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파리 생활에 지쳐 있었고, “더 많은 색채와 더 많은 태양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1888년 2월, 바람대로 프랑스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아를로 이사했다. 그해 눈이 많이 왔다. “사방에 60센티미터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추운 겨울도 오는 봄을 이길 순 없다. 봄이 왔고, 차츰 눈이 녹기 시작했다. 진갈색 상의에 연회색 바지를 입고 까만 모자를 쓴 남자가 연갈색 개랑 밭두둑 위를 걸어간다. 남자와 개는 아직 잎이 돋지 않은 교목과 관목 같다. 남자가 걸어간 만큼 두둑 아래 밭에 풀이 보인다. 남자가 걸어갈 앞쪽 밭두둑엔 아직 눈이 덮여 있다. 걸어‘갈’ 두둑과 밭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고, 걸어‘온’ 두둑과 밭엔 풀이 돋고 있다. 걸어온 만큼 눈이 녹았고, 걸어갈 만큼 풀이 돋겠다.
바빌로니아로 끌려와 페르시아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50여 년이 지나면서 3대가 되었다. 바빌로니아 혹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거기가 고향이다. 옛날 성전이 있던 땅, 회복해야 할 땅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소원이 생경했다. 게다가 옛적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자면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페르시아 왕이 돌아갈 것을 명령하고 지원을 약속했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때 이사야를 통해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울린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길을 예비하라는 건 다른 사람들도 갈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내라는 뜻일 터다. 앞서 길을 가라는 뜻을 거다.
남자와 개가 광야를 걷는다. 눈 덮인 밭두둑을 남자와 개가 걸어간 만큼 눈이 녹는다. 두둑에 쌓인 눈이 녹고, 밭을 덮은 눈이 사라진다. 남자랑 개가 먼저 걸어간 밭두둑을 뒤따르면 미끄럽지 않겠다. 남자랑 개가 앞서 지나간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릴 수 있겠다.
광야(曠野)의 광(曠)은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빈 들을 둘이 걷는다. 두발짐승과 네발짐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광야를 걷다 보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겠다. 광야 너머 멀리 설산이 보인다. 멀지만 가야 할 길이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고, 쉬다가 일어서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나무가 되면 어떤가. 남자는 교목이 되고, 개는 관목이 되어, 거기에서 함께 숲이 되면 그 또한 좋잖은가. 봄은 거기에도 올 것이다.
멀지만 낙심할 필요 없겠다.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수께서도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다. 길에 있으면 예수와 함께 있는 거다. 제법 멀고 꽤 높겠지만, 고흐는 눈 덮인 산을 위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산이 멀어도 마실가듯 갈 만하다. 가쁜 현실일 뿐, 오르면 되는 산이다. 달랑달랑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할 네발짐승 동료 있어 많이 외롭진 않겠다. 다시 걷는다. 걸어간 만큼 봄이다. 겨울로, 봄은 또 온다.
첫댓글 와.. 그림 묵상이 이렇게도 은혜로울 수가 있다니..!!
필자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걸어간 만큼 봄이다.
겨울로, 봄은 또 온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