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친위대는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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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친위대는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슈츠슈타펠 또는 SS는 나치 독일에서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조직 중 하나였다.
1925년에 창설된 친위대는
나치당의 정예 부대로 간주되었다.
하인리히 힘러를 필두로 친위대는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원 역할을 넘어
현대 역사상 최악의 잔학 행위를 자행했다.
실제로 지도부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소위 최종 해결책을
계획하고 조정하고 지시했다.
하지만 어떻게 소규모의 맥주 홀 깡패 집단이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사악하고 비난받는
준군사 조직 중 하나로 진화했을까?
클릭으로 SS의 어두운 역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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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과 제3제국
슈츠슈타펠(SS)은 출신이 비천했다. 1923년, 아돌프 히틀러는
뮌헨에서 열리는 나치당 회의에 보안을 제공하기 위해
살-슈츠라고 알려진 작은 경비대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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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 창당
나치당은 1920년에 창당되었다.
초기 신청자는 1925년 사진에서 안경을 쓴 하인리히 힘러였다.
그는 Saal-Schutz, 즉 "홀 시큐리티"의 열성적인 자원봉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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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홀 푸슈
히틀러의 인기가 높아지자, 히틀러는 개인 경호원을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이 부대는 그가 Stabswach(직원 경비대)라고 불렀다.
1923년 맥주홀 푸슈가 나치당의 뮌헨 권력 장악 시도로 실패한 이후
이 조직은 슈토트루프(Stoßtrupp, 쇼크 부대)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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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슈렉 (1898–1936)
1925년 히틀러는 나치 고위 관리 율리우스 슈렉에게
새로운 경호 부대를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슈츠슈타펠은 1925년 11월 9일에 창립되였고,
슈렉은 초대 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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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힘러 (1900–1945)
그러나 이 사악한 준군사조직과 영원히 연관된 사람은 하인리히 힘러이다.
히틀러의 승인으로 그는 1929년 1월 SS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힘러 휘하에서 SS는 "인종적 순결"과 총통에 대한 충성으로
인종 민족주의적 비전을 바탕으로 나치당의 엘리트 군단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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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타포와 친위대
친위대는 폭력적인 문화 위에 세워졌다.
독일 내에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 국가를 세웠다.
1934년 헤르만 괴링은 힘러의 제3제국 내부 메커니즘에 대한 철권 장악을
강화하기 위해 나치 친위대에게 게슈타포의 모든 통제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숙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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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검의 밤
게슈타포의 통제권이 힘러에게 넘어온 것은 장검의 밤의 전주곡이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한 "브라운셔츠"로 알려진 나치의 준군사 조직인
슈투르마브테이룽(SA)의 전멸을 명령했다.
1934년 6월 30일, SS는 게슈타포와 함께 SA 지도부 대부분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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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상
한편, 히믈러는 친위대 고위 간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게슈타포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 모두 홀로코스트의
주요 설계자로서 지속적인 악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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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르트 SS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히틀러의 개인 보호군에 대한 필요성도 커졌다.
히믈러는 총통의 개인, 사무실, 주거지를 경비하는
정예 부대인 라이프스탄타르트 SS 아돌프 히틀러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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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가 완전한 통제권을 얻다
1934년 말까지 친위대는 히틀러에게만 책임이 있는 독립적인 조직이었다.
게슈타포 외에도 친위대는 독일 경찰과 시칠리아 정보기관인 SD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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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나흐트
나치 친위대는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 소유의 기업과 유대교 회당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크리스탈나흐트로 알려진 유대인에 대한 폭력을 비밀리에 조정했다.
수백 명이 그 폭력사태로 죽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다음 주까지 약 30,000명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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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이케 (1892–1943)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1933년 다하우의 개방과 함께 설립되었다.
1939년 아이케는 토텐코프 SS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죽음의 머리 부대라 불린 토텐코프 사단은 독일과 점령지에서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는 SS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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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사단 토텐코프
SS 국가 지도자로서 힘러는 오스트리아의 다하우젠과
마우트하우젠을 포함한 여러 강제 수용소를 직접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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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친위대
아우슈비츠는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친위대 대원 3명을 수용했다.
수용소 외곽에서 사회적 휴양을 즐기는 모습은 리처드 바어 사령관,
요제프 멩겔레(죽음의 천사), 루돌프 호이스 전 아우슈비츠 사령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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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남은 증거
유명한 아우슈비츠 앨범의 이 사진에서,
SS 장교가 가스실에서 몰살시킬 유대인들을 선택하고 있다.
몇몇 정보원들은 사진작가가 친위대 장교인
에른스트 호프만이나 베른하르트 발터였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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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제2차 세계 대전은 SS의 전투 사단인 무장친위대에 의해
현장에서 자행된 잔학 행위를 불러왔다.
폴란드 침공 당시 친위대는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지만,
군사적 정당성 없이 마을을 불태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사진은 1939년 9월 1일 독일 정규군 병사들이 국경 장벽을
무너뜨리고 소포트에서 폴란드로 건너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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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의 기원
무장친위대의 기원은 1933년 3월 셉 디트리히에 의해 120명의
친위대 병사들이 선택되어 베를린을 형성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트리히는 후에 제1SS기갑사단 라이프스탄타르트 SS 아돌프 히틀러를 지휘했고,
1944년 벌지 전투에서 미군 포로와 많은 벨기에 민간인을 살해한
말메디 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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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 디트리히 (1892–1966)
1929년 전에 디트리히는 아돌프 히틀러의 운전사이자 경호원이었다.
폴 하우저와 함께 디트리히는 친위대 최고위급 장교로,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또는 대령집단지도자의 지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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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스트룹 (1895–1952)
SS의 또 다른 악명 높은 멤버는 위르겐 스트룹이었다.
그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진압을 이끌었고
이 작전에 대해 책 분량의 설명인 '스트로프 보고서'를 썼다.
한 무리의 유대인 민간인들이 피난처였던 벙커에서 나오는 중에
독일 SS 부대 총구를 가리키고 있는 이 이미지는
봉기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이며,
실제로는 전쟁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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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이중 고대 기호의 기원
나치 슈츠타펠의 SS 더블 룬 기호는 1929년 발터 헥에 의해 설계되었다.
당시 헥은 SA의 중대장이었으며, 나중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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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조장하다
검정 SS 제복은 권한을 나타내고 공포를 조장하도록 맞춤 제작되었다.
그것은 카를 디비치에 의해 디자인되었고 후에 휴고 보스가 되는
의류 회사에 의해 수천 개의 제품으로 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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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흙"
SS 이데올로기는 주로 반유대주의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충성에 기반을 둔 "인종적 순결"에 대한
인종주의적 비전을 강조했다.
그것은 민족주의 슬로건인 "피와 흙"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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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융커 스쿨
친위대 장교 후보생들은 친위대 융커 학교로 알려진
특수 지도자 훈련 시설에서 훈련을 받았다.
가장 유망하고 헌신적인 생도들만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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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스보른
특히 풍기문란한 SS 단체는 레벤스보른이었다.
힘러에 의해 설립된 이 단체는
SS 대원들의 부인들과 미혼모들에게 출산 가정과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나치 조직이었다.
독일 어머니의 명예 훈장은
가장 많은 아리아인 자녀를 낳은 여성들에게 수여되었다.
낙태는 장애아와 비게르만인 어린이들을 위해 합법화되고 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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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컬트 사이트
힘러는 베스트팔렌에 있는 베웰스부르크 성을 사유지로 삼아
SS의 중심 컬트 사이트로 확장했다.
SS 지도부의 통일된 이념 훈련을 보장하는 학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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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르베 연구소
히믈러는 독일인들이 다른 인종 집단들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한
아리아 인종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조장한 연구 기관인
안네르베를 설립했을 때 제3제국을 넘어서고 있었다.
친위대 소속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조상들이 수세기에 걸쳐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으며, 친위대가 이 지역들을
다시 획득하는 것을 임무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티베트와 같은 먼 곳으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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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모리스 (1897–1972)
친위대에 의해 채택된 아리아인의 관점에서 매우 드문 예외는
에밀 모리스의 경우였다. 슈츠슈타펠의 설립자이기도 한 모리스는
유대인과 독일계 혼혈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첫 개인 운전기사였고 나치 지도자는
힘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친구로 남았다.
그는 1924년에 히틀러와 헤르만 크리벨, 루돌프 헤스,
프리드리히 베버와 함께 두 번째로 왼쪽에 있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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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칼텐브루너 (1903–1946)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요제프 멩겔레와 아돌프 아이히만,
에리히 프리에브케, 알로이스 브루너와 같은 SS 조직원들이
탈출하거나 적어도 일시적으로 사법정의를 회피했다.
하지만 교수형 집행관을 만난 한 남자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였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친위대 최고위층으로 재판을 받았다
(힘러는 1945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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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파이퍼 (1915–1976)
말메디에서 미군 포로들의 처형을 명령한 셉 디트리히는 어떤가?
놀랍게도, 그는 사형 선고를 면하고 대신 10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마찬가지로, 학살에서 그의 역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요아힘 파이퍼도
감옥에서 10년을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1976년, 파이퍼는 트라브즈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반나치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출처: (Holocaust Encyclopedia)
(Britannica) (History) (Yad Vashem)
참조: Historical massacres that shocked the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