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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묵은 땅을 갈라 (렘4:1-4절)
대영제국이 오래 동안 자존심을 걸고 만들어낸 세계적인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학식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 부씩 소장하고 있었던 그런 훌륭한 사전입니다. 엔사이커피디아 브리타니카 (Encyclopedia Britannica) 라는 백과사전인데 하도 유명하여 세계적인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그렇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768년 스코틀랜드에서 설립된 회사에서 만든 것으로서 200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전통을 자랑하는 그런 백과사전입니다. 1990년대에만 해도 년 6억5천만 불이라는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마이크로소프트와 글로리아 두 회사에서 동일 종류의 제품이 나오면서 부득불 이 브리타니카 회사는 제3위로 위치가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CD-ROM 백과사전이 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CD-ROM이 나왔을 때는 브리타니카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애들의 장난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역사와 전통을 고집한 결과로 고객은 역사와 전통을 운운하는 브리타니카의 묵은 땅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결국 1999년에 이 회사는 아주 헐값에 팔리고 말았습니다. 하기야 지금은 CD-ROM 백과사전도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으며 인터넷에서 간단한 검색만 해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지식도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과 20년 만에 이런 엄청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 어떤 백과사전도 필요가 없습니다. 손 안에 있는 핸드폰으로 문제를 다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 시대를 향한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200년의 화려한 전통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명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현대요,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이요 현상입니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큰 변화를 말합니다.
이 변화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생명은 반드시 이 모든 다가오는 사건들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대로 머물러 있는 동안 그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그대로 밀려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하라는 것은 자연현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대로 주저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감나무의 감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기다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는 현대에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바둑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 컴퓨터와 세기의 대결을 펼친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모두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변화가 절대적인 바둑은 절대로 기계가 인간을 이기지 못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에세돌 9단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긴 것입니다. 이제는 인공지능 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사람들과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고 야구를 할 시대가 곧 온다고 합니다.
집에 앉아서 비행기 표를 예배하고 은행의 업무를 보고 물건을 사고팝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T.V 조선 엥커는 말하기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인데 그때에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게 될 것이다. 과연 인간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엥커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나중에 그 중요한 것을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슐츠라는 분이 성숙한 인간, 현대인으로서 성숙한 인간의 특징을 몇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무의식 속에 살지 않고 항상 의식이 분명하고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프로 골퍼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만 번 골프를 쳤지만 이 사람은 골프를 칠 때마다 골프채를 들고 다시 한 번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공을 칠 때마다 다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따라가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밝은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밝은 의식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장의 동기나 자아 형성을 동기를 자기 자신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고 자아실현의 동기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스승도 내가 만나는 것이고 좋은 친구도 내가 만드는 것이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수용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과거가 있었든지, 어두운 날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지나간 날이고 항상 오늘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이미 지나갔다. 나는 이제 다시 쓸모가 없다. 그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또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점이 내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자기를 수용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비생산적이거나 부정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절대로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거나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항상 생산적인 경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밝은 의식을 가지고 사물을 분명히 인식하며 자신의 성장 동기를 만들고 자기 수용을 생활화 한다고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카테고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절대로 인간의 생각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계에 부딪히고 다시 좌절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탕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탕자들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안목의 정욕을 위하여,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자신들의 고귀한 생명을 탕진하는 탕자들인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인간이 돌아가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간이 범한 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않는 데에 가장 크고 악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렘4: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여기서 ‘가증한 것’ 이란 우상을 뜻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우상은 말이 없으며 인격 또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상에게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우상은 비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곧 죽음에 예속된 것이요, 생명의 침묵이며, 비인격적인 인간의 소외입니다. 그것은 생명이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언제나 인간과 함께 교제하시는 영원한 인격적인 하나님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우상 숭배는 인간을 사체화하고, 진리에 대해 맹목적이게 하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자신을 비인격화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서 떠나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요동하지 말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그 창조 목적을 위배하는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아서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키고 다시는 그 길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마음의 뜻을 하나님의 진실, 하나님의 공평, 하나님의 정의에 묶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닻을 내려놓지 않으면 언제나 파도에 밀려 그 삶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요동하는 자는 우유부단한 자입니다.
*약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요동하는 자는 죄와 타협하는 자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개혁이란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내적 개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기 백성을 기꺼이 다시 영접하시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를 단순한 형식적인 회개운동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시아 왕 시대에 개혁운동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인 회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들과 맺은 조약들을 분명히 거부하는 결단을 하는 신실하고 진정한 영적 회개를 하지 않으면 회개문을 천만 번 낭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은 진실, 공평, 정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질을 회복할 때 언약은 영속적으로 지속되고 택한 백성의 구원은 보장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런 회개의 필요성을 알려 주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농사에 대한 비유입니다.
*렘4: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농사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종자입니다. 씨앗이 좋아야 좋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자는 아주 좋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최고의 종자입니다.
둘째는 밭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토양, 기름진 밭,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거름이 넉넉하고 토질이 좋아야 합니다. 모래밭이나 자갈밭은 곡식을 파종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가시덤불이 있는 밭도 좋지 못합니다.
셋째는 일기가 좋아야 합니다. 햇빛과 비가 적당해야 하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야 합니다. 온도가 맞아야 하고 습기가 너무 많거나 너무 건조하면 곡식이 자라는데 방해가 됩니다.
넷째는 좋은 농부입니다. 위의 조건들이 아무리 좋아도 게으르고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농부는 한 해 농사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농부는 병충해를 방지해야 하고 때를 따라 잡초를 제거하며 농작물을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농사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농부의 땀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때를 따라 씨를 뿌리고 철따라 가꾸고 돌보고 추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절대 요소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밭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종자는 아주 좋습니다. 일기도 아주 적당합니다. 농부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땅이 문제입니다. 땅이 그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서 묵어버린 것입니다.
요즈음도 시골에 가면 한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서 묵은 땅들이 있습니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다 나가고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옛날 조상들이 농사를 짓던 땅들이 묵혀지고 만 것입니다.
땅이라는 것은 처음 한 해 농사를 짓지 않으면 묵혀집니다. 그 다음 해에는 버려집니다. 그 다음 해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이 후에는 다시 갈려고 해도 갈아지지 않고 처음 개간하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처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묵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딱딱하게 굳어지고 나면 다시 옥토로 만드는 과정이 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묵은 땅’ 이 두 종류로 나옵니다.
농사를 잘 짓다가 묵혀 둔 땅도 묵은 땅이지만 처음부터 아예 농사를 짓지 않은 땅 역시 묵은 땅입니다. 오늘 본문에 ‘’니르‘라는 묵은 땅은 오래 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돌처럼 딱딱한 땅에 가시덤불만 무성하는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므낫세 왕의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었으며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농사를 지은 적이 없는 황무지 같은 묵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라는 온갖 폐단들,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하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묵은 땅이 무엇이겠습니까. 농사에만 묵은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에도 묵은 땅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행동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생각이 먼저 있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고 익숙해진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옛날에 할머니들이 물레질을 잘 합니다. 호롱불 아래서 물레질을 하시는데 기름이 다 타서 호롱불이 꺼져도 계속해서 물레질을 잘 하십니다.
그래서 손자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불이 꺼져서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물레질을 그렇게 잘 하세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몇 십 년을 해 왔는데’ 하시면서 계속해서 깜깜한 데서 실을 뽑으십니다.
이런 행동은 참 익숙하고 능한 것 같으나 거기에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동이 지속되면서 하나의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지속되면 그것은 당연히 문화화 됩니다.
문화화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부터는 전통이 됩니다. 전통이 되면 하나의 가치관이 되고 때로는 신앙의 교리가 되고 사람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버리기 어렵습니다. 버릴 수가 없고 도리어 고정관념이 됩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먼저는 묵은 경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낡은 경험입니다. 반복되는 경험입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이 없이 익숙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려면 익숙한 것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익숙한 것을 버려야 하는데 익숙한 것이 더 편하고 안일하고 쉬워서 자꾸 거기에 머문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생각이 그 경험 속에 깊이 빠져버리고 맙니다. 경험이란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지혜를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서 이 사람의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해 보았다. 내가 시험해 보았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고집불통이 되고 수첩 인사가 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고 집에 있는데 어느 날 부인이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생전 처음있는 일입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하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를 위해서 한 평생 부엌에서 일을 했는데 내가 오늘 한 번 했기로 무슨 잘못이 있나.’
그런데 부인 이야기가 ‘그것이 고맙지 않고 서글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었답니다. ‘어쩌다가 남자가 이 모양이 되었나’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면 어떻습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아들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해야지 노가다 일이나 하고 농사나 지으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묵은 것입니다. 낡은 경험이고 지식이고 전통입니다. 해묵은 전통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이 이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을 제본을 잘 한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식도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년 전통이면 더 한심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들레꽃이 200년의 모습 그대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모습과 성질과 내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어제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아는 지식에 집착할 때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미 아는 그릇된 지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고 퇴보해 버리고 맙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자기가 가진 낡은 지식에 묶여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묶여 있으면 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또 하나는 낡은 감성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해 묵은 감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가슴에 영원히 묻어 두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감정에 매여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입니까.
아픈 상처나 고통 역시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역사 이래로 타민족의 침략과 공격을 받아왔고 때로는 지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이나 몽고나 일본이나 여러 나라들이 우리를 침략했습니다.
그 중에 특히 일본과는 감정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저들이 너무나 잔혹하게 우리를 멸시했고 국가 존립 자체를 없애려고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짓밟았습니다. 그런 기억이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는 일본을 정상적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이라고 해야 하는데 ‘일본놈’이라고 부릅니다. 민족 감정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상처 받은 감성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물론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설령 죽도록 사죄를 한다고 해도, 용서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한이 맺힌 이 민족의 감정이 정상이겠습니까. 가슴을 확 돌려야 하는데 이것이 안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은 될수록 빨리 털어버려야 합니다. 묵은 정서, 묵은 감정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묵은 이성, 묵은 가치관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네 종류의 밭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갈 가의 밭은 씨를 뿌리면 새가 주워 먹어버립니다. 가시덤불과 같은 밭, 돌짝 밭,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줄기가 자라지 못합니다.
농부가 이런 밭을 경작하여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을 불지르고, 돌밭을 폭파하고, 부드러운 옥토로 만든 다음에 씨를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서 허둥지둥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 둥지를 떠나면 꼭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다 쓴 것입니다.
그러나 폭풍이 워낙 거세어서 둥지를 더 이상 지킬 수도 없고 그 둥지에 계속해서 안주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둥지를 포기하고 그 새는 날개를 펴고 폭풍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이리 날리고 저리 돌아가면서 바람을 의지하여 끝없이 날아갔습니다. 얼마동안 날아가니까 폭풍이 멎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이 조용해지고 햇빛이 밝게 비출 때 땅을 내려다보니 넓고 푸른 초원이 있었습니다.
생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아름다운 초원, 자기가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아름답고 풍성한 초원이 펼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새는 그곳에 내려앉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가 태어난 둥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치십니까. 묵은 땅에서 언제까지나 헤매고 계실 것입니까. 날개를 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시는 땅을 향해서 자유롭게 그 방향으로 날아가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인도하시도록 나를 맡기십시오. 날개를 활짝 펴시고 낡은 전통과 고집을 버리십시오. 성공이라고 하는 허상을 버리고, 나라고 하는 우상도 버리고, 묵은 관념을 갈아엎고, 새롭게 파종하십시오.
유대인의 율법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겐네테아노센’ 중생이라고 하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원어대로 해석하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Born from above' 위로부터 태어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묵은 마음을 갈고 엎어서 옥토로 만든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파종하면 분명히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이 말은 비단 유대인들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인 우리들도 처음 믿을 때의 옥토는 이미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날들이 오래 될수록 마음은 묵어가고 황폐하여집니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도 모르게 묵어버린 마음을 쟁기로 갈아엎고 뒤집어서 옥토로 만듭시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사상과 철학과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
우리의 경험도, 지식도, 정서도 다 빗나갔습니다만 낡은 것에 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우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그릇된 집착과 과거를 털어버리고 옥토와 같은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말씀 안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변해가는 시대를 보면서 거듭나는 삶,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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