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패션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Versace, Gianni) 피살
1946. 12. 2 ~ 1997. 7. 15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50)가 1997년 7월 15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사우스 비치의 자택 앞에서 총격을 받고 인근 잭슨 메모리얼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함께 이탈리아 최고의 기성복 디자이너로 꼽혀온 베르사체는 이날 아침 인근의 뉴스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귀가하던 길에 현관 계단에서 20대의 백인 청년으로부터 머리에 2발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출신 촌뜨기가 이탈리아 패션 1번지 밀라노에 등장한 것은 스물여섯살 되던 1972년. 제니, 발렌티노 등 유명 패션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6년 만인 1978년 ‘지아니 베르사체’ 상표를 내걸고 독립했다. 1회용 반창고 스커트, 팝 가수들을 사로잡은 검정 가죽 점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는 첨단 소재를 사용한 섹시하고 여성적인 옷들로 몇 년 지나지 않아 파리 뉴욕을 비롯한 세계 패션 수도를 정복했다. 로마 신화 태양신의 얼굴을 따온 베르사체 상표는 소비자들에게는 ‘고급품’의 상징이 됐고 세계 곳곳에 유사품 시장이 번창했다.
베르사체 살해자는 샌디에고에서 출생한 필리핀계 미국인인 앤드루 쿠나난(Andrew Cunanan, 27)으로 연쇄살인범이었다. 쿠나난은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한 고급 남창’으로 그의 살해 대상은 동성애자였다. 베르사체 역시 동성애자였다. /조선
[1982년]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 준공
← 1982년 7월 15일 잠실야구장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경기장을 둘러보고 있다.
1982년 7월 15일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이 준공됐다. 종합운동장 남쪽어귀 1만3천8백여평에 세워진 이 야구장은 1982년 9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대비, 서울시가 지난 1980년 4월에 착공한 것으로 1백26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야구장의 외형은 우리나라의 전통악기인 장구의 본을 땄으며 내외야 4천2백평에 자연잔디를 심었다. 필드의 규모는 국제규격대로 중앙길이 125m, 파울라인쪽이 100m에 내야 2천룩스, 외야 1천5백룩스를 유지할 수 있는 6개 타워의 나이터시설을 갖추었다. 5만관중을 수용할 스탠드는 내야의 개별형의자 2만8천석과 외야의 7천석벤치로 짜여있어 70%의 관객이 내야에서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좌석색상은 선수와 관객의 시력보호와 안정감을 위해 녹색으로 통일했다. 컴퓨터로 조작되는 대형전광판은 한글과 영문글자를 겸용해 화면에 나타낼 수 있도록 했다. 4개의 실내연습실이 마련돼 있어 각 팀이 실내에서 투구와 타격연습을 할 수 있고 샤워실, 라커룸, 의무실 등 선수를 위한 부대시설과 완벽한 통신 시설을 갖춘 중계실, 보도실을 갖췄다. 이밖에 관람객을 위한 식당, 다방, 매점 등의 편의시설도 갖췄다./조선
[1976년] 잠수교 개통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잇는 잠수교가 1976년 7월 15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이 준공테이프를 끊음으로써 개통됐다. 한강에 놓인 9번째 다리인 잠수교는 총공사비 22억4천만원을 들여 1975년 9월에 착공한 것으로 너비 18m, 길이 1,225m의 4차선 교량이다. 한강에 놓인 기존 교량이 수면위 16∼20m에 위치한데 비해 이 다리는 수면의 2.7m위에 놓여있어 마치 물위를 걷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장마때 10∼20일간 물속에 잠긴다고하여 잠수교로 명명한 것이다. 이 다리는 2층으로 설계돼 있으며 이날 완공된 것은 아래층에 해당되는데 한강의 뱃길이 막히지 않게하기 위해 14번과 15번교각 사이로 들어올수 있도록 승개(昇開) 장치도 해놓았다. 잠수교가 개통됨에 따라 제1, 제3한강교의 교통량 분산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으며 남북간의 교통시간도 단축됐다. 이 다리의 2층은 1982년 6월에 준공되었는데 이것이 반포대교이다. /조선
[1973년] 경주 천마총 천마도장니 출토
1973년 7월 15일 경주시 황남동 155호 고분(천마총)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천마도장니가 발견되었다. 5~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품은 말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흙이 튀는 것을 막아 주던 말다래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힘찬 생동감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성실한 묘사가 특징이다. 천마의 몸에 그려진 반달 모양의 무늬는 남부 러시아 고대 스키타이 미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마도장니는 벽화를 제외한 삼국시대의 유일한 그림으로 신라 미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었다./브리태니커
[1968년] 중학입시제 폐지- 중학교 평준화
1968년 7월 15일, 정부가 중학교 입시 철폐안(案)을 발표했다. 성장발육에 지장을 줄 정도로 극심한 입시지옥으로부터 어린 아이들을 구해내자는 것이 취지였지만, 막 궤도에 오른 산업화에 투입할 일정 수준의 균질한 인력 확보도 감안한 결정이었다.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부터는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전주, 1971년부터는 전국의 모든 중학교 입시제를 폐지하고, 학생들은 추첨을 통해 무시험으로 진학하며, 세칭 일류 중학교는 단계적으로 3년 안에 학생모집을 중단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에 따라 경기중·서울중·경복중·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교는 1969년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고 학교를 폐쇄했다.
개혁안이 발표되자 당연히 학부모를 포함한 각계의 지지와 환영이 이어졌지만 막상 시행하고 보니 엄청난 실력차, 교원·교실 부족, 소속감 결여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시행 첫해 51%였던 진학률은 62.6%(1970년), 68.7%(1971년)로 점차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조선
[1964년] 극단 ‘토월회’ 조직한 박승희씨 별세
극작가 춘강 박승희 선생이 1964년 7월 15일 별세했다. 춘강은 3·1운동 이후인 1923년 ‘토월회’를 조직, 20여년 간 운영하며 우리나라 근대연극의 토대확립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선조 말 초대 주미공사와 총리대신을 역임한 박정양의 셋째아들인 춘강은 메이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토월회 조직 이후 20여년의 연극생활동안 연출 1백80여회, 번역-번안-창작-각색 작품만 2백여편에 이를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현재 그의 창작희곡 가운데 ‘이 대감 망할 대감’ ‘혈육’ ‘홀아비형제’ ‘고향’ 등 4편이 전하고 있다.
춘강은 연극운동가로 우리나라 근대연극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선구자 중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문화체육부는 1994년 9월의 문화인물로 춘강 박승희 선생을 선정했다. /조선
[1946년] 조선체육회, 올림픽대책위원회 설치
올림픽 위원회는 올림픽정신을 국내에 보급/발전시키고 한국의 체육 및 스포츠 활동을 국제무대로 확산하여 인류평화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 : Korean Olympic Committee)는 1946년 7월 15일 조선올림픽대책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어, 1947년에 제41차 IOC(IOC :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에서 IOC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KOC는 대한민국 정부가 채 수립되기 전인 48년 1월 30일에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 5회 동계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 올림픽 가족이 되었다.
48년 런던올림픽은 KOC가 선수단을 파견한 첫 하계올림픽이다. KOC는 2차례의 올림픽(제6회, 22회)을 제외하고는 모든 올림픽에 참가, 전세계 올림피안들과 평화와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
특히 1952년 핀란드 헬싱키하계올림픽은 전쟁중에도 참가하여 올림피즘의 숭고한 이상을 앞서 실천한 나라로 찬사를 받았다.
[1940년] 김지미(金芝美) 출생
동양적인 미모와 강인한 성격을 바탕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여배우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발탁되어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뒤 1989년 〈아낌없이 주련다〉까지 모두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동양적인 미모와 강인한 성격을 바탕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1960~70년대를 풍미했다. 1974년 〈토지〉로 제13회 대종상과 파나마 영화제의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1987년에는 지미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제작영화로는 〈티켓〉(1986)·〈아메리카·아메리카〉(1988)·〈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22년] 일본 공산당 창건
1922년 7월 15일 가야타마 센[片山潛],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 등의 주도 아래 일본 최초로 공산주의 정당이 결성되었다. 이후 당국의 탄압과 검거로 해체와 재건을 거듭하다가 1930년 이후 지하활동으로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합법정당으로 재건되면서, 1949년 총선거에서 35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극좌모험적 전술로 대중의 지지를 점차 잃게 되자 일본 공산당은 소련파와 중국파를 축출하고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를 중심으로 자주노선체제를 견지했다. 1972년 중의원 선거에서 37명을 당선시켜 일약 제2야당으로 부상했으나 그후 다시 퇴조를 거듭했다. 기관지로 <아카하타 赤旗>를 펴냈다./브리태니커
[1906년] 중국 여성혁명가 추진(秋瑾) 처형
← 중국 여성혁명가 추진(秋瑾).
추진(秋瑾)의 눈 앞에 펼쳐진 의화단 사건은 실로 충격이었다. 청조를 짓밟은 열강들에게는 굴욕감을 느꼈고, 침략에는 무력하면서도 민중에게는 고압적인 청조에게는 분노가 솟았다.
어느덧 27세, 결혼도 했고 1남1녀의 어머니였지만 선진문명에 목말라한 추진은 1904년 가족을 뒤로 한 채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사격연습도 하고 폭탄제조법도 익히며 혁명을 준비하던 중, 쑨원(孫文)이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하자 자신도 동맹회에 가입, 고향인 저장(浙江)성 분회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청조의 요청으로 일본 정부가 청국 유학생들을 단속하자 추진은 1906년 2,000여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여성혁명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비밀결사에 가입하고 혁명의 아지트인 대통(大通)사범학교를 운영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거사를 함께 도모하던 한 동지가 예고도 없이 먼저 봉기, 실패하는 바람에 츄진도 곧 체포돼 7월 15일, 뜻도 펴보지 못한 채 저자성에서 처형됐다. 추풍추우수쇄인(秋風秋雨愁殺人ㆍ가을바람 가을비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 처형되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시였다./조선
[1873년] 독립운동가 이봉우(李鳳雨) 출생
1873. 7. 15 부산 ~ 1921. 9. 23.
본관은 경주. 일명 봉우(奉雨). 호는 백단(白旦). 대한제국 궁내부(宮內府) 기사(技師)를 지내다가 1908년 간도로 망명했다. 1910년 정동중학교(正東中學校)를 설립해 육영사업에 노력했으며, 국민회(國民會)에 가입해 활약했다. 1918년 김규식(金奎植) 등 39명의 이름으로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할 때 국민회 대표로 서명했다. 1919년 4월 한족독립기성회(韓族獨立期成會)의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임명되어 구춘선(具春先)·마진(馬晉)·유예균(劉禮均)·최원일(崔元一)·고용환(高龍煥) 등과 함께 활동했다. 자유시사변이 발생하자 국민회 대표로 군비단·광복단·신민단·농민회·공의단·태극단 등의 대표와 함께 1921년 9월 성토문(聲討文)을 발표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연락을 위해 상하이[上海]로 가던 중 만주 옌지 현[延吉縣]에서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55년]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의사 출생
1855(철종 6)∼1920. 11. 29.
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일우(日愚).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한의학을 배워 한약방을 차렸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조국의 독립을 의논했다. 1915년 라오허 현[饒河縣]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동광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4일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이 되었다. 노인단의 독립투쟁노선에 따라, 일본총독 등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그해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8월 서울에 잠입했다.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정무총감·만철(滿鐵)이사·일본경찰 등 37명을 사상시켰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유해는 감옥 공동묘지에 있다가 이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606년]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출생
← 렘브란트, 유화로 그린 <자화상>(1661~62경)
1606년 7월 15일 태어남 / 1669년 10월 4일 죽음
렘브란트는 서양미술사의 거장들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네덜란드 화가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며, 20세 초반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루벤스를 위시한 유럽의 일류 화가들과 경쟁하고자 성경과 신화를 주제로 야심만만한 대작들을 그렸다. 1631년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상인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한편 종교화 작업을 계속했다. <엠마오스의 그리스도 Christ at Emmaus>(1628) 등에서 보듯 일찍부터 독특한 명암 해석을 통해 공간에 통일성과 깊이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법의 암시적 효과로 인해 그의 초상화들은 감정의 내면성과 섬세한 뉘앙스를, 종교화들은 절제되고도 강렬한 영성을 띤다. 주문받아 제작한 <야경 Night Watch>(1642)은 초상화이면서도 이와 같은 독특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1640년대에는 여전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제작 주문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는 일련의 종교화들과 자화상들을 통해 한층 더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칼로 찍어 바른 듯한 임파스토, 거친 질감,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 등 그는 전통적 예술의 규칙들을 무시한 '산문성'으로 인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탁월한 화법으로 당대 및 후세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브리태니커
[1099년]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 세계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차 십자군은 먼저 군중 십자군에 대한 승리로 자만하고 있는 니케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안티오키아를 공략한다. 그러나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함으로 해서 군웅들 간의 유대감이 사라지고 군웅 할거로 치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몇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위키백과
십자군[十字軍, crusade]
유럽인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군사 원정(1095~1270).
8차례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았는데 목적은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성묘(聖墓)를 이슬람교도의 지배로부터 탈환하는 것이었다. 11세기에 봉건 유럽에서는 상업과 종교가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예루살렘과 동방의 성지 순례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제국은 점점 강대해지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유럽, 특히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알렉시우스를 돕고 그리스도의 성묘를 탈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의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베르망두아의 위그,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보잘것없는 전사·모험가·광신자 들의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형성되었다. 그후 2년이 넘도록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모여 오늘날의 터키 지역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1098년 그들은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1099년 7월 15일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후 몇 십 년 간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등 소위 십자군 국가를 세웠으며, 그곳에 유럽인 통치자를 두었다. 그들은 해안과 내륙의 변경을 따라 성을 세웠다.
1144년 십자군은 모술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세운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자 장기에게 에데사를 빼앗겼다.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 유게니우스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이 제2차 십자군 원정 동안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이끄는 군대가 1148년 봄 예루살렘에서 연합해 5만 명의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을 공격했다. 그들은 장기의 후계자 누레딘이 이끄는 군대에게 밀려 결국 후퇴했으며, 제2차 십자군 원정은 치욕스런 패배로 끝났다. 누레딘은 1154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살라딘이 1169년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고 1183년 알레포를 점령함으로써 십자군 국가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1187년 살라딘은 갈릴리 바다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을 거의 무찔렀으며 10월 2일에는 예루살렘과 다른 십자군 요새를 대부분 점령했다.
예루살렘 함락에 충격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때까지 모인 중 규모가 가장 큰 십자군 부대가 1189년 5월 붉은수염왕 프리드리히 황제의 지휘로 출발했다. 그러나 1년 후 프리드리히가 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살라딘과 프리드리히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191년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비잔틴 속주 키프로스를 점령한 뒤,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2세와 연합해 본토의 아크레를 공격했다. 7월에 그들은 아크레를 함락하고 그곳 주민들을 학살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데 실패한 후, 1192년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5년 동안 유럽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었다. 1198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 소집한 제4차 십자군 원정은 예기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서 들여온 배와 장비의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베네치아인들을 도와 헝가리의 자라 시를 점령한 다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 4월 13일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60년 이상 존속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의 이러한 행동을 비난했지만, 제4차 십자군은 비잔틴 교회와 라틴 교회의 동맹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버렸으며, 비잔틴 제국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그후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의 열기가 되살아나 1212년 비극적인 소년 십자군이 생겨났는데, 이때 참여한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실종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3년 후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한번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할 것을 호소했다. 그결과 주로 프랑스와 독일 사람들로 구성된 제5차 십자군은 1219년 나일 강 근처의 담미에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수를 만나 카이로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던 십자군은 8년간의 휴전에 합의하고 어물쩡하게 원정을 끝마쳤다. 이것은 교황이 직접 조직한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제6차 십자군 때 출정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적이 있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에 10년간 예루살렘을 유럽인들에게 반환한다는 협정을 얻어냈다. 1244년 몽골족의 진출로 서쪽으로 밀려온 크바레즈미 투르크족이 이집트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1248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 제7차 십자군도 제5차 십자군처럼 이집트에서 패배했다. 루이는 22년 뒤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륙한 직후 대부분의 군대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그후로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원정활동이 계속되었지만 십자군 시대는 끝나버렸다. 이집트의 맘루크(노예군인)가 몽골족을 시리아에서 몰아낸 후 맘루크족 술탄 바이바르스는 십자군을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몽골족과 동맹을 맺었다. 1268년 맘루크는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 1289년 그들은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1291년에는 본토에 있는 라틴인들의 최후 전초기지인 아크레마저 점령했다. /브리태니커
그밖에
2009년 이란 여객기 추락 ... 168명 숨져
2009년 서울-춘천 고속도로 개통
2005년 노무현대통령 빠라스 네팔 왕세자 내외 접견
2003년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서 새만금 사업 판결선고 전까지 공사중단을 결정
2003년 산악인 한왕용씨, 세계 11번째-한국인으로서 3번째 히말라야 14개봉 정복
1998년 고려대 천준 교수, 새 암치료법 미국 특허 획득
1997년 울산시, 울산광역시로 승격
1994년 자크 상테르 EU 집행위원장으로 선출
1987년 대만, 38년 만에 계엄령 해제
1983년 목포에 해양박물관 건립
1982년 인도 대통령에 자일 싱 당선
1981년 중국, 인민공사 전면철폐
1980년 솔라즈 하원의원, 미국의원 최초로 평양 방문
1980년 임진왜란때 영남동부지방 의병기록인 동계실기 원본 발견
1979년 멕시코의 대통령(1964-70) 디아스 오르다스 사망
1974년 그리스계 키프로스군 쿠데타. 마카리오스 탈출
1968년 동독, 서백림(西伯林) 통행제한조치 발효
1958년 이라크 신정권, 아랍연맹 해체를 선언
1958년 미국, 레바논 파병
1957년 미국, 주한미군에 핵무장화 착수 발표
1953년 창경원 일반 공개
1950년 국군, 제2군단 창설
1949년 병역법 국회 통과
1939년 일본,국민징용령 시행
1939년 알리 하메네이 이란 대통령 출생
1933년 서울-동경 직통전화 개통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 개설
1915년 조선은행 ‘하얼빈지점’ 개점
1913년 안악회사건 판결공판에서 윤치호-양기택-이승만-안국태-옥관빈에 6년 선고, 기타는 무죄
1912년 중국, 손문 등 제2혁명 발발
1904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사망
1902년 한국-덴마크 수호조약 체결
1900년 경인간 최초로 전화 개통
1896년 국내철도규칙 반포
1886년 프랑스 문학평론가 자크 리비에르 출생
1879년 독일. 보호관세법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