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에는 바이러스로 갑갑한 날들이 지속되었고, 자연의 땅에는 온갖 꽃들로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말마다 내리는 비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빗방울처럼 작은 조팝 꽃잎들도 서둘러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끝을 모르고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잠시만 멈춰달라고 요구를 했지만 깊어가는 갱년기 우울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월의 어느 날, 2년 만의 하룻밤을 작당했다. 장소는 우리들의 추억이 전설로 숨 쉬는 그곳, 서산에서 모이기로 했다. 공교롭게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명령은 도저히 거역할 용기가 없기에 우리 다섯 악동은 아쉽지만 한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다. 나를 제외한 넷은 서산에 근거지가 있기에 두 친구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번갈아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보름 전에 인천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서산행 버스에 자리를 일찌감치 확보해 두었었다. 인천에서 8시 5분 버스에 탑승하여 주말 고속도로 사정으로 1시간 반 거리가 조금 지체되어 10시에 서산에 도착했다. 서산 안방마님인 율이가 자동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숙이와 서산 숙이가 함께 차에서 맞아주었다.
졸업하고 40년이 되어가는 벗들이지만 늘 어제처럼 편안하고, 긴 세월을 못 본 듯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주름도 늘고, 흰머리 희끗희끗해도 열심히 살아온 증거이기에 부끄럽지 않다. 서산의 숙이가 아침 일찍부터 손수 빚은 쑥개떡을 차에서 나눠 먹으며, 우리는 숨겨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안면대교를 지나 섬 속의 섬처럼 자리한 나문재 카페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며 우리들의 수다는 계속되고, 우리들의 손은 스마트폰으로 꽃들을 탐했다. 천수만은 썰물이어서 소나무 너머로 갯벌이 드러나 있고, 카페 이름인 나문재는 보이지 않았다. 개미와 기린 등의 조형물을 바라보며 동심으로 돌아가고,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수놓은 정원을 거닐다 보니 절로 힐링이 된다.
산책하다 보니 카페 옆에는 유럽풍의 멋진 펜션이 있다. 언젠가 이곳에 와서 하룻밤 묵으면 어떨까 생각을 한다. 날이 좋으면 노을도 보고,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거나 환한 달빛에 마음을 비춰보리라. 밤새 바닷물이 들어오는 소리와 솔바람 소리에 잠을 설쳐도 좋으리라. 아침이면 눈 부신 햇살 아래 청량한 새들의 울음에 잠을 깨리.
카페를 나와 유기방 가옥으로 가는 길에 간월도를 들르기로 했다. 간월암은 공사 중이어서 풍경을 담지 못해 아쉬웠다. 그 대신에 주꾸미를 잡는 소라껍데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풍경, 출항을 마친 어선과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행의 목적이자 증거이기에 사진 찍느라 경치를 놓치는 아쉬움도 있지만 눈으로만 볼 수가 없다.
간월암을 나오면서 만난 유채밭에 환호성을 지르면서 잠시 주차, 다음 여정을 향해 달리다가 벚꽃의 유혹에 잠시 주차, 구불구불 펼쳐진 작은 길을 따라 문수사에 도착했는데 주차가 불가해서 유턴, 유기방 가옥 입구에서 사람들의 늘어진 행렬로 입장이 차단되니 다시 핸들을 꺾어 유턴, 정처 없이 떠돌다가 꽃을 보면 차를 세우고, 부지런히 봄의 풍경을 찰칵찰칵 담았다.
아침과 점심을 길에서 때우며 꽃과 수다의 삼매경 속에서 하루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우린 모두 배가 고프다. 한 시간을 앞당겨 식당에 도착하니 서산 벗들의 아지트인 듯 밑반찬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는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다. 고향의 맛, 서산의 맛을 음미하다 보니, 안방마님이 대령한 세꼬시와 주꾸미가 도착해 상 위에 떡하니 올려진다. 고소한 세꼬시를 고추냉이 장에 찍으니,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친구들을 만나면 소주가 달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주꾸미는 자꾸만 접시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악동들의 야멸찬 손에 의해 뜨거운 냄비 안으로 던져진다. 부드러운 속살을 지닌 너의 운명을 받아들여라. 우리는 충남의 명주名酒 린(이제 우린)으로 잔을 채우고, 냄비에 핀 주꾸미 꽃을 한 송이씩 건져 접시에 담는다. 봄 주꾸미는 진리여. 첫날 밤의 회포를 풀며,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로 서로의 가슴에 기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산 사는 숙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서울에서 내려온 숙이는 엄마를 만나러 친정 오라비 집으로 갔다. 두 숙이가 빠진 자리에 서산에서 태어나 수원댁이 된 현이 앉았다. 다시 운전대를 잡은 율은 고남 저수지 벚꽃 터널로 우리를 안내했다. 저수지 아래로 산이 들어앉았고, 꽃길이 펼쳐졌다. 마침 꽃은 봄바람에 지고 있었다. 한적한 길을 따라 꽃길은 끝도 없고, 꽃잎마다 햇빛이 반짝거렸다.
차 안에서 우리는 말을 잃고, ‘우와’ 감탄사만 연신 뱉어낸다. 지금껏 본 벚꽃 길 중 단연코 가장 길고, 가장 풍성한 꽃길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벚꽃과 저수지 아래로 내려온 산 그림자들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폴 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이 흘러나오고, 엠씨더맥스의 사랑의 시時가 비지엠이 되어 흘렀다. 꽃들과 음악의 선율에 가슴이 뜨겁고, 눈앞이 아득하다. 내 의식은 벚꽃처럼 자지러지고 돌아올 줄 모른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던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를 만나러 간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분에 우린 유턴하지 않고 무사히 수선화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주차장이 만차가 되어 도로는 물론 근처 논까지 차량으로 가득 찼다. 역시 부지런한 민족이다. 그러나 막상 입장하고 보니 노란 꽃물결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수선화 빛깔 하나로 이리도 황홀경을 접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수선화의 꽃말처럼 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행복한 나르시스에 빠지고 만다. 아름다운 꽃이 호수 안으로 빠져 자신을 찾아가듯 기꺼이 수선화의 물결 속으로 몸을 던진다. 꽃을 따라 걷다 보니 서산의 전통 가옥인 유기방 가옥의 능선이 구불구불 실개천처럼 흐르고, 가옥을 둘러싼 드넓은 정원과 언덕과 산자락이 온통 수선화 천지다.
다시 차를 돌려 서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교를 지나게 되었다. 교문은 닫혀 있고, 운동장에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저 언덕을 올라 한마음 교실에서 공부했던 시간과 그때 방황했던 사춘기의 슬픔이 되살아났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손짓처럼 아련한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조회 때 외쳤던 긍지 어린 목소리가 텅 빈 운동장을 떠돌아 귓전에 와 부서졌다. 방황했기에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날들, 그 통증이 있었기에 펜을 꺾지 않았을까? 졸업식 날, 교문 앞에서 찍었던 사진들이 지금 눈앞에 선하다. 부디 모두가 잘살고 있기를 바라며, 헤어짐을 위해 터미널을 향한다.
살다 보면 직진 보다는 유턴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직진만 고집하면 의도치 않은 길로 가게 되고, 험난한 여정이 될 때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다. 문수사 입구에서 돌아 나오고, 유기방 가옥 입구에서도 유턴했다. 의도하지 않은 길을 가다가 무릉도원을 만났고,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벚꽃 터널을 만났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봄날 같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늙어가는 서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 시절 싱그러웠던 청춘만이 봄날이 아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에 어떤 시련을 만나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엄동설한을 살아간대도 봄날을 살 수가 있다. 한 폭의 봄날 같은 추억이 있다면 순간순간이 모두 봄날이다. 오늘은 언젠가 소중하게 떠오를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다시 또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그 봄날까지, 잠시만 안녕 손을 흔들고 버스에 오른다.
첫댓글 문득 바람 피고 싶어요.. 봄바람, 꽃바람, 추억바람, 충남의 명주 '우린'바람~
그런데 왜 세월은 직진만 하는 걸까요?
혹시 63에서 유턴하면 36이 될까? 안 되더라도 53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는데~
봄바람은 여인에게 맡기시고, 강의 준비 잘 하세요.
응원합니다.
제주도에도 시인님 친구분들 같은 사람들이 많더군요. 비자림인가요. 아침 일찍 여성 친구분들이 어찌나 부럽든지. 왜 남자들은 그리 못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아마도 여성은 어디에 내놓아도 잘 살아가는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거칠게 없죠.
그 나이에 저렇게 어울릴 수 있는 친구분들이 있다니, 행복하십니다. 부럽습니다.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나이 들면 동반자는 친구랍니다.
부럽네요.
나도 여기저기 돌아다닐 곳은 많은데 왜 쉽지 않을까...
쉽지 않지요.
쉽지 않기에 소중한 시간이고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인간이 참 잔인한 동물이죠.
코로나 와중에도 옛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봄을 만끽하셨군요.
생각해 보니 저도 뜻하지 않게 유턴하다가 멋진 풍경을 만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풍경이라 더 감탄하게 되는 거겠지요.
삶은 유턴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ㆍ봄날 친구들과 좋았겠습니다ㆍ
인생은 직진 보다 유턴을 더 잘해야죠.
코로나 19 가 문제 입니다
만나고 싶은 사춘기의 친구를
5인 이상 집회는 금지
악동들은
추억의 길을 돌아
봄 나들이을 했군요
좋은 봄 여행
봄나들이로 지나간 봄날도 회상해 보았습니다.
행복한 봄날 보내세요.
@윤슬 강순덕 행복을 찾아 산으로 들로
해매고 다녀도
행복은 보이지 않고
꽃만 보고 갑니다
코로나가 심하긴 하지만 환한 봄날
오래된 친구들과의 나들이가 부럽네요.
간월도 간월암이 정말 좋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