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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9-24 레아가
본문은 레아가 다시 투기가 발동하여 자기 시종 여자 실바를 통하여 자녀를 얻는 모습으로 시작하여 레아가 다시 자녀를 얻게 되는 일과 이어서 라헬이 자녀를 낳게 되는 일들입니다.
1. 본문 9-13절은
“(9)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입니다.
1) 모세는 다시 레아를 향하고 있습니다.
레아는 네 명이나 되는 아들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번 차지해 본 우위를 항상 점유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했던 방식대로 레아 역시 자기 시녀로 자기 자리를 대신하게 합니다.
라헬은 참으로 자기의 폐막한 휼계(譎計)의 보상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라헬은 자기 언니로부터 승리를 쟁취하기가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나머지 자신이 이용했던 방법이 그처럼 속히 자기에게 역이용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레아는 더욱 큰 죄를 범합니다.
레아는 그 경쟁에서 부당하고 악한 사실을 역이용했습니다. 레아는 짧은 기간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우신 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동안 자기에게서 자녀 생산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마치 한번도 하나님 바로 그분이 주시는 은총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처럼 장래에 대해 절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 소원이 정당하면서도 아주 강열 했다면 어찌해서 복의 원천에 의지하며 호소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밀어들여 보냄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제도를 넘어서는 성급함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일에 불신감도 들어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과 함께 믿음도 소멸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곧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으로 행하신 일들을 아는 만큼 그 사람의 믿음이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그 마음이 온전히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을 꾸준히 인내하며 기다린다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지나치게 황급한 나머지 허둥지둥 하다가 실족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에 대한 지당한 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올바른 길로 행하기를 원한다면 육신의 공격을 그만큼 더 경계해야만 한다는 데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2) ‘갓’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해석자들의 설명이 구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치하는 점도 있습니다. 즉 벡아드의 의미는 마치 레아가 ‘생산의 때는 왔다’ 라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일치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가드를 재성 쥬피터(목성)로 생각합니다. 또는 머큐리(Mercury)신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고 행운의 신으로 상상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사야 65장 11절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데 거기에는 ‘저희가 갓에게 상을 베푼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 있는 문맥은 이것이 오히려 천군이나 거짓 신들에 해당하는 수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거기에는 그들이 별들에게 제사하며 무수한 신들에게 상을 베푼다는 것이 잇달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형벌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수한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을 그 수만큼 칼에 붙이신다는 것입니다. 본 구절에서 레아가 하나님 대신에 목성을 칭송하였다는 것은 틀린 견해입니다. 레아는 인간 종족 증식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온다는 원리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해석자들이 이것을 재물신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모세는 나중 49장 19절에서 이것을 정반대 의미로 몰아 갑니다.
모세는 ‘갓이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한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아가 만일 자기 자식의 수가 군대처럼 많게 되는 사실을 스스로 축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모세가 거기서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아는 자기 동생을 훨씬 능가했기 때문에 자기 자녀가 크게 풍부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녀가 여섯 번째 아들로 인해 자신을 복되다고 선포할 때에는 많은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얼마나 존중되었던가 하는 것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모라는 신성한 칭호를 주시는 것 자체가 큰 영광입니다. 또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생긴 인종을 증식시키실 때 그것은 크나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14절은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입니다.
한 소년이 들에서 무슨 종류의 열매인지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돌아와 자기 어미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어미는 그것을 동생에게 팔아 남편과 하루 밤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정말로 하찮고 어린애 장난 같은 감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 안에는 유용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기원을 찬양하며 자랑하는데는 유달리 열성입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인류와 함께 아담과 노아의 후손입니다. 그렇지만 그 점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예는 드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증언하듯(롬9:5) 확실히 그들은 조상들의 존귀한 신분 때문에 빼어난 민족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묘사하여 그 시작이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데서 유래했다고 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이런 교만을 타도하시려는 의도에서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그들이 자신을 전시할 수 있는 훌륭한 무대를 가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자신들을 낮추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자기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언급된 열매의 종류에 대해서는 확실히 예시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아가서 7장 13절에서 향기 있는 식물이라는 것만이 끌어올 수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합환채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3. 본문 15-16절은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신자들에게 언의의 의미를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즉 야곱의 집에는 다툼과 분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아의 마음은 오랫동안 분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자기 동생에게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거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두 자매는 날 때부터 이처럼 다툼을 좋아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골육상쟁을 허용하신 것은 이로서 후손에게 일부다처제의 형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정 안에서 이처럼 개인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적대적인 알력으로 서로 싸우자 야곱이 큰 고통과 슬픔에 시달렸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이처럼 이쪽 저쪽으로 마음이 엇갈려 괴로움을 겪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온갖 정당한 것을 위배해 가며 부부 결합의 ‘단일성을 깨뜨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한가지 문제만 정결해도 가정 안에 상당한 평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비해서 다른 문제들은 잔가지 치기와 같이 쉬운 일들이 됩니다.
4. 본문 17-20절은
“(17)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입니다.
모세가 이것을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대해 얼마나 관용심을 가지시고 처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레아는 자기 아들이 채집해 온 합환채를 동생에게 주지 않겠다고 밉살스럽게 거절하였다가 그것을 판 대가로 자기 남편과 하루 밤을 같이 보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기도할 장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께서 인간이 갖는 그토록 큰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기 역사를 꼭 완성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여러 가지 과오에 대한 용서가 허락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무지하게도 자기 죄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아들을 받은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녀는 자기 동생을 대적하기 위해 새로운 첩을 소개했고 그럼으로써 거룩한 결혼의 신실성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는 자기 과오를 고백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 공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행위에는 어느 정도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녀는 자기가 욕정에 자극됐다기보다 정숙한 사랑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가문에서 인구를 불리고 나아가서 한 가정에서 명예로운 어머니로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는 이런 구실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신성한 결혼의 모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뻐하시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레아는 이유를 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일을 취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층 더 관찰해야 할 만한 점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너무나 만연하고 있는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를 받을 때도 그들은 제 공훈인 양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레아는 여섯 번째 아들을 얻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때 그녀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다 순수하고 올바르게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자기 남편이 지금 이후에는 자기와 보다 밀접히 연합되기를 기대합니다(20절). 야곱은 전에 레아와 함께 살았지만 라헬에게 너무 쏠려서 레아를 완전히 소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합법적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의 마음을 연합시키는 이음고리입니다.
5. 본문 21절은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입니다.
야곱에게 다른 딸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족보 기사를 기록할 때 여인의 이름을 생략하는 일은 성경에서 드물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제 이름을 갖지 않고 남편의 그늘에 숨어 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여인에게든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야 그들을 특별히 언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나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나중에 상세한 것이 언급될 것이지만 디나는 세겜에서 봉변과 욕을 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력이 소상하게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누이동생이 다른 민족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모욕으로 간주합니다. 모세가 달리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딸이나 애굽에서 혼인한 딸을 기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면 야곱에게 난 딸은 디나 하나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6. 본문 22-24절은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23)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 것도 이후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현재이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잊어버리신다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것을 기억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받는 결과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실재와 기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행위에 의해 나타나시는 대로 상상하는 까닭에서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말로서는 라헬의 자식이 맨 마지막으로 태어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hysteron proteron 즉, 나중을 처음으로 한다는 비유가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요셉이 자기 형제 중 마지막으로 태어났다면 모세가 창세기 41장 46절에서 기록하는 나이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동요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헬의 혼례를 두 번째 칠년의 마지막부터 계산한다는 점에서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야곱이 라헬을 위해 자기의 노역을 제공하기로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즉시 라헬을 소유했다는 것은 문맥으로 보아 확실히 인증됩니다. 그러므로 두 자매간의 분쟁은 처음부터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라헬이 출산을 포기하고 그녀의 불임 때문에 오래도록 수치를 감수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복이 늦게서야 내려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번영의 징조 때문에 라헬은 자기 아들에게 요셉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것은 두 아들에 대한 희망에서입니다. 즉 한 아들을 더 기대하는 데서 나온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어느 정도 눈이 뜨인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그녀의 소망은 하나님을 향하여 품은 소망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사람 속에 있는 무지와 부패와 무능에 대한 인식이 매우 더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둔탁한 껍질이 벗겨지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요구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주심을 바라면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