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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문학] 시와비평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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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세이 스크랩 산문 내가 본 6.25 그 날
지석동 추천 0 조회 38 10.06.20 12:0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내가 본 6.25 그 날 


                                                                                    지 석 동
 


전쟁이 나기 전에 밤은, 남로당계 사람들이 공포를 조성하느라 가까운 산마다 봉화를 놔서 불안했다.
안산에 인왕산에 북악산에 봉화가 환하게 올라가면,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민족진영계 대한청년단
민족청년단 소속 청년들이 죽창을 들고 봉화가 뻘겋게 타는 산으로 달려가는 게 예사 일 정도로
밤이면 가끔 봉화가 올라, 시민이 불안했고 남로당계는 숨어 밤을 공포로 몰아갔다.  
대한청년단이나 민족청년단원들이, 학교운동장에서 목총을 들고 훈련하는 것을,
목총이 없으면 죽창을 들고 제식훈련은 물론. 찌르지 등을 해 구경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6.25의 참상을 보고 겪은 것은
서울 금화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 얼마 안된 9살 철부지 때 여름날이다.     


밤새 비가 오고 하늘이 파랗게 든 6월 25일 일요일아침
서대문구 금산밑 천연동 120의 우리 집 마루에서, 아버지와 큰외삼촌이 오랜만에 술상 앞에 마주앉아
지지난해 서윤복 선수에 이어 지난 4월 11일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내리 1 2 3등을 차지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선수들의, 장한 이야기와 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시작으로 해 기분 좋은 우승소식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라톤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한참 우리민족의 장기를 자랑하다
동네서 하나밖에 없던 우리 집의 거대한 몸체를 뽐내던 상자형 진공관식 3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이야기에 얼굴이 핼쑥해져 상을 물리고
내 손을 잡고 금화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큰길에 가서야 전쟁이 났음을 아버지는 알았다.


영천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어 북으로 가는 차량마다 가로수인 미루나무나 푸라다나스를
꺾어 위장하고 군인을 가득가득 실은 체 넘어가는 가하면, 나팔형 스피커를 단 헌병지프차에서
장병들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자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는 날마다 투닥거리더니 그에 터졌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서둘러 집으로와 라디오를 틀고 뉴스를 들었지만
영용한 우리 국방군은(이하 국군) 남침한 괴뢰군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북진 중이라고 되풀이되는 방송에,
시민들은 늘 38선 언저리서 분대나 소대단위나 정도로 토닥거렸으니 그 것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 아무 준비도 없이 날이 어둡고 다음날 들려오는 소리에,
38선 전역에서 괴뢰군이 남침을 해와 국군이 밀리는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아 피난을 가야하나
기다려 봐야하나 안절부절인 상황에
라디오에 나온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영용한 국군 용사들이 남침해오는 적을 물리쳐 북진중이니 조금도 흔들림 없이 생업에 전념하라는
말과 국방최고위 담당자도,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는 다는 말로 걱정하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호언장담에
누구도 그 말을 의심하거나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없이 제 삶에 몰두하면서도
보퉁이를 이고 지고 무악재를 허옇게 넘어오는 행렬에서 나오는 소리는,
국군이 북의 쏘련제 탱크에 손도 못쓰고 무너져 후퇴중이라는 소리를 듣고 인심은 겉잡을 수없이 흉흉해져
피난을 가야하나 가면 어디로 가야하나 분분하다 어두운 저녁엔 비마져 뿌려 더 막막한데,

 
하늘을 찢는 포성이 귀를 때려 어머니는 갓 돌 지난 큰누일 기저귀로 둘러 업고 마루 끝에서 안절부절 하는
허연 얼굴에 대고 아버지는 침착 하라 소리 높여 안치고 태평양전쟁 말 미군 폭격에 대비한다고 동네 뒤 바위산에
U자 모양으로 파놓은  방공호에 가보고 와 몇 일 피난은 걱정 말라는 소리에 진정된 어머니는 먹을 거며
덥고 잘 이부자리는 물론 엄청난 가재도구를 싸놓는 바람에 아버지는 집 가까운데 뭘 이렇게 많이 챙기느냐고
불똥이 튀고서야 이십 중반의 젊은 어머니는 석 지게들이 물독에서 바가지로 푼 물로 마른입을 적시고
뛰는 가슴을 눌렀다.


밤 되고 하늘을 찢는 대포소리는 고랑포에서 나느니 불광동 넘어 어디쯤까지 국방군이 밀리고 있다느니
소문이 소문을 물고 퍼져 전쟁을 처음 당하는 사람이 태반인 시민들의 공포는
입에 침이 마르는 안절부절 그거였다.
 
 
아버지는 미국과 맥아더 장군이 공산화되게 남침을 보고있지만은 않을 거다
세계제일 미군이 다시 들어오면 며칠 안에 괴뢰군을 밀고 올라가 이 기회에 통일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을 하며 손에 힘을 주어보시던 기억이 난다.
27일 저녁에는 앞날개가 이층인 쌍옆 비행기가 날라 다니며 기관총을 쏴대 사람들은 파랗게 질려
우리비행기는 저걸 안 막고 무얼 하느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우리비행기가 어디 있느냐고 안타까워 혀를 찼다.
그 쌍옆비행기는 쏘련제 야크기라고 했고 비록 구식 비행기였지만 비행기의위력을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구 네는 피난을 갔다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적을 맞이하는 꼴이 되었다.
27일 밤을 집 뒤 방공호에서 났다. 굴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덜어져 덮은 이불이 졌었고 바닥은
메주덩이만 한 돌덩이들이 있어 누우면 허리를 찔러대 불편했지만 더는 들어갈 수 없을 만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떨리는 밤을 지샜다.
굴 한쪽에 생수가 고여 다행이 먹을 물은 걱정하지 안아도 된다는 말이 오고 갔다.
이 방공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양아치들이 모여 종이며 쇠붙이 등 닥치는 데로 재활용품을 모아 산더미 같이
쌓아가며 살던 굴이었는데 전쟁이 나고 어찌된 일인지 싹없어져지고 빈 굴을 동네사람들이 피난장소로 이틀 밤인가를
난 고마운 장소로 휴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 그것도 변두리로 몰려들 때 판잣집들이 들어서고 입구를 못 봤다.


밤새 비 뿌린 28일 아침 일찍, 우리는 참으로 못 볼 것을 봤다.
적과 싸우다 역부족으로 후퇴하는 병사들의 처참한 모습에 우는 가하면, 그 손에 밥을 쥐어주고 다친 상처에 바르라고
약을 건네고, 어디로 가면 강이 가까우니 그리 가라 길을 일러주고, 누구는 군화가 떨어져 바닥이 보이는 걸보고
신은 신을 벗어 주기도 하는가 하면, 군복 입고 도주 하기는 위험하다고 옷을 주어 위장을 시켜 도주를 도왔다.
무악재를 넘어온 국군 패잔병들이, 큰길은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 변두리 길이나 산길을 택해 남하하는
모습은 처참하고 가여움 그것이었다. 둘이나 셋이되 그중 한사람이 부상을 당해 부추기며 가는 가하면, 총도 없이
철모만 들고 가는 사람, 부상병을 부추기며 총을 두 세정씩 메고 가는 사람, 그저 저도 없이 칼만 차고 가는 사람,


서로 마주치면 풀 섶으로 피해야 하던 한적한 변두리길이. 패전 병들의 남하 통로로 서호정 활터를 지나 방공호
앞에서 가파른 둥그재* 고개를 넘어 북아현동 어느 골목을 지나 마포나루나 용산 어느 나루를 이용해 남하하였으리라.
아마 이미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이, 서호정* 마당에 왔다면 수많은 우리 군인들이 잡혀, 다시 의용군이 되어 자기가
충성하던 나라와 군에 총질을 했을 거라 짐작을 한다.


10시쯤 됐나 동태를 알아본다고 전찻길에 가보니, 위장을 한 인민군들이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길 가득
행진을 하며 들어와 무혈입성을 했다.
큰 말이 포를 끌고 들어오고, 기관총을 메고 나치 친위대들이 타던 옆자리에 사람이 탈수 있는 오토바이도,
앳된 여자병사들도 보이고..  군관들은 어깨에 힘을 주고 긴 장화는 번뜩이며 들어왔다.
길 양편에서는 인공기를 든 사람들이, 공화국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고 야단이 났다.
아버지는 저 사람들이 남로당 패고 잠입해있던 빨갱이들이라며, 어서 가자고 팔을 끓어 빠른 걸음으로 왔다.  


그 날 들어오던 북한군 탱크가 서대문 형무소 문을 밀어붙여, 그 안에 잡혀있던 남로당계 사람들이
뛰쳐나와 길을 가득히 메우는 행진에 인공만세 김일성 장군만세를 부르며 제 세상을 만난 듯
날 쳐 댔다, 훗날 많은 사람들을 인민군에 끓어 가는데, 유명인사들 납치에, 인민재판에서 판을 쳐댔다.
그 날 새벽 국군이 남하하며 한강다리를 끊고 가, 피난 가던 수많은 인파가 강물에 빠져 물귀신이
됐다는 소리가 돌았다.


28일 저녁 무렵에는 안개비가 내렸지만, 저녁을 일찍 해먹고 누군가 입에서 나온 말인지,
둥그재로 전쟁구경을 가자는 소리가 나와, 애어른 없이 어둡는 산등에 올라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한강을 사이에 두고, 퍼런 불 뻘건 불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날라 다니는데 그게 전쟁이었다.
기관총이 타타타타...불을 뿜으면 뻘건 불똥이 줄줄이 포물선을 그으며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어른들은 도깨비 불같다고 했다.
둥그재에서 마포나 용산은 먼 거리지만, 총알 가는 불빛은 또렷했고 총소리도 화기에 따라 구분되어 들렸다.


그 날 그 전쟁을 우리는 놀이 삼아 보 듯, 등구재 어느 바위에 앉아 봤지만,
2차대전의 영웅 5성장군 맥아더는, 영등포 어디쯤서 우리 쪽을 건너다보며 작전을 세웠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6월30일쯤에는 동네 곳곳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이 걸렸고, 거리마다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 펄럭였다.
학교서 오래 갔더니, 학교건물에 벌써 스탈린 김일성 사진이 걸렸고 북쪽 노래를 부르며 인민군을 찬양하는
소리일색이었다.
하얀 한복에 붉은 완장을 두른 눈 매서운 여자 담임 선생님이 운동장에서 아이들 손을 꼭꼭 잡아주며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지금은 전쟁중이니 다치지 말고 살아있다,
오라는 기별이 가면 오라는 말로 어서 가라고, 등을 밀은 게 마지막이었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자전거를 준비해 녹번리 불광동 구파발(그때는 가까운 농촌이었다) 등으로 다니며,
먹을 거면 무엇이든지 사다 날랐다.
우리는 아버지의 부지런함으로 해, 그 무서운 공산치하 3개월 동안 수제비라도 먹으며 굶지 안았다.
말직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손바닥과 손가락을 돌로 문질러댔다.
오고가다 인민군한테 잡히면, 손부터 보는데, 고우면 공무원이나 일 안하고 산 부르조아로 잡아다,
인민재판에 붙여 죽인다 소문이 돌아, 깨끗하고 수려한 손에 흠집을 내고 거칠게 해 위기 때 모면할
방책을 만들며 다니셨다.
사실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인민재판을 해,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기도 했다.
어느 때는 인민군의 불심검문에 걸려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해, 검 많으시던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인민군이 들어오던 날부터 아버지는 조카 걱정을 했고, 나도 고종사촌형님을 생각했다.
28일 아침에 본 국방군의 처절한 후퇴 모습에서, 경비대적에 입대해 이등중사이던 형님의 백골부대가
거의 다 전멸해 겨우 후퇴했다는, 소리를 듣고 붙어는 전사했을 거라고 절망적인 생각을 했다.
정신 없이 전쟁을 피해 다니느라 있고 산 9.28 수복 후, 어느 날밤, 들창을 두드리며 살아서 돌아 와,
어머니는 귀신이 왔다고 까무러치기까지 해 법석을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서 지금 국가적인 불상사가 나면 어떨까를 잠시 생각해보자.
첫째 먹는 물이 문제다.
6.25때는 모두가 재래식 변소로 살아 물이 없어도 불편을 몰랐다
지금은 수돗물이 끊기면 어찌되나를 생각해 보라.
당시는 어느 동네고 우물이나 펌프가 있어, 비행기를 피해 물을 길어다 먹으며 살았다.
지금은 어떤가, 우물이나 펌프가 남아 있는 동네가 하나도 없어 수천만의 사람이
수돗물이나 생수가 없으면, 먹을거릴 가지고도 굶을 처지고 환자 나 어린아이 입에 넣자고 해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짐작 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당국은 이러한 점도 눈 여겨야 할 것이다.


다음은 연료고 땔감이다.
당시는 집집이 아궁이가 있어, 세를 살아도 마당이 있어 화덕을 걸고 수제비라도 떠서 먹고
살아났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 나라 도시고 농어촌이고, 이제는 아궁이 있는 집이 거의 없어 모두가 취사를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고 겨울에는 동사한다는 것이다.
모두 가스나 기름 아니면 전기를 이용해, 취사와 난방을 하는 현실에 만약 국가 재난이나 전쟁이 터져
가스 전기 기름 모두를, 당국에서 닫아걸어 구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먹을 것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한 단 말인가.
당시는 마당에 냄비를 걸어놓고 나무를 때서 해먹으며 고난의 전쟁을 버텼지만, 지금은 먹을 걸 가지고도
거지반이 굶는다는 소리다.


때문에 전쟁이나 국가적 불상사가 없어야 할 이유는
오늘의 부와 풍요로도
물이 없거나 땔감이 없으면 견딜 수 없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 국가는 이에 대비를 해야한다고 본다.        


* 서호정.. 서대문구 천연동에 마지막으로 남아 내려오던 조선시대 활터.            
* 둥그재.. 냉천동 천연동과 북아현동사이에 있던 가파른 고개.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이 없음.                  201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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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6.21 12:00

    첫댓글 생생한 체험담이군요. 저야 전후세대라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러니 지금 아이들이야 일러 무었하겠습니까? 국민을 상대로 시기치는 치졸함은 이승만 때부터 대물림 한 것 같군요. 그때 솔직했더라면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 작성자 10.06.21 17:38

    고맙습니다. 부만 따라다니느라 권력만 생각해 국가 담장 낡고 무너지는 게 안보일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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