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
추 제 협*
1)
※ 이 論文은 2014年 3月 15日 投稿 完了되어 2014年 4月 15日까지
審査委員들이 審査하고, 2014年 4月 20日까지 審査委員 및 編輯委
員會議에서 揭載로 判定되었습니다.
<目 次>
Ⅰ. 들어가는 말
Ⅱ.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
1. 경사서(經史書) 강조와 육
경(六經)으로의 확대
2. 거경궁리(居敬窮理)의 공
부론(工夫論)
3. 육왕학(陸王學)의 비판과
존덕성(尊德性工夫) 중시
Ⅲ.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에서
홍여하의 학적 위치
Ⅳ. 나오는 말
<국문초록>
이 글은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
장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료의
한계로 인해 그 전모를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가 당대 퇴계
학파의 전형적인 학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확
인할 수 있었다. 즉 리기론보다는 공부론에 관심을 갖고 존덕성(尊德
性)과 도문학(道問學)의 병행을 전제로 하면서도 존덕성 중시 경향을
보인다거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의 두 공부를 ‘경
(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육왕학을 교왕
과직(矯枉過直)의 폐단이 있음을 적극 비판한 것이 그러하다. 물론 그
가 아직 학파적 의식이 뚜렷하지 않는 가운데 다양한 교유관계를 통
* 韓國, 慶北大學校 基礎敎育院 講師.
376 東亞人文學 第27輯
해 자신의 독특한 사상적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없지 않았다. 가
령 격물의 해석을 형류(形類), 상류(象類), 성류(性類)로 구분하여 해석
하는 부분이나 팔조목을 ‘명명덕(明明德)’과 경으로 일관하는 것 등은
분명 주희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을 17세기의 사상
적 지형도에서 보면 첫째, 사서(史書)에 대한 천착과 육경(六經)으로의
확대는 퇴계학파 내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로 아직 학파의식이 뚜렷하
지 않은 가운데 다양한 인물들과의 학문적 영향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으며 둘째, 도문학의 독서궁리공부를 존덕성의 마음공부를 위한 것
으로 귀결시켜 이를 경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존덕성 중시적 경향
을 분명히 하여 이황 공부론의 핵심을 잇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홍여하, 영남 퇴계학파, 육경, 존덕성, 경, 교왕과직
Ⅰ. 들어가는 말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17세기에 활동했던 정치
가이자 역사가로, 우리에게는 ≪휘찬여사(彙簒麗史)≫와 ≪동국통감제
강(東國通鑑提綱)≫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찍이 그의 집안은
명문사족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5대조인 홍귀달(洪貴達)은 두 차례
나 문형(文衡)의 자리에 올랐고 그의 아들 홍언충(洪彦忠)은 이러한
문재를 이어받아 사가독서와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홍호
(洪鎬) 또한 이른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 대사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
나 그들은 당대의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금에게 직언을
고하는 직신(直臣)의 삶을 자처했으며, 이러한 선택은 불운의 길을 피
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1)
1) 홍원식, ≪문경 허백정 홍귀달 종가≫(대구: 경상북도・경북대 영남문화연
구원, 2012).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77
홍여하 또한 이러한 선조들의 강직한 품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
으로 보인다. 마침 그가 활동하던 때가 예송논쟁이 일어날 즈음이었기
에 그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남인과 서인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 속
에 37세 때 이상진과 이원정을 추천한 일로 파직되고 그 해 응지상소
(應旨上疏)를 올렸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 察訪)으로 쫓겨났다. 40세
때에는 북방 군정의 폐단과 이후원에 대해 붕당의 형태가 심함을 상
소한 것이 빌미가 되어 송시열 등 서인들에 의해 파직되고, 41세 때
권우의 일을 문제 삼다 또 다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불운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는 이내 고향인 함창 율곡리로
돌아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2)
그가 주로 활동하던 이 시기를 철학사적으로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
학파의 학문적 대립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다. 퇴계학파 내에서는 직전
제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후 류성룡(柳成龍)의 제자인 정경세(鄭經
世)와 류진(柳袗), 그리고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 정구(鄭逑)
등에 두루 나아간 장흥효(張興孝) 등 재전 제자들이 전면에 부상하고
이들의 학통이 다시 정종로(鄭宗魯), 류주목(柳疇睦)과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 등 삼전 제자들로 각각 이어지고 있었다.3) 이들의 등
장으로 비로소 퇴계학파는 학파의 면모를 갖추어가면서 율곡학파의
비판에 서서히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홍여하는 퇴계학을 가학으로 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
며 특정한 사승관계를 맺지는 않은 듯하다. 그의 아버지 홍호가 정경
세의 제자였던 관계로 그 또한 정경세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아버지의
도우였던 류진과 이들의 문인이었던 류원지(柳元之),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에 있었던 허목(許穆) 등에게도 학문을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
2) 앞의 책, pp.122~133. 참조.
3) 금장태, <영남성리학의 전통과 쟁점>, ≪퇴계학파의 사상Ⅰ≫(집문당,
1995); <조선후기 퇴계학파의 학맥과 리철학의 전개>, ≪퇴계학파와 리철
학의 전개≫(서울대 출판부, 2000).
378 東亞人文學 第27輯
다. 특히 정경세가 ≪허백정문집≫의 서문을 쓰고 그의 6세손인 정종
로가 뒷날 그의 ≪휘찬여사≫를 교정하고 서문을 지을 만큼 이들은
그의 집안과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외에도 류성룡의 제자였던 이구
(李榘)와 정경세의 손자였던 정도응(鄭道應)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는 등 퇴계학파의 여러 인물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가 이황과 류
성룡의 찬, 장흥효의 묘갈, 류진과 이휘일의 행장 등을 쓴 것은 이러
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4)
이러한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정치가나 역사가로서의 면모만
을 주로 다루었을 뿐, 사상가로서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
다.5) 앞서 살펴본 대로 당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대립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고 그의 교유관계를 고려할 때, 그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어느 정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
인다. 다만 안타깝게도 현재 ≪목재선생문집(木齋先生文集)≫에는 그
편린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뚜렷한 사상적 입장을 찾기는 쉽지 않다.
기왕의 연구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다양한 인물들과의 교유
관계를 통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학문적 훈습은 그의 사상을 정
립하는 데 결코 가볍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글은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을 통해 그의 학적 위치를 검
토해 보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어
떠한 맥락 속에서 논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본 글의 주된 내용
이 될 것이다.
4) 서울에 있을 때는 이식(李植)과 조경(趙絅)과도 교유한 사실이 확인된다.
5) 홍여하의 사상에 대해서는 홍원식의 논문(<목재 홍여하의 생애와 성리
설>, ≪한국사상사학≫ 43호, 한국사상사학회, 2013.)이 유일하다. 비록
개괄적인 소개에 머무르고 있긴 하지만 자료의 일차적인 검토를 통해 논
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논의를
보강, 확장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79
Ⅱ.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
1. 경사서(經史書) 강조와 육경(六經)으로의 확대
홍여하의 행장을 썼던 이현일은 그를 “됨됨이가 근면하고 민첩하며
배우기”를 좋아해 “병이 깊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의심
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눈을 감고 정밀히 생각하여 자득(自得)하기
를 구하였다.”6)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가 보
기에 옛 성현들의 행적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니 이를 읽지 않
고는 실행의 바름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옛 것을 상고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또 다른 폐단이 생길 수 있
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에 적절히 쓰이지 않을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시세(時勢)를 헤아려 오늘날에
도 합당하고 옛 것에도 어긋나지 않는 것을 실행할 줄 아는 통변(通
辯)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7) 그가 “독서는 장차 이치를 궁리
하기 위한 것이고, 이치를 궁리하는 것은 장차 쓰이기 위한 것이다.”8)
라는 독서의 의의와 그것이 결국 치세지도(治世之道)9)에 있음을 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 근거한다고 생각된다.
6) 李玄逸(이하 생략),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
木齋先生洪公行狀>, “爲人勤敏好學, 平居談說, 不出經史子集之外. 疾病, 猶
不釋卷, 遇有疑晦處, 必合眼精思, 以求其自得.”
7)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與學者論經濟之術曰, 先王遺法載在方冊, 可考而行. 然不量時勢, 動輒引古,
必有泥而不行處. 是以爲政, 貴在通變, 宜於今而不悖於古, 然後政成而民安
矣. 其學術論議, 大要類此.”
8)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讀書將以窮理也, 窮理將以致用也.”
9) 洪汝河(이하 생략), ≪木齋先生文集≫, <序>, <木齋先生文集序>, “木齋洪
公嘗語余曰, ‘我未之能也, 我所願則學治世之文也.’ 乃今讀其集, 豈不誠學治
世之文者也? 治世之文者, 卽若云通明道德而發之言者也. 學治世之文者, 卽
若云首嚮正學, 篤信先師, 言足以達其心, 文足以達其言者也.”
380 東亞人文學 第27輯
그런 점에서 홍여하는 독서의 편폭이 다양했으며 그 결과 꽤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불행히 현재 남아있는 것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관심이 대략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군(府君)의 문장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근본으로 삼고, ≪좌
전(左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한서(漢書)≫를 보
익(輔益)으로 삼았으며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준칙으로 삼았
다.11)
그의 후손인 홍대구(洪大龜)의 다음 말에서 그가 사서, 오경(육경)
의 경서(經書)와 ≪좌전≫, ≪사기≫ 등의 사서(史書)에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서(史書)에 대한 관심은 퍽 이채로운 면이
있다. 당시 퇴계학파의 도학적 분위기 속에서 사서나 문학은 도본사말
(道本史末), 도본문말(道本文末)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도외시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 또한 도를 먼저 밝혀야 그것이 문으로 자연스레 드러
날 수 있음12)을 말하여 이러한 관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가령 권근의
글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도학자로서의 권근을 바라보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3) 그럼에도 그가 사서를 경서와 함께 매우
10) 홍여하는 ≪목재집(木齋集)≫, ≪휘찬여사(彙簒麗史)≫, ≪동국통감제강(東
國通鑑提綱)≫을 비롯해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 ≪용학구의(庸
學口義)≫, ≪의례고증(儀禮考證)≫, ≪해동성원(海東姓苑)≫ 등 경학, 사
학, 예학, 보학 등 다양한 방면에 관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지
만 현재 전하는 것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1) ≪木齋先生文集≫ 卷11, <附錄>, <行狀>, “府君文章, 以四書五經爲本, 以
左國遷固爲輔, 以朱子集註爲準則.”
12) ≪木齋先生文集≫ 卷10, <雜著>, <文苑傳>, “惟其深明乎道, 發於言者, 燦
然而成章, 非以爲文也. … 吾東以平易爲主, 然得其門而入者寡矣. 不得其門,
則不可謂之文也. 故曰, ‘莫若先明乎道, 誠卓然有見乎是, 則體之於身, 會之
於心, 而其見於言者, 自然沖夷渾雅, 一軌于正道, 超然有得於氣稟工程之表
矣, 彼中國之士, 何足畏也哉?”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81
중요하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사서(史書)란 포폄(褒貶)하고 권징(勸懲)하는 책으로, 왕법(王
法)이 깃들어 있고 대일통(大一統)이 매여 있는 것이다.”14)라고 하여
사서를 강조하게 된 이유를 언급했다. 이러한 사서가 중국에 비해 우
리나라는 “외설스럽고 뒤섞여서 사대부와 선생들이 말하기 어려운 사
실이 들어 있으니, 어떻게 세도(世道)에 보탬이 되고 치도(治道)에 도
움이 될 수 있겠는가?”15)라고 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일
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라고 우리 역사의 무관심에 대해 일침
을 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문란함을 심법(心法)을 통해 바로
잡고자 하였다.17) 즉 윤리적 판단에 근거하여 인물의 행위와 마음의
정사를 위주로 한 역사를 강조하였던 것이다.18) 이러한 역사관은 이
른 시기 ≪휘찬여사≫와 이후 ≪동국통감제강≫의 저술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사서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서 중에서도 ≪좌전≫과 ≪사기≫를 매우 높였는데, 그 이유는 문장
13) ≪木齋先生文集≫ 卷4, <書>, <與李大方>, “大家文體, 固不必專以此爲貴
也. 夫文體以森嚴典則爲主, 君子好尙, 恐在此而不在彼也. 譬諸人物德性, 其
理亦然, 嗇夫之喋喋, 豈賢於絳侯之木訥耶? 如陽村文字, 平鋪放著, 沈鬱頓
挫, 非今日務爲尊經者所可彷彿萬一也.”
14)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嘗以爲史者褒貶勸懲之書, 王法之所寓, 而大一統之所係也.”
15)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吾東方史法, 猥釀, 有薦紳先生難言之實, 其何以裨世敎資治道乎?”
16)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大方>, “東人, 恥不知中國事, 不恥不知
自家國事.”
17) ≪木齋先生文集≫ 卷1, <詩>, <評易, 詩, 史法, 寄睦來之, 來善李士徵(元
禎), 二學士>, “男兒大業受命初, 生此東韓亦不虛. 萬里山河禹貢外, 千年禮
樂箕疇餘. 碩儒譚易多臻妙, 騷客言詩或起余. 祇有史家門路錯, 發揮心法正
須渠.”
18) 김영택, <목재 홍여하의 역사의식과 문학관 연구>, 안동대 석사논문, 2004,
p.29.
382 東亞人文學 第27輯
의 구법과 관련이 있다. 구법(句法)이란 문장 작법의 준칙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편장자구법(篇章子句法)이라고 하는 것이다.19) 즉 글자
가 모여 하나의 구가 되고 다시 이 구가 모여 장구가 되며 장구가 모
여 한 편의 글이 됨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긴중(緊重)과 조응
(照應)의 문제이다. 이를 테면 하나의 구에서 긴중은 첫머리에 두되
이어지는 글자와 앞뒤가 섞이지 않아야 하며 구의 마지막 글자와는
조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 이러한 원리가 하나의 구, 더 나아가
한 편의 글 전체를 이루는 내적 준칙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러한 구법을 이해하는 것은 글읽기와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공부임
을 강조한다.21) ≪좌전≫, ≪사기≫를 필독하라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러한 공부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기≫를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좌전≫
을 읽는 이는 거의 없다. ≪좌전≫은 조리(條理)와 맥락(脈絡)을
19) 홍여하의 편장자구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논문이 참고가 된다. 권
진옥, <목재 홍여하의 산문비평 일고>(Journal of Korean Culture Vol.17,
2011), pp.48~58. 참조.
20)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奉彦>, “大抵累字爲句, 一字二字可至十
餘字爲句. 其中字意緊重者, 撥轉居之句首, 聯接字, 要不錯先後, 至句末字照
應, 然後方爲一句. … 累句爲章句, 緊重者居章首, 聯接句, 皆要歷落分明,
至末句與首句, 相應結之, 然後方爲一章. 次章要承接首章, 不當揷入他意, 第
三章, 又要承接次章. 累章爲篇, 末章與首章相應結撰, 然後方成一篇.” 그가
예로 든 것을 보면 “상제는 짐이 본래 친히 교사를 지내지만 후토에는
친히 제사할 수 없다(上帝朕本親郊, 而后土不得親祀).”라는 문장에서 상제
上帝와 후토后土가 긴중이라면 이 긴중을 중심으로 짐본朕本, 부득不得의
술어가 대응되고 친교親郊, 친사親祀가 조응되는 것으로 이해했다(≪木齋
先生文集≫ 卷4, <書>, <答李奉彦>, “漢書上帝朕本親郊, 而后土不得親祀.
可見下字有先後處也.”).
21) 조선초 도본문말(道本文末)의 지배적 인식으로 인해 문장에 대한 관심은
소기(小技)로 치부되곤 했는데 17세기 이후 이러한 문장에 관심을 갖는
일군의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균과 장유, 박지원
등이 해당된다. 홍여하의 구법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연관된
다. 권진옥, 위의 논문, pp.52~53. 참조.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83
주로 삼으니 후세의 글보다 상당히 정교하다. 우리나라의 글은 비
록 때로 좋은 곳은 있으나 모두 문장의 조응과 정밀하고 분명함이
부족한 것은 ≪좌전≫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22)
이렇게 그의 사서 강조는 단순히 역사의식의 발로에 기인하는 것만
은 아닌 문장의 구법을 익힘으로써 독서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지침
서로서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법을 익히는 데 ≪주
자서절요≫와 ≪사서집주≫도 중요한 교재가 된다고 하였다.
≪중용≫과 ≪맹자≫ 등의 책에 주를 단 방법을 살펴보니 모두
첫 대문을 강령으로 삼고 아래 문장들이 구절마다 상응하며 관건
이 매우 치밀하여 가득찬 물이 새지 않는 것과 같다. 주선생의 긴
요함과 정력이 모두 여기에 있다.23)
앞서 언급한 편장자구법이 주희의 ≪사서집주≫에 매우 치밀하게 담
겨져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사서집주≫의 연원을 ≪좌전≫에서 찾
고24) ≪좌전≫과 ≪사기≫에 나타나는 문장의 구법이 주희의 ≪사서
집주≫라는 하나의 체계에 고스란히 체현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시문을 지으면서도 끝내 주희의 문로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
은 또한 ≪좌전≫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전≫과 ≪사기≫
를 읽고 주희의 ≪사서집주≫를 읽지 않으면 오히려 옛 것에만 치우
쳐 사정이 절실하지 못하게 된다.”25)라고 하였던 것이다.
22)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九成(允諧)>, “東人好讀馬, 讀左者絶無
焉. 左氏以條理脈絡爲主, 精巧甚於後世. 吾東文字, 雖時有好處, 全欠照應精
明, 坐不讀左耳.”
23)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柳拙齋>, “竊見中庸, 孟子等書註法, 皆以
初大文爲綱領, 而下文節節相應, 關鍵甚密, 盛水不漏. 朱先生喫緊精力都在
此處.”
24)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九成(允諧)>, “晦庵四書集註文法血脤,
皆從左氏門戶中來, 儘有歷落.”
25) ≪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九成(允諧)>, “我國人至老做文章, 終不
384 東亞人文學 第27輯
물론 이러한 문장의 이해는 궁극적으로 주희의 ≪사서집주≫를 통
해 경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깊이를 넓히는 데 있는 것이다.
옛날 군자들은 도를 밝히기를 힘쓰고 글을 짓는 데는 힘쓰지
않았다. 오직 그 도를 깊이 밝혀서 말로 드러낸 것이 찬란하게 문
장을 이룬 것이지 문장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도를 밝히는 데 힘
쓰지 않고 한갓 문사만을 일삼는다면 말은 비록 공교로우나 이치
에는 통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반드시 공교롭지도 못한 경우에
있어서랴.26)
그는 문에 힘쓰기보다 그 문에 드러난 도를 밝히는 이른바 ‘명도(明
道)’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서집주는 바로 그러한 도가 전체
삼십육 편이 마치 하나의 혈맥이 통하듯 이어지니 이를 총체적인 입
장에서 파악하여 거기에 담긴 도의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심혈을 기
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27)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이황이나 류성
룡이 그 주해보다는 경문을 통한 직접적인 이해 방식을 강조한 것과
는 차이가 있다. 특히 류성룡은 주해에 의지하면 그것이 마음에 걸려
자기 나름의 새로운 뜻, 즉 ‘신의(新意)’을 얻을 수 없다고 부정했다.28)
따라서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율곡학파의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曉晦庵門路, 亦坐不讀左耳. 雖然讀左馬, 而不讀朱註, 則猶爲僻古, 而不切事
情.”
26) ≪木齋先生文集≫ 卷10, <雜著>, <文苑傳>, “古之君子, 務明道, 不務爲文.
惟其深明乎道, 發於言者, 燦然而成章, 非以爲文也. 不務明乎道, 而徒事乎
文, 則言雖工, 而不達乎理, 況未必工乎.”
27) ≪木齋先生文集≫ 卷2, <詩>, <讀四書集註法, 示金景謙, 崔汝安(基重), 十
一絶>, “分門語孟學庸同, 三十六篇血脈通. 理會章章相發處, 許君親見紫陽
翁.”
28) 柳成龍(이하 생략), ≪西厓先生文集≫ 卷15, <雜著>, <讀書法>, “凡讀書,
不可先看註解. 且將經文反覆而詳味之, 待自家有新意, 卻以註解參校, 庶乎
經意昭然, 而不爲他說所蔽. 若先看註解, 則被其說橫吾胷中, 自家竟無新意
矣.”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85
경서 해석의 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사서집주에 성
학의 연원을 제대로 조명하고 있기에29) 이를 통해 도의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이러한 도의를 완성하는 것이 그 이해한 바
를 체득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있음도 빼놓지 않았다.30)
이렇게 보면 경(經)과 사(史)는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장의 이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경문에 나타난 도의를 이
해하는 데에도 그러하다. 그래서 홍여하는 전체대용(全體大用)의 관점
에서 경서와 사서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도(道)의 전체(全體)는 비록 경(經)에 있지만 대용(大用)은 실로
사기(史記)에서 드러난다.31)
전체대용은 흔히 체용일원(體用一源)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경과 사를 통해 근본을 밝혀 세상의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경서는 도학의 의미를 익혀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기 위한 전체(全體)의 목적이었다면, 사서는 치세의 방법을
익혀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기 위한 대용(大用)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주희의 ≪사서집주≫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사서의
전제와 육경으로의 확대32)를 강조한 것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황
29) ≪木齋先生文集≫ 卷9, <雜著>, <大學, 四書發凡口訣>, “聖學淵源, 十六言
而已, 故老先生釋論語仁字, 章章必使用天理人欲字, 天理, 卽道心, 人欲, 卽
人心也. 釋大學首章曰, ‘蓋必有以盡夫天理之極, 而無一毫人欲之私也.’ 中庸
首章曰, ‘存天理之本然, 遏人欲於將萌.’ 皆所以發明經文言外之意也. 至孟子
尤詳焉, 此四書中開卷第一義.”
30)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講學而無體驗之實, 則其爲學鹵莽而已, 求治而昧時措之宜, 則其爲治擿埴而
已. 夫所謂體驗之實者何也, 講學而驗諸身之謂也.”
31) 洪汝河(이하 생략), ≪東國通鑑提綱≫ 卷1, <木齋家塾東國通鑑提綱序>,
“先生嘗言, 道之全體, 雖在於經, 而道之大用, 實見于史.”
32) 홍여하는 육경에까지 공부를 확대한다면 경서의 입언한 뜻을 깨우치고
386 東亞人文學 第27輯
이나 이이는 물론 당대에도 사서육경은 중요시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탐독한 것은 사서(四書)였다.33) 당연히 사서(史書)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에 있었
던 허목은 주목된다. 그는 육경(六經)과 사서(史書)에 많은 관심을 갖
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홍여하가 그를 스승처럼 여겼던 점은 그들 사
이에 학문적 영향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학관은
17세기 중엽 송시열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경학 연구에 비해
다소 침체된 영남지역 경학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
기도 하다.
2. 거경궁리(居敬窮理)의 공부론(工夫論)
홍여하는 리기론(理氣論)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34) 흔히
해득할 이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木齋先生文集≫ 卷4, <書>, <答李
九成(允諧)>, “況由是以求之經中立言之旨, 庶有悟解之理也哉. 不得其門而
入, 雖用力專苦, 轉見迷闇, 何益哉? 須讀左馬, 以求晦庵, 讀晦庵, 以求六經,
斷不相誤, 千萬努力.”) 비록 독서록의 형태로 일부분이긴 하지만 육경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가
된다. 전재동, <목재 홍여하의 경학관 경서 해석>, ≪영남학≫ 23호, 경북
대 영남학연구원, 2013.
33) 李滉(이하 생략), ≪退溪先生文集≫ 卷16, <書>, <答奇明彦>, “聖學只在四
書.”
34) 홍여하가 정경세를 찾아뵈었을 때의 기록에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정경세가 ≪중용≫ 수장 장구의 뜻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만약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고 리(理) 또한 부여하였다[氣以成形 理亦
賦焉]’라고 한다면 기가 먼저이고 리가 뒤인 듯하게 됩니다. ‘역부(亦賦)’
자 대신 ‘본구(本具)’ 자를 놓는다면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이후 이 ‘구’자를 다시 철회하게 되는데 여기
서 우리는 그의 리기선후(理氣先後)에 대한 입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先生問以中庸首章章句義. 公對曰, ‘若曰氣以成形而理亦賦焉, 則似氣先而
理後, 以本具字代亦賦字, 義較著矣.’ 先生奇其對, 以爲異日必成大儒. 及公
稍長, 乃言曰, ‘吾前日看得錯賦如朝廷命令頒布四方之意. 天命流行賦於物,
亦猶是也. 若下具字, 義反晦矣.’”; ≪木齋先生文集≫ 卷11, <附錄>, <行狀>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87
퇴계학파의 직전 제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태도는 이황의 성리
설을 그대로 묵수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조식 또한 불필저술
(不必著述)의 의지를 밝혔지만 그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입장에서
하학의 실천적 공부를 우선시 하고자 하는 데 있었기에 차이가 있다.
홍여하가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인물들을 두루 교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하였기에 이러한 특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정확
히 알 수 없다. 다만 권유(權愈)가 홍여하의 학문을 “평소 높이고 계
승한 것은 주자와 퇴계였는데, 그 글을 일관되게 연구하여 환히 이해
하는 데 더욱 마음을 극진히 하였다.”35)라는 말을 보면 전자에 좀 더
근접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남아있는 편린들을 볼 때, 홍여하의 관심은 주로
공부론(工夫論)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의 유학자들이 그
러하듯 그 또한 성인됨의 학문을 추구했으며, 그가 임금이 성왕이 되
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직언했다.
천하의 일은 무궁하지만 일에 응하는 기강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뜻과 기운에서 동(動)하여 사욕(私欲)이 싹트면 그 기강이
만사의 변화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성왕들은 배
우지 않음이 없었지만 배움에 반드시 치지(致知)를 우선으로 했고
거경(居敬)을 요체로 삼았다.36)
그는 천하의 일은 많고 그 일에 응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에
“嘗隨曾王考, 謁愚伏鄭先生於漢陽. 愚伏問中庸首章集註義, 府君對曰, ‘氣以
成形, 而理亦賦焉. 似氣先而理後也, 以本具字代亦賦, 則義較著矣.’ 愚伏曰,
‘此兒已解理氣先後, 異日必成大儒矣.’”
35) ≪木齋先生文集≫, <序>, “平生所尊述, 晦庵, 陶山所, 於其書, 貫究之, 解
會之, 尤盡心焉.”
36) ≪葛庵先生文集≫ 卷26, <行狀>, <通訓大夫司諫院司諫木齋先生洪公行狀>,
“天下之事無窮, 而應事之綱在心. 惟其動於意氣而私欲萌焉, 則其綱不足以應
萬事之變. 是以古之聖王無不學, 學必以致知爲先, 居敬爲要.”
388 東亞人文學 第27輯
사욕이 깃들 여지가 있으므로 이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다고 말한
다. 그러면서 옛날의 성왕은 이 마음을 잡기 위해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성인됨의 학문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거경함
양(居敬涵養)을 들고 있다. 흔히 주자학에서 말하는 공부의 두 가지를
그 또한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격물치지에 대한 홍여하의 설명을 보자. 그는 우선 ≪대학(大
學)≫의 경(經) 1장과 전(傳) 10장은 성인의 전체대용(全體大用)을 밝
힌 책이며 삼강령 팔조목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요체를 말한 것이라
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자께서 장을 나눠 앞뒤 순서를 정하고 빠
진 부분을 보충한 것은 만세토록 배우는 이들에게 큰 공이 있는 것이
다.”37)라고 하여 주자의 ≪대학≫ 체계를 높이 평가하였다. 알다시피
≪대학≫ 고본의 인정여부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구분하는 기준 중 하
나로, 그는 주희의 입장에서 ≪대학≫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주희가 빠진 부분이라고 했던 격물치지보전에서 격물치
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치지(致知)는 격물(格物)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류(類)를 격(格)하는 것이다. 격(格)은 헤아리는 것[度]이고 물(物)
은 류이다. 사물이 생겨나면[형(形)은] 같은 류가 아니지만 상(象)
은 같은 류[象類]이고 상은 같은 류가 아니지만 성(性)은 같은 류
[性類]이며 성은 같은 류가 아니지만 도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군
자는 천지와 만물을 헤아릴 때 반드시 류로써 헤아린 연후에야 앎
이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된다. … 그러므로 군자가 형이 같은 류를
알지 못함은 없지만 성이 같은 류를 아는 자는 드물며, 성이 같은
류를 알지 못함은 없지만 도가 하나임을 아는 자는 드물다. 그러
므로 온갖 류를 알면 하나임을 알게 되고 하나임을 알게 되면 신
통[神]하게 되고 신통하게 되면 하늘과 같게 된다. 이것이 물이 이
37) ≪木齋先生文集≫ 卷5, <策題>, <大學>, “朱夫子定著序次, 補其闕略, 所以
大有功於萬世學者也.”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89
른다고 말한 것이고 이것이 앎이 지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38)
그는 치지 즉 앎에 이르는 것은 결국 도가 하나임을 아는 것인데
이 도가 하나라는 것을 알려면 격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물에
격하는 것을 그는 ‘류’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류는
‘무리’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는데, 그는 이를 세 가지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다. 형류는 외형상 드러난 형태가 같은 무리를, 상류는 구
체적인 형태 이면에 숨어 있는 원리가 같은 무리를 의미하며 이 둘은
모두 기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 성류는 성이 같은 무리를 의미하며 리
의 영역에 속한다. 그는 격물치지란 바로 이러한 형류와 상류, 성류를
거쳐 도가 하나라는 앎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찍이 주희는 격물치지를 즉물궁리(卽物窮理), 즉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앎이란 사물의 리에 대
한 앎인 덕성지지(德性之知)와 사물의 기에 대한 앎인 문견지지(聞見
之知)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물의 리
에 대한 앎인 덕성지지라고 했다. 그런데 문견지지를 함께 언급한 것
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에는 리와 기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며 사물의
기는 리를 방해할 수 없듯이 문견지지가 덕성지지를 가릴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주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은 문견지지가 아닌 덕성지지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39)
홍여하는 이러한 주희의 관점을 견지하여 천리를 인식하되 그 방법
에서 기의 영역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즉
38) ≪木齋先生文集≫ 卷9, <讀書箚記>, <大學, 格物解>, “所謂致知在格物者,
格其類也. 格也者, 度也, 物也者, 類也. 物之生, 不類而象類也, 象不類也而
性類也, 性不類也而道一也. 故君子, 測天地度萬物, 必以類格之, 然後知極其
至也. … 故君子莫不知形類也. 知性類者鮮矣, 莫不知性類也. 知道一者鮮矣.
故類則一, 一則神, 神則天,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39) 홍원식, <정주학의 거경궁리설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6, pp.98~
102. 참조.
390 東亞人文學 第27輯
기의 영역인 형류와 상류를 거쳐 성류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결
국 앎이란 바로 기의 영역을 통해 리의 영역에 이르러 그 분수의 리
가 하나의 도인 천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격물치지에 대한 독특한 이해는 팔조목의 순차에 있어
서도 주희와는 다른 이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물은 격하는데 지가 혹 이르지 못한 경우는 있지만 물이 격하
지 않았는데 지가 이미 이른 경우는 있지 않다. 그런 경우가 있다
면 장문중과 동방삭의 지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지는 이르렀는
데 의가 혹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지가 이르지 않았는데
의가 이미 성한 경우는 있지 않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양주와 묵
적이 인의를 행한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 이러한 여러 사람들은
능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지극함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끝과 처음이 있다. 먼저 할 바와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깝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아! 이러한
여러 사람들은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도다.40)
사물에 격한 후에 지가 이르는 것이 대학의 일반적인 차순이다. 이
에 따르면 물이 격하는데 지가 이르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만 물이 격
하지 않았는데 지가 이르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홍여하는
현실적으로는 후자와 같은 경우가 있음을 언급하고 이에 해당하는 역
사적 인물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이들이 결국 “물에 본말이 있고 일
에 선후가 있듯이 그 할 바의 선후를 알”지 못한 것으로 마치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고 능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지극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도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그 이유
40) ≪木齋先生文集≫ 卷9, <讀書箚記>, <大學, 明明德贊>, “物格矣而知或有未
至者矣, 物不格而知已至者未之有也. 有之乎則臧文仲, 東方朔之智也. 知至
矣而意或有不誠者矣, 知不至而意已誠者未之有也. 有之乎則楊朱, 墨翟之行
仁義也. … 之數子者, 可謂能矣, 非其至者也. 故曰,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噫! 之數子者, 其於道遠矣.”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91
는 앞서 그가 ≪대학≫의 삼강령 팔조목이 수기치인의 요체를 말한
것이라고 한 점을 상기할 때, 그들은 수기는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치
인만을 일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물의 행위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그가 역사 서술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이러한 차순에 따른 선후와 함께 팔조목이 결국 명덕을
밝히는 하나의 목표에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격물은 명덕의 통함이고 치지는 명덕의 충만함이며 성의는 명
덕의 충실함이고 정심은 명덕의 곧음이며 수신은 명덕의 이룸이고
제가는 명덕의 실행이며 치국은 명덕의 드러남이고 평천하는 명덕
의 두루 미침이다. 밝은 덕이 통하는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철저
히 한 것이며 밝은 덕이 충만한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다하는 것
이며 밝은 덕이 참된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참되게 한 것이며 밝
은 덕이 곧게 된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일관되게 하는 것이다. 밝
은 덕이 이루어진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밝게 하는 것이며 밝은
덕이 행해진 것은 경으로써 몸소 행하는 것이다. 밝은 덕이 드러
난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돕는 것이며 밝은 덕이 이루어지는 것은
경으로써 그것을 도탑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강령 중 가장 큰 강령이 되는 것이며 경이라는 것은 처음과
끝을 통하여 성인의 공효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41)
홍여하는 성인의 공효는 결국 ‘명명덕(明明德)’에 있으며 ≪대학≫
의 팔조목 역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명덕에 대해 주희의 설
41) ≪木齋先生文集≫ 卷9, <讀書箚記>, <大學, 明明德贊>, “格物者, 明德之通,
致知者, 明德之充. 誠意, 爲明德之實, 正心, 爲明德之貞. 修身, 乃明德之成,
齊家, 乃明德之行. 治國, 則明德之發, 平天下, 則明德之達也. 明德之通, 以
敬徹之, 明德之充, 以敬盡之. 明德之實, 敬以實之, 明德之貞, 敬以一之. 明
德之成, 敬以明之, 明德之行, 敬以形之. 明德之發, 敬以翼之, 明德之達, 敬
以篤之. 故曰, 明明德, 爲綱領之一大綱領, 而敬者, 所以徹始徹終而成聖功
也.”
392 東亞人文學 第27輯
명을 보면 “사람이 천에서 받은 것이며 허령하여 어둡지 않고 중리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42)으로 “인의예지의 성”이며 “심에 주로 하
는 것”43)이라고 했다. 이 설명에 논란이 없지 않으나44) 명덕을 심성
으로 이해해 본다면 앞서 인용문에 그가 한 팔조목은 이 심성을 밝히
는 다양한 양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주희의 해석과는 다른
것으로 모든 공부의 핵심을 명덕 즉 심성의 문제에 두고자 한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찍이 류성룡이 격물치지를 심법으로 해석한 것
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물론 그가 류성룡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류성룡이 이황의 정맥이며 주
일主一의 학을 했다45)는 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학의 참된 공효는 하나의 명(明)에 있는데
팔조목의 자세한 설명은 닦는 행위이니
모름지기 격물치지가 모두 심법(心法)이라는 것을 알아
묶은 책에서 앎을 헛되이 찾지 말지니.46)
42) ≪經書≫, ≪大學≫ 1장, <朱子註>,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43) 朱熹(이하 생략), ≪朱子語類≫ 권14, <大學>, <士毅錄>, “或問, 明德便是
仁義禮智之性否? 曰便是”; “或問, … 明德是主於心裏言? 曰這个道理在心
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44) 19세기 명덕주리주기논쟁은 화서학파, 한주학파와 간재학파간에 펼쳐진
심설 논쟁으로 주희의 명덕에 대한 일련의 언급을 통해 리로 볼 것인가
기로 볼 것인가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이 참고가 된다. 이종우, <명덕심성논쟁>, ≪19・20세기 한국 성
리학의 심성논쟁≫, 심산, 2005, 173~191쪽 참조; 김근호, <류중교와 전
우의 심설논쟁에 대한 연구>, ≪한국사상사학≫ 28집, 한국사상사학회, 2007.
45) ≪木齋先生文集≫ 卷6, <贊>, <西厓先生贊>, “天資純粹, 旣養而充. 淸明洞
達, 業廣德崇. 濟屯之才, 主一之學. 命世眞儒, 陶門正脈.”
46) ≪西厓先生文集≫ 卷2, <詩>, <讀大學有感十首>, “大學眞功在一明, 八條詳
說是修爲, 須知格致皆心法, 莫向陳編枉索知.”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93
팔조목 전체를 마음 닦는 행위로 보고 격물치지를 심법으로 이해했
다. 여기에는 흔히 격물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치지는 마음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양지를 발현하는 것으로 보는 양명학의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외적 대상의 탐구 또한 결국 마음이 맑아 사물의
실제가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여하가 팔조목을 마음을 밝히는 다양한 양상이
라 하고 이를 경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당연한 귀결
로 보인다. 달리 말해 격물치지가 깊어져 활연관통에 이르면 내 마음
의 온전한 바탕이 분명해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국 명덕을 밝히는
것이니 이 공부는 반드시 경공부로 일관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격물치지와 거경함양이 하나의 경에
서 합일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공부론의 핵심이 주경(主敬)에 있음
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말한 경(敬)의 의미를 좀 더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천군(天君)>47)이라는 시에서 경을 통한 극기(克己) 공부를 강조
하는 가운데 이 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천군이란 심을
의인화한 것으로 조식의 <신명사도(神明舍圖)>를 연상시킨다. 그렇다
고 이것이 그의 경에 대한 태도를 조식의 영향으로 판단하기에는 좀
더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 의미만을 짚어본다
면, 그는 이 마음이 늘 한결같기를 원한다면 마음공부를 힘써 해야 하
고 이는 오직 경공부에 전념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경을 늘 조심하고 삼가는 ‘외경(畏敬)’의 의미로 새기
47) ≪木齋先生文集≫ 卷1, <詩>, <天君>, “明見萬里外, 天君乃聖神. 都將不欺
義, 盡瘁作忠臣. 臣妾不相治, 何以事天君. 盡禮唯在敬, 閑邪要策勳. 王道在
愼獨, 戒懼不覩聞. 中和天地位, 然後得君君. 降衷元年正, 靈臺儼紫宸. 歸仁
一朝驗, 富有四海春. 君有堯舜質, 受命火德王. 致知資賢輔, 懲忿遣良將. 克
己卽匪躬, 省察是諫諍. 若論帶礪功, 第一曰唯敬. 人心每聽命, 作德逸於上.
恭己定無爲, 太平還有象. 天君眞富貴, 持盈愼終始. 莫敎頻出狩, 端坐明堂
裏.”
394 東亞人文學 第27輯
고 있는데48) 이와 관련하여 그가 경성에 있을 때의 일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꿈에서 이황을 뵙고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이 풀렸다면서 이
때부터 이황이 깨달은 참된 이치를 궁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술
회하고 있다.49) 그때의 깨달음을 그는 경의 공부인 상성성법(常惺惺
法)으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장백산 바다 북쪽 백강 동쪽
내 신세는 바람에 날리는 쑥 같네.
백년 인생 나그네에 미치지 못했어도
만리를 주인옹과 함께 왔네.
지난 공부는 모두 실을 구하고자 했는데
앞의 명리는 부질없음을 알았네.
공자와 안연의 참된 즐거움을 얻음에
안중에 봄바람이 불지 않은 날이 없네.50)
상성성이란 마음이 늘 깨어있는 것으로 이른바 마음의 자각상태를
의미한다.51) 홍여하는 세사에 시달리면서도 늘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
하기 위해 이러한 상성성의 경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술회한 바와 같이 이황이 깨달은 학문
의 본지를 궁구한 데에서 얻은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일
48) ≪木齋先生文集≫ 卷1, <詩>, <偶吟>, “最後朱夫子, 說敬畏爲近. 此義尤精
切, 至哉萬古訓.”
49) ≪木齋先生文集≫ 卷1, <詩>, <記夢>, “秋風撼長白, 衰鬢颯如蓬. 思鄕轉悄
悄, 雲海隔萬重. 歲晏道無成, 中夜涕橫縱. 忽夢陶山子, 函丈接從容. 微言雖
未了, 光景挹昭融. 俄然夢蘧蘧, 身在碧海東. 此理誰復解, 感歎正由中. 千載
會心人, 朝暮得相逢. 歸歟理遺篇, 蚊蝱視千鍾.”; <偶書>, “玩索遺文在驗躬,
寒齋方夢退陶翁. 古來事業君看取, 出自窮居喫緊中.”
50) ≪木齋先生文集≫ 卷1, <詩>, <眼疾廢書, 日事惺惺法>, “長山海北白江東,
身世飄飄若轉蓬. 未了百年長作客, 同來萬里主人翁. 工程後面都要實, 名利
前頭看破空. 領取孔顏眞樂在, 眼中無日不春風.”
51) 한형조, <퇴계 ≪성학십도≫, 주자학의 설계도>, ≪조선 유학의 거장들
≫(서울: 문학동네, 2008), pp.116~129. 참조.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95
지 모르나 그가 이황을 주희에 비견하곤 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52),
이황이 자신의 학문적 완성인 ≪성학십도≫에서 학문의 요체를 경이
라 한 것53)은 그의 주경적 공부론을 정립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
을 것으로 짐작된다.
3. 육왕학(陸王學)의 비판과 존덕성공부(尊德性工夫) 중시
주희와 이황이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것은 육왕학(陸王學)이었다.
특히 이황은 “양명의 학술이 매우 편벽되어 그 마음이 강하고 사나와
제 마음대로 하고 그 언변이 장황하고 시끄러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현혹하게 하여 자기의 본심을 잃어버리게 하니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이 사람이 아닐 수 없다”54)라고 하며 <전습록변
(傳習錄辨)>을 지어 그의 대표적인 학설인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
지설(致良知說), 지행합일적 지행론(知行合一的 知行論) 등을 비판했
다.55) 여기서 이루어진 비판의 논리는 이후 이황의 직전 제자들을 거
쳐 그 후예들에게까지 이학관(異學觀)의 기본적 준거로 작용하였다.
홍여하 또한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
면적인 비판을 가하기보다는 육왕학의 공부론에 한정하여 자신의 입
52) ≪木齋先生文集≫ 卷2, <詩>, <感懷三十一絶>, “天降退陶翁, 遺文照海東.
丈人疑大隱, 洛水似閩中.”
53) ≪退溪先生文集≫ 卷7, <箚>, <進聖學十圖箚(幷圖)>, “敬者, 又徹上徹下,
著工收效, 皆當從事而勿失者也.”
54) ≪退溪先生文集≫ 卷41, <白沙詩敎傳習錄抄傳, 因書其後>, “陽明者, 學術
頗忒, 其心强狠自用, 其辯張皇震耀, 使人眩惑而喪其所守, 賊仁義亂天下, 未
必非此人也.”
55) 이황의 <전습록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 논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김
용재, <퇴계의 양명학 비판에 대한 고찰>, ≪양명학≫ 3집, 한국양명학회,
1999; 김세정, <양명 심학과 퇴계 심학의 비교 연구>, ≪동서철학연구≫
43호, 한국동서철학회, 2007, pp.300~309. 참조; 홍원식, <서애 류성룡의
양명학에 대한 관심과 퇴계심학의 전개>, ≪양명학≫ 31호, 한국양명학
회, 2012, pp.150~151. 참조.
396 東亞人文學 第27輯
장을 밝히고 있다.56) 우선 육구연(陸九淵)의 존덕성에 대한 비판은 그
가 51세 때 복천촌(福泉村)에 이거하여 존성재(尊性齋)를 지었는데,
이 재명에 대한 자술에서 나타난다. 그는 남송의 학자들이 주희의 학
문을 도문학(道問學)이라 하고, 육구연의 학문을 존덕성(尊德性)이라
하는 잘못이 생겨 이것이 원, 명의 학자들에게 이어져 주자의 도문학
이 곧 진정한 존덕성이며 육구연의 존덕성은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불
과함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57)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이
유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군자는 배우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
하며 자신을 돌아보아 이기고 다스려서 감히 조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에 해이하지 않는 자는 품부받은 기가 이지러지고 부족함의
치우침을 떨어내고 천지의 덕성이 온전해지기를 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공자와 자사, 맹자, 주돈이, 장재, 이정 형제가 사람들을
가르친 까닭이며 이어 주자가 도문학에 힘을 다한 것도 모두 이러
한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는 재주와 지혜를 부여받은 것
에 차이가 있어 영민함이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나면 반드시 스스
로 높은 데 처해 다른 사람들을 이기는 데 힘쓴다. 재주가 높아
이기는 데 힘쓰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더욱 굳어지고 사사
로운 생각이 뒤따라 생겨 가리고 숨기는 데 힘쓰며, 성현의 말들
가운데 비슷한 것을 취하여 겉으로 치장하게 된다. 그가 높이고
받들며 지키는 것은 부여받은 재주이고 사사로운 생각으로 이 모
두가 기질지성과 관계된 것에서 나온 것일 뿐인데, 그것이 덕성의
56) 양지론(良知論)에 대한 비판의 일단을 볼 수 있는 시가 있긴 하다. ≪木
齋先生文集≫ 卷1, <詩>, <題陽明集後>, “學問工程有階梯, 莫須辛苦說良
知. 倘敎上乘人人曉, 一貫先將語樊遲.” 홍여하는 일관(一貫)과 번지(樊遲)
를 들어 사람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 즉 학문의 차제가 있는데 양명학은
이를 무시하고 양지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57) ≪木齋先生文集≫ 卷6, <記>, <尊德性記>, “宋之季, 謬以朱爲道問學, 而陸
爲尊德性. 元明之人, 猶襲是說, 不知朱子之道問學, 乃所以眞尊德性也, 而陸
氏之所尊, 非眞德性也, 而乃其氣質之性也.”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97
본체가 아님을 알지 못한다. … 저 육상산의 인간됨과 학문함은 영
민함에 기대 뛰어넘고 천고의 시간을 올려다보니 덕성의 바탕이
이지러지고 부족함이 없을 수 없다.58)
군자의 학문이 추구하는 것은 천하의 리를 궁구하여 품부 받은 기
를 제어하는 데 있다. 인간이기에 태어날 때 품부 받은 기는 어긋나거
나 치우침으로 인해 사사로운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을 제어하지 않고 거기에 의지하게 되면 이는 덕성의 본체를 알
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구연은 바로 자신의 영민함만 믿고 이러
한 기에 치우쳐 제어하지 않으니 자칭 진정한 덕성을 이룬 것으로 생
각하지만 정작 그것은 기질지성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군자
가 이러한 덕성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희가 선현처럼
도문학에 힘을 다하였던 것도 사실은 이러한 덕성을 온전히 구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주희는 ≪중용≫을 해석하는 가운데 존덕성, 도문학을
지(知), 행(行) 또는 마음공부, 독서궁리공부와 연결하여 논하면서 그
병행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유독 육구연과의 관계에서 주희는 상대적
으로 도문학을 중시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는 주희가 육구연과의 아
호논쟁 과정에서 육구연의 지나친 도문학 경시에 대해 존덕성을 부정
하지 않으면서 도문학도 폐기할 수 없다는 입장에 대한 곡해에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급기야 주희는 도문학 중시, 육구연은 존덕
58) ≪木齋先生文集≫ 卷6, <記>, <尊德性記>, “君子貴夫學也. 學問思辨, 省察
克治, 不敢少懈其功者, 凡以祛其氣稟虧欠之偏, 而求全夫天地之德性者也.
故孔氏思孟氏周張程氏之所以敎人詔後, 朱氏之所以致力於道問學者, 皆是物
也. 而其間或有稟才智之偏, 穎悟出於衆人, 則必自處高而務勝人. 才高而務
於勝, 則其自是也愈堅. 私意遂成而遮藏掩護, 取聖賢之說之近者, 而文於外,
其所以尊奉持守者, 乃稟才與私意, 合而爲一, 出於氣質之性之緖餘耳, 而不
知非其德性之本體也. … 彼陸氏之爲人與爲學, 穎悟超詣, 高視千古, 而德性
之體, 不能無虧欠焉.”
398 東亞人文學 第27輯
성 중시라는 도식이 성립하게 되고 왕수인에 이르러 주희가 처음에는
도문학을 중시하였지만 만년에는 존덕성으로 기울었다는 이른바 주자
만년정론(朱子晩年定論)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홍여하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육구연의 존덕성은 기질지성과 관
련된 것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존덕성은 주희가 도문학에 힘
씀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즉 그는 주희의 말처럼 둘의 병행을
강조하면서 존덕성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이 도문학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왕수인(王守仁)을 비판하는 다음의 말에
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왕양명이 선가의 종지를 깨달은 후에 겉으로는 회옹(주희)을 높
이면서 속으로는 배척하여 말하는 것과 마음 쓰는 것이며 교묘하
고도 기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이 끝이 없다. 그렇지만 스스로 천
하 만세의 공의에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아 회옹이 말한 것 중
존덕성만 말한 것을 따로 모아 묶고서 만년정론이라고 여겼다.59)
왕수인이 주희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지만 이미 선가의 종지
를 따르고 있으므로 그의 학문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주자만
년정론은 더욱 근거 없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앞서 언급한
대로 주희는 배우는 이들에게 하학상달을 늘 염두에 두되 그 시작은
도문학을 통해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힘을 쓴다면 그것이 바로
덕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였음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 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용≫의 의미를 풀어낼 때에도 이에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
면 치지할 수 없으며 마음을 보존한 자도 또한 치지하지 않을 수
59) ≪木齋先生文集≫ 卷6, <跋>, <題陽明集朱子晩年定論後>, “陽明悟解禪旨
之後, 陽尊晦翁而陰斥之, 立言措意. 詭巧奇譎, 無所不用其極. 然自知不容於
天下萬世之公議, 則乃取晦翁之說專於尊德性者, 別爲裒類, 以爲晩年定論.”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399
없다.”라고 말하였다. ‘치지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것을 급히
해야 한다는 말이고, ‘치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것을
천천히 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60)
“마음을 보존하지 않으면 치지할 수 없으며 마음을 보존한 자도 또
한 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 둘을 본말과 경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치지할 수 없다’는 말은 마음의 함양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존덕성과 도문학이 선후의 관계로, ‘치지하
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함양이 이루어졌기에 존덕성과
도문학은 중경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주희의 도문학
이 사실은 존덕성을 위한 것이란 전제에서 그 본말과 경중을 따진다
면 존덕성이 본과 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주희의 견해와는 다른 홍여하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주희는 존덕성과 도문학의 병행을 언급했지 그 본말을 분명하게 나누
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이황의 생각과 겹치
는 면이 없지 않다. 이황은 육왕학이 지나친 존덕성 일변을 문제 삼았
을 뿐, 존덕성 중시 그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올바른 마음수양을 위한 존덕성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도문학의 역할
이 존재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61) 류성룡은 이러한 이황의 생각을 이
60) ≪木齋先生文集≫ 卷6, <跋>, <題陽明集朱子晩年定論後>, “晦翁之敎, 必使
學者, 下學而上達, 姑先從事於道問學上精思力踐, 則乃所以眞尊德性也. 及
其箋釋中庸之旨, 則乃曰, “非存心, 無以致知, 而存心者, 又不可以不致知
也.” 夫無以云者, 急之之辭也, 不可以不云者, 緩之之辭也, 其於本末輕重,
灼然甚明.”
61) 이황은 양명학의 선구로 보는 진헌장이 정좌설을 주장하지만 독서를 폐
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학문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평가한 데에서 이
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退溪先生文集≫ 卷41, <雜著>, <白沙詩敎傳
習錄抄傳, 因書其後>, “滉謹按陳白沙, 王陽明之學, 皆出於象山, 而以本心爲
宗. 蓋皆禪學也. 然白沙猶未純爲禪, 而有近於吾學. … 此其不盡廢書訓, 不
盡鑠物理. 大槩不甚畔去. 但其悟入處. 終是禪家伎倆.”
400 東亞人文學 第27輯
어 이를 교왕과직(矯枉過直) 즉 굽은 것을 고치려다 곧음이 지나쳐버
렸다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본심 공부에 대해서는 일견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62) 이것은 이후 존덕성과 도문학의 관계를 본
말로 인식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실제로 김종덕(金宗德), 이원조
(李源祚), 이진상(李震相), 이정익(李鼎益) 등은 존덕성 편중의 입장을
드러내 놓고 말하기 시작한다.63)
따라서 홍여하는 바로 이러한 육왕학에 대한 이황과 류성룡의 입장
을 계승하여 존덕성을 중시하되 도문학이 결국 존덕성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그 역시 이황의 존덕성 중시의 견해에 서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Ⅲ.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에서 홍여하의 학적 위치
앞서 살펴본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에 근거하여 이제 그가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어떠한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로 한다. 물론 그는 다양한 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였기에 꼭 퇴계학
파에만 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주로 이황, 류성룡, 정
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가학으로 하는 학문적 분위기에서 형성되
었다는 점에서 이를 중심으로 그의 학적 위치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우선 17세기 사상사의 지형도를 대략 살펴보자. 16세기에 있었던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과 이이와 성혼의 인심도심논쟁은 17세
기 들어 조선의 주자학화를 본격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정치
적으로는 동인의 몰락에 북인 또한 인정반정에 쓰러지면서 정국은 서
62) ≪西厓先生文集≫ 卷15, <雜著>, <知行合一說>, “詳王氏之意, 盖懲俗學之
外馳, 於是一以本心爲主, 凡所着心講求者, 皆以爲行, 盖矯枉而過直者也.”
63) 홍원식 외, <총론: ≪심경부주≫와 조선유학>, ≪심경부주와 조선유학≫
(서울: 예문서원, 2008), pp.24~27. 참조.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401
인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이의 문인이었던 김장생을 필두로 김집,
송시열 등이 정치의 구심점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이들은 이이의 철학
을 그 모태로 삼고 주자학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이어간
다. 그러나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
게 되면서 노론은 더욱 배타적인 정통론을 고수하고 이는 퇴계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견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퇴계학파 내에서는 이황 사후 직전 제자들이 스승의 성리설보
다는 공부론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
지고 이어 등장한 재전 제자들과 그 후예들은 이러한 공부론 일변도
에서 탈피하여 보다 다양한 사상적 관심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류성
룡의 문하에 있었던 정경세의 제자들인 류원지와 이구 등은 서인의
세력화에 대한 견제로 이이 철학을 비판하는가 하며 장현광 등 비록
학파 내 선배 학자라도 이이 철학과의 유사성을 지닌다면 강하게 배
척하곤 했다. 이러한 점은 퇴계학파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한편 그들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현일과 정시한은 이러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대립은 더욱 과열
된 양상을 띠게 된다.
홍여하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흐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가 교유했던 인물들의 면면이 그러하고, 비록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분명 자신의 사상적
색깔을 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그
의 사상적 특징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
가 있다.
우선 경학관을 보자. 홍여하는 경서와 사서를 전체대용의 관점에서
언급한다. 경서에서 사서집주에 나타난 편장자구법에 따른 경문의 의
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치세지문인 좌전
과 사기를 우선 필독하기를 권하고 이러한 공부가 사서집주를 통해
무르익어 다시 육경으로 이어져 이전의 경지를 벗어나게 된다면 경서
402 東亞人文學 第27輯
에 입언한 뜻을 온전히 깨우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 퇴계학파의 학문적 경향과는 이질적이다. 사서(史
書)에 대한 중요성, 특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은 당시 도학적
분위기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고 설사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
도 도본사말의 관점에서 도학과 대등하게 논의될 수는 없었다. 또한
이황을 비롯해 그 직전, 재전 제자들이 사서와 육경을 모두 강조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사서에만 몰두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홍
여하 또한 이러한 기본적 입장은 다를 바 없었으나 육경에 대한 관심
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경서에 대한 독서법에 대
해서도 주해보다는 경문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류성룡은 경서를 보는 데 주해를 먼저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
게 되면 자신의 견해가 남의 견해에 가리워져 ‘신의’를 얻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정경세 또한 이러한 스승의 관점과 비슷하게 독서를 하
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문(疑問)’이며 이러한 의문이 사색을
통해 그 뜻을 얻을 때 학문의 진보가 있게 된다고 하였다.64)
그런 점에서 근기 퇴계학파의 인물들 특히 허목은 주목된다. 그는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에 있으면서 당대에는 특이하게도 육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며 역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동사
(東史)≫를 지었다. 홍여하는 그를 스승 대하듯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 간의 학문적 수수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경학관은 17세기 영남의 경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16
세기 이황과 이이를 중심으로 석의 형태의 주석서가 이루어졌고 이어
이덕홍과 조호익 등이 그 뒤를 이어받지만 17세기는 이렇다 할 성과
들이 없었다. 이는 17세기 중엽 이이를 이은 송시열 계열에서 진행된
일련의 경서 해석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홍여하,
김응조, 정도응 등의 경학 관련 연구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17
64) 鄭經世(이하 생략), ≪愚伏先生文集≫ 卷13, <書>, <答宋敬甫問目>, “疑而
後思, 思而後悟. 古人之學以疑爲貴者此也.”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403
세기 중엽 영남 인물들의 경학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음으로 공부론을 보자. 이황의 직전 제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그에게도 리기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찾을 수 없다. 이는 기본적
으로 이황의 성리설에 대한 묵수의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겠는데, 여
기에 그의 <천군>이라는 시는 조식의 <신명사도>를 연상시킨다는 점
에서 그의 불필저술에 대한 태도 또한 일정 부분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점을 전제로 공부론에 한정하여 볼 때, 그는 격물궁리
와 거경함양을 중요한 공부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학과 다르
지 않다. 다만 격물을 해석하는 가운데 즉물궁리의 과정을 매우 세분
하여 이해하고 이것이 결국 마음공부를 위한 것임을, 그리고 둘은 경
(敬)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주경의 공부론 즉 경을 통해 독서궁리를 마음공부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은 주희의 입장보다는 이황이 말한 존덕성의 마음공부를 중시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황은 주희처럼 이 둘의 병행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존덕성을 우선해야 함을 강조했
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류성룡에게서 격물치지를 모두 심법이라 하는
데에서 재확인되며 이어 정경세가 학문은 근원적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며 이는 경으로써 일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65) 따라서 그는 이황의 공부론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도
문학에 대한 존덕성 중시를 보다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후
김종덕, 이원조 등 퇴계학파의 인물들에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
은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육왕학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황이 그러했
듯이 퇴계학파의 인물들은 대부분은 육왕학에 대해 철저한 비판의 입
장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그의 심즉리설과 존덕성 편향의 입장을 문제
65) ≪愚伏先生文集 別集≫ 卷4, <年譜>, “講明此學, 而不以敬持守, 則將無以
維持此心, 而爲涵養之本矣.”
404 東亞人文學 第27輯
삼았는데, 이황은 그 존덕성 중시를 부정하기보다 이에 대한 지나친
편향과 도문학의 폐기로 인해 결국 선가의 기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비판했다. 이른바 교왕과직의 폐단을 지적한 것인데 양명학에 대
한 관심을 표명했던 류성룡 또한 이러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홍여하도 이러한 맥락 속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육왕학을
비판한 것은 존덕성공부였는데 이는 기질지성에 지나지 않으며 주희
가 말한 도문학을 통하는 것이 진정한 존덕성공부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살핀 주경의 공부론에서 격물궁리와 거경함양을 연결시
키는 것과 맥이 닿아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이 말한 주자
만년정론 또한 터무니없는 주장이며 그는 주희가 그 두 공부를 모두
강조하면서도 본과 말을 엄격히 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홍여하는 퇴계학파 내에서 오늘날 말
하는 류성룡, 정경세, 류진, 류원지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 자리하여
그들의 기본적인 사상적 경향들을 공유하면서도 여러 성향의 학자들
과 교유하여 다양한 사상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사서에 대한 천착과 육경으로의 확대, 그리고 도문학의 독서궁리
공부를 존덕성의 마음공부를 위한 것으로 귀결시켜 이를 경으로 일관
한 점, 육왕학의 존덕성에 대한 입장 등은 그의 사상적 특징으로 지적
할 수 있겠다. 다만 당대 류원지와 이구 등 퇴계학파의 인물들이 학파
내외적으로 율곡학파와의 학문적 논쟁을 통해 퇴계학의 정체성을 세
우고자 하는 상황에서 그의 역할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이는 짐작건
대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학문적 성향이 치세지도에 있었기 때문에
성리설과 같은 다소 사변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판단된다.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405
Ⅳ. 나오는 말
이 글은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
장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했다. 자료의 한계로 인해
그 전모를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가 당대 퇴계학파의 전형
적인 학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
었다. 즉 리기론보다는 공부론에 관심을 갖고 존덕성과 도문학의 병행
을 전제로 하면서도 존덕성 중시 경향을 보인다거나 격물치지와 거경
함양의 두 공부를 경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육왕학을 교왕과직의 폐단이 있음을 적극 비판한 것이 그러하다. 물론
그가 아직 학파적 의식이 뚜렷하지 않는 가운데 다양한 교유관계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사상적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없지 않았다.
가령 격물의 해석을 세 가지 류로 세부하여 해석하는 부분이나 팔조
목을 명명덕과 경으로 일관하는 것 등은 분명 주희의 해석과는 다른
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을 17세기의 사상적 지형도에서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사서에 대한 천착과 육경으로의 확대는 퇴계
학파 내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로 아직 학파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가
운데 다양한 인물들과의 학문적 영향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점
이다. 또한 도문학의 독서궁리공부를 존덕성의 마음공부를 위한 것으
로 귀결시켜 이를 경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존덕성 중시적 경향을
분명히 하여 이황 공부론의 핵심을 잇고자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홍여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여
전히 많은 과제들이 남아있다. 우선 여기서는 류성룡 계열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 간의 관련성을 일부 다루는 것에 한정했다. 그 외에 그가
교유한 다양한 인물들 간의 학문적 수수관계를 정리하고 이것이 그의
사상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총제적으로 파악해 볼 필요가
406 東亞人文學 第27輯
있다. 또한 경학관에 대해서도 비록 체계적인 서술이 아니고 그 일부
만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가 가졌던 사서집주에 대한 태도 및 육경에
대한 그의 해석 등 이른바 궁경관(窮經觀)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연구
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홍여하의 사상적 특징을
보다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시론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17세기 사상사의 여러 국면들이 여전히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가운
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계속 이어진다면 이 시대를 보다 풍부
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參考文獻】
≪經書≫, ≪大學≫
朱熹, ≪朱子語類≫
洪汝河, ≪木齋先生文集≫
, ≪東國通鑑提綱≫
李滉, ≪退溪先生文集≫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鄭經世, ≪愚伏先生文集≫
李玄逸, ≪葛庵先生文集≫
권진옥, <목재 홍여하의 산문비평 일고>,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 17, 2011.
금장태, <영남성리학의 전통과 쟁점>, ≪퇴계학파의 사상Ⅰ≫, 서울:
집문당, 1995.
금장태, <조선후기 퇴계학파의 학맥과 리철학의 전개>, ≪퇴계학파와
리철학의 전개≫, 서울: 서울대 출판부, 2000.
김근호, <류중교와 전우의 심설논쟁에 대한 연구>, ≪한국사상사학≫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407
28집, 한국사상사학회, 2007.
김영택, <목재 홍여하의 역사의식과 문학관 연구>, 안동대 석사논문,
2004.
이종우, <명덕심성논쟁>, ≪19・20세기 한국 성리학의 심성논쟁≫,
서울: 심산, 2005.
전재동, <목재 홍여하의 경학관 경서 해석>, ≪영남학≫ 23호, 경북대
영남학연구원, 2013.
한형조, <퇴계 ≪성학십도≫, 주자학의 설계도>, ≪조선 유학의 거장
들≫, 서울: 문학동네, 2008.
홍원식 외, <총론: ≪심경부주≫와 조선유학>, ≪심경부주와 조선유학≫,
서울: 예문서원, 2008,
홍원식, <목재 홍여하의 생애와 성리설>, ≪한국사상사학≫ 43호, 한
국사상사학회, 2013.
홍원식, <정주학의 거경궁리설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6.
홍원식, ≪문경 허백정 홍귀달 종가≫, 대구: 경상북도・경북대 영남문
화연구원, 2012.
408 東亞人文學 第27輯
Appearance of Toegye school and
Mokjae Yeoha Hong in 17th century
Choo, Je hyup (Kyungpook Univ.)
<Abstract>
This paper is aim to find out appearance of Yongnam Toegye school
and relations through Hong, Yeoha’s theory feature. It was not easy to
figure out all because of lack of data, but I can verify his theory was
not deviate much from Toegye`s academic trend. He was interest in
Self-cultivation theory instead of LiKi theory, premised enhance of virtue
(尊德性) and investigation of knowledge(道問學) together but pretend
enhance of virtue more importantly, consist Gyeokmul Chiji(格物致知)
and Geogyeong Hamyang(居敬涵養) as ‘Gyung(敬), and in this view, he
criticized that Lu Wang studies has problem as Gyowang Gwajik(矯枉過
直)’. Some data shows even he did not have exact awareness about
academic trend, he argued his own theory through diverse relationship.
Such as, he interpreted Gyeokmul as Hyungrye(形類), Sangrye(象類),
Sungrye(性類), also consist Paljomok as Myungmyungduck(明明德) and
Gyung are different with Zhu Xi’s theory. When we look these
peculiarity through theory of 17th century, first, expansion of four books
about Confucianism(史書) and six Gyung is not common in Toegye
school, then we can consider about his study exchange with variety
people. Second, we can find out he tried to follow point of Lee Whang
study theory by consist Dockseo goongli study in investigation of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등장과 목재 홍여하∣추제협 409
knowledge for enhance of virtue.
Key Words:Hong, Yeoha, Yongnam Toegye school, six Gyung, premised
enhance of virtue, Gyung, Gyowang Gwaj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