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은 죽었는데, 누나인 ‘정명공주’ 어떻게 살아남았나?
정명공주가 살아남은 이유는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누나인 정명공주는 왕위를 위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명공주도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면서 옹주로 강등되었지만 사실상 서인으로 강등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인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올라치면 “이미 죽었다.”라며 둘러대면서 정명공주가 부각되지 않게 한 것이 살아남은 이유입니다.
정명공주는 천수를 누리고 83세에 세상을 떴습니다.
당시 학자 송시열은 “정명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에 걸맞게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해 오복을 향유했다.”라고 했듯이 정명공주는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 번의 예송, 경신 대기근 등 역사의 굴곡을 직접 겪기도 하고 거쳐 가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인조가 승하한 후 36년간은 지난 47년의 고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순탄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현종과 숙종은 정명공주에게 빚을 진 적이 없고, 최고의 예우를 아끼지 않았지만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에게 빚을 가장 많이 진 인조는 17년이나 정명공주를 무고 혐의로 괴롭혔습니다.
광해군과 인조는 한때 정명공주를 도탑게 보듬었지만 광해군은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귀가 얇은 인조는 의심증 때문에 정명공주를 죽음의 고통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정명공주는 송시열이 말한 존귀, 겸손, 공손, 어짐, 후덕 의 오복으로 83세까지 천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18년 생여진 족 누르하치가 요녕성 심양을 공격하여 후금을 건국하는 해에 인목왕후가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는 인목대비 폐출사건이 발생한다.
인목왕후는 1613년 아버지 김제남과 세 아들이 사약을 마시고 죽는 참변을 당하였다.
또한 대북정권은 1616년 선조의 제2왕후인 인목왕후가 선조의 제1왕후 의인왕후의 능을 저주하였다면서 역모로 몰아, 죽은 지 3년이나 지난 김제남의 시신을 꺼내 부관 참시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서궁에 유폐된 인목왕후는 류간이 후궁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이첨이 후궁으로 강등을 시키되, 녹봉(급료/늠료)과 혼인은 옹주(후궁의딸)의 예우로 해야 한다고 하여 후궁의 딸 대접을 받았다.
서궁에서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에 이어 정명공주까지 잃을까봐 죽었다고 소문을 낸다.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물으면 죽었다고 대답하였다. 정명공주는 서궁에서 바깥으로 나가 생활을 하였는데, 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궁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어린 정명공주가 화정(華政)이라는 서예글씨를 써서 남겼는데, 화정이라는 글씨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군주가 "빛나는 정치"를 하려면 어떤 정도의 길을 가야하는 지를 서예글씨로 써서 광해군에게 말해 주고자 하였던 글씨가 화정(華政)이었다.
1623년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신원이 복귀되었다. 반정 후 공주로 복귀되고 21세 때 홍영의아들 홍주원과 결혼하였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홍씨, 홍인한, 홍봉한, 홍국영, 원빈 홍씨 등은 정명공주의 후손이었다.
인목왕후 딸인 정명공주는 인조와 효종(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 아들)과는 동족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를 외면하기 위해 삭 바느질과 자수 등에 전념하는 척하였으며, 인목왕후와 함께 한석봉 체를 즐겨 썼다.
인조9년 30세 때 인목왕후가 죽자 방에서 백서 삼폭의 비단에 저주의혹(詛呪疑惑)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인조의 의심을 샀다. 이것은 인목왕후가 선조의 제1왕후 의인왕후를 저주하지도 않았는데, 저주했다고 대북정권에서 중상 모략하여 궁녀들이 글씨를 새겨 인목왕후에게 알려줄 요량으로 비단에 새겨 놓은 것으로 결론 났다. 서인 최명길 등이 구명하여 위기를 넘기게 된다.
효종 때도 의심을사서 항상 몸을 사리며 살아야하였다. 인조, 효종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자손들이고 정명공주는 선조의 제2왕후 인목왕후의 딸이었기 때문에 왕조계승에 있어서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명공주가 다른 왕자를 내세워 왕위를 바꿀까봐 인조, 효종은 주변에 나인을 심어 감시하였다.
현종, 숙종 대에 이르러서 왕실의 원로 대우를 받아 7남 1녀를 두고 자손들에게 남의험담을 한귀로 듣고 함부로 남의 허물을 내뱉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685년 83세의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 유언으로 영조 때 사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혜경궁홍씨는 한중록을 남긴다.
[출처; 다음 Tip]
첫댓글 수고하심에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