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쏟아져 내리는 별빛 아래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토록 아까워하는 '내 인생'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드디어 나는 가장 좋은 삶의 자리와, 죽음의 자리를 찾았어"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을 습격한 적군파의 리더 오쿠히라가 쓴 글이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신념을 따라 순교하겠다는 구도자들이다.
그들은 벤구리온 공항을 점령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저항 했다.
포위망이 좁혀 오자 그들은 단 한명의 나래이터를 남기고 모두 자살했다.
아랍을 위해 동방의 청년들이 전투 중 집단 자결한 사건은 아랍의 전 역을 들끓게 했다. 아랍에서 그들은 신화가 됐다. 이후에 아랍을 방문하는 모든 일본 사람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싸움을 후손에게 전해주는 임무를 띄고 살아남은 한명의 적군을 이스라엘에서 구하는 것은, 아랍의 목표가 됐다.
수년동안 집요한 테러와 포로의 교환 협상에서 ‘한명의 적군’을 구해내는 조건이 반드시 들어가 있었다. 결국 그 한명의 적군은 팔레스타인의 집요한 요구로 테러범에서, 전쟁포로로 격상 풀려났다.
일본 동경대 본관의 후미진 곳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야스다 강당이 있다. 그곳은 내가 일본에 살았던 1987년에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 연못가에서 1987년 어느 날 신혼의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은 왜 저래요?"
"음, 그거......요시다 강당이라고......과거 일본에서 데모하는 애들이 농성하던 곳이야........."
나는, 그때 그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때, 그 많고 복잡한 이야기를 착하고 온순한 아내에게 모두 말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느날, 아내와의 신혼방 우편함에 적기[赤旗]라는 팜프렛이 놓여 있었을 때, 너무나 놀라 부들부들 떨었던 아내를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는 동경 시내 시타마찌(서민들이 사는 동네, 서울로 말하면 강북 정도) 허술한 아파트에는 수도 없이 배포되던 때였다. 나는, 그때 한달에 800엔씩 내는 구독자였다.
시게노부 후사코는 일본적군(日本 赤軍)의 마지막 전사다.
1945년 9월 28일에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다. 도쿄도립 제1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1년 근무하다가 1965년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등록금을 내러 가다가 등록금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만났는데 한 시위대원이 함께 앉아 항의하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이에 시게노부 후사코는 자연스럽게 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러다가 운동권에 합류하게 되었다.
2000년 오사카에서 그녀가 검거되어 세계 테러 사에서 악명을 날렸던 붉은군대는 사실상 소멸 했다.
일본의 낭만적인 학생운동 패밀리에서 아랍의 잔인한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소멸하기까지, 이 일단의 적군(赤軍)들은 일본 지성인들의 불행한 일탈을 상징하는 아픔이었다.
야스다 강당의 함락과 함께, 발화한 전공투는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적인 조직체로 70년대 일본 지성인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 혹독한 낭만의 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적 기반을 형성했다. 단언컨대, 전공투와 적군파들이 없이는 일본의 청년들이 이토록 세련된 문화구조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68세대로 불리는 일본의 학생운동 조직들이, 1969년 동경대에 모여 전국적인 연합체인 전공투를 결성하고 야스다 강당에 모여 농성에 들어갔는데. 이틀간의 지악스런 항전에도 불구하고 야스다 강당이 함락됐다.
동경대는 불에 탄 야스다강당을 수리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전하고 있어서 세기적인 지성의 일탈을 후손에게 기억시키고 있다.
극렬하게 저항하던 야스다 강당 싸움이 진압되고 일본의 학생운동은 극렬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과 사제 폭탄이 시위에 사용되기 시작해 세계에 유행했다. 신나에 휘발류를 칵테일하는 이 제조기술은 80년대 중반에 문헌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수됐다. 극렬한 진압과 대응으로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국적인 패밀리를 중심으로 과격해지기 시작 했는데 그 중에 한 패밀리가 일본적군이다.
68세대라 불리는 이 시기에는 세계 각 곳에서 붉은 군대가 출현하였는데 그중 독일과 일본 적군이 지악스럼과 규모로 최고였다.
시게노부 후사코는 45년생으로 유명한 기꼬망 간장 공장의 공순이 였다. 메이지대 야간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관여해, 미모와 탁월한 전투력으로 메이지대 적군 섹타의 유명한 간부가 됐다.
일본의 학생운동 조직은 각 패밀리 별로 독특한 색과 기호를 넣은 헬멧을 쓰고 시가전을 치렀는데 붉은색 하이바 조직이 한쪽에서 바리케이트를 치면, 검은색의 하이바가 건너편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화염병과 투석이 난무하는 시가전으로 도시를 점령하고는 했다.
이들은 최류탄이 눈에 들어가면 레몬즙을 넣어서 통증을 달래곤 했는데. 헬멧을 쓰고, 두꺼운 가죽 구두를 신고, 노란 레몬을 하나씩 들고 출정하는 긴 행렬은 대학가에 일대 패션으로 10여년을 풍미했다.
당시 동경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레몬족과 낑깡족의 극렬한 대비는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을 반영하는 풍요와 지적 방황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본뿐 아니고 전후 세계의 경제성장과 그 굴곡에 만연된 사회적 그늘에서 인류의 지성들은 방황했으며, 더러는 극렬하게 저항했다.
문명은 이것을 ‘68세대의 질풍과 노도’로 기록했다. 68의 방황 속에서 세계의 휴메니즘은 강철처럼 단련 되었다.
그 후폭풍의 진원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20세기말 세계를 주도하는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그 일부는 세기를 경악케하는 테러 집단이 되기도 했다.
극렬조직에 대한 검거와 탄압이 거세지자 일본적군의 조직들이 해외로 눈을 돌렸는데, 해외의 혁명조직과 연계해 일본을 침공(?)하자는 전략이 수행 됐다.
그들이 이런 혁명기지로 우선 주목한 곳은 북한이었다. 그들은 민항기 요도호를 납치해 서울로 왔다. 서울에 승객을 내린 그들은 비행기를 몰고 북한으로 들어갔지만 북한에서 테러조직은 환영받지 못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을 전복하겠다는 이들의 계획서는 뭔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비전은 길을 잃어버렸다, 1972년 ‘연합적군’의 학생들이 산장에서 합숙을 하던 중 사상과 교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4명의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의 빌딩과 산을 근거로 도시 게릴러를 조직하자던 섹트의 주장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이 전개 됐다.
스무살의 나이는 희망과 이상을 향해 산화할 수 있는 나이다. 스무살의 이상이 집단 살육과 전쟁을 아이템으로 설정 할 수 있다는 거는 불완전한 문명의 책임이다.
소련이 소멸되기 전까지 세계의 도처에서 수천.수만이 집단 살육을 벌이는 악의축, 문명의 코드가 있었다. 문제는 극도로 폐쇄된 조직을 통해 죽음과 살육의 문화로 걸어간 그들의 기구한 생명력이다.
시게노부 후사코와 연합 적군의 일단이 아랍으로 날라가 ‘혁명근거지’를 건설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각축을 벌이는 아랍은 혁명이 문화 행위가 아니고, 전쟁행위인 곳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과 연계한 테러조직을 형성했다. 그들이 처음 기획한 사건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 난입 테러이다.
벤구리온 사건의 배후로 시게노부 후사코가 거론 됐다. 시게노부 후사코는 이후 적군이 수행한 무시무시한 테러들의 배후였다. 그녀는 26년동안 베일에 가려진 여 전사였다.
벤구리온 사건 이후 후사꼬는 사과나무아래서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폭탄 같은 선언을 했다.
“나 임신 했어요. 낳을 겁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벤구리온에서 죽은 오쿠히라를 사랑했음을 고백하고 먼저 간 동료들이 준 귀중한 선물, 아이를 낳겠다는 약속을 했다.
테러리스트가 그거도 적군의 간부가 애를 낳겠다는 약속은 좀 충격적이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보기도 전에 죽었다.
모사드의 테러는 너무도 잔인해서 애를 기르기는 커녕, 자기 한몸을 숨기기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후사코는 사과나무 아래서의 약속을 지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메이라고 했다. 이후 후사코는 동지들의 선물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아이가 태어난 것을 숨기고 살았다.
2000년 오사카에서 후사코가 체포 됐다. 조국을 떠난지 26년인가 만이었다. 그사이 동지의 약속들은 모두 좌절했다. 혁명의 기지 소련이 해체됐다. ‘98년에 질 줄 모르던 독일 적군이 해체를 선언 했다.
일본에서는 전후 처음으로 일본의 공산당이 선거에서 전멸 했다. 최근까지 일본에서 기세등등하던 사회당과 공산당이 몰락했다. 수백명을 살육했던 불후의 아가구미 후사코가 감옥에서 그간의 죄과를 반성하는 서글픈 고백을 했다.
그리고 동지의 선물이며, 혈육인 후사코에게 일본의 국적을 달라는 간곡한 탄원서를 제출 했다.
그 탄원서를 정리해 출판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는 제목으로 번역 돼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 베일에 가려졌 던 후사코의 딸 메이가 일본 언론에 노출됐다. 놀라운 거는 그애는 혼혈이었다. 사랑한 ‘오쿠히라’의 아이가 아니고 팔레스타인 전사의 딸이었다.
후사코도 아이의 아빠는 벤구리온에서 죽었다고 만 밝히고 끝내 아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극우파 국가로 인식 되어진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실 공산당이라는 정치조직이 1922년에 시작되었을 정도로 좌파가 극성을 부리던 국가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두번째 선거에서는 공산당에서 3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은, 정부로부터의 보조금을 한푼도 받지 않고 당원의 회비와 기관지 적기의 판매 대금만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공산당이 많이 쇄퇴한 것은 사실이나 지방정부에서는 아직도 대한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 진보정당들은 정보 보조금에 목을 매고 거기에 따라 눈치를 보며 정당운영을 하는 것에 비하면 많이 대조를 이룬다.
그렇지만 시게노부 후사코의 적군파는 일본 공산당을 탈퇴하고 적군파를 결성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