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가을 바닷가 산책
2107. 10. 24. 금계.
예전 같으면 공휴일인 10월 24일, 유엔 창립 기념일. 날씨가 너무 좋다. 똑딱이 카메라 하나 들고 집을 나선다. 버스 정류장에서 건너다보이는 문화방송 건물. 현재 문화방송은 편파적이었던 사장을 몰아내기 위하여 달포가 넘게 파업투쟁 중이다.
해양대학교 후문 쪽 1번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1번 버스는 항상 시작은 미미해도(손님이 적어도) 금방 창대해진다(손님이 북적거린다).
종점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동네의 아기자기하고 오순도순하고 정겨운 모습. 나는 저런 데서 살기를 좋아하는데 어쩌다가 찻소리 시끄러운 도회지 2층에서 살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겄다.
예전에는 코스모스가 동네마다 갓길마다 지천이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요즘은 미스 코리아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
정오의 가을 햇살에 억새가 찬연히 반짝이며 미풍에 흔들린다.
해양대학교가 먼저 생기고 목포대교는 최근에 생겼다. 해양대학교는 뒷벽에다가 목포대교로 훌륭하게 환경정리를 했다.
목포대교는 해양대학교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해양대학교 쪽에서 바라본 유달산 2등바위.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목포8경 가운데 하나인 용두귀범(龍頭歸帆), 용머리 오른쪽의 높은 교각 세워진 곳쯤이 예전에 돛단배가 돌아들어 오던 곳이다.
내가 오래 살기는 오래 산 모양이다. 저렇게 풍광명미한 곳에 저토록 근사한 다리가 세워질 줄 어찌 알았으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대반동 유원지 - 예전에는 여름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하당 신도심, 남악 신도시가 생기면서부터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아, 옛날이여! 영원히 잘 나가는 곳이란 있을 수 없구나.
찰나멸성 - 모든 것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무너진다.
셀카가 아니더라도 혼자 자기 사진 찍는 방법 -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다 카메라를 들이댄다.
찻집 ‘노인과 바다’ - 전에 한두 번 들렀던 곳도 같다. 전에는 장년이었는데 해와 달이 돌고 돌아 노인으로 변하고 말았구나.
헤밍웨이처럼 돛새치나 청새치는 낚아 올리지 못했지만 나도 서해안 남해안에서 감성돔 몇 마리쯤은 낚아보았다. 감성돔이 낚싯대 끝을 힘차게 잡아당길 때의 아슬아슬하고 쭈뼛쭈뼛한 전율은 낚시꾼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재미였다. 그러고 보니 낚시질 폐업한 지도 스무 해가 넘었구나.
목포항에서는 12시 1시 언저리에 출발하는 배가 많다. 어디 가는 배일까. 안좌도? 비금도? 장산도? 하의도?
유달산 자락의 공생원(共生院).
1928년 윤치호 전도사가 불쌍한 거리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같이 생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 와중에 500명의 아이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로 떠난 윤치호전도사가 행방불명되었고 그의 일본인 아내 윤학자 여사(다우치지즈꼬)의 헌신적인 봉사로 3,000여명의 고아들을 키워냈다. 윤학자 원장은 1963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고 1965년에 ‘제1회 목포시민의 상’을 받았다 한다.
잠시 공생원 정문 쪽에다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올렸다.
유달산 바닷가에 자리 잡은 신안비치호텔은 수십 년 동안 목포의 대표적인 호텔로서 그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유달산과 고하도를 잇는 케이블카 기공식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다. 케이블카라면 여수, 통영 등 몇 군데만 흑자이고 다른 곳은 모두 적자라는데 목포는 어떠할지, 유달산의 자연 경관을 해치지는 않을지,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은 끼치지 않을지 여러 모로 걱정이 태산 같다.
신안비치호텔에서 시내 들어가는 쪽 바닷가에 세워진 인어아가씨 동상이 가을볕에 홀로 쓸쓸하다.
5년 전에 가보았던 덴마크의 인어아가씨 동상에는 관광객들이 미어 터졌는데 목포 앞바다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용머리를 바라보며 한가로이 가을볕을 쪼이는 저 아자씨들이 무척이나 부럽다. 시간을 죽이는 건지,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는 건지는 몰라도, 재수 좋으면 문저리(망둥어)나 새끼 감성돔이 올라올는지 모른다.
‘인도양 횟집’ - 저 멋진 서양풍의 횟집에도 한 번인가 가보았던 것 같다. 회 맛은 여느 횟집과 엇비슷했지만 종업원들 시중드는 태도가 다른 곳보다 좀 더 다소곳했던 것도 같고.......
목포항으로 들어오는 ‘대흥 페리9호’. 원래 목포항이 다도해의 여러 섬에 겹겹이 가려서 풍랑에는 안전한 곳이지만 특히 저 철부도선은 아주 든든하게 보여서 엔간한 풍랑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듯하다.
세월이 무상하다. 예전에는 바닷가가 그냥 허술하고 쓸쓸했는데 이제는 나라 형편이 좋아졌는지 해양대학에서 여객선 터미널에 이르는 수km의 도로가 훌륭한 산책로로 탈바꿈했다.
온금동 - 다순구미. 조금 때면 뱃사람들이 돌아와 유달리 ‘조금새끼’들이 많았던 동네. 유난히 가을볕이 화사한 저 골목 어느 돌담에 기대어 낮잠이라도 한 숨 때리고 싶다.
망망대해 나가면/ 움푹하고 볼록한 삶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다시 산기슭에 서 보면/ 그래도 그립고 정겨웠던 곳/
갯바람으로 절인 비좁은/ 온금동 골목길/ 그 달동네가 그리울 게다’
[강해자 - 온금동 연가]
목포항 건너편 용당 해역사령부로 귀항하는 경비정.
선창가에 줄줄이 쌓인 나무궤짝. 모두 바다로 나가 생선을 담을 궤짝들이다.
아무리 스티로폼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생선을 보관하는 데에는 나무궤짝이 훨씬 제격인가 보다.
차로 실어온 얼음덩이들이 구조물 위로 올라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어선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 나는 십 몇 년 전에 저기에서 상하이 가는 배를 타고 25시간 걸려 상하이에 닿았다. 객실 침대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낭만이 그럴 듯했는데 그 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던지 금방 없어지고 말았다.
살아생전에 국제여객선 항로가 다시 열리면 나는 행선지를 가리지 않고 또 배 위에 올라보고 싶다.
국제여객선 터미널에서 조금 더 걸으면 연안여객선 터미널이 나온다. 터미널 지붕 위로 때 아닌 뭉게구름이 장관이다.
가을은 가을이다. 터미널 앞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카페리 호. 이마빡에 현수막을 걸쳐놓았다. [제5회 선왕산 전국 섬 등산대회]
비금도 선왕산을 구경하지 않은 사람은 한 번쯤 가볼 만하다. 멀리서만 보아도 참 새롭고 다정하면서도 독특한 산이다.
선창에는 아구탕 집이 스무 군데쯤 된다. 생선회를 아우르는 곳이 많고 아구탕 값도 횟값보다 별로 싸지 않다.
목포항 건너편 삼학도. 삼학도 가운데 섬 앞바다는 요트 계류장.
요트 계류장 오른쪽에는 목포 어린이 바다과학관.
목포항에 정박한 작은 배들.
목포항에 정박한 대형어선.
풍어를 기원하는 화려한 깃발. 펄럭이는 저 깃발만 보면 나는 무작정 어디론가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고 싶은 욕망에 몸이 뒤틀린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삼학도 왼쪽 산의 황토 길이 바로 이난영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애잔하고 구슬픈 느낌인데 지금도 여전히 목포는 여러 모로 서러운 가락이 맴도는 도시다.
선구사에 걸려 있는 그물들. 언젠가 또 이 그물들은 어느 배엔가 실려서 먼 바다로 나아가 만선의 꿈을 펼칠 것이다.
선창가 그물 위에서 가을볕에 말라가는 생선들.
여수나 순천 쪽은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데 목포는 해가 갈수록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다. 어민들도 줄고 서남해안의 수산물 어획량도 차츰 줄어드는 추세다. 게다가 섬마다 다리가 놓이니 다도해 여러 섬들의 모항 구실을 하던 목포항의 비중도 차츰 줄어들고 있다.
다른 도시들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데 비하여 목포는 광복 직후나 70년 후나 인구 20만 명 언저리로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도시의 활기가 부족하여 시민들은 매가리가 없고 우울하다.
처남댁 정원에는 국향이 넘실거린다. 우리 처남은 아주 훌륭한 정원사다. 이렇게 풍성한 국화를 키우려면 얼마나 잔손질이 많이 가는지 키워본 사람만이 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