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
희로애락이란 말이 있다.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 같은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자 우리의 삶의 일단을 나타낸 말이다. 살다 보면 기쁜 날이 있는가 하면 슬픈 날도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기쁜 날은 몇 안 되고 슬픈 날은 많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쁨도 종국에는 슬픔으로 돌아간다 하여 모든 것은 고통이라 하였다. 우리 속담에도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라 하여 삶이 고뇌의 연속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 없는 삶을 늘 꿈꾸어 왔다. 그것이 곧 이상향이다. 서양의 유토피아나 동양의 무릉도원이 다 그러한 곳이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묘사되는 상상의 섬 이름이 다. 유토피아는 경제는 공산주의, 정치는 민주주의 체계를 지니면서도 교육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상적인 나라다. 전쟁에 대비하여 이 섬나라는 자폴렛이라는 용병을 두고 있다. 그 병사들은 전투 중에 적들과 함께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 독재는 생겨나지 않는다.
유토피아 섬에는 화폐가 없다. 주민들은 각자 시장에 가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만큼 물건을 가져다 쓰면 된다. 집들은 모두 똑같고 문에는 자물쇠가 없다. 주민들은 누구나 타성에 젖지 않도록 10년마다 이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누구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 무료 시장에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2년 농사를 지을 의무가 있다. 간통을 하거나 섬에서 탈출하려고 기도한 자는 자유인의 권리를 잃고 노예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일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하고 같은 시민이었던 옛 동료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유토피아에서는 하루에 총 6시간 일을 한다. 먼저 3시간 일을 하고 식당에서 점심밥을 먹은 다음, 다시 3시간 일을 한다. 일을 한 다음에는 문화센터에 가서 자신에게 맞는 맞춤 강좌를 듣는다.
최소한의 노동만 하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유토피아다. 이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동양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은 또 어떤 곳일까?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동진 때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했다.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 사람이 고기 잡는 것을 직업으로 하였는데, 시내를 따라서 가다가 온 길이 얼마나 되는지를 잊어버렸다. 홀연 복숭아꽃이 핀 숲을 만났는데 언덕을 끼고 수백 보에 걸쳐, 중간에 다른 나무는 없고 향기로운 풀이 아름다운데 떨어지는 꽃들이 흩날렸다. 어부가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앞으로 가면서 숲이 다하는 데까지 가보려고 하였다.
숲이 물의 근원에서 끝나는데 바로 산이 하나 있고, 산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마치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즉시 배를 놔두고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처음에는 매우 좁아 겨우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지만 다시 수십 보를 가니 훤하게 트이고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드넓으며 집들이 번듯번듯하고, 좋은 밭,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 대나무 등속이 있고, 밭두둑이 서로 통해 있으며,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가운데서 오고가며 농사를 짓는데, 남녀의 옷 입은 것은 모두 바깥사람들과 같았고 노인들과 아이들이 모두 기쁘게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어부를 보고는 크게 놀라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자세히 대답해 주니 바로 집에 가자고 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닭을 잡고 밥을 지어 주었다. 마을 안에서, 이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와서 묻고 또 물었다. 자신들이 말하기를, “선대(先代)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이 외진 곳에 와서는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아서 마침내 바깥사람들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를 묻는데, 한(漢)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위(魏)와 진(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이 일일이 그들에게 아는 것을 자세히 말해 주니 모두 탄식하며 놀랐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또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모두 술과 밥을 내놓았다.
며칠을 머물다 하직하고 떠나는데,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기를, “바깥 사람들에게 족히 말할 게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나온 뒤에 자기 배를 찾고 곧 전에 왔던 길을 따라가며 곳곳에 표시를 해 놓았다. 군에 이르러 태수에게 찾아가 이런 일을 말하니, 태수가 즉시 사람을 시켜 그가 갔던 곳을 따라가게 하였다. 전에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았으나 결국 헤매다가 다시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남양의 유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였는데, 이 말을 듣고 기꺼이 찾아갈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얼마 후 병들어 죽으니, 후에는 마침내 길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걱정 없이 살아가는 무릉도원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이 글의 끝부분에, 어부가 돌아온 뒤로 다시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유토피아(utopia)도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유토피아란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쓴 지명이기 때문이다.
도연명으로부터 다시 770여 년이 지나서 송나라의 비곤(費袞)이 지은 '양계만지'(梁谿漫志)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씌어 있다.
어떤 가난한 선비가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 밤마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소원을 빌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신이 나타나 물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비가 대답하였다.
"다만 한평생 입고 먹을 것이 이럭저럭 넉넉하고, 산간이나 물가에서 노닐면서 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신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신선의 즐거움인데, 네가 어떻게 그것을 얻겠는가?"
선비의 소원은 엄청난 부귀 명예나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평생 넉넉히 입고 자연에서 소요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신은 그의 바람은 신선의 즐거움이지 인간이 감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갈하였다.
입고 먹을 것이 이럭저럭 넉넉하고, 산간이나 물가에서 노닐면서 생을 마치는 것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어떤 이상향이나 그냥 노닐면서 걱정 없이 사는 삶이란 아예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디스토피아(dystopia) 세계인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존재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 닥치는 고뇌를 받아들이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최고의 진리임을 깨닫는 일뿐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결코 부처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님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다. 그래서 묘협은 보왕삼매론에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였고, 한때 수채화에 좌절했던 고흐는 “그게 쉬웠으면 그 속에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는가.”라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