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고통 중에 만나는 친구 예수님은 높은 산에서 아주 잠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다. 구약 예언서에 예언되어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늘나라, 하느님의 아들을 상상하며 그릴 수 있는 그 모습이었을 거다. 어떤 표백제를 써도 그보다 더 하얄 수 없고, 빛이 없이 빛나는 그런 모습이다. 그게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잠시 보여주셨다.
땅 위를 꼬물꼬물 기어다니고 나뭇잎이나 갉아 먹는 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변한다. 하지만 두 개체를 두고 보면 그 연속성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아이 얼굴에 부모의 얼굴이 있고, 어른 얼굴에서 빛바랜 사진 속 어린이가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십자가에 죄인으로 처참하게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어떻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을까?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거다.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도 사람은 그게 뭔지 모른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횡설수설했던 베드로 같을 거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신비를 깨닫는 게 아니라 그분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거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9,7).”
그런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깨달을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내 삶과 무슨 상관인가?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에서 먼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땅에서 사는 우리 사이가 그렇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셔서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 특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라고 부르짖으셨듯이, 그분도 하느님의 부재, 아무도 당신을 도와줄 이 없는 절대적인 외로움을 겪으셨다. 그분은 육아에 지쳐 밤에 혼자 우는 젊은 엄마가 만날 수 있고, 불의한 대우에 고통 받는 서민 옆에 앉을 수 있는 분이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그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그 분부를 따랐지만 부활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을 믿어야 비로소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불의에 맞서 싸워 세상을 개혁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의한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게 당신에게는 더 쉬었을 거다. 그분은 불의한 세상 속에 생명의 길을 내셨다. 고통받는 모든 이에게 친구가 되시고 그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그분과 친구가 되면 십자가에서 부활의 영광을 찾아볼 수 있을 거다.
예수님, 주님은 죄 말고는 모든 면에서 저희와 같아지셨다. 한 서민이 되셨고, 죽는 것까지 같아지셨습니다. 이제는 저희가 주님을 친구로 삶의 진정한 동반자로 맞아드릴 차례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홀로 우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아드님을 만나게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