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최고의 화제작은 이명세 감독의 [M]이었다. 거장들의 신작이나 화제작을 소개하는 갈라 프리젠테이션이라는 섹션이 올해 처음 신설되었고 대만의 허우사오시엔 감독의 [빨간 풍선] 등과 함께 이 섹션에 초대된 이명세 감독의 [M]은 관례대로 한 호텔의 즈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했지만 몰려든 취재진들로 20분이나 시작이 지연되었다. 좁은 공간에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몰려 들어 자칫 사고 위험까지 제기되었고, 주최측에 대한 격렬한 항의도 있었다. 결국 이틀 뒤 부산국제영화제측에서는 공식 사과를 해야만 했다. [M]의 기자회견장에는 한국측 프레스보다 일본이나 대만 홍콩 등지의 기자들이 더 많았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가 동남아에 배급되면서 강동원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세 감독의 신작 [M]은, 신인시절 [첫사랑]을 만들고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한 스타일리스트의 중간 결산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집중과 탐색은, 이명세 감독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로 만들었다. 사실 [M]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왜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쏟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M]에는 집념과 끈기로 자신의 미학적 세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장인의, 고독한 냄새가 배어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크게 성공하고, [양들의 침묵]을 만든 조나단 드미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박중훈을 [찰리의 진실]에 캐스팅하면서 이명세 감독의 국제적 지명도가 상승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2천년대 초반 5년 넘게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귀국해서 만든 [형사]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을 의식하고 동양적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자신의 감각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너무 강했다.
몇 달전 조성우 음악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조성우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이명세 감독은 [M]의 음악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에 와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했지만 [형사]에 쏟아진 나의 비판을 의식한 그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났다. [M]의 제작사인 M&FD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그를 만났고 나는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밤, 해운대 메가박스에서 [M]을 보았다. 영화가 끝난 후 이명세 감독과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고 제작자인 조성우, 그리고 여주인공 이연희가 무대로 나와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관객의 요청으로 이연희는 [M]의 주제가인 [안개]의 첫 부분을 직접 노래 부르기도 했다. 예전에 정훈희가 불러서 크게 힛트했던 그 노래다. 영화 속에서는 보아가 리메이크 한 곡이 실려 있다.
[시각적 비주얼이 너무 강렬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이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야수파의 마티스 그림을 보면 정말 야수같은 감각이 살아 있다. 인상파의 세잔이나 고호의 그림도 인상적인 풍경이 강렬하게 드러난다. 내 영화는 비주얼적인 효과를 강렬하게 추구한다. 그것은 영화의 한 표현방법이다. 결국 이야기를 중시하는가 표현을 중시하는가,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명세의 이 말은 [M]의 스타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작인 [형사]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M]에서 소설가 한민우와 미미의 첫사랑의 느낌이 살아나면서 긴장이 늦춰지지 않고 끝까지 지속될 수 있는 상당한 힘을 음악에 빚지고 있다. 조성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M]이 이룬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조성우의 공이라고 표현했다. 소설가 한민우는 거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리고 그는 안개낀 날 비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루팡이라는 바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첫사랑 미미(이연희 분)를 만난다는 이야기다. 그러고보면 이명세 감독은 유난히 첫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데뷔작도 [첫사랑]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M]은, 이명세 감독이 전작 [형사]에서 비판받은 장식성의 과잉을 딛고 초심의 순수함을 되찾기 위해 다시 첫사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자신이 이룩한 미적 세계에 순수함을 접목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M]은 스릴러 구조를 갖고 있지만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는 아니다. 이명세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은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순수함이다. 이미 첫사랑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이번에는 소재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드러냄의 위대함에 몰입한다. 베스트셀러 소설가이며 대중적 인기도 많은 한민우(강동원 분)는 재력 있는 약혼녀(공효진 분)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알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진다. 출판사와 계약한 소설은 잘 써지지 않는다. 출판사에서는 그가 소설을 써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이미 그는 선인세로 많은 돈까지 받았다.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일식집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출판사 편집장과 한민우가 일식집에서 만나는 장면은,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 대사로 상황만 바꿔 가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 나중에는 역할까지 바뀌어서 처음에 편집장이 했던 대사를 한민우가 미리 똑같이 한다.
[이 영화의 중심에 일식집 장면이 자리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데자뷰로 볼 수도 있는 장면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보일 수도 있는 게 사물이고 사건이며 우리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M]에서 반복되는 일식집 장면은 무의미한 현실, 권태에 빠진 소설가의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그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최초의 순수함을 발견하는 것 뿐이다. 첫사랑 미미에 대한 추억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가 어둡고 안개 깔린 도시의 뒷골목을 지나다가 루팡바에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비좁은 골목길,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가 강렬하게 대비되고 안개가 자욱이 깔려서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진 도시의 뒷골목을 한민우는 걷는다. 그것은 어쩌면 과거로 통하는 길이고 무의식의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문이다. 루팡바의 바텐더(전무송 분) 뒤에 배치된 조명은 증앙의 블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순백의 화이트가 빛나고 있다. 그곳에서 한민우는 미미를 만난다.
관객과의 대화는 뜨거운 열기 속에 늦게까지 계속됐지만 다음 영화 상영을 위해서 끝내야 된다는 주최측의 제지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도 그는 관객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렸다. 인파가 몰려들자 역시 주최측에서 제지를 해서 우리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명세 감독의 카페 팬들이 술자리를 만려해 놓은 곳으로 우리는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약 50여명의 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온 팬들도 있었다. 일본 팬은 자신이 직접 그린 이명세 감독의 캐리커처를 검은 티셔츠에 만들어서 여러 개를 선물했다.
[창조자로서 한 사람의 감독이 똑같은 소재를 반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정신적 내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첫사랑 이야기를 반복하는가?]
내가 이렇게 묻자 술자리에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이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맞장구쳤다. 정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잘 모르는,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잘 알고 있는 그의 첫사랑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비가 내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마지막 탄광촌 장면에서 그는, 빗방울의 섬세한 줄기가 보일 정도의 엄청난 분량의 빛을 제작진에게 요구했다. 영화의 명장면은 감독은 집념과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제작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찍기 전에 만든 콘티북과 최종 편집이 끝난 영화가 거의 틀리지 않는다. 이것은 충무로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M]은 첫사랑이라는 하나의 정서, 하나의 이야기로 지속된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는 [형사]와는 다르게 통일성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보는 영화다.]
[M]이 지나친 기교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스타일의 강박증에 사로 잡힌 극단적 결과가 [M]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M]에는 목적의식이 강했던 [형사]와는 달리 순수한 열정이 숨어 있다. 왜 영화를 만드는지, 그 영화를 통해서 그는 무엇을 꿈꾸는지, 그런 본질적 질문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 영화를 순수하게 만들고 한민우의 열정을, 미미의 순박함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처음 등장했을 때 미미의 어설퍼 보이는 모습은, 어설퍼 보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기다. 그것을 연기의 미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연희는 매우 뛰어난 정서를 갖고 있는 배우다. 그리고 한민우 역의 강동원은 착한 배우다. 나는 한민우의 숨어있는 내적 광기를 강동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
배우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강동원의 [M]인줄 알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몰려든 일본과 중국의 수많은 프레스들의 관심은 오직 강동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동원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스타였다. 그가 이명세 감독의 [형사]를 통해서 새로운 한류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미쳐 몰랐다. 그런데 영화 [M]을 보고 나면 이 영화는 강동원이 아니라 이연희의 영화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M]이 거둔 의심할 바 없는 수확 중의 하나는, 신인 이연희의 발견이다. 강동원은 일상 속에 잠복된 폭력이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어떤 광기의 드러냄에는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이연희다. 미미는 영화를 미로 속으로 끌고 가는 주역이면서 동시에 미로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이연희는 캐릭터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금보다 앞으로 더 가능성이 많은 신인 여배우의 발견은 [M]이 거둔 가장 큰 수확이다.
[처음 배역을 맡고 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감독님께 물어 보면 미미에 어울리는 사진이나 사물에 대해서 설명해주신다. 감독님이 추천하는 프랑스 영화도 다 보았다. 그런데 감독님은 매우 추상적으로 설명하신다.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이명세 감독 팬들과의 뒷풀이 자리에서 이연희는 그렇게 말했다. 이명세 감독은 [다양한 장르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 [M]이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최고의 상을 차릴려고 영화라는 주방 안에서 정성껏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M]의 빛깔은 강한 흑백의 콘트라스트를 바탕으로 블루톤이 지배한다. 소설가의 집은 유리로 겹쳐져 있어서 차갑고 모던한 느낌을 주는데 그 느낌을 상승시키는 것은 블루톤의 조명이다. 카메라는 유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들이 유리에 비치는 모습까지 차갑게 담아낸다. 왜 따뜻한 영화 [M]을 차가운 정서가 지배할까. 소설가가 살고 있는 현실공간과 소설가가 꿈꾸는 이상공간의 대비는 블루톤으로 현실을 차갑게 만듬으로써 오히려 이상세계는 더욱 따뜻해질 수 있고 첫사랑의 연인 미미는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 미미의 순수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이명세 감독은 두 시간동안의 공들인 화면을 마련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진수성찬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