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 팁의 불편한 역사
물가가 오르니 유난히 부담이 되는 것이 팁이다. 봉급은 그대로인데 인플레로 물건 값이 비싸지면 수입은 줄어든 셈.
주머니 사정이 빡빡해지면서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패턴도 바뀌었다.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를 가져와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푸드 코트를 자주 이용하기도 한다.
한인타운 수퍼마켓 내의 푸드 코트들은 메뉴도 다양하고 가격도 일반 식당에 비해 저렴한 데다 무엇보다 팁을 안 내도 되니 식사비용이 절약된다.
하지만 식사 후 커피 한잔 하러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점심 값 아낀 건 말짱 헛수고가 된다. 카운터에서 주문하고 직접 커피를 받아가는 시스템인데도 대금 결제 태블릿에는 팁 선택 조항이 있다.
‘15%, 20%, 25% 팁’ 아니면 ‘노우 팁’ - 앞에 서 있는 종업원 눈치가 보여서 ‘노우 팁’을 누르기는 쉽지가 않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팁을 내고 만다.
“갈취 당하는 기분이다. 돈을 내고 또 내고, 두 번씩 내야 한다. 음식 값 내고 서비스 받았다고 내고 …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런 기분이 든 적이 있다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앞의 말은 1870년대, 80년대 미국의 소비자들 입에서 자주 터져 나왔던 불평이다.
미국에서 팁에 대한 불평은 역사가 깊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팁 철폐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1908년 대통령 선거에 나간 윌리엄 태프트는 자신이 팁 반대주의자라며 팁을 안 내는 걸 자랑하기도 했다.
팁에 담긴 불편한 역사 때문이다. 미국에서 팁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인종과 계층 문제가 담긴 예민한 사안이었다.
팁은 원래 중세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봉건사회에서 영주는 하인들이 일을 잘 하면 칭찬의 의미로 돈을 주곤 했다. 또한 영주의 손님들이 후한 대접을 받고 나면 감사의 표시로 시중드는 하인들에게 팁을 주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전까지 팁이란 게 없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인들의 유럽 여행이 잦아지면서 팁 문화가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럽이라면 껌뻑 죽던 당시 미국인들은 유럽인 흉내 내느라 팁을 주었고, 그 무렵 대거 밀려온 유럽 출신 이민자들을 따라 팁 시스템이 들어오기도 했다.
당시는 수백만 흑인들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시기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일자리가 없었다. 땅이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취업할 만한 기술도 없었다.
먹고 살 길 막막한 이들을 고용한 것이 식당. 식당 주인들은 해방 노예들을 고용한 후 봉급을 주지 않고 손님들로부터 팁을 받게 했다.
아울러 미국의 팁 문화 정착에 크게 기여한 회사는 풀만 침대차 회사였다. 기차에 침대칸을 만든 조지 풀만은 승무원들을 고용해 승객들의 시중을 들게 했다.
기차 침대칸은 당시 호화 여행의 상징이었다. 중산층 승객들은 집에는 하인이 없어도 침대칸을 타면 승무원의 시중을 받으며 하인을 둔 듯 으쓱한 기분을 느꼈다.
풀만은 승무원으로 흑인남성들, 그것도 ‘시중드는 훈련 잘 받은’ 남부 출신들만을 고용했다. 그리고는 명목상의 봉급만 주고 승객들의 팁에 의존하게 했다. 기차가 전국을 다니면서 팁 문화는 미 전국으로 퍼졌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해방된 흑인들이 백인 손님들의 팁을 받으며 다시 하인의 위치에 서는 구도. 마크 트웨인 등 지성인들은 팁 철폐 운동에 나섰다.
팁이 노예근성을 조장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와 반 귀족주의 정신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몇몇 주는 팁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팁은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고용주들이 종업원들의 봉급을 제대로 준다면 소비자들이 팁 부담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음식 값이 더 올라가게 되는 걸까.
2023-08-01 (화) 미주한국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