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울지 마라.”
(루카. 7,11-17)
Do not weep
말씀의 초대
사렙타에 사는 한 과부의 아들이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인 엘리야 예언자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 아이를 다시 살려 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교회를 몹시 박해하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케파’라고도 부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를 만나 사도가 되었다(제2독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한 과부를 만나셨다.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어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이를 목격한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을 찬양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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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인 제노바의 앞바다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그리스도상이 잠겨 있는데,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제노바에서 큰 해전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바닷속 깊은 곳에 묻힌 수많은 젊은이를 회상하며 주로 그 부모들의 헌금으로 이 조각을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상은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낮은 곳에 내려오시어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당하시고,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 성문에서 장례 행렬을 보시게 됩니다. 죽은 이는 젊은이였고, 그의 가족이라곤 어머니뿐이었습니다. 과부는 당시에 의지할 데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는데, 그녀는 그나마 아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누구인가 청했을 때에야 예수님께서 응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먼저 나서십니다. 그리고 과부를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깊은 연민과 자애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12,15).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시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시니, 우리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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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신대원신부-
연중 제10주일이다.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놓으신 것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요한 17,26)을 실현하시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와 함께 상호 내재적 삶을 원하시고 실현하신 것은 전적으로 가련한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며, 이 사랑은 곧 우리가 당신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게 하시려는 것(요한 17,33)이다.
오늘 예수께서는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루카 7,13) 하고 위로하신다. 그분은 위로하실 뿐 아니라 몸소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면서 관을 메고 가던 사람들을 멈춰 서게 하셨다(루카 7,14).
생명이신 분이 앞으로 나아가던 죽음을 멈추게 하셨다. 또 그 죽음을 메고 가던 사람들마저 더는 죽음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정지시켰다. 마침내 생명이신 분이 죽음에 휩싸여 가던 바로 그 젊은이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5)고 이르시면서 죽음에 덮인 이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 생명 있는 이로 바꿔놓으시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되돌려주셨다. 교회의 몸이신 분이 슬퍼하는 가엾은 이를 보시고 위로해 주셨고, 사람을 위해 당신을 산 제물로 내놓으신 분이 죽은 사람의 몸을 생명 있는 몸으로 되돌려 놓으셨다.
교회의 몸이신 분이 이처럼 작은이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생명을 빼앗긴 이에게 몸소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면, 그분을 머리로 하는 교회공동체 또한 그분의 삶을 빼닮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아프리카 선교사제였던 고 이태석 신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선교사로서 그분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는 세간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많은 관객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이태석 신부는 일반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고, 주님 부르심에 의해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해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곧 아프리카 수단 남부에 있는 톤즈(Tonj)라는 지역으로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잠시 들렀다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 다시는 그가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던 톤즈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짧다면 짧은 투병생활 끝에 48세로 선종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는 교회 공동체가, 또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주님의 종'이 누구인지를 이 영화는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치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이사 42,1-4) 하고 외치면서 주님의 종 모습을 선포하고 있다.
공정(公正)이란 중용(中庸)이며, 중용은 진리를 지키는 일이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생명을 사는 일이다. 생명을 사는 일은 평화를 일구는 일이며, 평화를 일구는 일은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샘솟게 하는 일이다. 희망을 샘솟게 하는 일은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는 일이며, 작은이들을 끌어안는 일은 그들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하는 일이다. 함께하는 일은 곧 사랑의 삶을 사는 일이다. 사랑의 삶을 사는 일이 곧 성체성사의 삶을 사는 일이고, 부활의 삶을 사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울지 마라"고 하시며 우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의 삶에 몸소 들어가셨다. 아마도 이태석 신부도 성체성사이시며 사랑이신 분의 삶에 동참해 가엾은 이들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동시대 사람들, 특히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내려가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주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가엾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울지 마라"하고 따스한 손길을 건네신다. | |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
-전영준신부-
파리 시내 북쪽, ‘몽마르트 언덕’의 제일 높은 곳에는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을 조화시킨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871년부터 성당신축 모금 운동을 시작하여 1914년에 공사를 완료하였으며, 1919년에 축성식을 가진 성당입니다. 지금 이 성당은 ‘예수 성심 성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성삼위와 관련된 주제나 성인들의 이름으로 성당 이름을 정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예수 성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성심 신심’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한 다음에 오는 금요일을 예수 성심 대축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월을 ‘예수 성심 성월’로 지정하여 한달 동안 예수 성심을 묵상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을 상징화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중세에서부터 이러한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경하는 예수 성심신심을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역대 교황님들도 예수 성심 신심을 승인하고 널리 권장하는 문헌들을 발표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하는 행위로 이 신심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제1독서와 복음말씀은 비슷하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염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기적을 베풀어 잠시 동안 살 길을 열어 주었지만, 결국 신세를 졌던 시돈 지방 사렙타 마을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과부는 탄식 속에서 엘리야에게 울부짖었고, 엘리야는 딱한 사정을 헤아려 하느님께 여러 차례 기도를 드린 다음에서야 아이를 살려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상적인 장례를 치르고 있던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 과부가 어떤 청도 하지 않았으나 먼저 다가가시어 죽은 이에게 명령하심으로써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원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에 다시 놓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 속에서 ㅠ허덕이며 청을 올릴 때뿐만 아니라, 미처 청을 올리지 못했을 때도 늘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마치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어쩌면 우리가 미처 청하지 못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하는 바오로를 부르시어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 수님의 마음을 늘 잊지 말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김태훈 수사-
시작기도 사랑의 성령이시여, 당신 빛의 광채를 저에게 보내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예수님께서 나인 고을에서 과부의 아들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과부의 법적, 정신적, 물질적 삶을 지탱해 주는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의 죽음으로 과부는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 세상에 외톨이로 버려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과부의 처지를 보시고 위로의 말이 아니라 “울지 마라.”(루카 7,13)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분께서 과부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고 해주겠다는 어떤 확고한 자세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더군다나 ‘울지마라 ’라는 동사의 시제는 행동의 계속적인 금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슬픔 속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말해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관을 멈추게 하시는데 단순히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관에 손을 대십니다. 그 당시에 관이나 죽은 사람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타는 행위로(민수 19,11.16) 이는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임에도 굳이 손을 대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젊은이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손을 대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고서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여기서 ‘일어나라’는 동사는 부활을 지칭합니다. 이 말씀은 잃었던 생명을 다시 일으키는 위력을 지닙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말씀입니다.
더욱이 ‘내가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제1독서의 엘리야의 모습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엘리야는 수차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 다음 기적을 일으킨 반면,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신 권위로써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젊은이를 살리십니다. 이로써 생명은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영역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인 두려움이 언급되어 있고, 더욱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 구절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을 돌보신다는 유다 백성의 정서를 반영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루카는 예수님을 단순히 하느님 힘의 통로인 어떤 중개자로 국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셨다는 표현을 할 때 ‘주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 호칭은 칠십인역 구약성경에서 인간을 두고 ‘주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를 제외하고 오직 하느님에게 적용되던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게 적용하면서 그분의 신성을 부각시켰습니다.(사도 2,36; 로마 1,4) 그리고 특별히 부활하신 주님께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부활하신 그분만이 사람들을 부활시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젊은이를 어머니한테 돌려주심으로 과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디서 이 굉장한 사건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오늘의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이심이 드러났고 이 사건의 출발점이 측은지심, 곧 자비심이라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표징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비심은 인간의 선행이나 믿음을 앞섭니다. 과부의 선행,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살려주신 것이 아니라 다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셔서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묵상 (Meditatio)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는 상대를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을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되심이요, 여느 사람들처럼 나타나심인 육화는 바로 자비심의 현현입니다. 그분 오심 자체가 자비심이요, 그 자비심은 이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도 계십니다. 이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 이웃을 내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기초할 때 사심 없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우리 눈길을 맞출 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비로소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 (Oratio) 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당신 사랑의 말씀을 제게 주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어제 톨스토이의 책 중에서 ‘세 가지 의문’이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던 황제가 한 도사를 만나 답을 구한다는 내용이지요. 황제의 질문은 1) 가장 중요한 시기는 언제인가? 2)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인가? 3)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지요. 도사는 어떤 체험을 황제 스스로 하게끔 한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그 이유는 ‘지금’이라는 하나의 시기만이 우리들 인간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물은 현재 자기가 교제하고 있는 인간이오. 그 이유는 자기가 언제 다른 사람과 교제를 가질 수 있을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오. 또 가장 중요한 것이란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로, 이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유일한 의미이기도 하오.”
어쩌면 우리들이 매순간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 가장 중요한 인물, 가장 중요한 것을 놓고서 우리들은 갈등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은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에,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정답을 제대로 맞히지 못하면 계속해서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계속해서 뒤로 미루는 사람,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기에 바쁜 사람들은 더욱 더 후회라는 시간을 많이 간직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 각자의 체험으로 쉽게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셔서 장례 행렬을 만나십니다. 죽은 사람은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와서 살려달라고 청했을 때 그 청을 들어준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런 부탁도 없었음에도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어 아들을 살려주셨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 가장 아파하는 사람 그래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였던 당시 과부는 혼자의 힘으로 살기에 무척 힘들었지요.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제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이 과부였고, 이 과부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외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지요.
우리 역시 이 세 가지 원칙들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즉, 지금 당장 그리고 지금 내 도움을 필요한 사람에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이 땅에 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을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드라이든).
죽음보다 강한 사랑
-김수환 신부-
구약 성경 민수기 19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이 나옵니다.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어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가엾이 여기시고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십니다. 스스로 부정해지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관을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런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젊은이를 일으키시고, 그를 그 어미에게 돌려주십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젊은이의 죽음으로 인해 부정해진 이는 없습니다. 관에 손을 대던 순간은 잠시 그렇게 보였을지라도. 죽은 이를 살려냈는데 예수님을 부정하다고,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과부의 아이를 살려내고 그 아이를 어미에게 돌려주었던 엘리야 예언자를 떠올리며 유다인들은 위대한 예언자가 왔다며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죽음도, 죽음으로 인한 부정함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이는 외아들마저 잃은 과부를 가엾이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넘는 힘을 지닙니다. 사랑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마음
-박기석 신부-
박완서 선생님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제25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할 때 나눠주신 소감에 다음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고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물론 소설 내용에도 아들을 잃은 어느 어머니가 넋두리를 하지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에 치매 상태가 된 친구 아들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라고. ‘다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그렇게 부럽더라.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질투가 다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을 지나시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이지요. 상복을 입은 여인한테서 성모님의 모습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지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또 숨을 거둔 자신을 품에 안으실 성모님을 말입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어머니의 슬픔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비애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지만 젊은이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자식이 배고플 때 ‘내가 밥이다.’라고 주시는 어머니처럼 군중의 배고픔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마태 14,14) 빵을 많게 하셨고, 자식이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니 이를 보고 또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루카 7,13) 살리십니다. 부모님께서 저세상에 가시면 자식은 부모님을 흙 속에 묻지만 자식이 당신들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면 부모님은 자식을 가슴에 묻지요. 예수님은 더하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몸소 지셨고 그 위에서 몸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해 가지신 ‘가엾은 마음’은 ‘형벌(刑罰)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마음과 사랑 때문에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에 그렇습니다.
넘어질 수 있게 하자
-김찬선신부-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니 요즘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린 어느 유명인사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며칠 전 그는 젊은이들을 위한 희망 콘서트를 마치며 앞으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 것 말입니다.
그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젊은이들이 절망 속에 일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가 세간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간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저를 비롯하여 다른 어른들은 희망을 주지 못하였고 어떤 어른들은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숨을 쉴 수 없게 하고, 일어서지 못하도록 젊은이들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역설적이게도 넘어질 수 없게 함으로써 일어설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넘어져야 다시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까?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를 줘야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넘어져도 일어서면 된다고 여유를 줘야 넘어져도 죽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넘어져봐야 일어서는 법을 터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우리의 가혹한 시대는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 살고 지는 자는 죽는 정글의 법칙을 정당화하며,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넘어지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도록 부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으라고 밟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실패는 영원한 추락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도덕군자의 낭만적인 넋두리라고 묵살하며 일어설 기회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젊은이들은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일어설 힘도 없지만 일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는 마치 옛날 임금이 말하는 듯합니다. “짐이 말하노니, 일어나거라!!!”
여기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느껴집니다. 그 힘에 아무런 힘이 없어도 안간 힘을 쓰고 일어서게 됩니다. 그 힘에 일어설 엄두를 냅니다.
주님의 명령에는 죽음도 거역하지 못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유명인사는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함으로써 용기를 줍니다.
과부의 아들
-김인한 신부-
몇 년 전 주일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제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 신자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청했기에, 비록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은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할머니에게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병실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삶은 지금 맡겨진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시는 예수님도 부모를 몰라라 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과부인 저희 어머니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문득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송미영 수녀-
작년에 사랑하는 친구가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참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안 친구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아파하면서 그들이 새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자신이 멀리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내는 ‘무엇을 주어야만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 좋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한테는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엄마요 아내라고 말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옵니다. 저는 다음 기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자녀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큽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자녀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되살려 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고 다시금 우리 품에 안겨주신 날입니다.
-김병수 신부-
오늘 복음은 나인이라는 동네에 죽은 외아들의 과부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라는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과부가 느낀 슬픔은 절망 그 자체였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 동네 곳곳에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절망적인 슬픔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 이 과부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여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크나큰 슬픔을 안쓰러워하시며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관에 넣어진 채 무덤으로 향해 가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손길은 생명의 손길이요 축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슬픔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참으로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바로 나인 동네의 과부와 같은 간절한 심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다정하게 우리의 등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 하용달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치유기적’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인’이라는 도시는 나자렛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나자렛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의 거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 나인이라는 마을의 젊은이를 되살리신 기적 이야기는 루가 복음서에만 전해옵니다.
루카 복음서는 흔히 ‘소외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집니다. 루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활동 초기부터, 곧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때부터 소외자들에게 큰 관심을 드러내십니다. 루카 복음 4장 18절-19절에 의하면 이사야서 61장 1절-2절: 58장 6절을 읽으셨다는데, 그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시력 회복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여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각별히 아끼신 여러 부류의 소외자 안에는 고통받는 병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향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의료사업에 깊이 헌신하는 소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금 ‘의료와 선교’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초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병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시대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의료 사업에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또한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2년도에 질병의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는 병자들에 대한 사회와 이웃의 관심을 유도하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명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세계 병자의 날’을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천주교부산교구에서도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을 메리놀수녀회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로부터 경영권을 인수받은 후 지금까지 지역사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재현하고, 생명사랑과 인간존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제도의 변화로 의료사업은 큰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의약 분업 이후 의료계의 경영 악화와 국민들의 질적 수준과 의식의 변화 등으로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의 의료 시설로는 이에 부응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부산교구에서는 2003년 8월 29일에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 85-5번지에 부산성모병원 기공식을 갖고,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부산성모병원의 신축 과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교구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도와 익명의 은인들의 협조 및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계획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산성모병원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준공되어 진다면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보이신 많은 기적들, 특히 고통 받는 병자들을 치유하신 기적들을 재현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전인적 치료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힘겨운 일이 하느님의 뜻대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교구장이신 정명조(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 강조하셨듯이 무엇보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된 마음으로 열심히 바치는 기도, 특별히 교구의 주보이신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기도의 뒷받침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 받은 후 바친 아름다운 기도의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아멘.
간절한 기도
-최혜영 수녀-
과부의 외아들을 되살리신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과부 어머니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외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을 느끼시고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시며 젊은이를 살려주셨습니다. 자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부모님만큼 절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 이런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 받은 적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백발백중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자녀의 생명만을 기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가 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들의 기도는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를 청하거나 돈 잘 버는 직장에 들어가기를 청하는 때와는 매우 다릅니다. 이때의 기도는 이기심 따위는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시지 고통이나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생명의 주님, 우리에게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당신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김경희 수녀-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70평생 냉담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어느날 아침을 먹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임종하시려고 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달려가 보니 말씀도 못하시고 겨우 숨만 쉬고 계셨습니다. 지난밤 병자성사를 받으셨는데 노자성체도 넘어가지 않아 신부님이 영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신부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아 신부님께서 마지막 강복을 해주고 가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임종을 맞으면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할 것 같아 열심한 자매님 몇 분께 아버지의 선종기도를 부탁하고, 아는 신부님·수녀님께도 기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어떤 기도가 가장 힘이 있을까 생각하다 우도가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우도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어 천국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도 성인님, 당신처럼 우리 아버지도 예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도록 전구하여 주십시오. 예수님, 우리 아버지에게 우도의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아버지는 한마디도 못하셨지만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렀습니다. 회개의 눈물 같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기도하고 가시면서 “이 노인네 오늘 돌아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그날이 금요일이라 장례미사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평생 냉담하셔서 미사 은혜를 받지 못했는데 장례미사까지 못하게 되면 안 될 것 같아 아버지의 귀에 대고 “아버지, 하루만 참으세요. 월요일 장례미사는 꼭 하셔야 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씀드리고 나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2시간만 기도로 아버지를 붙잡고 있으면 장례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두 안방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동안 성모님께서 오셔서 아버지의 70평생 묻은 때를 다 닦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월요일 장례미사를 하는 동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가는 저희 아버지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로 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느님 나라로 초대해 주시는 기쁨에 저는 장례미사 내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까 7:11-17]에서 우리는 나임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예수께서 살려 주셨다 하는 기적을 말씀을 들었다.
나임이라는 곳은 열왕기 하권 4:18-37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언자 엘리아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곳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들렸을 때 상여에 매어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게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뼈아픈 슬픔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편을 여윈 과부의 슬픈 생애,그리고 거기에다 세상에서 의지하고 마음 둘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뼈 아픈 슬픔" 이것은 인간의 삶속에 뼈아픈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으셨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고 위로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비애를 그토록 마음 아파하실 줄 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얼마나 인정어린 예수님의 모습인가? 그토록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같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여, 일어나라!" 명하신다.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속에 우리는 무엇을 또 볼 수 있는가? 바로, 사람의 생명을 주시고 걷우시는 주체자이시며, 생명의 주인, 즉 우리의 생명을 살리실 수도 걷우실 수도 있는 생명의 주 되심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내 생명 주인이 되시기에 요한복음 14:19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무덤에서 승리하시어 친히 스스로 살으셨기에 우리도 또한 살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을 부르는 믿음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코린 12,12-14.27-31ㄱ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복 음 :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묵상
㰡죽은 자식 불알 잡기㰡‘라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고 그래봐야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아쉬움을 접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일이 오늘 복음에 발생했지요.
한 과부가 외아들이 죽자 장례를 지내려 상여를 따라 갑니다. 마침 나인이라는 동네를 가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와 마주치시지요.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위로하시며 젊은이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옛 예언자들 중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고, 하느님의 사람이 찾아와 주셨다고도 하며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이지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은 오늘 복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전해지는 사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과부와 고아는 이방인과 합께 사회의 가장 晩募?층에 속하는 약자들입니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은 재산과 권리조차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그 아들이었고 그가 생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마저 죽음에 빼앗겨 버리는 일이 일어났지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약자들의 보호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에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내는 기적을 연이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기적이 열왕기 상권 17장과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 7장에 언급되고 있지마는 배경과 주제는 전혀 다릅니다. 열왕기 상권 17장에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준 사렙타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숨지는 일이 일어나지요. 이때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소리쳐 부르며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추기를 세 번 합니다. 이는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생명의 힘이 산 사람에게서 죽은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가 세 번 몸을 맞추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㰡’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㰡“(1열왕17,21)
그러자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아이에게 다시 생명의 호흡을 주셨고, 마침내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기적을 일으키셨지요.
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떠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㰡’울지 마라.㰡“(루카7,13)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십니다. 그리고는 상여를 메고 가던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상여에 손을 대며 㰡’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㰡“(루카7,14)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㰡’죽은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㰡“(루카7,15)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시지요.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는 전혀 다르게 직접 당신의 힘으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사람들은 㰡’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㰡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㰡‘, 또 㰡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㰡‘하고 말하기도㰡“(루카7,16)하지요.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곧 온 유다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나갔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을 직접 살려 주시는 사건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은 후에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인도에서 살았던 현자 썬 다싱의 이야기입니다. 네팔을 여행하다가 썬 다싱은 히말라야 산맥이 위치한 곳에서 우연히 한 여행자를 만나게 됩니다. 눈보라를 헤치며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있던 그들은 눈밭에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썬 다싱이 갈등 끝에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 하자, 㰡’미쳤군요, 우리도 죽을 판인데… 우리는 인가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㰡“하며 동행자는 서둘러 떠나고 말았습니다. 썬 다싱은 죽을 각오를 하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죽어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한 발자국씩 혼신의 힘을 다해 걸어갔습니다. 얼마를 가다보니 몸이 훈훈해졌고 등에 업혀 있던 사람도 깨어났습니다. 둘은 몸을 밀착하여 서로의 온기를 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오자 그들은 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먼저 간 사람이 마을 어귀에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㰡’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㰡“는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죽은 이도 일으켜 살리시는 하느님 나라는 구약이나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지금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그 분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되찾아 주는 곳이 바로 㰡하느님 나라㰡‘이고 세상의 㰡빛과 소금㰡‘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 방식을 고집하고 내 능력대로 살고 싶어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지요. 그런 삶의 자세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절망에서 희망을 부르는 기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는 기적을 불러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수철신부-
주님 앞에 우리는 모두 젊은이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절망과 죽음의 어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희망과 생명의 빛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기에 앞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면만 강조하다 보면 삶이 팍팍하고 고단합니다. 예전에 이런 심정을 담아 표현한 ‘나무에게’ 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때로는 하느님을 찾는 열정을 접어두고
고요한 호수의 마음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영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과부의 죽은 외아들의
소생 이적에 대해 하느님을 찬양하며 드리는
사람들의 고백이 딱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 오셨다.” 그렇습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무일도의 기도를 통해,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신 후,
죽은 외아들을 살려내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인 연민입니다.
청하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의 필요를 연민으로 알아채시고
개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니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처절한 슬픔은
이미 기도가 되어 하느님 마음에 닿았을 것입니다.
“젊은이여,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얼마나 고마운 구원의 말씀인지요!
비단 죽은 젊은이뿐 아니라, 실의와 좌절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우렁찬 말씀입니다.
빛과 희망, 생명의 주님께서 절망의 어둠 중에
죽어있는 과부의 외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어 죽은 외아들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 시작하자
주님은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합니다.
얼마나 멋진 주님의 모습인지요!
외아들의 죽음으로 절망의 어둠 속에 죽어 살게 될 과부에게
외아들을 살려 돌려드림으로
생명의 빛 속에 희망으로 살게 된 과부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절망과 죽음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주님을 만나 생명의 빛 속에 희망 되어 사는 우리들,
연민의 사람들입니다.
한 성령 안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우리들,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면 될수록 우리의 마음,
그리스도의 연민 가득한 마음이 되니
우리는 연민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연민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어
당신의 빛과 생명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희망의 배달부
-조성풍 신부 -
새로운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가족 관계에 대한 물음 외에 종종 듣게 되는 것이 취미에 대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진부한 듯하여 ‘독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답을 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책을 읽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기쁨도 크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배달해주시는 분들이 반가운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배달부를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그에게 위로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서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에게 잃은 아들을 되돌려주심으로써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배달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는 없습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하고 위로하시며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다.
-강영구신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죽은 부모를 산에 내다 묻고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먼저 간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부모 앞서 죽는 것보다 더 큰 불효(不孝)는 없다고 합니다.
외아들을 잃은 나인의 과부는 살아있어도 산목숨이 아닙니다. 기대고 살던 남편이 떠난 후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과 기쁨은 외아들뿐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예레미야 31,20 이사야 43,4) 아들이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하늘이 불러 가면 어쩔 도리가 없지요. 아들을 가슴에 묻은 여인은 기쁨과 희망을 잃고 아들과 함께 죽은 목숨이 됩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한마디 말씀은 죽었던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지만, 사실은 아들과 함께 죽은 과부 어머니를 부활(復活)시킵니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자비지심(慈悲之心)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죽은 아들과 함께 과부를 살려냅니다.
당신의 오늘이 예수님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마산교구
<깊은 슬픔>(2002-09-16)
-양승국신부-
언젠가 겨우 일곱 살 된 아이를 먼저 떠나 보낸 한 어머니의 주체못할 슬픔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건만 결국 싸늘하게 식은 아이의 시신 앞에 오열하는 어머니에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이가 떠나간 빈자리는 너무도 커 보였습니다. 식사는커녕 밤잠마저 이루지 못해 몰골은 말이 아니게 변해 갔고, 하도 울어 눈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그렇게 잊으려 잊으려해도 스쳐 지나가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죽은 아이와 연결되어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또래 아이들만 만나면 즉시 가슴이 미어져왔습니다. 평소에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만 봐도 당장이라도 "엄마!" 하고 외치며 아이가 뛰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슬픔 중에 가장 사무치는 슬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무엇보다도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인 듯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인성의 과부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란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인성의 과부가 느낀 슬픔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들을 보며 달랠 수 있었습니다. 과부이기 때문에 손가락질 당할 때마다 효성 지극하고 총명한 아들만을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성 구석구석까지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사무치는 슬픔을 자비의 예수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십니까? 잘나서? 예뻐서? 사목을 잘해서, 기도를 열심히 해서?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도 사랑하시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평지설교(6,20-7,1)를 보도한 후, 곧바로 두 편의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두 편의 기적사화는 가파르나움에서 중병으로 거의 죽게된 백인대장의 종을 원격(遠隔) 치유하신 기적(7,1-10)과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7,11-17)이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전후좌우의 문맥을 살펴보면 왜 두 편의 기적사화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신원(身元)과 정체성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간결산의 역할은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졌다. 두 편의 기적사화 다음 대목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7,19) 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먼저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7,22-23) 하고 말씀하셨다. 의아하면서도 재미있는 곳은 바로 직전의 구절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신원(身元)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마자 루가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도 뜨게 해 주셨다"(21절) 라는 재빠른 보도를 삽입하였다. 이 보도와 예수님의 답변을 비교해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빠져있다. 따라서 루가에게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기적을 앞서 보도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나인에서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킨 기적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이다. 전체 구조의 흐름은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지방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1열왕 17,8-24)이나 엘리사 예언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 기적(2열왕 4,20-37)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하는 진의(眞意)는 판이(判異)하다. 엘리야나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쓴다.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 위에 엎드려 몸과 몸을 맞대고 야훼께 수 차례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방에서 이리 저리 걷다가 아이 위에 엎드리기를 일곱 번 거듭하여 사자(死者)를 소생시키는데 비하여, 예수께서는 상여(喪輿)에 손을 대고 "젊은이여, 일어나라"(14절) 라는 단 한마디의 명령으로 생명을 도로 주신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신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셈이다.(16절) 여기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