앞뒤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 뒤 원하는 단수의 기어만을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방식이다. 수동 변속기으 기본이랄 수 있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반면에 콘스탄트매시 방식은 경주차용 변속기의 주류를 이뤄왔다. 모든 단수의 기어가 맞물려 있는 대신 메인 샤프트와 기어가 헛돌게 만들어졌다.
변속은 메인 샤프트에 달린 ‘시프터’가 움직여 샤프트와 기어를 연결해 동력을 전달하는 원리다. 콘스탄트매시는 기어와 샤프트의 회전수 차이가 크면 매끄럽게 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드라이버가 더블 클러치로 회전수를 맞추어야 한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현재 승용차용 수동 변속기의 주류가 된 것이 싱크로매시 방식이다.
싱크로매시는 기본 구조가 콘스탄트매시와 비슷하지만 시프터와 기어 사이에 싱크로나이저링이 설치되어 있다. 마찰 클러치으 일종인 콘(꼬깔)형태의 싱크로나이저링은 기어와 샤프트의 회전수를 비슷하게 맞춰 변속동작으로 매끄럽게 만들어준다. 빠른 변속이 필요하지 않은 일부 트럭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자동차용 자동 변속기가 싱크로나이저 기구를 달고 있다.
싱크로나이저링 하나를 쓰는 워너 타입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고성능과 내구성을 요구하는 스포츠카에는 더블콘, 트리플콘 방식도 쓴다. 마쓰다 RX-7의 경우 급가속에 가장 많이 쓰이는 2, 3단에 더블콘 싱크로매시 기구를 달고 있다. 이밖에 워너 타입보다 구조를 단순화한 혼다와 고성능의 포르쉐 타입도 있다. 포르쉐 싱크로나이저는 드럼 브레이크에 가까운 대용량의 마찰 클러치를 이용해 강력한 싱크로 성능과 내구성을 자랑한다.
1929년 미국 듀센버그(Duesenberg), 모델 J(Model J)발표 : 프레드, 어거스트 듀센버그 형제는 자신들의 첫 차 모델A로 프랑스 그랑프리와 인디애나폴리스500 경주에서 우승했지만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당시 어번자동차 사장이던 코드가 이들을 후원하면서 듀센버그 모델 J(Duesenberg Model J)가 탄생했다. 직렬 8기통 6.8리터(ℓ) DOHC엔진에 265마력, 최고 속도 186km/h이다. 1932년 슈퍼 차저를 더한 모델 SJ가 추가되었다. 모델SJ의 최대 출력은 320마력, 최고 속도는 205km/h이다.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그레타 가르보 등 헐리우드 스타와 사업가 윌리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등이 듀센버그를 탔다. 유럽에도 50여 대가 수출되었는데 각국의 왕과 왕족이 고객이었다. 1930년대 듀센버그는 최고의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프레스티지카의 대명사였다. 듀센버그의 차는 보디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코치빌더들이 차체와 내부를 꾸몄는데, 약 175가지의 보디가 만들어졌다. 듀센버그 코치빌더 중 유명한 사람으로 게리 쿠퍼와 클라크 게이블의 차를 만든 라 그랑이 있다. 대공황과 뒤이은 경기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듀센버그는 1937년 문을 닫는다. 1937년까지 모델J는 모두 340대가 생산되었다.
1929년 프랑스 부가티(Bugatti), 타입 41 르와이얄(Type 41 Royale)발표 :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 1881∼1947)가 알자스의 몰샤임에 세운 자동차 제조회사이다. 밀라노의 예술가문에서 태어난 부가티는 자전거 회사에서 3륜차를 디자인하다가 자동차 만들기에 나섰다. 1901년 밀라노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프랑스자동차클럽의 'T2'상을 타며 창의성을 인정받은 그는 1909년 낡은 염색공장에 회사를 차렸다. 1911년 '타입 13'은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2위로 들어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푸조에 라이센스를 준 '타입 19'는 '베베(Bebe)'라는 이름으로 성공했다.
192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타입 13’을 내보내 1위부터 4위까지 휩쓴데 이어, 1924년에 발표한 직렬 8기통의 '타입 35'는 2천 번 이상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부가티를 스포츠카의 전설이 되게 하였다. 일련의 차들을 공유플랫폼으로 제조해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전체길이 6.7m의 12.7ℓ ‘타입 41’은 대공황으로 6 대밖에 생산하지 못했지만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1987년 경매에 나온 1 대는 2분 만에 5백만 파운드에 팔렸고, 1929년산 중 1대는 1995년부터 한국에 있다.
1930년대 후반 ‘타입 57’을 디자인 한 아들 쟝(Jean)이 경영일선에 나섰다. 타입 57은 ‘아름다운 투어링카’로 손꼽혀 약 750 대가 팔렸고, 1937년과 1939년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하였다. 그러나 쟝은 1939년 시험 주행 중에 죽었다. 며칠 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7년에 에토레도 죽으면서 부가티는 쇠락의 길에 들어섰고 1956년 공장문을 닫았다. 부가티는 모듈 엔지니어링 개발 등 자동차산업에 여러 공헌을 하였다. 예술혼이 깃든 7,900 대의 원조 부가티 중 다수가 아직 건재하며 사람들의 아낌을 받고 있다.
1998년 독일의 폭스바겐에 사용권이 인수된 후 부가티는 최고 시속 300km가 넘는 수퍼 스포츠카 ‘EB118’를 발표한 데 이어, 8ℓ 16기통 1천마력의 ‘EB16/4 베이론(Veyron)’을 개발하고, 2005년 5월 시속 400km 돌파하는 시험 주행에 성공하였다.
1929년 영국 보그졸(Borgsol)社, 싱크로메시式(synchromesh type) 변속기 채택 : 일반적으로 변속기(transmission)란 클러치와 추진축 또는 클러치와 종감속 기어장치 사이에 설치되어 엔진의 동력을 자동차의 주행상태에 알맞도록 회전력과 속도를 바꾸어 구동 바퀴에 전달하는 장치를 말한다. 이러한 변속기는 클러치와 변속기의 조작을 운전자가 직접 행하는 수동변속기(manual transmission)와, 클러치와 변속기의 조작이 유압에 의해 자동으로 행해지도록 하는 자동변속기(automatic transmission)로 대별된다.
한편 통상의 변속기는 서로 다른 감속비를 가지는 다수의 기어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어 변환시에 기어가 부드럽게 물리지 않으며 이에 따라 기어가 손상되는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수단으로, 소위 싱크로메시(synchromesh) 장치가 있다. 싱크로메시(동기물림식) 장치는 서로 물리는 기어의 원주속도를 일치시켜 기어의 물림이 용이하도록 한 기구로, 그 구현방식에 따라 키형(key type) 싱크로메시와 핀형(pin type) 싱크로메시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