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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자제
성경 말씀: 예레미야 11:1-8; 고린도전서 9:19-27
요약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는 개인의 덕이 아닌 그의 하나님과 함께로 보입니다. 그를 자제하는 이가 자신이면, 자신의 제어가 보입니다. 그러나 그를 제어하는 분이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면, 그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그를 제어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분 인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제는 영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분 자신의 자제가 아닙니다. 아무도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덕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과 그분 함께를 분명히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제입니다.
자아의 자제
자제는 개인들이 추구하는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다른 덕에 수반됩니다. 자제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덕도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종한 사람이 어떤 덕이든 갖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개인이 자제할 때, 자제하는 그가 세워집니다. 그는 그의 의지로 자신을 제어합니다. 자제는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의 수련의 노력으로 향상됩니다. 그것은 그의 수련으로 성취되기 때문에 그의 향상의 덕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제된 자아가 형성됨으로, 그는 덕을 갖추는 사람이 됩니다.
자제는 자아의 고양입니다. 즉 자아는 제어되지 않고 자제로 상승됩니다. 자제로 자아는 덮여지지 않고 정제됩니다. 그러므로 자제는 성숙한 자아의 모습입니다. 이 점에서 자아는 덕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아집니다. 그것은 자아의 양도 혹은 폐기를 뜻합니다.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가 맺어지면, 자아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자아의 성숙을 뜻하지 않고 자아의 양도를 뜻합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맺어지니, 자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자아의 양도를 수반합니다. 사람의 자아가 드러나면, 그는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 의해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되게 되지 않습니다. 그의 자아는 언제나 그의 주인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자아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는 자아의 소진을 뜻합니다.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롬 6:6). 그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이전 자아는 죽었다고 합니다. 이 점은 다음 인용에 잘 보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자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아의 죽음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전 자기중심적 자아의 죽음을 뜻합니다. 바울의 이전 자아의 죽음에 대한 강한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자제는 예수님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자제의 궁극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자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삶에 열매 맺어집니다. 예수님의 자제가 열매 맺어지게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자제의 서사로 보아지게 됩니다. 세례 받은 예수님은 이어 유혹되었습니다. 복음에 서사된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유혹을 이기는 길에 있으신 것을 보입니다. 그 길의 종점은 물론 십자가상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유혹을 이기는 길로 향한 여정으로 말해질 수 있습니다.
유혹을 이김은 자제의 표현입니다. 창조된 사람은 유혹됨으로 타락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의 충동적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충동에 의해 빠지게 됩니다. 유혹은 언제나 자기노출의 충동으로 빠져들게 이끕니다.
예수님의 자제
자제가 예수님의 유혹됨과 십자가로 반영될 때, 궁극적 자제는 자기고양이 아닌 자기부정을 뜻합니다. 도덕이 자기고양을 가르치고, 종교는 자기성찰로 해탈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도덕이나 종교는 자아고양이나 자기성찰을 통한 자아완성으로 이끕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으로 전개됨으로, 자아를 유혹된 것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자아를 보이려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발로 살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언약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하나님의 창조를 다루는 뜻입니다. 성경이 보이려는 것은 창조된 자아의 성향을 따른 삶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삶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를 배경으로 사람의 성향의 타락을 보입니다.
자아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삶, 곧 언약의 삶으로부터 보아, 유혹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성향을 표현한 삶은 세상에 자연적 삶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자연적 표현은, 하나님 말씀의 삶에서 보아, 타락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언약의 삶에서 보아, 자제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나타나는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순종은 자아가 아닌 자제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자아가 아닌 자제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이루어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아의 죽음은 예수님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의 자아가 아닌 예수님의 자제가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삶을 서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아가 아닌 자제로 서사됩니다. 성경에 자제는 자아의 자제가 아닌 말씀으로 자제입니다. 즉 자아의 자제가 아닌 순종의 자제입니다. 순종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보이듯 자아의 죽음입니다.
자아의 죽음은 구약의 율법에 보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결국 자아의 성취를 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는 그의 정제된 자아를 보입니다. 즉 율법은 율법으로 정제된 자아의 실현을 보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순종을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성경이 도덕이나 종교로 풀이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자제를 보이지만, 도덕이나 종교는 자아를 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도덕이나 종교는 개인의 성향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은 자제를 보이지만, 개인의 성향은 자아의 고양이나 성찰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 의해 지켜지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같이 됩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잘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할 때, 그것은 세상의 일반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법을 지킴은 자아의 성취입니다.
함께하는 자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유혹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보다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과 사람의 그것을 지킴에 의해 보이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에 그의 성향이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하나님 말씀을 지킴에 그의 성향이 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보다 그가 한 것이 됩니다.
사람은 이기주의로 가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말씀을 주시면, 그는 그가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과 관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분 이루심에 대한 감각을 갖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의 반응을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으로 맺어집니다. 여기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를 말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더라도, 성령님은 그분 말씀을 열매로 맺습니다. 성령님은 자아의 열매가 아닌 자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읽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것을 서사합니다. 예수님의 자제가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유혹됨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이어진 것은 예수님의 자아가 아닌 예수님의 자제입니다.
예수님의 자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제된 예수님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의 자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제어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로 서사됩니다. 복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자제되게 읽어져야 합니다.
복음은 자제로 읽어져야 합니다.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지는 자제로 읽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제가 자제되게 읽어짐으로,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됩니다.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예수님은 자제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자아에 고정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아 시각으로 예수님의 자아를 보려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힘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힘을 가졌지만, 유혹을 이겨 십자가로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유혹을 이겨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의 자아를 그립니다.
예수님이 자아의 모델로 설정되는 한, 예수님은 언약의 예수님이 아닌 종교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따라야 될 롤 모델로 설정되는 한, 예수님은 종교의 창시자입니다. 자신을 세우려는 이는 이 유혹에 언제나 빠져듭니다. 그는 의의 훌륭한 모습을 끌어냅니다.
자아가 아닌 자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수반됩니다. 언약의 삶은 자아가 아닌 자제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삶은 성령님의 열매로 자제가 맺어짐으로 열려지게 됩니다. 언약의 삶은 자제의 열매로 번성합니다. 자아는 열매일 수 없습니다. 존속과 소멸로 특징지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제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언약의 삶으로 자제하게 하옵소서.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자제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으로 인도되어 자제하게 하옵소서.
자아가 전시되는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 자제가
영적으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교회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는 자제하는 삶의 표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