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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필요한 漢字만은 섞어 쓰자:
심리언어학자의 견지
쓸모있는 漢字는 쓰고 가르치자
인섭 테일러 박사 / 맥루한 연구소, 토론토 대학
심 재룡 옮김 / 동양학부 객원교수, 토론토 대학
박희진 시인의 「한글과 漢字의 영원한 혼용을 위하여를 본지 제29호(1992년 9월)에 개재한 이래 독자들의 국어교육에 대한 관심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다. 본지 1992년 11월호, 31호에 기고한 최익환 교수의’ 한자혼용론의 이념적 밑바탕’은 서울에서 발간하는 한글학 회지 (1993년 1월)에 전재되었다. 최근 수십년간 학자들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킨 문제다. 이번호에는 토론토 대학의 인섭테일러 박사의 글을 내보낸다. 인섭 테일러 박사는 동양언어, 문자연구에 오랫동안 종사한 학자이다.
많은 애독을 바란다.---편집자주
한국사람들이 한글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 한글만큼 효율적인 글자가 이 세상에는 또 없다고 누구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때문이다. 무엇때문에 그 좋은 한글을 놔두고 어려운 한자를 계속 써야하나? 게다가 그 어려운 한자를 배우려면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한다. 이 물음을 둘러싸고 한국 사람들은 지난 수 십년 동안 남북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미주현대불교』 (1992, 제29호)는 최근에 시인 박희진씨가 쓴"한글과 漢字의 永遠한 混用을 위하여"라는 긴 시를 「한국논단』에서 옮겨 실었다. 잇대어 미주현대불교 제31호는 최익환 박사의 ‘한자혼용론의 이념적 근거’라는 반박문을 실었다. 한자사용에 대해 평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는 심재룡 교 수가 전해 준 위 두 편의 글을 읽고, 이제부터 본 논쟁에 뛰어 들어 심리언어학의 견지를 전개해 보겠다.1이 논문은 본래 중국, 일본, 한국 세나라의 문자와 문자생활을 비교 연구한 拙著 ‘동아시아의 문자와 문자해독’ Scripts and Literacy in East Asia(출판준비중) 가운데서 한국글자 주 한글과 독해력 부분을 거의 고치지 않고 발표하는 것이다.
1. 한자를 써서 우리가 얻는 잇점들 (漢字 使用의 利點들) 은 무엇일까?
한자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자란 한국에서 쓰고 있는 중국 문자를 가리킨다.(중국식 발음으로는 '한쯔' 일본식으로는 '간지’라 읽는다. 중국글자 즉 한자는 뜻글자(表意文字)다: 하나하나의 한자는 하나의 소리값을 갖는다.(音素): 그 글자 하나가 그대로 단어일 수도 있고 단어의 일부일 수도 있다. 한자는 뜻을 글자로 그대로 직접 나타내고, 소리는 사실 부차적,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뜻글자로서 한자는 다음과 같은 글자의 잇점을 지닌다: 뜻을 얼른 파악하기 쉽다: 합성어를 만들기 쉽다: 표현이 간략하다; 약자를 만들기 쉽다; 등등.
1.1 뜻을 빨리 파악한다. (迅速한 意味把握)
뜻 글자는 그 시각적 형태만 보고도 곧장 그 뜻을 직접 알 아 볼 수 있다. 줄줄이 잇대어 쓴 알파베트들을 차례로 훑어 본 다음 다시 그 글자들을 음소로 바꾸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을 파악하는 등의 여러 단계를 훌쩍 건너뛰고 직접 글자꼴만 보고 그 뜻을 알아채는 것이다. 어느 독자가 山이라는 한자를 보고 그 뜻을 이해하는 과정과 m-o-u-n-t-a-i-n이라는 여덟 자를 연결하고 '마운틴'이라고 소리를 확인한 다음 그 뜻을 파악하는 과정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산에 해당하는 한자는 본시 산의 세봉우리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그림글자의 원형이다. 그래서 누구나 바로 그 그림을 보는 그 자리에서 그 뜻을 알아 볼 수 있다. 山이라는 한자를 한글로 쓰면 '산'인데. 그 뜻은 그 자리에서 직접 알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산'이라는 글자는 그림글자와 달리 어느 꼴로 나타내는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은 단지 하나의 소리마디(음절)로써 '뫼'라는 뜻 이외에도 '산算/헤아리다'産/낳다'
"散/흩어지다'', 酸점/(맛이) 시다'와 같이 여러가지 뜻을 지닐 수 있다. 또 '산다(물건을 산다 또는 평생을 같이 산다)' 그리고 '산들바람'같이 순수한 한국말의 한 부분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이럴 때의 '산'은 그저 소리뿐으로 '산' 그 하나만의 뜻은 없다).
다음 <도표 I》에서 두개의 한자로 쓴 복합어/합성어를 생 각해 보자. 첫번째 보이는 한자는 '뫼'를 나타내는 山이고 그 다음 보이는 한자는 그 뜻을 구별해 주는 요소다.
〈도표1 "묏 산/L이 들어간 두 한자로 된 단어들
단어 한자 각 한자의 뜻
산맥 山脈 산, 줄기
산각 山脚 산, 다리
산거 山居 산, 머물다
산정 山頂 산, 꼭대기
산정 山亭 산, 정자(亭子)
산협 山峽 산, 좁은 골짜기
위 〈도표1 》에서 첫 글자 산은 한글로나 한자로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글자이다. 그런데 둘째 글자는 흔치 않아서 한글로만 쓰면 알아 보기 쉽지 않다. 이 때 한자를 써 주면 그 한자의 뜻을 어느 정도 그 형태로부터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 합성어의 뜻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자가 서너게 들어간 단어는 예컨데 '심리학 心理學(마음 心 , 이치 理, 배울= 마음의 이치를 배우는 學問이나 ‘心理學者’
(마음, 이치, 배움, 사람 = 마음의 이치를 배우는 學者) 처럼 그 단어를 구성한 한자의 뜻이 알려지는 대로 전체 단어의 뜻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다.
물론 간혹 전혀 이치에 닿지않게 한자로 된 단어가 있다; 아마도 순수한 한국말에 뜻은 생각지 않고 그 소리값만 보고서 억지로 한자말을 만든 탓이리라: 예컨데 '각씨閣氏'란, 각각 한자의 뜻만으로는 '집에다가 '성'를 붙인 것이지만, 원 뜻은 '새 색시' 아니면 '인형'이다. 이런 식으로 한자를 사용하는 버릇은 일본의 경우 더욱 흔하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방식을 '아데지'또는 '주쿠지쿤 "이라 부른다. 한자에도 두 가지 다른 뜻을 지닌 한 글자가 때로는 다른 발음으로 사용되는 수가 있다. 예컨데 易은 '난이 (難易 / 어려웁다. 쉽다)라고 할 때는 뜻과 발음이 '이'로 되고, '역경' (易經/ 변화, 책)이라고 할 때는 '변화'를 뜻하고 발음 또한' 역'이 된다.
한자로만 써야 잘 분별이 되는 수가 있을 경우에는 특히 신 문 같은 데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뜻을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자를 많이 쓰게 된다(요즘 한자를 합리적으로 쓰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려깊은 저자들은 사람들이 흔히 많이 쓰 지 않는 단어를 꼭 써야 할 경우에는 부득불 한자로 직접 표기 하거나 한글로 쓰고 그 다음 옆의 괄호 안에다 한자를 같이 넣 어 준다. 한자 단어인 경우 한글사전을 찾아보면 그 단어를 설 명하는 항목에는 반드시 한자를 맨처음에 달아주어 그 단어의 뜻이 충분히 들어나도록 배려하고 있다.
1.2 같은 소리의 글자들도 갈라 볼 수 있다 (同音異意語 判別用易 )
단음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음소로 된 말, 예컨데 '산'처럼 동시에 '뫼 山' ,헤아릴 算', 낳을 産', ‘흩어질 散’, 그리고 ' 신 맛 酸’ 등의 여러가지 뜻을 가진 말일 수록 그 뜻에 맞는 고유의 한자를 쓰면 혼동을 없앨 수 있다. 1,856개 정도의 한자를 수록한 한국말 사전에도 '수'라는 단어에 38개의 동음 이의어가 수록되어 있다. 더 큰 사전엔 아마 더 많은 동음이의어들이 나열되어 있을 것이다. 두 개의 한자로 된 낱말 예컨데 동기'라는 말은 한글로 쓰면 적어도 7개의 서로 다른 뜻을 나타내는 동음이의어가 되어버린다. 그런 혼동은 한자를 쓰면 문제없이 그 뜻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動機, 同期, 冬期, 童妓, 洞旗, 銅器,同氣). 특히 한국 사람들의 이름에는 너무나 동음이의어가 많아 저들을 구분하려면 한자사용은 거의 필수 적이다.
1.3 표현이 쉽고 간략하다. (表現力과 簡略性)
어떤 추상적인 단어는 그에 해당하는 순수한 한국말이 없 는 경우도 있다. 예컨데 유교의 덕목으로 치는 충忠, 효孝, 인仁을 생각해 보자. 아마도 이 한자들은 너무 간편해서 한국 사람이건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아마 일본 사람들이건 그런 개념에 해당하는 순 한국말을 전혀 만들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한 한국말로는 하나 이상의 형태소를 동원해야 그 뜻을 표현할 것이 두개 내지 네개의 한자 단어나 숙어를 쓰면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한자말 ‘落馬'는 순수한 한국말 '말에서 떨어지다'와 비교하면 짧고 간략하다. 한자 숙어 ‘七顚八起(일곱, 넘어지다. 여덟번, 일어나다 =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한다)를 생각해 보자. 한국말로는 이렇게 길어진다.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 일어난다." 한자숙어는 표현성, 간결성이 있고, 또 재미난 어원을 지닌다. 게다가 중국인 일본인들도 그런 숙어들은 서로 共有共用한다.
1.4 복합단어를 쉽게 만들 수 있다. (複合語 合成容易)
한자말의 無나 不같은 접두어는 수많은 형태소에 붙어서 無識(없다 + 지식 = 무식하다) , 不正(아니다 + 옳다 = 옳지 않다) 같은 합성어를 만들 수 있다.
또 –化같은 접미어는 民主化 機械化 같은 합성어를 만들고, 접미어 –學은 心理學 物理學 같은 합성어를 쉽게 만들 수 있다. 영어에서 접두어 "un-" 또는 접미어 "ize'같은 말을 없애고 사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순수한 한국말로도 합성어를 만들 수가 있지만, 보통 학문적 용어 내지 합성어들은 방금 나열한 것처럼 주로 한자말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1.5 줄임말을 쉽사리 만든다. (略語 合成 便利)
길다란 단체 이름은 눈에 띄게 중요한 한자 몇개를 뽑아서 짧은 줄임말로 만들 수 있다. 梨花女子大學校(배 꽃 여자 아이 큰 배움 집)는 간단하게 梨花大 아니면 그냥梨大(梨花男子大學은 없고, 이화중학교는 있기 때문에)라고 줄인다.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 硏究所처럼 긴 말은 「高大亞硏, 정도로 줄임말
을 만들어 쓴다. 이 때 「고대아연」을 그냥 한글로만 쓰면 아무 의미가 없어 쉽사리 알아 보기 힘들다. 단체 이름 뿐만 아니라 보통 단어들도 늘상 줄여서 쓴다. 예컨데 ‘大入試’는 ‘大學校 入學試驗’을 줄여 쓴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자로 된 형태소, 말과 숙어등은 한국 말에서 없앨 수 없는 필수적 요소들이다. 비록 한자의 수효는 줄여도 되고 아마 줄여야만 될 터이지만, 완전히 없애면 한국 말은 무척 초라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한자를 근간으로하는 한국말(중국식-한국말 Sino-Korean)이 존재하는 한 한자 몇 백개 쯤은 꼭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 뜻을 정확하게 또 빨리 알아낼 수 있다. 또한 한자의 공유를 통하여 한국인들은 중국인 내지 일본인들과 문화적 유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보너스를 받는 덕도 있다.
2. 한자 한글을 섞어 쓴 글과 한글만 쓴 글(韓漢混用工 한글專用의 得失)
이제까지 설명한대로 단어나 숙어로 중국식 한국말을 쓸 적에 한자는 그 쓰임새가 많다. 한자는 따로 따로 쓸 적보다 문장 속에 사용할 적에 더욱더 쓸모가 있다. 한국 문장은 일본 문장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한글로만 쓸 수도 있고,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쓸 수도 있다. 오늘날 남한의 책들은 성인들을 상대로 할 경우 거의 대부분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고 있다. 물론 한자의 사용빈도는 책마다 다르다. 필자가 지난 몇해 동안 발간된 신문, 잡지, 그리고 통속적 책들을 살펴 본 바에 따르면, 단 5%의 한자를 그것도 주로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명, 단체의 약어, 또는 숙어나 고사성어 등에만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씀으로써)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문장을 읽을 수 있는가? 한국말로 책을 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 가? 순전히 한글로만 쓸 것인가? 아니면 약간의 한자를 섞어 쓸 것인가? 뒤의 경우, 그럼 한자는 얼마나 쓰고 또 무슨 말을 한자로 쓸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영어로 독서하는 경우와 잠깐 비교해 보도록 하자. 소리를 내지 않고 읽을 경우 숙달된 독자는 중요한 정보와 덜 중요한 정보를 구별해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한 것보다 천천히 읽는다. 영어 문장을 보면 중요한 정보는 주로 내용어(예컨데, 어제/ Yesterday. 친구/Friend, 샀다 /bought, 컴퓨터/ computer)에 담겨서 전달되고, 덜 중요한 정보는 주로 기능어(예컨데. 나의/my 하나의/a)로 전달된다. 독자의 눈은 내용어에 오래 머물고, 짧고 자주 나타나는 기능어는 스쳐 지나간다. 어느 단어의 뜻. 소리, 종류, 그리고 기타 정보가 추출되기는 바로 그 눈이 머무는 때이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것을 영어로 읽는 경우와 대비해 보면, 흔히 쓰는 한자를 내용어로 사용할 경우 읽기에 더 쉽겠다는 짐작이 갈 법하다.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문장에서 눈에 띄게 복잡한 한자가 그 보다 간단한 한글보다 당연히 한 눈에 알아보기 쉬울 터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순한글 문장과 한자한글을 섞어 쓴 문장을 주고 독해력을 비교한 실험이 결과는 언제나 순한글 쪽이 더 빨리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필자의 공동연구자는 최근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어느 신문에서 세 편의 사설을 뽑아 한 편은 한자가 전혀 없게하고, 다음 것은 한자를 10% 섞고, 마지막엔 50%를 섞었다. 대학생들에게 소리내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 스크린에 나타난 그 사설들을 읽게했더니, 물론 간단한 이해력 테스트에는 모두 통과했지만, 읽는 시간에 있어서 세 편의 사설을 읽는데, 한자가 하나도 없는 글을 제일 빨리 읽었고, 10% 한자를 섞은 글을 그 다음 속도로, 그리고 50% 한자를 섞은 글을 가장 더디 읽었다. 2
테일러 인섭과 박권생 “한국말, 영어, 일본어를 읽는데 글자 모양이 주는 영향에 대하여 “l. 테일러. Dr. Olson(공편) ‘글자와 독해력’ (Script and Literacy). 화란: 클르버( 츌판 고려중)
영어 독해력을 연구한 결과를 보고 예상하던대로 한국말 독해력 테스트의 결과가 그대로 나오지 않자 조금 의아했다. 특히 한국말 독해력 테스트는 일본말 독해력 테스트 결과와도 맞지 않았다는 점이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일본말은 순 일본 카나로 된 글보다 한자/간지와 일본 카나를 섞어 쓴 편이 훨씬 더 빨리 읽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을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예컨데 한국말 문장에는 중요한 내용어라도 순한국말이면 그대로 한글을 쓰지만, 일본말 문장에는 순수한 내용어는 주로 간지/한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일본말 독자들은 요컨데 다음과 같은 독서방침을 개발할 터이다. 즉 '히라카나로 된 말은 지나치고 그저 간지/한자로 된 말만 눈여겨 보고 그 정보를 정리하자.’
물론 한국말 독자들도 "한자말을 눈여겨 보고 그 정보를 정리하자"는 방침을 개발할 터이지만, 일본 독자보다는 자신이 덜할 것이다. 왜냐하면 순 한글로 된 단어들도 간혹 중요한 내용어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순전히 한글로만 된 문장을 읽는 한국 독자들은 두 기 지의 형태소들을 구분하는 시각적 요령을 지닐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한 귀절은 늘 하나의 내용어 +하나의 문법적 형태를, 그리고 빈 칸이 따라오는 법이라서, 빈 칸 앞의 한글뭉치들은 문법적 요소이기가 쉽상이라고 짐작하는 요령을 획득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한글(2 내지 13획)과 한자(1내지 26획)의 시각적 복잡도의 차이는 일본 히라카나(1 내지 6획)와 간지(1 내지 14획)와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덜하다. 따라서 한국문장에서 한자로 된 내용어가 한글로 된 문법적 요소들과 대비되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정도는 일본 문장에서 간지로 된 내 용어가 히라카나로 된 문법적 요소들에 대비되어 드러나는 정도에 비하여 덜하다.
테일러와 박의 연구 결과에는 아마도 한자 한글을 섞어쓰 자는 데 역행하는 일종의 기술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을 법도 하다. 즉 읽을 거리를 학생들에게 컴퓨터 화면에 제시한 점이 좀 마음에 걸린다. 화면은 인쇄된 책에 비해 해상도가 떨어지므로 복잡한 한자는 단순한 한글에 비해 약간 흐리게 나타 날 것이다. 문자 기호에 익숙치 않은 독자는 이를 확인하느라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만 한다.
• 가장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한국학생들은 한자가 섞인 문 장보다 순 한글로만 된 문장에 익숙하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 학생들이 한자를 배우기는 국민학교에서가 아니라 중고등 시절 즉 나이들어 늦은 시기에 배운다. 학교안팎에서도 한자는 일상의 문장에서 아주 드물게 띄엄띄엄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은 한자를 읽을 기회가 적어 훈련이 덜 되어있다. 한국 학생들은 중국식 한국말(한자를단어)도 한글로 읽을 기회가 많고 한자로 쓰여진 것을 볼 기회가 적다. 이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순 히라카나로 된 글보다는 간지와 히라카나를 섞어 쓴 글을 읽는데 훨씬 더 익숙하다. 일본 사람들은 국민학교 적 부터 거의 대부분의 학습과정에서 간지를 배우고, 또 아주 어 린 아이들을 위한 책을 빼고는 대부분의 책에 엄청난 수효의 간지를 섞어 쓰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한 단어를 쓸 적에 간지건 히라카나건 카다카나건 한 가지로만 통일해서 일관성 있게 쓰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정도는 실험 결과에 그대로 나타나게 미련이다. 테일러와 박의 실험 가운데 한 번은 학생들에게 한자와 한글이 섞인 문장 가운데에서 한자로 된 낱말을 뽑아 큰 소리로 읽는 연습을 시켜서 한글을 읽는 정도로 비슷하게 빨리 읽는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 이 훈련은 이삼일 동안 한자단어들을 여러 번 계속 반복해서 읽히는 것이었다. 이 훈련을 거친 학생들의 독해력 속도는 세 가지 문장을 읽을 적에 즉 한자가 전혀 없는 것, 10% 섞인 것, 50% 섞인 것을 비교 할 적에 그 속도차이 가 상당히 줄어 들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박과 손(1990)의 연구에 따르면, 역사나 중국학처럼 많은 한자를 다루는 책을 읽는 학생들이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 비해 한자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 속도가 훨씬 빠르더라 는 것이다.③ 박영목.손영애. “한글이 讀解力에 미치는 영향: 한글 專用 대 漢字 한글 混用” 韓國敎育開發院 1990
따라서 한국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정한 훈련을 거친다면 漢字 한글을 섞어 쓴 것을 순 한글만 專用한 문장보다 더 빨리 읽을 수 있겠는가? 훈련은 어느 정도해야 하는가? 한자를 배우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 독해력을 높힌다는 잇점을 들어 정당화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자를 계속 사용할지 폐지할지를 따질 수 없다.
3. 한자폐지-한글만 쓰기 (漢字廢地 한글專用)의 역사와 그 실적:
- 쓸모있는 꽃 몇 백자쯤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가르치자-
중국의 글자 즉 한자를 쓰는 나라마다 한자를 계속 쓸것인가 말것인가를 두고 격심한 논란이 있다. 월남은 1910년에 로마식 알파베트를 채용하고 한자를 폐지해 버렸다. 중국과 일본은 한자를 폐지하고 로마자나 카나만 쓰자는 방안을 놓고 이리저리 관념적 논쟁만 계속하고 있다. 남한은 1970년에 한자를 폐기하고 한글전용을 택했다가 몇해 뒤에 다시 한자를 쓰기로 하였다. 북한은 1948년에 한자 를 폐기했으나, 1963년에 다시 복원해서 중학 이상 대학에서 3천개의 한자를 학습한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출판물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의 일반 교과서나 기타 출판물에서 한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한자폐지운동의 연혁을 시기별로 따라가 보자.
- 1948년 이승만 대통령 훈령으로 정부간행물은 모두 한글 로만 쓰되, 당분간 한자를 한글과 같이 쓸 수도 있다고 하다.
- 1951년 문교부가 常用漢字1천개를 공표하다.
- 1955년 문교부 훈령으로 모든 정부간행물과 일체의 출판물 즉 신문, 잡지, 일반서적은 한글로만 쓴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전문 용어등은 괄호안에 한자를 쓸 수 있다고 하다.
- 1957년 문교부는 1천 3백개의 한자를 임시 제한적으로 사용토록 공표, 1963년부터 1969년까지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조치하다.
- 1967년 박정희 대통령 훈령으로 한자폐지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발표하다.
- 1968년 박 대통령 5개년 계획을 2년 계획으로 단축하다.
즉 1970년부터 한자는 공문서와 교과서에서 없어진다. 그러나 한자폐지는 일반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히다.
- 1973년 1천 8백개의 한자를 다시 가르치되, 국민학교는 제외, 단 중 • 고등에서 가르치기로 한다.
한국에서 한자를 폐지할 조건은 너무나 좋다. 한자는 꼭 중국식 한국말에만 쓰지 순 한국말에는 전혀 쓰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주 효율적인 소리글자 한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이 모두 한자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왜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제한된 수효의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에서 간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한국말에서 중국식 한자화된 단어(Sino-Korean)를 쓰고 있는 한, 그 가운데 몇 백개쯤은 꼭 한자로 써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중국식 한자 단어는 꼭 한자로 쓰기 전엔 전혀 알아볼 수 없거나 한글만 쓰면 알아보더라도 한참 생각해야 한다.
한자 폐지는 한국말에서 중국식 한자 단어를 모두 없애고야 가능한 일이다. 1962년 한국정부에서 임명한 한글전용위원회는 일반 출판물에 나타난 일만 4천개가 넘는 중국식 한자 단어와 외국어를 전부 순한국말로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제안에 그쳤지 더 이상 진전이 없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 앞에서 한자의 잇점을 들어 설명할 적에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중국식 한자 단어를 전부 순 한국말로 바꾸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 아침에 영어에서 희랍-라틴어에 기원을 둔 낱말들 예컨데 telephone이나 encyclopedia 따위를 (한국에서는 한자단어(Sino-Korean)로 전화/電話, 백과사전/ 百科事典이라 쓴다) 일만 4천개가 넘게 모두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가?
아무튼 한자단어를 한국말 사전에서 폐지할려는 노력은 유감스럽게도 그리 성공적일 수 없음에 틀림없다. 『현대용어사전』 (1987년 동아일보 편찬)에 나타난 대부분의 용어들은 한자로 합성된 단어들이다: 서구식 용어는 일부 발음 그대로 음역되었거나 대부분 한자단어로 번역해서 표기되어있다. 아니면 위 두 가지 방식을 섞은 것이다. 간혹 순 한국말이 들어있으나 예컨데 '스리마일(Three Mile)-섬-事件(영어 순 한국말-한자단어)'처럼 한자와 순 한국말을 한 글로 혼합해서 쓰고 있을 뿐이다. (『미주현대불교』에 실린 최 익환 박사의 글에서도 중국식 한자단어들을 순 한글로만 써서 뜻을 언뜻 잘 알아볼 수 없는 구절이 몇 군데 있었다.)
만약 한자가 필요하고 또 배우는게 좋다, 배울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한다면, 국민학교적부터 일찍 배우는 것이 그것도 철저하게 배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일정한 수효의 한자단어는 향상 일관성있게 모든 출판물에서 전부 사용해야 한다. 요컨데 흔히 쓰는 글자는 그게 한자건 한글이건 간에 눈에 익은 글자로 써야한다는 점이다. 필요하다면 어떤 말은 한자로 어떤 말은 한글로 한다는 일정한 기준이 있으면 더욱 좋다. 즉 한자는 흔히 쓰지 않는 중국식 한자단어나 숙어 그리고 한자 이름이나 지명에 쓰고, 한글은 나머지 말들 예컨데 아주 흔한 중국식 한자단어, 순 한국말로 된 내용어, 그리고 문법적 기능어에 쓴다는 정도로 기준을 정하면 좋을 것이다.
한글학회는 이렇게 단언했다. "제한적으로 한자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글 전용의 큰 원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한글만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왜 받아들여야만 한단 말인가? 한자도 쓸모가 있다. 예컨데 8백자 정도 제한된 수효의 한자를 배우는 것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큰 부 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4. 중국, 홍콩, 대만의 학생들은 거의 3천개에 가까은 수효의 한자를 배운다. 일본 학생들은 1천개 정도의 한자를 배우는데 그 가운데 어떤 자는 둘 또는 그 이상 읽는 발음이 다른 글자들이다.
199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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