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감사하자(시44:1~26) 찬송333장.
본 시편은 저작 시기가 언제라고는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우나, 대략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에 마카비 통치(B.C166~160) 훨씬 이전 시대에 한 경건한 신앙인이 이방인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패배하고 치욕을 당한 사실을 배경삼아 작시한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면 1~8절까지는 옛 조상들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벅찬 감격의 순간을 회고하는 내용이고, 9~22절 까지는 그와 대조적으로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고 있는 뼈저린 패배의 고통과 자기의 순전함을 말한 시인의 고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26절까지는 절망의 심연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기어코 구원해 주십사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기도의 내용을 살피면서 우리의 기도의 모델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날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1~8).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과거에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성공적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지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된 것임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열조의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번성케 하시며 계속적인 행복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수난과 고난의 역사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였습니다. 현재 처한 상황과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요1:12절 말씀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를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확인해야 합니다. 이 신분 자체가 모든 절망을 극복할 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와 저주의 손길에서 해방되게 하십니다. 사탄의 모든 억압에서 당연히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요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감사치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원인을찾아 기도하자 (9~22).
과거의 구원과 그 축복을 회상하던 시인이 갑자기 돌변하여 마치 욥의 탄식과 같은 분위기로 하나님께 현재의 고난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 따지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에게 고난당함으로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련을 가져다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나은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단지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끝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시련은 성숙을 위한 연단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본주의가 다 깨어지고 새로운 형상으로 빚어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쳐진 마음을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체질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인간인지라, 현재의 고난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호소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인내와 순종으로 새로운 형상으로 빚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고 꿈이 있으면 요셉과 같이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서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주를 앙망하고 찾는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멸시치 않으십니다. 반드시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안겨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의 연단이 필요했고, 요셉은 20년의 연단이 필요했으며, 모세는 80년의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신약 시대의 성도들도 순간순간 말씀과 기도로 훈련되어지는데, 본격적으로 말씀을 적용하고 간절한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때때로 기가 막히는 웅덩이 속에 넣으시기도 하십니다.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 두시기도 하십니다. 부당한 오해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이때에도 우리는 인간의 수단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23~26).
과거와 현재를 말한 시인은 마침내 미래의 하나님 구원에 대하여 노래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속히 임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이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주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절박한 위기의식이 엄습해 올 때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며 안절부절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구원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이 구원자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를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경건히 살고자 하는 성도에게 고난과 시련은 필연적입니다. 따라서 고난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그러한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쉽게 천국에 들어가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천국 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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