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가 국기 게양식이나 하강식을 할 땐 우린 가던 길을 멈추고 태극기를 행해, 아니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손을 가슴에 올리고 다소곳이 국민의례를 했었다.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광고가 끝나자마자 바로 우린 극장 좌석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린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화면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측보행이지만 좌측 보행 시절 우측으로 다녔다고 경찰관에게 한 대 맞았다는 형님 이야기에 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고 웃었지만, 지금 애들은 분식의 날 도시락에 보리쌀 섞이지 않았다고 벌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기절초풍을 한다. 점심밥 먹기 전에 도시락 까서 검사받던 시절 이야기다.
“다음은 애국가를 제창하겠습니다.”
애국가를 부를 땐 엄숙한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사회자가 애국가 제창이라고 한다. 애국가를 제창하다니 이 무슨 개 풀뜯어 먹는 소리인가. 애국가는 봉창이라고 해야 하는데 사회자가 몰랐던 모양이다. 학교 교가나 이런 유의 합창을 제창(齊唱)이라고 하지 애국가는 엄숙하게 불러야 하는 봉창(奉唱)이다.
낡은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활용하려다 아버지께 꾸중 들었다. 태극기는 그렇게 허투루 대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태극기는 밟아서도 안 되고 빨아서 사용해도 안 되고 버릴 땐 불에 태우라고 배웠다. 난 아버지가 분명 독립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아버진 술을 좋아하시고 보신탕을 아주 즐겨 드시는 분이었지 조국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시는 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왔기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존경받은 이유가 단지 아들만 셋 낳았다는 자부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뒤로 태극기 관리만큼은 철저히 했고 개업 선물로 태극기를 돌릴 정도로 태극기 사랑을 극심하게 했다. 지금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마음이 많이 희석되고 말았다. 지금 나의 애국심은 애국가 4절까지 다 부를 줄 알아야 하고 국경일마다 부지런히 태극기를 게양하는 그런 쪽보다는 나 하나의 행동이 국격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겠다는 아주 작은 결기만 살아 있을 뿐이다. 최소한 외국 여행 중 엘리베이터 안에서 방귀 뀌고는 “스미마셍”이라고 인사해 예의 바른 한국인은 절대 이런 좁은 곳에선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딱 그 정도이다.
영웅이란 영화에서 단지(斷指)한 피로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표하는 안중근의 태극기, 월드컵 경기에서 황희찬이 넣은 마지막 골에 미친 듯이 흔들리는 태극기, 내 마음속의 태극기는 그렇게 살아 있어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 흘릴 줄 아는 그런 애국심을 가져야 하는데 덤으로 몇 개 더 넣어주지 않는 딸기 집 아줌마의 작은 손이나 탓하는 쪼잔한 인간으로 변한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딸만 둘 있는 가장 생활에 찌든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다. 국내에선 내 속에 숨어 있는 애국심을 깨우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조국을 떠나 사라진 애국심을 다잡고 와야겠다. 가서 국위선양을 하고 오리라. 하지만 친구들이랑 라오스 다녀오겠다는 말이 선 듯 나오지 않는다. 독립운동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첫댓글 애국심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만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니 가슴이 벅차 눈물이 절로 나더군요. 내나라 내땅 내민족. 천지 도움 안된 제 자신이지만 나라사랑은 어쩔수 없나 봅니다.
폭소가 나오려 합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뒤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그런 우직함이 오늘의 우리나라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감동! .....
애국심이 있는 분이 애국심을 곱배기로 잡수려 라오스로 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