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포스터의 社主 캐스린 그레이엄이 84세로 작고한 날이도 하고,
7월 17일 자체로는 제헌절 날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버지 유진 메이어와 남편 필립 그레이엄에 이어 1963년부터
워싱턴 포스터를 이끌었다. 40년 가까운 그녀의 시대를 통해 워싱턴 포스턴는,
일개 지방지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랐다.
올해로 1백 29년이 되는 워싱턴 포스터의 역사에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기입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첫순위로는 1974년 워트게이트 사건을 특종보도한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 두 기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보도는 현직 대통령 리차드 닉슨을 권좌에서 끌어 내렸다.
그 다음 순위로는 당시 발행인이었던 그레이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워트게이트 사건의 특종보도는 편집자들의 판단을 존중했던 그녀의
큰 배포가 아니면 나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 법무장관 존 미첼은 닉슨 선거팀이 워트게이트 빌딩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두 기자에게 포착되자, 이것을 기사화할 경우
"그레이엄의 젖가슴을 세탁기에 넣고 짜버릴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레이엄의 이런 결기는 그 보다 3년전에 베트남 전쟁 관련 극비 문서 '펜타곤페이퍼스'
사건 때 이미 드러났다. '펜타곤페이퍼스'를 특종 보도한 경쟁지 뉴욕 타임스가
닉슨 정부의 출판정지 가처분 신청으로 후속보도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워싱턴 포스터는 다른 채널을 통해 입수한 이 문서를 그대로 기사화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터는 3,500만 달러 규모의 주식 상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 변호사들은 그레이엄에게 보도 중지를 건의 했지만, 이 '언론의 女帝'는
편집국의 판단을 신뢰했다. 정부가 주장했던 '국익'과 편집국 기자들이 옹호했던
독자의 알 권리 사이에서 그녀는 뒤쪽을 선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