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편집: 묵은지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는 힘겨운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그들을 조율하며 임금의 자리를 무려 51년 7개월이나 누리고 나이 또한 83세까지 살며 조선 임금 가운데 최장수의 수명과 재임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중재와 자신의 유연한 탕평책을 통해 분쟁을 최소한으로 완화시킴으로서 그간의 악바리같은 싸움을 절제시켰으며 특히 잔인한 형벌인 압슬형, 낙형, 자자형 등과 같은 악질 형벌을 없애고 균역법을 통한 조세제도의 모순을 개혁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첩의 자식이라는 서러움을 안겼던 서얼 차별을 막아 그들에게도 벼슬을 할 수 있는 길을 터 주는 등 집권을 장수한 임금답게 영조는 많은 치적을 쌓아가며 정사를 펼쳐 안정감있게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습니다.
이런때 조선에는 명문가로서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에 두 사람의 문장가로 대표되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반남 박씨 가문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이었고 또 한 사람은 기계 유씨 가문인 창애(혹은 저암) 유한준(1732~1811)으로 이들은 동시대를 살면서 같이 학문을 배우며 매우 화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두 집안은 정치적으로도 같은 노론계에 속하기도 했지만 높은 학식을 자랑하는 명문 집안으로서 주위의 존경을 받으며 아주 돈독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지원과 유한준은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가면서 어찌된 일인지 서로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새삼 문인상경(文人相輕)이란 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두사람의 모양새가 중국 후한시대에 대문장가인 '반고'와 '부의'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으로 그때에도 반고와 부의는 서로의 친근함을 항상 문장을 통해 자웅을 겨루듯 지냈습니다. 그러다 라이벌 의식이 과한 나머지 번번한 다툼을 일으켜 결국 서로를 헐뜯는 사이가 되버렸다해서 비롯된 말로 이를 가리켜 '문인들은 서로 상대를 경멸하는 습성이 있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사자성어 입니다.
왜그러는지는 몰라도 구시대의 소위 학자라 하면 옹고집에 벽창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 이런 오래전의 이야기들이 고착화 되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들 두사람 역시 그래서 였을까 학식이 쌓이고 학문이 성장하게 되면서 차츰 서로간의 견해차를 나타내며 사이가 벌어지더니 급기야는 서로의 글을 혹평으로 비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창애 유한준은 호가 '저암'으로도 알려진 '저암집'을 낸 문장가로 형조참의까지 지냈으며 연암 박지원 역시 자유로운 문장가로 정조시절 이른바 '문체반정'의 중심에선 문제작으로 알려진 '열하일기' 등을 집필하였으며 벼슬은 크게 욕심내지 않아 양양부사를 역임하기까지 학자로서의 기개를 지켜나간 인물입니다.
이렇게 두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였지만 서로간의 하찮은(?) 비방으로 자존심을 긁어대 두 학자는 서로의 시시비비가 집안문제로 비화하여 선친의 묘지 문제로까지 다툼을 벌이는 지경이 되버렸습니다. 학문을 사이에 두고 비롯된 이들의 사사로운 감정이 점점 확대되어 서로간의 자존심에 치명상을 받게되자 감정이 극도로 치달아 돌이킬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이들은 묵은지 뿐만 아니라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야말로 별거 아닌 것을 시작으로 앙숙의 관계가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지며 가문끼리의 원수지간이 되버린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전까지 학식이 높은 문장가로 조선 학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명성을 쌓아왔고 젊은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냈었는데 어찌하여 그 지경으로까지 가게 되었는지 묵은지로서도 그런 결과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어이없게도 심각하게 두 집안 문제로 치닫고 있었는데 그 한 예로 박지원의 둘째 아들인 혜전 박종채는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움의 내용을 담은 자신의 글 '과정록'에서 조차 유한준을 '백세에 걸쳐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며 심하게 비난을 퍼부어댔고 또한 유한준의 아들로 자신의 호를 딴 제목의 일기 '흠영'으로 유명한 유만주도 역시 박지원을 매우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잡스러운 인간'이란 심한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들이 활발하게 서로 경쟁하듯 집필을 하고 책을 발간하던 이 시기는 사실 이전에 정조에 의해 일어났던 '기사순정' 혹은 '비변귀정'이라는 정책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게 바로 후세에 이름지어진 정조의 '문체반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임금의 자리를 어렵게 이어받은 정조는 왕권의 권위를 세우는 치세로 당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하는 자유로운 문장가인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이같은 종류의 글을 정조는 단순히 재미와 흥미위주로 지어진 '패관소품(소설이나 잡기로도 불리는 가벼운 한문 문체)'이라 규정하고 점잖은 품위를 지키는 고문(古文)을 모범으로 삼고 권장해야 한다며 자신의 통치차원에서 이를 배척시킨 일종의 문예부흥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의 27명 임금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방대한 문집인 '홍재전서'를 남기는 등 가장 학구적이었던 정조는 학자로서 자신의 학문관에 문체를 치세의 기본으로 삼겠다는 생각이었고 이런 정조는 당대의 이같이 가볍게 여기는 문예 현상을 문풍의 타락으로 간주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일으켰으니 그는 문예부흥의 산지로 '규장각'을 중요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승정원, 홍문관을 비롯한 제 기관의 기능을 통합하고 장악함으로서 분산되었던 문예를 기반으로하는 권력의 틀을 일원화하여 문화정책을 '효율화'시켰습니다. 또한 세간에 유행을 타고 떠돌아다니는 잡서나 패관소설 등은 집필이나 수입을 금지시켰고 중국의 고문을 위주로 권장을 하였는데 박지원은 정조의 이같은 문체반정에 저항이라도 하듯 거리낌 없는 자신의 독특한 문체를 파격적으로 집필하였고 그가 집필한 '양반전'이나 '허생전' 등 수많은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리에 읽혔습니다.
야심차게 시작된 문체반정은 정조가 의도한대로 모든게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지원과 같은 새로운 신문학으로 저항하는 세력들도 생겨나고 거듭되는 새로운 문체의 유행은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관료적 지배계층인 양반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은 공론만을 일삼던 도학적 학풍에서 벗어나 조선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새로운 학풍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변화로 보아 정조의 문체반정은 과연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룬 성공한 반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조의 고도 정치술수가 깔려있는 그의 의도로 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어쨌던 그는 당시 유행하는 신문화를 완전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튼 영조와 정조시대를 내려오면서 조선의 문화는 더욱 견실해 졌으나 정조가 죽고난 이후 세도정치의 아비규환 속에 순조와 헌종, 그리고 철종을 지나는 동안 부도덕한 세도정치는 극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이 세도정치를 끝장낸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앉혀놓고 대신 자신이 치세를 하던 시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박지원의 후손으로 홍문관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던 환재(헌재) 박규수가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를 보고 그 시의 주인공을 불러 들이려 하는데 알고보니 그는 다름아닌 유한준의 후손인 16세의 청년 유길준이었습니다. 박규수는 유길준이 자신의 집안과 앙숙의 관계로 지내온 유한준의 후손임을 알았지만 그런 것을 문제 삼거나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기꺼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박규수의 부름을 받은 유길준도 그를 만나려 했지만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는 '원수의 집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절대로 안된다'며 완강하게 반대를 하는 통에 만남은 즉시 이루어지지는 못했는데 그래도 이들의 간곡해진 마음은 막을수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박규수와 유길준은 만남을 이루었고 이때 박규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누히 되뇌였던 백세의 원수집이라는 원한 맺힌 말을 머리속에서 깨끗히 지워버리고 유길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박규수는 자신이 먼저 내민 화해의 손길로 '그동안 양쪽 가문이 서로간에 쓸데없는 불화로 지내왔으니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수 있도록 노력하자' 라는 말을 합니다. 유길준 또한 박규수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고 개화사상에 눈뜬 그의 문하에 들어가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김윤식 등의 개화 청년들과 실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유길준은 스승 박규수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그때 박규수의 서실에 놓여있던 서양에서 가져 왔다는 '지구본'을 접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특히 유길준은 박규수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자신에게 개화의 바람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었던 것은 스승 박규수로부터 '해국도지' 한 질을 선물로 받고나서 개화사상에 눈을 뜬 후였습니다.
어쨌던 두 집안이 화해를 이룬 것은 실로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으며 이런 극적인 화해의 사실은 장안에도 자자하게 널리 화제가 되었습니다. 유길준은 자신의 호를 딴 시집 '구당시초'에 실린 시 한 편으로 두 집안의 화해 분위기를 잘 나타 내었는데 박규수 역시 이 시를 보고 크게 감탄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승의 덕에 개화사상에 눈을 뜬 청년 유길준은 이후 근대 최초의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한 유학생이 되기도 하였는데 덕분에 일어와 영어에 능통하여 외교적인 역할을 많이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의 근대적인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여 국민계몽에 앞장서는 일을 하는 등 개화기를 맞은 나라를 위해 신교육을 받은 일꾼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 나갔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미국의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길에 오른 유길준은 구한말의 요동치는 정세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국민개사론'을 제창하고 흥사단을 조직하여 대중교육을 위한 노력과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우고 교과서의 편찬과 사범학교도 설립하는 등 근대적 지식을 갖춘 국민계몽을 위한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집안간의 감정 대립은 흔히 있을수 있는 상황들이지만 이 두 가문의 상황이 굳이 회자되는 것은 이 두 집안이 당대의 문장가로서 명문가였기에 후세에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점이고 또한 이들 후손들이 난국에 중요한 인물로 나름대로 나라의 큰일들을 감당하였기에 이를 의미있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들의 유명세는 남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림을 앞에두고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진정 보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창애 유한준은 당대에서는 모범적으로 받들었던 고문에 충실한 학자였으며 이에 반해 종전의 고문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현실을 비판하며 쓰고자했던 연암 박지원과는 문학의 방향이 달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학자로서 서로간의 학풍을 존중하고 논의로 풀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피차간의 오해와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무려 100년의 세월 동안이나 집안간의 적대감을 키워 마음에 담고 살아왔다는 것은 덕망을 겸비해야할 학자로서는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하여 후대까지 이르게된 이런 부끄러운 상황은 드디어 박규수와 유길준이라는 후손들에 의해 풀어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작된 이들의 학문을 통한 학습과 노력은 한발 더 나아가서 개화기를 맞아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라에 재목이 되어 암울한 세상을 비추는 한줄기 빛으로나마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이 된 것은 묵은지가 보았을때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