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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8
12월18일[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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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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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nuaZdGHGvM
[서울대교구 홍웅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청소년국 청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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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임마누엘,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입니까?>
또다시 성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성탄이 아무리 수백번, 수천번 되풀이된다할지라도, 우리가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그 성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는 성탄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은 간절한 원의와 열망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예수라는 이름 이상으로 심오하고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인가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이스라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자랑거리였습니다. 이러한 임마누엘 신앙은 이스라엘 역사 안의 중요한 순간마다 강조되고 상기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 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 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 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부르짖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건가요? 정말 계시다면 어떻게 이토록 큰 곤경과 수모를 겪게 하시는 것인가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이래,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의 침략으로 공포에게 떨고 있을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분명 함께 계셨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바르실 때, 예언자들을 통해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처참히 함락되고 파괴될 때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할 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참담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부르짖고 있는데, 대체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신가요?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당신 자녀들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나요?”
그러나 우리가 정녕 잊지 말아야 할 불변의 진리 한 가지를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재앙 한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우리 인간을 환대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베푸시며, 발버둥치는 인류를 도우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자비를 베푸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이 큰 환난에 당당히 맞서게 하시며 극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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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그분의 손길이 내 인생에 닿는 순간>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전환점은 다름 아닌 "강렬한 하느님의 손길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닿는 순간 요셉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제 인생 안에서도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하느님 그분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실재를 생생히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재물도, 명예도, 사람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더군요.
진정한 내적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하느님 체험의 순간은 얼마나 은혜로운 순간이었던지,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요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셉이 탄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로 인해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을 알게 된 요셉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하루하루였습니다. "마리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나?"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서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는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 등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까? 언제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생생한 자취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에 취해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그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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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IhftOF94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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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옛날에 세 자매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자매는 모두 예뻤으나, 그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결점이 있었습니다. 큰딸은 게으름뱅이이고, 둘째 딸은 훔치는 버릇이 있고, 셋째 딸은 험담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한편, 아들 삼 형제를 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세 딸을 모두 자기네 집으로 결혼시키지 않겠느냐고
청해 왔습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자기 딸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그대로 말하자 부자는 그런 점은 자기가 책임지고 그것을 고쳐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는 게으름뱅이 첫째 며느리에게는 여러 명의 하녀를 고용해 주었고, 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둘째 며느리에게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에게는 매일 같이 오늘은 험담할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아버지는 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여 사돈집을 찾아갔습니다. 큰딸은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고, 둘째 딸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시아버지가 자기에게 관계를 꼬치꼬치 묻기 때문에 귀찮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셋째 딸만은 부잣집의 며느리로 들어가서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버릇은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쳐지기 전까지는 절대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만은 뱀이 일으키는 감정입니다. 불만을 품고 남을 심판하면 이미 뱀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나도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남의 죄도 뒤집어쓸 수 있어야 ‘의로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그분 덕분으로 죄를 용서받은 입장에서 이웃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의로운 요셉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의로움이 곧 사랑이기에 의로운 사람에게만 사랑 자체이신 분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얼음을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보관할 수 없고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을 보관하려면 그 받아들이는 것의 본질을 깨뜨리지 않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그릇이란 요셉처럼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랄프 이야기도 있습니다. 랄프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였는데, 연극에서 ‘방 없어요!’라고 세 번만 하면 되는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연극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고 가난한 이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영화 ‘헬프’(2011)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 가정부들이 당하는 비인간적인 취급을 다루었습니다. 도대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병균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실 수 있으실까요?
아기 예수님을 바란다면 제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은 조약돌로도 성인을 만드실 수 있으십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도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이 되기 전에 이웃을 험담하거나 판단하는 마음부터 버립시다.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분을 맞이하는데 내가 타인의 잘못을 꼬집는 사람이라면 따듯한 밥을 냉장고에 보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의로우신 분은 의로운 사람만 모실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는 말구유와 같은 처지의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의로우신 분이 요셉이었고 그분은 그것 하나로 예수님과 성모님을 맞아들일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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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았던 국제행사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37년과 35년이 지난 행사입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이 두 행사를 통해서 국제행사를 치를 만큼 성장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주최국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행사의 결과는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즈음 스포츠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문화와 경제에서도 ‘한류’를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과 북이 화해하는 ‘평화’의 올림픽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눈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에서 살고 있지만 삶의 인프라와 문화적인 역량은 서울이 결코 뒤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39년 전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도 그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심한 박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00년 동안 만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의 도움으로 한국천주교회는 박해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변방에서 이름 모르던 가톨릭이었던 한국천주교회가 긴 어둠을 뚫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에 있었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와 1984년에 있었던 ‘103위 성인 시성식’이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여의도에서 대규모 행사와 미사를 준비하였고, 완벽하게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있었습니다. 그전의 행사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세계성체대회는 전 세계 가톨릭을 초대한 명실상부한 국제행사였습니다. 2014년도에는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복자 시복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진행하는 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울은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주관하는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흥식 추기경님은 바티칸의 성직자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4,19구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긴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서독의 탄광에서, 중동의 사막에서 땀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가 있기까지 순교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헌신했던 성직자와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서 투쟁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은 그들에게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는 경찰에게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젊은이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다음에는 성직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시오, 그래야만 저 젊은이들을 잡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비자 교리반은 신청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는 매10년 100만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성인처럼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한 이, 헐벗은 이, 굶주린 이, 외로운 이를 주님으로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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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셨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셨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하셨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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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이 말씀처럼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분께서 탄생하실 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배경을 설명합니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요셉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인 만큼 그의 입장과 처지는 어떠하였을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니다.
자신의 약혼녀와 혼인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별안간 그가 임신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장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 본인의 억울함을 풀려고 행동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하게는 돌을 던져 그를 죽일 수도 있었고(신명 22,23-27 참조), 사람들 앞에서 갖은 모욕과 창피를 주고 나서 멀리 내쫓아 다시는 고향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약혼녀가 곤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모르게 파혼 절차를 밟으며 일을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러던 가운데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리아를 그대로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왜 내가 그런 희생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요셉은 천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오래전부터 마련하신 구원 계획이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참고 이겨 낸 자기희생과 순종 덕분에, 다윗의 후손에게서 구원자가 나오리라는 약속은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아버지가 된 요셉의 보호 아래 장성하여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만민의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묵묵히 헌신한 요셉 성인을 공경하며, 우리도 그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명령이라면 그 어떤 삶의 문제보다 앞세울 수 있는 마음과, 이를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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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요셉의 응답>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이 이야기는 요셉 성인이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로 성모님을 선택하실 때, 마리아라는 한 처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루카 1,26-27) 이것은 하느님께서 요셉 성인과 성모님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두 사람이 약혼한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도 따로 주어지고 ‘응답’도 따로 이루어진 것은, 두 사람이 아직 약혼 단계여서 ‘같이 살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간 일이 먼저 있었고, 요셉 성인을 찾아간 일은 마리아의 성령 잉태 사실이 드러난 다음입니다.>
본문에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저절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천사가 찾아온 일과 천사와 나눈 대화도 모두 전했을 텐데, 성모님과 천사가 나눈 대화에서는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천사가 직접 요셉 성인을 찾아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 쪽에서도 요셉 성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셉 성인이 성모님을 믿었고, 성모님의 말도 모두 믿었다는 점입니다. <사랑했으니까 믿었습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라는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모님과 아기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믿었으니까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는 말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과 성모님 사이에서만 일어난 일로 생각했고, 아기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니까 자기는 뒤로 물러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할 것이고, 아기를 요셉 성인의 아기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님과 아기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라는 말은, 요셉 성인이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 성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소설을 쓰듯이 상상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이루어진 일의 결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 성인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또 성모님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알려 주고, 아기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알려 준 것은, 성모님이 요셉 성인에게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기도 하고, 아기 예수님의 아버지 역할을 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달해 준 일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과 천사가 한 말들은,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는 일, 누가 옆에서 보고 기록할 수도 없는 일, 순전히 요셉 성인 자신의 혼자만의 체험이고 증언입니다. (성모님이 천사를 만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요셉 성인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나는 마리아를 믿는다. 그리고 마리아가 나에게 한 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천사가 ‘성령 잉태’와 ‘메시아 강생’을 설명해 줄 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들도 미리 알려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자신들이 겪게 될 일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두 분의 응답에는 그런 고난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응답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기 자신을 모두 봉헌한 일, 즉 전적인 헌신과 희생입니다.>
요셉 성인의 응답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일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또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한 일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고, 또 성모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서에 있는 ‘임마누엘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설명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요셉 성인과 성모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 즉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고,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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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창신 이냐시오 신부님]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인내하자.>
제가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군생활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가 힘들어했던 것 중에 하나가 태권도였습니다. 군복무기간 중에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저는 자대배치를 받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평소 훈련이나 작업이 없으면 짬짬이 시간을 내어 선임자들로부터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승단시험이 있다고 하면 중대에서는 한 명이라도 승단시험에 합격시키려고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킵니다.
몸에 좋은 운동이기는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몸이 유연하지 못해 연습이 너무 힘들었고, 매번 아침이 되면 태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었습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져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한 덕에 다른 사람보다 늦기는 했지만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습니다. 승단시험에 합격한 그날의 감격과 기쁨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과 기쁨을 꿈꾸지만 고통의 시간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생의 여정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 있듯이 기쁨을 원하는 만큼 고통의 시간에 대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생에 겪게 되는 어려움, 고통을 제 나름대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누구나 살아가면서 당연히 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요, 이 사회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들입니다. 제가 군에서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 힘들었던 연습을 했던 것도 군인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었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공부라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산고를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공공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법규들을 준수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사회적, 가정적, 그 외 나의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당연한 고통입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러한 고통의 극복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엔 회피해도 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고통이 아니기에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고통을 견딤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고통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다거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으로 헌신하는 일 등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고통보다 더욱 고통스럽고 벅찬 것들이지만 이 고통의 감내로 세상은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고통과 성모님과 함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친 요셉의 생을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삶은 피할 수 있었던 고통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게 됨으로 겪게 될 사회적 비난을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법대로 살아가는 요셉 역시 잉태한 마리아를 받아들임이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더 큰 뜻을 위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선택한 고통으로 세상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온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도 지금 고통의 언덕이 어떤 형태 이로든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든, 세상을 위한 것이든 힘껏 참아내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을 인내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더 큰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회피라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안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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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는 공개적인 법적 행위를 하거나 파혼에 대한 사적인 문서를 작성하여 그녀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마리아의 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려 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말씀과 매우 긴밀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언제나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아마도 큰 실망에 빠졌을 것이고, 크게 분노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외적인 법의 준수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해결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요셉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 있는 존재다. 인간의 근본적인 첫 관계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다른 어떤 관계도 좋을 수 없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68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한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보호자가 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세심히 보살핍니다.
우리는 누구의 보호자로 불림을 받았을까요? 나에게 맡겨진 사람을 더 세심히 보살피려면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내 멋대로가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를 보호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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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해욱 요아킴 신부님]
<하느님 사랑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인간과 세상의 구원, 어두움에 빛을 가져온 탄생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성취시키기 위한 탄생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한 모습으로 마구간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탄생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탄했습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매년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 없이 연중행사로 지내는 무덤덤한 성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쁨으로 다가오는 탄생인가? 아니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탄생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일회적 행사로 지내버리는 탄생인가?
만일 그분의 탄생이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탄생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탄생은 단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비천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욕망, 이기심, 교만을 버리도록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번 성탄은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온 마음으로 느껴보고 소중히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성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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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본디 12월 17일 복음(1,1~17)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의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이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요셉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심이 갑작스럽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오랜 한 가문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그 표현이 우리 한국인의 정서나 사고 의식과 아주 흡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곧 우리 격언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다!’는 것과 너무 흡사합니다. 다만 5번에 걸쳐서는 이런 단서를 달았지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자식을 낳았다.’는 표현은 곧 ‘어머니에게서 낳음을 받았다.’는 특별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제 복음에 이미 예수님은 요셉에게서 태어난 분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1,16)고 기록하면서, 오늘 복음에서는 그 까닭을 “마리아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1,20)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곤혹스럽고 황당하지만, 그 이유를 오늘 복음은 요셉의 꿈을 통해서 그 해답을 주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장황하게 족보를 기록한 까닭은 바로 오늘 복음을 열기 위한 발판이었으며, 그 핵심은 곧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 얼마나 혹독한 이야기를 요셉은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을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우리 각자와 그리고 삶에 대조해서 숙고할 때 신앙의 깊은 차원, 하느님의 섭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 보태 주시다. 하느님께서 얹어 주시다. 하느님께서 덧붙이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는 그 이름에서부터 요셉 성인이 누구이며 어떤 소명을 받고 태어나셨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되신 까닭은 바로 그 자기 뜻과 전혀 다른 하느님의 연장과 도구로써 선택에 따른 특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래 요셉의 의중을 성서는 밝히고 있으며, 이것이 한 남자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성숙한 선택에 따른 응답, 곧 하느님께 뜻에 대한 신앙의 순종입니다. 다만 그런 선택의 이면에는 요셉 성인의 됨됨이가 잘 드러난 ‘상남자’다운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19) 이로써 우리는 간접적이지만 요셉 성인의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내면을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 ‘남모르게’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는데 우리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남모르게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한 돌봄이 진정 ‘상남자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주 쿨하게’ 떠나가려는 것이겠죠.
물론 성경의 때는 모든 것이 충만할 때를 말하는데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1,20)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만일 꿈에 천사가 나타나지 않고 요셉이 자신의 결정을 마리아에게 통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기에 가장 필요한 때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전달했으며, 이로써 요셉은 자신과 아내 마리아의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하게 되었고,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덧붙여 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냥 맡기시지 않고 그에 필요한 은총을 꼭 덧붙여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물론 요셉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식 아닌 자식을 자기 자식인 듯’ 돌봐야 하는 ‘양부의 역할’을, 하느님의 선택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런 은총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셨고, 그래서 올바른 가문의 사람을 선택했다고 느껴집니다.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특별한 은총을 덧붙여 주셨듯이 오늘 저희에게도 새로운 은총을 덧붙여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분명히 하느님은 은총에 은총을 덧붙여 주실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덤으로 덧붙여 주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의 그릇이 저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 다른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며, 다만 저희 모두에게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저희가 늘 주님 구원의 도구이자 연장으로 잘 쓰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도록 충실히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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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자동차와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홀로 자전거 여행 중이었는데 차와 부딪힌 것이었지요.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도 이 차의 운전사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저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차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주자 중인 차였기 때문입니다. 그 차는 가만히 있는데,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차 안에 사람이 있었고 또 운전 중인 차였다면 저 역시 화를 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운전하면 되냐고? 차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운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차 안에 사람이 없으니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꼭 화를 냈어야 했나 싶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가 크게 잘못한 경우에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무조건 상대에게 책임을 물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 자체를 지우고 그 상황만을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실제로 화를 낸다고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화를 냄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상황이 더 꼬일 때도 많습니다.
전에 운전하면서 신호를 확인하고 좌회전하는데 제 좌측에 있는 차가 속도를 내어 직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 차의 왼쪽을 그대로 그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그 차를 향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괜찮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상대방 운전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저씨? 그따위로 운전하면 어떻게 해요?”
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보험회사를 불렀고, 결과는 상대방 과실 100%였습니다. 화를 내는 길보다 내지 않는 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이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그는 성모님과 약혼한 상태였지요. 그런데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화를 내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마음에 담아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한 요셉 성인이었기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쓰면서 화를 내고 복수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할 자리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하느님의 방법을 선택할 때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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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사람>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오 1,24)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에서
나 몰라라 뒷걸음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자신의 일처럼 한걸음 다가가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성껏 품어야 할 자신의 일마저
하느님 탓으로 물리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과 손발이 되어
자신의 일을 정성껏 보듬지요
그리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에서나마 이루려고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꿈에서나 이룰 수 있는 것을
현실에서 이루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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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로써 ‘야훼는 구원이시다’(신명3,21)라는 의미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하느님께서 주셨던‘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입니다.”하고 예언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조들이 전쟁 중일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할 때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함께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 힘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그분의 영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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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
-우리 하나하나가 "요셉"이자 “임마누엘”입니다-
“깨어있음, 경청, 순종”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어제 12월 17일 대림2부 첫날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O후렴”은 “오! 지혜(O Sapientia)”로 시작되었고, 오늘 둘째 날인 12월 18일은 “오! 하느님(O Adona)”으로 시작됩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의 끝은 대림으로 시작되어 우리는 하루하루 설레는 기쁨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마중나가고 있습니다.
끝은 늘 새로운 희망의 시작입니다. 엊그제 수도공동체가 선물받은 이해인 수녀의 “이해인의 햇빛 일기”라는 예쁜 시집이 따사로운 햇볕처럼 참 반가웠습니다. 암투병 후 79세 노령에도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아가시는, 영원한 현역의 수녀님의 삶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말 그대로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의 표지가 되는 수녀님입니다.
지난 목요일 12월 14일부터는 배밭 배나무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배 농사 역시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 줍니다. 배나무의 가지치기 전정과 더불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삶의 전지(剪枝)”를 통해 삶의 본질이 투명히 드러나도록 해야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침 배나무 전지와 더불어 우리 수도형제는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들도 말끔히 전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수사님, 이 추운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들 참 멋지게 전지하노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높은 사다리를 움직이며 가로수(街路樹)를 전지한 수사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를 상징하는 듯한 너무 멋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에 반해 쓴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라는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2023.12.15
이제 겨울의 시작 초겨울인데 벌써 깨어 부활의 봄을 기다리는 하늘 향한 무수한 겨울 나무들같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예언자가 실감 나게 묘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리라.”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이런 주님을 앞당겨 맞이하여 모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 공정과 정의, 구원과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화답송 후렴처럼 정의와 평화를 꽃피우며 참으로 멋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의인 요셉입니다. 주님 탄생을 앞둔 하느님의 배려와 준비가 참 완벽합니다. 이미 하느님은 의인 요셉을 예비했고 당신의 사람,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해결사 하느님은 당신의 천사를 통해 그의 약혼자 요셉을 찾아 오십니다. 여기 오늘 복음을 통해 의인 요셉에게 우리는 세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의인 요셉은 깨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참 영성의 표지가,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가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삶, 깨어 준비하는 삶, 깨어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꿈과 희망, 길과 진리, 빛과 생명의 주님을 기다릴 때 비로소 인내로이 깨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공감과 배려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묘사가 참으로 깨어 있는 의인 요셉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참으로 숨막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배려가, 분별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사랑의 배려, 사랑의 분별, 사랑의 지혜입니다. 우선적이 분별의 잣대는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태풍으로 변할 사건을 참으로 깨어 있었던 의인 요셉의 사랑의 지혜로 미풍이 되고 말았으니 천만다행입니다. 하느님은 안도했고 요셉이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둘째, 의인 요셉은 경청(傾聽;敬聽)의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의 사람, 경청의 사람입니다. 경청으로 표현되는 겸손이요 참으로 멋지고 매력적인 요셉의 인품입니다. 참으로 이런 요셉을 택한 눈밝은 하느님이요 이런 준비된 요셉을 친히 찾아 오신 주님의 천사입니다. 얼마나 요셉을 신뢰한 하느님인지 그대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시나 하느님의 위험한 모험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의인 요셉입니다. 요셉의 은밀한 주님과 만남의 내적체험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깨어 삶의 깊이에서 이런 내적 체험을 필요로 하는 우리입니다. 아마도 침묵중에 깨어 깊이 경청했을 요셉입니다.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라는 뜻인데, 또 주님을 믿는 우리 하나하나의 이름처럼 생각되는 참 아름다운 이름 예수입니다.
셋째, 의인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어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이 환히 밝혀집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예언된 임마누엘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임마누엘 이름 뜻은 얼마나 멋진지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또 하나의 임마누엘임을 깨닫습니다. 요셉의 경청에 이은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현이자 영성의 잣대이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으로 조마조마했을 하느님입니다. 그대로 거룩한 밤, 거룩한 꿈중에 이뤄진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런 순종을 통해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새삼 영성생활에 날마다의 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의 성패는 이렇듯 밤에 달렸음을 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란 시도 생각납니다. 무려 26년전 시라 더욱 반갑습니다.
“나무는
밤에 불을 켜지 않는다
밤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쉰다
나도 밤에는
그분의 어둠과 고요에 묻혀
쉬고 싶다, 꿈꾸고 싶다, 기도하고 싶다
밤에는!”-1997.7.25
이런 순종으로 이끈 이런 밤의 꿈 체험의 기억은 평생 요셉의 믿음을 늘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세례받아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하나가 요셉이요 예수님이요 임마누엘입니다. 참으로 의인 요셉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의인 요셉처럼 깨어 경청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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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1,20)
<<나는?>
오늘 복음(마태1,18-24)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초점은 '요셉'입니다. 반면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에서는 '마리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 그는 법대로 사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상태에서 잉태를 했다는 것은 율법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는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혼인해야 만이 합방이 허락되는 당시 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요셉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하느님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잘것 없어보이는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당신 구원 사업의 결정적 도구로 쓰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메시아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십니다.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를 꽃피우시기 위해 이 땅 위에 내려오십니다.
이렇게 묵상하고 나니, 더 많은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잘 쓰여지고 있는지?'
'임마누엘이신 구세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해방의 삶을 살고 있는지?'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도록 노력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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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VmlDXfHF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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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 20)
성령은
생명의 빛입니다.
성령은
쿵캉쿵캉 뛰며
움직이는 생명의 활동
그 자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으로 탄생하시어
인격으로 우리를
들어높여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의 가치를
되찾아 주시는
인격의 원천입니다.
인격이 파괴되고
관계가 파괴되는
이 땅 위에 인격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으로 맺어기를
간절히 바라입니다.
옛것만을 되풀이하는
우리을 위해
당신 친히 새 사람이
되시어 인격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 대림시기가
인격의 가치를 회복하는
성령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생명 안에 있는
성령의 불꽃이
누군가의 삶에
또 다른 불씨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아름다운 인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입니다.
인격의 출발이
성령임을 믿으며
성령의 역할을
되새겨보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령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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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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