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은 늘 많은 이야깃거리가 몰려 있기 마련이고 지난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보면 그리움과 애잔함 더불어 후회가 한 움큼 밀려온다. 중고교 시절의 이야기라면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 선생님과 전설의 일진 ‘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바바리맨. 더하여 초등학교 시절의 괴담까지를 보탠다면 아주 완벽히 학교에 관한 전설 따라 이야기가 될 듯하다. 단지 이런 이야기에 애잔함과 후회가 뒤따르지는 않을 것이니 나는 다른 기억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겠다.
나의 집은 인근 타학교를 지나는 길에 있었다. 때때로 학교 정문에는 할머니 한 분이 바구니, 아니 바가지를 놓고 옆에는 지팡이를 두고 앉아 계셨다. 바구니라고 할 그것은 공장제가 아닌 박으로 만든 바가지같은 것이었는데 오랜 세월의 흔적을 따라 낡고 시커멓고 그러면서도 제법 단단하게 보였다. 할머니는 학교 정문을 오르는 계단에 걸터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면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확연하게 ‘구걸’의 장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교문 앞에 있을 때도 있었고 어쩔 때는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는 오후 시간 즈음에 햇살을 맞으며 그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자주 그곳에 있었던 것 같고 제법 오~랜 세월을 그곳에 있었다.
그 할머니에 관한 소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집 근처 학교에서 자주 보았지만 동네 다른 곳에서는 본 적도 없고 할머니가 사는 곳이 어디라고 어느 근처라고도 들은 것 같지는 않다. 동네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들은 것 같은 이야기. 그 학교 앞에 있는 할머니에 관한 소문은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실상을 파헤쳐 본 듯이 전해지곤 했다. 사실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래, 눈도 나쁘지 않으면서 앞이 보이지 않은 척하며 그러고 있대. 집도 있고 돈도 많대. 엄청 부자래. 자식도 많대.
그런 소문을 들은 후엔 나도 의심과 의문을 한가득 담고 할머니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왜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소문 하나가 더 뒤따라온다. 그 봉사 할머니, 아~주 욕심이 많아서 그랬대.
그때에 시각장애인을 부르는 말은 봉사, 장님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점점 민주시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으며 ‘차별’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인터넷 어느 싸이트 내에서는 여전히 비하의 의도로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할머니 생각이 떠오른 건 명확하게 어떤 ‘빈곤 포르노’에 대한 반감이 많아진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더불어 요즘 많아지는 또다른 기사, 이미지를 보며 의문이 의문을 더해가는 상황이었다.
영상물이 넘쳐나는 시대, 다양한 형태로 아프리카로 대표되는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을 모습을 비추며 감성을 자극한 후 기부금, 후원금 자막이 뜬다. 빈곤포르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영상물이다. 가난을 상품화하는 것. 그러나 힘겨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공동체의 가치를 실행하는 일로 여겨진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상황을 자~알 보여주어야만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지갑을 연다.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알아야 돕기 위한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금활동을 하는 구호단체 등이 실제로는 기부금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기사가 더해지고 점검 그런 일들이 잦아지면서 사람들은 힘겨운 사람들을 돕는 행위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그렇게 힘겨운 사람들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한, 그들뿐만 아니라 내 삶도 힘겨운 상황에서 그들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데 지쳐간다고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때 그 할머니를 따라다닌 소문은 할머니를 보는 데 지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아닐까, 사실과는 상관없이. 지금 나는 소문에 의심만을 더하며 더 이상 무엇도 하지 않았던 나를 잊어버리고 그때의 내 모습에 대한 후회와 함께 그랬던 것에 대한 당위성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으로 더욱 그때가, 생각이 나는 것일 게다.
왜, 사람들은 빈곤포르노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해가면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음해성의 소문을 덧씌우며 외면하려 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또다른 연출에는 열광하는가. 왜 그토록 오뎅 먹는 모습에 열광하고 시장에 가는 모습에 환호하는가. 왜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를 외면하면서 그 옆에 ‘누가’ 있다고 하면 훌륭한 일을 해낸 이를 대하는 것보다 더한, 마치 광신도인 양 칭송하는가.
어쩌면 본질은 같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더 잘 보이려는 연출’. 연출된 방송을 보면서 ‘누군가’를 외면하고 ‘누군가’를 열광하는 모습이 지속되어 온 것은 오래되었다. 연탄재와 함께 살아가는 이에게는 손가락질하며 부러 연탄재를 묻히는 이에게는 활짝 웃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이,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싶은 불안함이….
사람을 동정하지 말고 연민하라고 했다. 동정이나 연민이나 사전 상에서는 동일한 의미다. 그렇기에 그 차이를 무엇으로 두는가는 어려운 일이다. 혹자는 진정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진정성’을 알기는 쉽지 않다. 더더구나 남을 속이려고 하는 자, 작고 사소한 것에도 허세와 거짓으로 가득한 이는 본인 자체가 거짓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도 한다. 나도 가까이에 그러한 사람을 알고 있어, 지켜보며 알게 되는 것은 거짓을 일삼는 본인 자체가 거짓과 허언과 허세가 일상화되어 그 거짓을 지키기 위해 그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착각이 너무도 견고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쉽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의 바구니에 동전이, 지폐가 늘 있었던가 싶다. 처음 그 바구니를 보며 놀라며 연민하던 나의 마음이 의심으로 짙어질 때쯤엔 아마도 더 이상 할머니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그 바구니 속으로 들어갈 동전이 아깝다 싶었기에 소문에 쉬이 마음을 내주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그 할머니는 돈 많은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았을 수도 있을 터인데. 전혀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도 아주 희미하게만 보이는 상태였을지도 모르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바구니를 들고 있을 때면 그냥 들고 길을 걷고만 있어도 동냥 바가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동전이나 지폐를 바구니에 넣을 것이고 어떤 이는 재수없다며 바가지를 걷어찰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진 자가 같은 바구니를 들었을 땐 힘겨운 이의 삶을 보듬어 주려는 몸짓으로 된다. 진정성 없는 연출의 대표라도 상관없이 그렇게 신화화 한다. 매번 이 연출이 잘 먹힌다. 너무도 잘 먹힌다. 타인의 진정성을 알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특정한 주기마다 무엇이 ‘진정한 연출’이고 무엇이 진정성이 있는지는,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하지 않는 이들이 새삼 시장을 돌며 코스프레 바구니를 펼쳐 보이고 있고 시장을 돌며 바구니를 채우면 환호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그 옛날 외면했던 날의 바구니를 떠올리며 아주 짙은 후회와 반성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비워져야 할 바구니와 채워져야 할 바구니가 무엇인지를 잘 판단하고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잊지 않고 잘 알아가기를.
첫댓글 비워져야 할 바구니와 채워져야 할 바구니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할머니의 바구니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