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령충만'의 용어 설명
아쳐 토레이 신부는 '성령충만'에 대한 용어의 설명에서 충만하다(full)와 충만케하다(fill)의 두 단어로 구분한다. 성령의 외적인 사역인 '충만'은 헬라어 'pleth(프레스)'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터질 듯이 가득 채워져 있는 일시적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일시적인 상태는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사용되고 있으며(행 2:4) 베드로가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말할 때도(행 4:8) 하나님께 담대함을 기원했던 평신도들에게 사용되고 아나니아가 안수를 할 때에 사울에게도(행 9:17) 바울이 안수할 때에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사용되었다(행 13:9).
그리고 성령의 내적인 사역인 '충만케 하다'는 헬라어의 'pler(프레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것은 장기간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포화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누가복음 2:40에 어린 예수가 "지혜가 충족하며"라고 기록된 말씀에서 또한 누가복음 4:1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셨다"에서 그리고 요한복음 1:14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지속적인 성령충만에서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2. 성령의 이중적 사역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령 충만을 외적인 능력으로 이해해왔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많은 혼돈이 있었다. 또한 성령의 사역을 내적인 충만으로만 이해하여 인격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이해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내적인 충만과 외적인 충만으로 이해해야한다.
내적인 충만은 생명과 인격에 관한 것이고, 외적인 충만은 능력, 은사에 대한 충만이다.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 성령 충만을 두 종류로 다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종류를 연합하여 이해하지 못했다. 성령이 두분 이라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적으로는 우리의 생명으로 계시고 또한 우리의 인격적 변화를 이루시고, 외적으로는 성령의 부으심으로 충만하게 되면 능력이 나타나고 또한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말씀대로 성령의 내적 충만을 입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고, 외적 충만을 입어 고린도전서 12장에 소개하는 아홉 가지 은사들이 나타난다.
성령의 내적인 열매와 외적인 은사를 오랜 세월동안 들어왔다. 그러나 교회사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적인 충만을 내가 경험했거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이해했다. 예를 들면 신유의 은사를 '병 고침'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수준이 아니다. 신유의 은사로 병을 고침 받았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재발하거나 다른 병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신유의 은사를 경험하고도 실망을 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그 질병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야 한다. 대부분은 영적인 문제로 인해 육신의 '병'이 나타난다. 물론 예외적으로 육체의 관리를 잘못했던가 귀신이 침투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영적인 문제로 인해 질병이 온다. 이러한 경우는 영적인 문제가 치유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육신의 병이 치유될 수 없다. 하나님은 신유의 은사를 통해 내적, 외적으로 치유하신다.
3. 내적, 외적인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내적, 외적 충만을 입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 육으로 건강하여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구원받아 의인(義認)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삶에서는 여전히 절름발이, 장님, 귀머거리 같다. 내 인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고, 그 뜻대로 살아드릴 수도 없다. 설사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 즉 감정이나 생각을 포기할 수 없어 순종할 수 없다.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무엇을 행하려고 보면 우리의 육체가 너무나 연약한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을 말하고자해도 남을 설득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입술을 가지지 못했고, 어떤 영혼이 귀신에 들려 신음하여 하나님께서 고치시기를 원해도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어 도와줄 수 없다. .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비정상적이다.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하셨다. 의원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쓸데없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이것은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 병자가 되고 죄인이 되어야만 성령이 우리 중에 오셔서 일하실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사실 비정상적이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말로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야 정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 옳은 것 같아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이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놀라운 성령의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도 율법아래 있다. 정말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하는 탄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내가 영적인 장애자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4. 성령의 내적 충만
내적인 사역이란 '침투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침투되어 우리 안에 확장된다는 개념이다. 우리가 중생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침투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여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는데 왜 보여주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마치 불청객처럼 한쪽 구석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존중하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역사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드시고, 우리에게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실 것을 위탁하시고, 또한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하라고 하셨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불청객 취급당한다. 내가 그를 존중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실 수밖에 없다. 오늘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하셔도 나는 '싫다'라고 하며 미움이 먼저 나간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불청객으로 계실 뿐이다.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부른다. 하나님이 마치 나의 심부름꾼이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침투시키시는데 그 방법은 다양하다. 죽은 의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침투시켜서 확장시켜 나가신다. 이것이 내적인 충만이다.
5. 내적인 충만은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자아파쇄를 통한 '자기 비움'이며
둘째는 생명의 말씀을 통한 '채움'이다.
성령의 내적인 충만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또한 조명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확장되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자아가 부서짐으로 되어진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하시며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35)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자아의 부서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릇에 무엇을 담으려 하면 먼저 채워져 있는 것을 비워야 한다.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 그대로는 성령을 채울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에게는 더 교만한 사람을 붙이신다. 하나님께서 사건과 문제를 통해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신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 즉 '성령의 침투를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되어짐으로 내적으로 '예수화' 되어진다. 이러한 내적인 침투는 계속되는데 우리는 비키지 않으려고 싸운다. '미움을 버리라' 하셔도 '그것만은 버릴 수 없다'한다.
우리는 나를 너무 사랑하여 정말 버리기를 싫어한다. 나에 대해서는 작은 것도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씀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린다. 그러므로 언제쯤 성령이 침투되어 확장되고, '내'가 아니라 '예수'라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이것을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말씀은 나에게 침투하여 나를 대신하여 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내 감정을 대신해서 예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신다.
6. 성령의 외적인 충만
우리는 그동안 성령의 충만을 외적 충만으로만 이해를 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내게서 능력이 나타나고 모든 일이 잘 되는 줄 알았다. 1970년대에는 성령 충만을 많이 강조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외적 충만이 주춤해 졌다. 성경은 사단이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지키시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한국교회에 외적 충만이 주춤해진 이유는 은사자들이 외적인 충만만 알고 내적 침투는 받지 못해 삶을 자기 멋대로 살기 때문이다. 고작 하나님 말씀을 율법적으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내적인 변화에는 관심이 없이 행위만 가르치다보니 교회에서 말썽부리는 사람은 모두 능력자들이었다. 내적인 변화가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타나니 교만해 진다. 나는 막대기에 불과하고 막대기를 드신 분은 성령이신 데 내가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여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낸다. 또 은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써먹는다. 심지어 어떤 기도원의 장로님은 봉투를 주지 않으면 절대 기도해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사를 자기의 부귀영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 자들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교회에서 성령의 외적인 충만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나무라고 고쳐야지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성령의 내적, 외적 충만을 접목하여 생각해 볼 때에 안으로는 침투 당해서 나를 변화시키고 외적으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되는 놀랍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드릴 수 있다.
외적인 충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방언의 은사를 받아도 충만할 수 있고 충만하지 않을 수 있다. 아홉 가지 은사를 다 받았어도 충만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은사를 받았어도 충만해 있지 않으면 무기력하다. 건전지도 다 쓰면 바꿔야 한다. 그러나 충전지는 다 쓰고 나면 충전시키면 된다.
다시 말하면 내적 충만이 점점 채워가는 것이라면 외적 충만은 충만해야한다. 그래서 다 쓰면 비워진다. 충전지와 같아서 날마다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한다.
그래서 성경은 외적 충만에 대해서 "날마다 성령 충만을 입으라"(엡 5:18) 말씀했고 내적 침투에 대해서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골 3:9,10) 하신다.
오순절 날 120문도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외적인 충만을 입었다. 그러나 그때의 충만을 입은 것으로 365일 충만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도 다시 기도하여 충만함을 입어야 비로소 주님이 원하시는 도구가 되어진다. 그래서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말씀한다. 우리가 기도함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도무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너무도 모른다. 안약을 사서 눈에 넣어야한다. 우리가 얼마나 헐벗었는지 발견되지 않고는 아버지 뜻대로 살아드릴 수 없다.
부디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