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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임기 2년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에 선출된 소설가 황석영. | 소설가 황석영이 문화계 감투를 썼다. 그는 지난달 27일 2년 임기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이사장에 선출됐다. 황석영의 색깔은 다양한 것 같으면서도 일관된 색조를 벗어나진 않는다. ‘객지’ ‘장길산’ ‘삼포가는 길’ 등 화제의 작품을 쏟아낸 황석영은 독자들이 알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이다. 하지만 그는 글속에만 매몰된 예술가가 아니다. 방북사건으로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한 분단시대의 뉴스메이커였는가 하면, 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실천적 문인이기도 하다. 다음달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2년간 연수를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예총 이사장직을 받아들인 것은 아직도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하는 세상을 바꿔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지나버린 인생은 누구에게나 격변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1943년 만주에서 출생한 황석영의 삶은 웬만한 세대가 겪기힘든 혼돈으로 점철돼 있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적 사건들은 악연처럼 그의 인생을 뒤쫓는다.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는 고등학생 때 벌어졌고, 대학에서는 6·3사태를 목격해야만 했다. 격변기를 겪었다고 누구나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용돌이와 같은 역사는 그의 가슴에 큰 이야기창고를 만들었다. 황석영이 당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구경꾼으로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석영은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칭한다. 소설가로서의 권위의식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실제로 그에겐 연예인 못지 않은 ‘끼’가 넘쳐 흐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적당히 중화됐겠지만, 문단에는 아직도 그의 전설적인 흔적들이 회자된다. 1990년 요절한 소설가 강홍규가 1980년대 후반 한 신문에 ‘관철동 시대’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문인들의 뒷 이야기에는 ‘딴따라 황석영’의 면모가 번득이는 일화가 담겨있다. 문인들 술자리의 분위기메이커였던 탓에 황석영과 어울리는 술은 취할 겨를이 없다고 한다. 곱추춤은 공옥진에 비견될 정도로 일품이었고, ‘거지타령’과 ‘문둥이타령’은 당시에도 쉽게 들어볼 수 없는 기막힌 노래였다고 한다. 황석영의 수많은 재주 중 백미는 ‘약장수’ 흉내. 이장면은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나들목)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강홍규의 단행본에서 실감나게 엿보자. <황석영의 ‘약장수’는 현란하다. 레퍼토리가 대여섯 개가 되는 모양인데 그중에서도 정력제를 파는 약장수 얘기가 사회풍자의 의미도 곁들이면서 청중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이 비아미로 말 할 것 같으면 비아미를 잡아먹고 사는 비아민데….” 황석영의 익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명한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 일행에게 황석영이 자기 소개를 하자 일행들이 “예끼 이 사람!”이라고 하면서 “소설가 황석영이 어떤 사람이라고 자네 같은 건달이 이름을 팔아! 엉!”이라고 하자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전 소설 따위는 모릅니다. 이름이 그냥 황석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저는 약장수 황석영입니다.”> 밑바닥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황폐함 끝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기에 황석영은 술한잔을 나눠도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문단 등단 초기부터 황석영은 소설쓰기와 문화운동을 동시에 해왔다. 대하소설 <장길산>을 집필하던 유신말기에서 5공화국 초기, 그는 전남 광주에서 민중문화운동을 벌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예총의 전신인 민족문화운동협의회 출범에도 참여했다.
등단초기부터 소설, 문화운동 병행
문학평론가 김춘식씨는 ‘황석영은 한국의 근대사라는 혼탁한 탁류 속에 기꺼이 몸을 던졌고 또 그 격랑의 흔적을 생생하게 증언해 온 작가이다. 시대가 자신을 비껴가기를, 또는 자신이 시대를 비껴가기를 용납하지 않았던 투철한 작가의식의 소유자로서,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평가한다. 그의 작품은 낯선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눈으로 보고 느낀 것들이다. <객지>와 <삼포가는 길>은 1970년대 개발정책에 밀려 사회의 더 낮은 곳으로 내려앉은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사회적인 모순을 소설을 통해 알리고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발표한 장편소설 <장길산>은 민중중심의 역사소설로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이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단절된 민중적 영웅상의 부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김춘식씨는 ‘황석영이 한국 소설가 중 가장 남성적인 힘을 지난 작가이며 그의 작품은 80년대 민중문학과 노동문학 계보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단정짓는다.
80년대 민중·노동문학의 효시
황석영의 문행일치는 1988년 민족문화운동협의회가 민예총으로 바뀐 뒤 초대 대변인 자격으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방북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당시까지도 우리 사회는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때문에 방북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었고 그가 유명소설가였다는 사실은 사회에 더 큰 충격을 던졌다. 그의 방북에는 옹호와 비난 등 극단적인 평가가 뒤섞였다. 하지만 정작 황석영 자신은 북한이란 존재에 대해 부담없이 편안하게 이야기 한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북한을 ‘또다른 나’라고 표현했다. 남한과 북한은 분열된 자아이고 언젠가는 하나가 될 자아라는 것이다. 소설가인 그는 실천적 삶을 산 덕분에 정치인이나 사상가에게 어울릴 법한 답을 요구받기도 한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 등의 미묘한 문제에서부터 통일방안에 대한 견해까지도 그를 거쳐 지나간다. 이에 대해 황석영은 굳이 거부하려 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내뱉는 그의 말은 막상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는 통일방안에 대해 신뢰를 쌓고 문화, 학술 등 다양한 민간교류가 활발해 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면에서 황석영은 이문열과 비교된다. 둘로 나누는데 익숙한 사회 탓이다. 한 신문이 마련한 대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외부의 시각과는 달리 정작 서로의 관계에 있어 아무 문제가 없음을 보여줬다. 문단 선후배로서 소설가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서 충분한 이해의 폭이 형성돼 있었다. 물론 황석영과 이문열은 사회참여적인 측면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최근엔 황석영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이문열을 한축으로 놓지 않으면 안될 듯한 느낌마저 든다. 올 초 두 사람은 오는 17대 총선과 관련 정치참여부분에서 또한번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황석영이 열린우리당의 공천심사위원직을 거부한데 반해 이문열은 한나라당의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군사독재시절 문학계에서 민감한 화두였던 참여와 순수논쟁을 떠올렸다. 당시 황석영은 반독재투쟁 등에 앞장섰다 옥고를 치뤘고, 이문열은 현실참여와 거리를 뒀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뒤바뀐 입장이 된 것이다. 시각차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문열에 비해 황석영에 대한 비난은 미미하다. 아니 오히려 끈기있는 애정에 놀라워해야 한다. 5년간의 망명생활과 5년간의 옥중생활을 합쳐 무려 10년동안이나 그는 문단과 민중과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이 13년만에 펴낸 신작소설이었다. 공교롭게도 책이 출판된 시점은 1997년 외환위기가 시작된 후였다. 하지만 수십만부가 팔려나가며 소설가 황석영의 문단복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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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7일 민예총 총회때 신임이사장으로 선임된 황석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북한은 하나가 될 또다른 자아”
<오래된 정원>은 18년간의 영어생활에서 풀려난 정치범 오현우가 수배시절 만나 사랑을 나눈 연인 한윤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물론 이 속에는 자신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본질에 관한 반추가 덧붙여진다. 사람들은 책 속의 주인공 오현우가 황석영을 연상시킨다고 입모아 말했다.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을 발표하면서 한국문학에 대해서도 일침을 날렸다. ‘서사가 결여되고 감각주의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황석영의 판단이었다. 겉멋과 상업성이 판을 치는 문단으로 돌아온 황석영은 남성다운 문학을 해보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리고 판소리 12마당의 독특한 구성을 따른 <손님>이라는 작품을 통해 내공을 과시하기도 했다. 황석영은 여전히 글쓰는 게 어렵다고 고백한다. 익숙해진 것 같지만 늘 고통스럽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민예총 이사장이란 직함은 그를 더욱 바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문행일치의 삶을 살아온 그야말로 소설가와 이사장직을 모두 잘 수행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문화계를 이끌 사람으로서 남북문화교류에 있어 황석영이상 가는 적임자는 없다는 평가다.
·1943년 만주 출생, 동국대 철학과 졸업, 본명 황수영 ·1945년 해방으로 평양을 거쳐 황해도 신천군으로 옮김 ·1949년 월남하여 영등포 정착 ·1962년 ‘사상계’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 입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이 당선되어 등단. 73년까지 중편 <객지> <한씨연대기> 단편<삼포가는 길> <돼지꿈> 등 발표 ·1974년 창작집 <객지>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간행. 이해 7월부터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 1984년 10권으로 완간. ·1980년 장편 <어둠의 자식들> 간행 1988 장편 <무기의 그늘> 간행 ·1989년 방북 ·1993년 4월 국가보안법위반(밀입북)으로 7년형을 선고, 복역중 1998년 석방 ·1999년 동아일보에 <오래된 정원> 연재 ·2000년 <오래된 정원> 간행 ·2003년 <심청> 간행 ·2004년 2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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