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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제방 그늘
요코는 오늘 마음을 굳게 먹고 고아원을 찾아가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반인들이 그냥 찾아가도 되는 건지 요코는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따라서 찾아간다기보다 하다 못해 고아원 건물이라도 보고 와야겠다는 심정으로 나선 것이다.
고아원은 시립 병원 근처에 있다고 하며, 이시카리 강의 제방 근처라고 들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요코는 그 근처의 지리에 어두웠다. 그래도 고아원의 밝고 큰 건물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긴세이 다리 입구에ㅣ 흰 페이트칠이 벗겨진 판자벽으로 둘러싸인 고아원이었다. 요코는 제방에 서서 그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2백 50평 남짓되어 보이는 이층 건물이 그보다 족히 네 배나 되어 보이는 대지 한복판에 세워져 있고, 마당 한켠에는 오래된 연못이 수양버들과 자작나무에 에워싸여 있었다.
제방 쪽의 공터에는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었으나 아이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때마침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가방을 들고 문을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요코는 제방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넓은 강이 7월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제방 양쪽에 사람 키보다 높이 자란 감제풀 잎이 군데군데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맞은편 강변의 자동차 운전 교습소에서는 대여섯 대의 차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누나, 어디 가?”
어느새 왔느지 초등학교 3,4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몇몇이 요코를 에워쌌다.
“바람 쐬러.......”
요코는 자기에게 말을 건넨, 얼굴이 동그란 남자아이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럼, 산책하는 거야? 누나네 집이 이 근처야?”
“아니, 여기서 멀어. 가구라 거리에 있는걸.”
“가구라 거리? 어딘데? 저기?”
“응, 저기야.”
요코는 남쪽을 가리켰다.
“누난 엄마 아빠랑 살아?”
개중 키가 제일 작고 목덜미가 거무스름한 남자아이가 물었다.
“응.”
“누나의 아빠 엄마는 결혼했어?”
“결혼?”
“응.”
두 아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결혼하셨지.”
요코는 문득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와 친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응, 결혼했다면 됐어.”
“그래, 결혼했으면 좋아. 어디서 결혼했어?”
분명히 그것은 어린아이의 질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너희들 집은 어디야?”
“우리 집은 루모이에 있어.”
“루모이?”
요코는 놀라며 대답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난 몰라, 세 살 때 왔으니까.”
“세 살 때 왔다구?”
요코는 그제야 이 아이들이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그럼 너희들은 저기 사는구나.”
요코는 제방 아래 있는 고아원을 내려다보았다.
“응.”
아이들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누나, 벌써 갈 거야?”
“지금 몇 시야?”
여자아이가 요코의 손목을 잡았다. 그 손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어머, 벌써 세 시 반이야.”
아이는 이렇게 말했으나, 여전히 요코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언니는 예뻐.”
여자아이가 요코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끼었다.
“정말이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같아.”
또 다른 아이 하나도 다가와서는 요코의 손을 잡았다.
“얄미워, 내가 더 가까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 요코의 손을 잡고 싶어했다. 그것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과 같았다.
“언니, 이름이 뭐야?”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말해ㅔㅆ다.
“쓰지구치 요코야.”
“쓰지구치 요코? 그거 아빠 쪽 이름이야, 엄마 쪽 이름이야?”
여자아이가 열심히 물었다.
“.......아빠 쪽 이름이야, 물론.”
“응, 그쪽이 좋아. 난 말이야, 언니. 엄마 쪽 이름이거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대.”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요코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까부터 아이들은 결혼이라는 말을 자주 입밖에 냈다. 그 이면에 얼마나 복잡하고 억압된 생활이 숨어 있는가를 요코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아원 쪽에서 갑자기 오르골 소리가 들려왔다.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길’이라는 곡이었다.
“어머, 무슨 오르골 소리야?”
“응, 이제부터 자유시간이라는 거야.”
“이제부터 자유시간? 하지만 너희들은 지금까지 여기서 놀고 있었잖아?”
“아냐, 놀고 있었던 거 아냐. 이 근처에 어떤 풀이 있는지 알아보러 왔어. 그렇지?”
남자아이가 이렇게 변명하며 갖고 있던 감제풀을 요코에게 보여주었다.
“누나, 우리 집에 가서 놀다 가.”
“그래, 놀다 가.”
아이들은 일제히 조르기 시작해ㅔㅆ다.
제방에서 고아원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도 뜻밖이었지만 그 애들이 먼저 말을 걸어 온 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고아원에 가서 놀다 가라는 말은 더욱 의외였다.
“학교 친구도 자주 놀러 오는걸 뭐, 그렇지?”
요코의 손을 잡아끌며 남자아이가 말했다. 요코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아이들과 함께 제방을 내려와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열려 있는 뒷문으로 들어가니 뚜껑이 없는 신발장에는 어린아이의 신발과 크고 작은 신발, 샌들 등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안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복도에 혼자 앉아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우리 방이야.”
현관 옆의 문을 열고 아이들은 요코를 방으로 끌어들였다. 왼쪽에 선반 같은 길다란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앞에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곳이 아이들이 공부하는 장소였다. 조금만 팔을 뻗어도 옆 사람에게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책상이 있는 벽 쪽에 책가방이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그 위쪽의 작은 선반에 놓여 있는 보자기 뭉치는 아이들이 갈아입을 옷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훌륭한데,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구나.”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2단으로 된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10명의 아이들이 아래위로 나누어 자게 되어 있었다. 아이들만의 세계였다. 아직 아버지나 어머니 품에 매달려 있을 나이인 아이들이 여기서 어떤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것일까. 여자아이가 말했다.
“언니, 자고 가.”
“자고 가라구?”
“원장 선생님께 부탁해서 우리랑 같이 자고 가.”
“그래그래, 자고 가. 함께 목욕도 하고......”
“집에 가서 물어보고 다음에 자러 올게.”
“정말? 그럼 약속! 죽어도 살아도 거짓말 안 하기야, 호호호.”
여자아이가 요코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입김을 쐬었다. 그때 또 오르골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강당으로 가. 점호가 있어.”
아이들은 다시 요코를 끌고 강당으로 데리고 갔다. 서너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에서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5,60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이 사람 누구야?”
다른 아이들이 요코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마. 우리 손님이니까.”
요코를 데리고 온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젊은 남녀 직원들도 강당으로 들어왔다. 요코는 이렇게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지 좀 불안했다.
고아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코는 4조 8가에 있는 ‘가메야’ 레스토랑에 들렀다. 가족 동반 손님이 많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저녁 식사 때라 실내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요코는 겨우 창가의 빈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목이 몹시 말랐다. 레몬스쿼시를 주문한 요코는 그제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코는 고아원 강당에서 원장을 만났다. 쉰 가까이 되어 보이는 원장은 소박한 옷차림에 자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장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요코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는 아이들을 좋아하나 보군요. 아이들은 사람에게 민감해요.”
나중에 원장은 넓은 욕실과 세탁실, 식당, 의무실 등으로 요코를 안내하면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녁 식사를 알리는 벨이 울리자 요코는 작별 인사를 하고 고아원을 나왔다.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나, 요코가 주문한 레몬스쿼시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요코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나쓰에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다투어 잡아끌던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머리 위에 커다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어 옆의 난초 잎이 선풍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비어 있나요?”
하고 누가 말을 걸기에 돌아보니 네 살 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목을 잡은 젊은 엄마와 아기를 안은 젊은 아빠가 서 있었다.
“비어 있어요. 앉으세요.”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아빠는 아기를 엄마에게 넘겨주고 메뉴를 폈다. 아이가 곧 외쳤다.
“난 런치 먹을래.”
“뭐? 넌 언제나 런치구나.”
아빠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런치!’
요코는 방금 헤어진 고아원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 아이들 중 부모를 따라가 런치를 먹어 본 아이가 몇 명이나 될까. 아마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런치!’
요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자식들이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자식들이 아닌가. 요코는 앞에 놓인 레몬스쿼시를 한 모금 마셨다. 부모를 다라온 그 남자아이는 웨이트리스가 가져온 어린이용의 높은 의자에 앉아서 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크림색 외출복 단추를 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아기는 엄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젖을 빨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진기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요코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엄마는 젖을 먹이면서 아기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리고 있었다.
“맘마, 맘마.......맘마.”
리듬이 있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기 엄마는 지루하지도 않은 듯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맘마, 맘마, 맘마, 맛있어? 그래, 그럼그럼.”
엄마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요코는 또다시 아까 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요코는 원장에게 자신도 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을 밝혔다. 고아원 아이들을 보고 있는 동안 요코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환경 속에 태어났던 것이다.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요코의 심정을 원장은 인자하게 헤아려 주었다. 그리고 고아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유아원에서 바로 가정으로 입양된 건 그래도 잘 된 일이에요. 유아원에서 자란 아이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말을 훨씬 늦게 배우거든요.”
유아원의 보모들은 혼자서 여러 아이를 맡아 길러야 한다. 아무리 상냥한 보모라도 결코 친어머니만은 못한 것이다. 젖을 물리며 ‘맘마, 맘마, 맘마’라고 몇십 번이나 되풀이하는 흉내 같은 건 보모는 도저히 낼 수 없다. 말을 거는 횟수도 적다. 게다가 교대로 근무한다. 아이들은 날마다 같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 수가 없다. 보모는 저마다 안아 주는 습관이나 말하는 습관이 다르다. 따라서 아이들은 말을 늦게 배우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요코는 눈앞의 젊은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지금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는 이렇게 길러져야 한다.
작은 깃발이 꽂힌 런치가 남자아이 앞에 놓여졌다. 남자아이는 깃발을 뽑아 팔랑팔랑 흔들어 보고 나서 다시 밥에 꽂아 놓았다.
요코는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았다. 오늘 다라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아이들 중에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요코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까 고아원 아이들이 강당에서 부르던 노랫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은총을 오늘 다시 받고서......우리는 하나님의 빛의 아들들”
날마다 부르는 노래일 것이다.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작은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찡했다. 뜻밖의 가사였다.
부모를 따라 레스토랑에 가서 런치를 먹어 본 적도 없을 ‘빛의 아들들’을 생각하면서 요코는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빠, 아빠 초밥 나 줘.”
남자아이는 먹다 남은 런치를 아빠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