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샘교회 정병선 목사님께서 2009년 1월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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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행복
카롤린 봉그랑은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를 읽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 책 덕분에 내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갑자기 삼라만상이 저마다의 의미를 띠었고,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이런 경험은 봉그랑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난 후 성경을 읽을 때면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가고, 세상과 삶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는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또 좋은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유익하고 더 행복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책을 읽는 게 좋았던지 밥을 먹을 때도, 버스를 기다릴 때도,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책을 읽었습니다. 약간의 짬이라도 나면 여지없이 책을 읽었습니다. 또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깊은 어두움에 사로잡혀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부여잡는 것조차 어려웠을 적에 나를 위로해주고, 보듬어주고, 격려해 준 것은 헨리 나웬의 책이었습니다. 나는 헨리 나웬의 손을 잡고 영적인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주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필자가 되어 책을 출판하고 난 후에는, 내 책을 읽고 진한 감동을 받았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문학 소녀였던 여고시절 이후 밤을 세워가며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라고, 밥이 타는 줄도 모르고 책에 빠져 읽었다고, 너무 좋아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이틀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책 속에 빠져 읽었다고, 10권을 구입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고, 책을 읽고 저자에게 글을 쓰기는 처음이라고, 네 번째 읽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을 때 더할 수 없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看書痴)라고 불렀던 조선시대의 독서광 이덕무는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되도록 일찍이 하루도 손에서 옛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으며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사람들은 내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얻은 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어느 날 일기에는 “공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온화하고 화평한 말 기운으로 나로 하여금 거친 마음을 떨쳐내어 말끔히 사라지게 하고, 평정한 마음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공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발광하여 뛰쳐나갈 뻔하였다.”고 썼습니다.
송시열은 자신의 초상화에 쓴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라니와 사슴과 더불어 사는 쑥대로 지붕을 인 집에서, 창 밝고 사람은 고요한데 배고픔을 참고서 책을 읽노라.” 김득신은 1634년부터 36년 동안 32권의 책을 1만 번에서 2만 번 정도씩 읽었고, 「백이전」은 무려 1억1만1천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독서의 기인 열전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에 의하면 위나라 상림은 밭을 갈면서도 책을 읽었고, 당나라의 이밀은 쇠뿔에 한서를 걸어놓고 꼴을 먹이면서도 잠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왕육은 남의 양을 치다가 책에 몰두하느라 양을 모두 잃었고, 후한의 고봉은 아내가 장을 보러 간 사이 마당에 널어놓은 겉보리가 소낙비에 다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고, 소진은 아예 상투를 대들보에 묶어 놓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최근에 화가 신윤복을 그린 ‘바람의 화원’이 소설과 영화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독서 열풍을 일으킨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도 책뿐 아니라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책과 영화를 다 보았다는 동생이 하는 말이 ‘영화보다는 책이 훨씬 감동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오천 편의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으나, 오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1만 번 본 사람은 없으나, 한 권의 책을 1만 번 읽은 사람은 있습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글이 뭐기에 많은 사람들이 글에 빠져 사는 것일까요? 도대체 글이 뭐기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일까요? 흰 종이에 글자를 인쇄한 것이 전부인데, 글이 종합예술의 총아인 영화보다도 더 큰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책을 읽는 과정 자체가 뇌 활동을 가장 창조적으로 활성화시키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독서와 영화감상의 성격이 다르다는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감독이 편집한 영상에 끌려가야 하는 피동적인 활동인데 반해, 독서는 저자와 대화를 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과 삶을 투영하는 능동적인 활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독서보다 더 강하게 뇌를 춤추게 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법정 스님은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 좋은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 읽는 책을 통해서 사람이 달라진다.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배우고 찾는 일을 멈추면 머리가 굳어진다. 머리가 굳어지면 삶에 생기와 탄력을 잃는다. 생기와 탄력이 소멸되면 노쇠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앙드레 지드는 독서의 유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책꽂이에 꽂았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 책을 읽기 전의 내가 아니었다.” 독서가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이보다 더 짧게, 이보다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은 읽는 이에게 지극한 감동과 행복을 주고, 삶을 읽는 지혜를 주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요. 사람이 여타 동물과 다른 점은 말씀을 먹는 존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은 ‘읽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음’과 ‘읽음’에 사람의 사람됨이 있다는 게 예수님의 진단입니다.
물론 ‘읽음’이 꼭 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삶, 사람, 세상, 우주만물을 다 읽어야 합니다. 삶을 읽지 않고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삶을 읽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실은 삶을 읽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들음을 통해서 읽을 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읽고 들을 때 사람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사람이 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