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막 (酒幕)
과 주점 (酒店)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주막 (酒幕) 은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종합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막 (酒幕) 에는 요즘처럼 특별한 간판은 없었으나 이름은
있었으며, 주막 (酒幕) 이름은 주막집 쪽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이 지은 것으로, 오동나무가 있는 집이면 오동나무 집이요, 우물이 있는 집이면 우물 집, 주인의 뒷덜미에 혹이
있으면 혹부리 집 등으로
불렀습니다.
주막 (酒幕)
의 표시로 문짝에다 `술 주 (酒)’ 자를 써서 붙이거나, 창호지를 바른 등 (燈) 을 달기도 하였습니다.
(주막 [酒幕] 창호지 등)
또는, 장대에 용수를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리거나, 소 머리나 돼지 머리 삶은
것을 좌판에 늘어 놓아 주막 (酒幕) 임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용수를 걸은 주막)
(술 거르는 싸리 나무 용수)
나라에서 운영하는 원 (院) 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옛 주막 (酒幕) 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먹으면
대체로 잠은 공짜로 재워 주었고, 주막 (酒幕) 의 큰 방을 주막방 (酒幕房) 혹은 봉노, 봉놋방이라고 하는데, 잠을 자는 길손들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시골 주막)
시골의 작은 주막 (酒幕) 은 방 몇 개에 술청이
있는 정도이며, 거리의 간이 주막 (酒幕) 은 허술한 지붕에 가리개로
사방을 막아 놓고, 낮 동안에만 술 장사를 했던
곳도 있어서 주막 (酒幕) 은 여러 가지 형태입니다.
(시골 간이 주막)
서울에 과거라도 있으면,
주막은 과거 보러 가는 손님들로 만원이 되기 마련이며, 주막에 들어 돈만 낸다고 해서 특실에 들거나, 상석에 앉지는 못하였고,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해도 구석방이나 마루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었으며, 양반이 판을 치고 양반 중에서도 권세 있는 자가 특실에 들어 거드름을
피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쩌다 손님끼리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이렇게 되면 주인은 돈도 못 받고, 그들의 뒤치닥 거리에 골탕만
먹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과거 시험 응시하는 선비들)
조선 시대 주막 (酒幕) 에서 팔았던 술은 탁주가 주종이었고, 소주도 팔았으며, 양반 손님을 위해 맛과 향기를 넣어 만든 방문주 (方文酒) 를 팔기도 하였습니다.
옛 주막 (酒幕) 에서는 술을 한 잔, 두 잔씩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는 무료 안주가 한 점씩 붙어 다녔습니다.
주막 (酒幕)
의 목판에는 안주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른 안주로는 육포, 어포 등이 있었고, 진 안주로는 쇠 고기, 돼지 고기 삶은 수육과 빈대떡, 떡 산적 (떡갈비), 생선구이, 술국 등이 있었습니다.
(주막집 술항아리)
주막 (酒幕)
에서 파는 우거지 술국을 해장국 (解腸羹 원래는 解酲羹 또는 양골국) 이라도 하였는데, 양지머리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 (늑골) 를 도끼로 토막 쳐서
흐무러지도록 끓이고, 우거지를 넣어 끓여 내면, 허연 국물이 된장 맛과
어울려서 구수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허기를 메워주는 식사류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는 순전히 양지머리로만
국물을 뽑기 때문에 국물이 순하며, 간을 맞추기 위해 간장을 타면, 연한 국물 빛이 장국을
더욱 맛있게 하였습니다.
(소고기 양지머리 국밥)
주막 (酒幕) 의 기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첫 째는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요,
둘 째는 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이며,
셋 째는 숙박처를 제공하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정보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달처 구실을 하였으며,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휴식처가 되었고,
여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구실도 하였습니다.
(복원된 산길 주막집)
따라서, 주막 (酒幕) 은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도회지에도 많이 있어 주막 거리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이며, 대체로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는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주막
(酒幕) 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서울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소사 (富川), 오류동 (梧柳洞) 에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
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 (酒幕) 이 번성했던 곳이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인 문경 새재 (鳥嶺) 에는 주막촌
(酒幕村) 을 이루었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 (花開) 장터, 한지와 죽산물, 곡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全州) 등이 주막 (酒幕) 들이 많았던 곳으로 꼽힐 수 있습니다.
(주막집 - 술막)
또한, 주막에서 시중드는 남자아이를 `중노미’라고 했는데, 이는 주로 안주를 굽거나, 공짜 안주를 먹는 사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막 (酒幕)
을 우리말로 `술막’
이라고도 하였는데, 시골 주막촌이나 주막거리에 새로 생긴 주막을 `새술막’ 또는 `새슬막’ 이라고 불러서, 지금은 춘천, 천안, 괴산 등지에 지명처럼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새술막 - 새슬막)
주막 (酒幕)
을 주사 (酒肆), 주가 (酒家), 주포 (酒舖) 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주막 (酒幕) 은 `밥집’ 에 가깝고, 주사 (酒肆), 주가 (酒家), 주포 (酒舖) 는 주점 (酒店), 즉 지금의 `술집’ 에 가깝습니다.
이 주점 (酒店) 들은 대개 도회지 (都會地) 에 많으며, 숙박보다는 사교 (私交) 의 장소의 하나로 많이 이용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주사 (酒肆) 는
술청 앞에 서서 먹는 `선술집’으로 비교적 큰 술집 (酒店) 을 말하며, 민초들의 사교 (私交) 장소의
하나로 이용되었고, `술주정’을 발음이 같은 주사 (酒邪) 라고 하여서, 주루 (酒樓) 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규모 큰 선술집’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혜원 신
윤복의 주사거배 [酒肆擧盃])
주사 (酒肆) 보다는 작은 규모로, 민초들이 드나드는 곳이 주가 (酒家), 즉 `술집’으로 경상도에서는 `술처’
라고 했으니, 현대시를 읽어봅니다.
저 웃 동네 쉬신달이
팔수 아지매도 뷔고
맨날 집에서 파 묵고 에미 주무이만
훌치내는 놈패이
옆집 신태란 늠도 뷔고
뻘쭘하이 키만 커 가주고 지집아가
싱겁어 빠진
뻘따이 겉은 딧집 춘자란
년도 뷔고
아래 웃 동네 술처어 (酒家) 만 댕기민서
주야로 외상술만 축내대는 뻘럭꾸이 옆딧집
춘발이 늠도 뷔고
장터어 들오는 바로 고 입시불, 다리꺼래 사는
눈굴따이 판수란 늠도 뷔고
요 앞서 및칠 새 시 쌍디이 오마이 된
과수원 너머 위딴 집 새댁이도 뷔고
바로 한 동네에 사는
멀 때 겉은 덩더꾸이 칠수 늠, 쌍 가매재이 순식이란 늠도
뷔고
쌍수 말래이 사는 여수겉은 미자란 년도 눈에 띈다
그 어다가 몸 성찮은 사람들도
오늘, 이 단대목 자 (場) 아
다 모인 거 겉다
곰보 딱지, 째보,
햇팔이, 사팔이, 곰배팔이, 앞 곰배,
딧 곰배, 삣땍이,
언처이, 먹보,
뻘찌라 카기도하는 버버리, 애꾸누이, 난재이,
안질배이,
찜빠리, 봉사,
당달 봉사, 곱사디이, 쪼막소이 꺼정.
대구의 추석 풍물 시골 장터를 노래한 상 희구 시인의 현대시 입니다.
(김 홍도 주막 술집
– 주가 [酒家])
하지만, 중국에서는 주점 (酒店) 혹은 주가 (酒家) 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규모와는 전혀 다르게 사용합니다.
(중국 낙양 주가 [酒家] – 대형 음식점)
주포 (酒舖) 는
`술을 파는 집’의 뜻으로 술도가에서 술을 받아다가 술병 (酒餠) 이나 주전자에 술을 파는 동네 술집을 말하며, 집에서 갑자기 손님을 대접하려면 담궈 놓은 술이 없으면 술을 사와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술 한잔을 하고 갈 수도 있는 민초들의 동네 술집, `사발 막걸리 집’ 즉 요즘 말의 `실비 집’ 이었습니다.
(실비 집 – 동네 술집 [酒舖])
또한, 길다란 널판지 (목로 [木壚]) 를 상으로 삼고, 술안주를 펼쳐 놓고 술을 파는 `목로 집’, 요즘의 목로 주점 (木壚酒店) 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술 찌꺼기 (지개미) 를 다시 거른 모주 (母酒) 에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로 만든 비지 부침개를 안주로 파는 서민들의 실비 술집인, `모주 집’ 도 있었습니다.
(술 지개미)
(모주 [母酒])
색다른 술집의 하나가 `내외 술집 (內外酒店)’ 으로
내외 술집은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연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술집으로, 남녀 사이의 내외가
엄격하던 실정이라 서로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얼굴은 안보이고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해서 `팔뚝 집’ 이라고 하는 술집이었습니다.
(팔뚝 집 – 내외 술집 [內外酒店])
예나 지금이나 술에는 아낙이 따르는 법으로, 아낙네를 앉히고 술을 마시고, 손님에게 술과 색 (여자) 을 함께 파는 술집으로 `색줏집 (色酒家)’이라고
하는 요즘의 `방석 집’ 술집이
생겨나게 됩니다.
(기산 김
준근의 색주가 [色酒家]
모양)
이조 세종 대, 홍제원 (弘濟院) 에 중국 사신들의 하속 (下屬) 들을 위하여 색줏집
(色酒家) 를 두었는데, 장안에도 남대문 밖 잠배 (紫岩 - 巡和洞) 와 원각사 뒤의 낙원동, 동구 안 서편, 동관 대궐 앞 뒷골목 수운동에 색줏집 (色酒家) 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이 색줏집 (色酒家) 앞에는 술을 거르는 용수에다 비 올 때, 갓 위에 쓰는 갓모 – 입모 (笠帽),
즉 우모 (雨帽) 를 씌워 긴 장대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는 자그만 등은 달아 놓았으니, 그 모양새를 가만히 보노라면, 우리 선인 (先人) 들의 해학 (諧謔) 도 가히 수준급이었습니다.
(기산 김준근 색주가 술 사먹는 모양)
(기산 김
준근 색주가 술 사먹기)
(갓모)
(용수)
계속합니다, 보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