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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묵상글 ( 연중 제22주일. - 하느님이 높여주시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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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이 높여주시도록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1 독서와 복음은 모두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니 연중 제22주일은 자신을 낮춤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라고 하시지만
낮춤이 굴욕이면 억지로 낮추거나 시늉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낮춤이 아니고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낮춤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 겸손의 낮춤과 사랑의 낮춤입니다.
먼저 겸손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겸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꼬라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뭐 대단한 것 같지만 75억 명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고,
공간으로 치면 어마어마한 우주의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라는 곳에,
그리고 지구 안에서도 대한민국에, 대한민국 안에서도 서울이라는 곳에 사는,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한 7-80 년 밖에 못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누구누구보다 높다고 해도 나보다 높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기 꼬라지를 잘 알면 누구도 높이려고 들 수 없으며
그래서 높아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경계하여 낮추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낮춤은 이런 인간적인 겸손이 아니라
당연히 영적인 의미의 겸손, 곧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이에 딱 맞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 바로 권고 19번의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음은 말할 것 없고,
낮출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은총도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바다에 물이 다 모여들고 가장 많은 물을 담고 있듯이
사람도 낮으면 낮을수록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높은 곳일수록 흘려버려 물이 고이지 않듯이
높이 오르려는 자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경쟁하지 은총을 구하지 않지요.
이제 사랑의 낮춤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낮춥니다.
엄마는 기꺼이 아이의 눈높이까지 낮추고, 밑으로까지 낮춰 순종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는 사랑하기 때문에 애인에게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칩니다.
그러니 겸손의 낮춤보다 더 자발적이고 더 숭고하게 낮추는데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 누구의 사랑보다 크기에 가장 낮추십니다.
그것이 필리피 서의 그리스도 찬가의 내용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겸손과 낮춤에 프란치스코는 감격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에 보낸 편지)
높은 사람은 혹 인간의 존경은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받지 못합니다;.
낮은 사람이 혹 인간의 멸시를 받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반드시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있느냐, 사람 앞에 있느냐의 문제인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도록
오늘부터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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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고 도미니코ofm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겸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잔칫상에 보여 준 것 같은 허영을추구하지 말고 온유하고 겸손한 당신 삶을 본받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온유와 겸손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이것은 하느님의 온유하심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온유한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온유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는 온유한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들어올리시며 구원하십니다.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온유합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며 ,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의 표징입니다. 조용하고 차분함과 관대한 중용이라고 하는 두 개의 의미를 지닌 온유는 그리스도와 당신의 제자들 그리고 목자들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박해에 다하는 가운데에도 모든 이에게 침착한 온유를 보여줍니다. 그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의거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겸손한 순종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겸손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만심을 갖지 않고 자기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자각한 사람이 갖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자기는 가치없는 종에 불과하며 죄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앞에 마음의 문을 열어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영광을 주십니다.
인간의 겸손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은 겸손은 주님의 겸손입니다. 그분은 겸손하게 당신을 낮춤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고 모든 것들 안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적인 위선이 아니라 진정한 겸손의 마음으로 수종 병자처럼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굽어 살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약함 이외는 아무것도 자랑으로 삼지 않고 그들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의 능력에 자신들을 개방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죄의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멸시받는 겸손한 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를 드러내십니다. 시련에 부딪치면서도 은총의 샘이신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에 자기를 맡기고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동참하는 사람은 주님처럼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그를 들어 올려 하느님 아들의 영광에 참여 시킬 것입니다.
주님처럼 온유와 겸손을 지닌 참 신앙으로 거듭나는 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8월 성령 열매성월 4주간 사랑 / 평화 ✝️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8-10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죽은 아버지가 비상적인 그의 아들의 첫영성체를 간청하다
바덴 (Baden, 독일) 주(州)의 모스바흐(Mosbach) 지방에 정겹게 생긴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있었다. 수십년 전에 오래된 사제관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었다. 후임 신부인 알펠트( AlIfeld,바덴)의 메츠(Metz) 신부가 몸소 그 사건을 체험했으며 맹세로서 확증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나는 사제관에서 현관 왼쪽편 구석방을 쓰고 있었다. 내 방의 두 개의 창문은 거리를 향하고 있었고 현관문 옆쪽에 있었다. 이 두 개의 창문은 밤에 항상 창의 덧문으로 잠궈 두었다. 다른 두 개의 창문을 통해서는 산골짜기가 보였다. 밤중에 나는 이 두 개의 창문의 덧문을 결코 잠그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 창문들을 통해 달빛이 방안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었다. 벽을 따라 방문 옆쪽에는, 넓은 산골짜기의 전경이 보이는 두 개의 창문 부근에 내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침대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문과 서적 진열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부활절날 처음으로 주님의 식탁에 나아가야 하는 어린이들과 함께 첫영성체 교리수업을 시작했었다. 아이틀 모두 수업을 잘 따랐다. 단지 한 아이만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농부 요한 뮬러(Johann Müller) 의 아들이었는데 예절은 바르지만 매우 융통성없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오시라고 했고 그의 상태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말씀드렸다. 훌륭한 사람인 그 아이 아버지는 이 사실을 매우 슬퍼하였고 이 일에 대해서 심하게 한탄하였다.(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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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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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가을의 길목입니다. 햇살과 바람이 벌판을 휩쓸면, 벌판의 벼들이 익어갈수록 고개를 깊이 떨구어가는 계절입니다. 가을 햇살과 바람에 벼가 익어가듯, 우리가 말씀의 빛과 영의 바람으로 익어가고 익어갈수록 고개를 푹 숙이고 낮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우리를 ‘겸손’에로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18)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 가시어 때,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첫째 관심은 ‘윗자리’ 입니다. 그 자리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자리이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모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섬김 받고 대우 받는 자리이고, 자신이 드러나는 자리, 곧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초대받은 이의 관심의 초점이 초대해준 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대한 대우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초대한 사람은 혼인잔치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건만, 정작 초대받은 사람은 혼인잔치의 기쁨보다 자신에 대한 대접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서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초대해 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혼인잔치의 기쁨(초대한 분의 기쁨)은 어느 자리에나 다 차고 넘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리가 기쁨이 되고 있으니, 분명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는 것이 기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높고 낮음’은 자신의 욕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고,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이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 앞에 초대받은 자로서 있느냐? 하는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하느님 앞에 선 자기 실존에 대한 깨달음과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초대받은 사람들’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이나 형제들의 자리와 역할,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형제들의 대우에 시선이 머물고 있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초대해주신 분을 중요시 여기기보다 자신을 중요시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요, 둘째 미덕도 겸손이요,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겸손한 사부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올리베따노 연합회 창설자)께서는 <편지 1>에서 말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전부가 가르치는 것이 바로 겸손이며, 갖은 말로 설득하고 요청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가 들은 이 겸손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편에서는 모든 악이 나옵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이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이 밥상은 하느님이신 분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차려놓으신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래서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어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도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는 이들이 있기에 더 큰 행복이요 기쁨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자신을 내놓으시어 당신의 몸으로 밥상을 차리시고 섬기시면서 아버지 앞에서 높여지셨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놓아 온 몸을 낮추어 형제들의 밥이 되는 본연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초대하는 이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초대하는 이에게도 역시 겸손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먼저 가닿아야 하는 것이 당연히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베푸는 것 역시 단순히 시혜를 베풀거나 기대와 계산, 혹은 자신의 필요와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을 베푸는 것도 겸손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소서.
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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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유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시간 겸손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처음 군중 앞에 서실 때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단에 서기를 거부하시고 “나는 여기 아래에 서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후 추기경단이 머무는 숙소로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의 추기경단은 새 교황을 맞이하려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때 버스에서 교황이 내린 것입니다. 교황님은 전용 리무진 기사에게 “추기경들이 타고 가는 버스에 함께 타고 가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본인이 묵었던 숙소에서 직접 숙박비를 계산하였고 숙소에서 교황청으로 가실 때에도 전용차를 타지 않으시고 일반 버스를 이용하셨습니다.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전화를 걸 때도 직접 교환원에게 총장 신부를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황님의 몸에 밴 겸손한 생활의 부분입니다. 지금도 여행객들이 머무는 작은 숙소를 이용하고 계십니다.
미국의 신문기자로 40년간 생활을 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깨달은 바를 자기 회고록에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여정에 있어서 사람의 유형은 스타형(Star)과 섬김형(Servant)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타형에 속하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볼 때는 잘난 것도 없고 빈껍데기뿐인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매달린답니다.
여러분 스타가 뭔지 아세요? 스스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하고 자화자찬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입을 조심하는 이는 제 목숨을 보존 하지만 입술을 열어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13,3). 고 말합니다. 그러니 결국 스타형은 파멸을 자초하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칭찬은 남이 해 주는 것이지 제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자랑해 주십시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섬김형에 속하는 사람은 그들은 언제나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하며 기회가 있으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랍니다. 그야말로 콩 한 쪽도 나눠 먹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은 대체로 소득이 적고,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고 드러나는 박수갈채도 없지만, 존경을 받는답니다.
바로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데 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인정받지 못하느냐? 부자로 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했으면 그만큼 잘되어야 하는데…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14,14).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것을 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상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에 눈멀지 말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두기를 바라십니다.
요즘시대를 피알시대라고 하나요?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피알시대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 알리는’ 것입니다. 천상것, 영원한 생명에 들지 않으면 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능력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19-20).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인정을 받고 칭찬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1장 13절 이하를 보면 욥의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소와 나귀, 양, 머슴들,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환난이 왔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깍았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1,21). 이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겸손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섬김형의 삶을 말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겸손의 상급은 결국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에 영원히 기록 하게 될 것입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나는 하느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몽당연필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가져다가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고 맡겨 드리는 그 겸손의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대개는 덕이 있고 결점이 없으며, 가난하고 욕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전의 수단으로 눈에 보이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열심한 유다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유다민족에 있어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존경심을 그들이 스스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타형이었습니다. 존경심은 누군가에게 강요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세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밥맛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낮아지지 못하였기에 부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1베드5,5-6).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결심을 해도 인간적인 마음이 금방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꾸준한 기도와 하느님 말씀을 듣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젖어 들지 않고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또 익혀서 부디 여러분은 스타형으로 살지 말고 섬김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섬기십시오. 겸손하게 섬기면 다 잘 될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도심의 한 골목에 맛좋기로 소문난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상호도 간판도 없었지만 미각과 식도락에 예민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골목에 새로 음식점이 생겼는데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음식점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집” 이라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마도 후발 주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터줏대감격인 식당에서는 뒤 늦게 시작해 놓고서는 자기 자랑만 내세우는 식당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조’, ‘진짜원조’, 심지어 ‘태조’, ‘시조’라는 말을 붙여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려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은 맛으로 승부를 내야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빛이 되어야지 천주교 신자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말고 삶의 향기를 통해 전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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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란이 보통 계란보다 조금 커서 열어보니 쌍 란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10개의 계란이 모두 쌍 란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쌍 란을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8월 14일 지면에 좋은 글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과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희망에는 닮은 듯 다른 이란성 쌍둥이가 있습니다. 바로 열망입니다. 희망과 열망은 다르지만 늘 함께 다닙니다. 열망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에 의탁하는 마음입니다. 열망은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 기대감이 솟구쳐 오릅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아침기도를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이러한 수많은 열망은 하나둘 무너집니다. 이것도 저것도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바라고 또 바라지만 결국 현실은 이를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원망과 분노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열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시들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라진 열망으로 인해 마음 속 작은 틈 사이에서 실망과 좌절, 분노의 기운이 올라옵니다.
열망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내 능력과 힘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갈망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고요함이 무너지고 불안해 집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열망은 온전히 내가 주인이기에 잘 안되면 내 탓이라는 자책과 네 탓이라는 원망 사이를 오가면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다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박해의 칼날이 서슬 퍼런 가운데서도 용감하게 수천, 수만 리를 걷고 또 걸어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닌데 수많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며 헤쳐 나갔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누군가의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터널에서도 희망은 유효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희망의 너머에는 늘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비록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 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을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열망이 없는 희망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열망 없이 희망만 하려는 사람은 겁쟁이고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 없이 열망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무례하며 교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에 기대는 열망은 행동의 에너지이며 활력입니다. 그러므로 열망이 없는 희망은 가다가 지치면 현실을 잊고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반면에 희망이 없는 열망은 뜻대로 안 될 때 쉽게 분노와 울분의 나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열망이 있어야 자신을 믿고 행동하며, 희망을 할 때 이웃과 세상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희망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바라고, 열망은 희망에 의하여 겸손한 바람으로 변화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은 희망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자동차의 기름은 열망과 같습니다. 아무리 내비게이션이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마치 새는 좌와 우의 날개를 펴서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열망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삶은 많은 결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겸손을 이야기합니다. 높아질수록 더 욱 낮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 사랑을 받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더불어 나눔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나누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들은 되갚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겸손, 희망, 열망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동차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열망은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겸손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기다리며 겸손, 희망, 열망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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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돈과 사치품, 외모, 권력 등 달성하기 어려운 욕망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을 이룬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질투심도 생기고 또 좌절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하나같이 소소한 일상을 언급합니다. 성당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산책, 음악감상, 맛있는 음식 먹기, 독서 등등…. 이때의 놀라운 점은 남과 전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행복할까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묻는 말이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대단한 곳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겸손함에서 행복 찾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한 삶을 강조하셨으며, 마지막 순간에서도 가장 겸손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는데,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따라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생활에서 식사 예절은 상당 엄격했습니다. 잔치가 크면 클수록 예절은 더 엄격해져서 식탁에 앉는 순서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정해 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과시에 몹시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되면 최대한 윗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인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품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통해 순간의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 보답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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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바다가 낭만적이거나 고향 같아서가 아니라 그저 낮아서다. 정을 느끼며 살고 싶다면 그대 바다처럼 낮아져라(이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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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8. 연중 제2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 위하여 감춰 두신
그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오니까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이제 처서處暑(8.23)도 지나니 서늘 하기가 완연한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희미하게 보이던 별들도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어제 8월27일은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고백이 나올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고 그대로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저는 참 주님의 섭리 은총으로 같은 수도명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 지도를 마쳤습니다.
피정 참가자들 18명중 14명이 선교수도사제이며 4명도 언젠가는 사제가 될분들입니다. 한국13명, 잠비아5명, 인도2명 으로 구성된 모두가 순수와 열정이 넘친 다국적 수도회라 할 정도로 참 다채로웠습니다. 호칭은 모두가 “형제”였습니다. 8월22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시작하여 어제 8월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로 끝난 일정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늘 8월28일은 아쉽게도 연중 제22주일이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 미사를 못 드리지만, 두 모자母子 성인을 생각할 때 늘 애틋한 마음이 들며 동시에 저와 제 어머니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생각할 때는 늘 다음 고백이 떠오릅니다.
“늦게서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근거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도 비록 오늘 부르지는 못하지만 참 아름답고 깊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깁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셨나이다.”
피정지도를 마친 후 귀원하자 총원장 형제의 단아端雅한 감사 답신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안으로 성베네딕도
밖으로 성프란치스코
라는 말씀이 기도와 활동안에서 수도여정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이에게 주님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탁마琢磨하며
그 길을 형제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겸심, 거룩한 결심에 진심으로 찬사와 격려와 더불어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레오 형제님!”
참고로 피정지도 주제는 “선교에 앞서, 선교와 더불어, 수도공동체에서의 기본적 수행들”이었습니다. 내 그리던 사랑, 수도원에 귀원했을 때 “난 수도승이다” 라는 자각과 더불어 흡사 야전사령부의 제자리에 온 듯 “주님의 전사戰士로 살다가 전사戰死하여 내 뼈를 묻을 곳”이란 순간의 결심도 새로웠습니다.
놀라운 기적은 제 침방에서 목격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이 또한 깊이 보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사전에 사랑하는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메시지들 전 과정을 공개합니다.
“수사님, 침방 여기저기 바닥에 세워져 있는 앨범, 액자등을 벽의 적당한 곳에 붙여 드릴까요”
“적당한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질서의 질서’,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는 제 취향인가 봅니다.”
“지금 마르코 수사님이 수사님 침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계십니다. 와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정말 피정 끝낸후 침방에 들어서는 순간 놀랐고 오늘 한 밤중에 일어났을 때 또 두 번 놀랐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입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택하게 한 계기가 됐습니다. 어제 마지막으로 발송했던 메시지입니다.
“침방의 조화와 균형의 배치가 기막히게 절묘하고 아름답기가 가히 혁명적입니다. 형제애兄弟愛에 감동합니다. 놀라운 아이디어의 기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일기쓰듯 강론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수도원의 환경은, 수도자의 방은 참 깊고 중요합니다. 수도자의 방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아름다운 대목을 강의록에서 인용합니다.
“수도자의 방은 숱한 투쟁, 패배, 승리, 기쁨, 눈물로 점철된 장이 될 수 있다. 방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 수도자는 더 성숙되고 세련洗練된 자아로 태어나 그날의 도전에 다시 잘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아플 때도 방은 병실이 될 수 있고 죽을 때는 부활의 생명이 나오는 무덤이 될 수 있다. 방안에서 항구함은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수도자의 방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도원 역시 어머니의 자궁과 같습니다.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같은 편안한 쉼터이자 지상에서의 천국인 수도원이라 어머님이 계신 고향을 찾듯이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이 찾는 영혼의 고향, 하느님 집인 수도원입니다.
오늘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은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두개의 독서와 하나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겸손은 덕행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겸손하기로 작정을 하면 등신等神이 되기 십상입니다. 본인은 절대 모르고 남만이 아는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답고 교만할 때 추합니다. 누가 인품이 아름답다 느껴지면 그는 분명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연습하다보면 속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입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사랑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겸손해 집니다. 우리 수사님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의 어원은 흙이고 흙에 어원을 둔 인간입니다. 흙humus같이 겸손humilitas해서 사람homo임을 깨닫습니다. 흙을 닮은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겸손에 대한 설명이 참 아름답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떠나 날리 멀리할수록 거만倨慢입니다. 겸손은 아름답지만 거만은 참 추합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겸손한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둘째, 환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초대”로 무려 아홉 번 나옵니다. 성경 원어는 ‘칼레오’ 곧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겸손으로 불린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초대의 마음, 초대의 사랑은 그대로 환대의 마음, 환대의 사랑과 통합니다. 초대와 환대의 사람 역시 겸손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자리, 환대의 자리에 갔을 때는 겸손히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 사실 겸손한 이들은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지기를 바라고 끝자리를 좋아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거만으로 높아지면 낮아지고 겸손으로 낮아지면 올라가는 것이 역설적 영적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의 진수, 환대의 진수를 보여 주십니다. 참으로 겸손한 환대의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게 진짜, 초대의 축복, 환대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불우한 이들을 형제애로 초대하고 환대할 때 마지막 날, 주님 친히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장애인들입니다. 아니 이런 환대의 사랑 자체가 보답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행복을 살게 합니다.
셋째, 천국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사랑, 환대의 사랑을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 천국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날로 가까워질수록 겸손에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시나이 산으로 대변되는 옛계약과 시온산으로 대변되는 새계약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은 새계약의 사람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삽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미리 맛보는 다음 새계약의 현실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감사하십시오.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미사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새계약의 천상의 세계의 아름다운 현실을, 하늘 나라 천국의 행복을 미리 맛볼 수 있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 환대의 사람, 의인義人이 되어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의인들아 기뻐하며 춤을 추라.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너희는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분 앞에서 기뻐 춤추라.”(시편68.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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