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봉수대.,전통무예 공연
남산 팔각정에서 매일 오후 3시에 봉수군들이
조선시대 국토방위를 위해 연마하였던 전통무예와
우리민족의 흥이 담긴 민속공연 등 다양한 전통문화공연
장창ㆍ기창 등 창술시범,
제독검ㆍ본국검ㆍ예도 등
검법, 대나무 및 짚단베기 시범,
맨손을 사용하는 권법시범., 진행.
조선시대 문존무비 사상으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예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어
중국(명, 청)으로부터 다양한 무예가 도입되었다.
1594년(선조27) 명나라 장수 이여송으로부터 무예 6기 도입.
영조 때 새로이 죽장창 등의 12기가 들어와 십팔기가 되었으며,
정조 때 기예 등 6기를 더하여 24기가 '무예도보통지'에 수록하였다.
무예24기는 조선시대 무과시험 과목으로., 구한 말까지 군사무예였다
남산(南山 : 265.2m)
일제강점기.,남산 신궁.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있는.,남산(270.85m)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정상에 N서울타워가 있고, 그 부근까지 케이블카가 설치.
남산 1·2·3호 터널이 뚫려 있고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남산은
지하철로 갈 수 있는 방법도 다양.
4호선 충무로역. 명동역 1,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
6호선 이태원역 4번 출구에서.
남산순환버스 02번, 05번을 타면.,
남산백범광장 & 남산 N서울타워 도착.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산책하기 좋다.
정상에 남산공원,
봉수대, 남산타워 등.
명동 ~ 남산타워 광장 ~ 이태원.
옛날이나 지금이나.,데이트 명소.
'연인의 언약' 명소.,"남산 연인길".
'남산 정상 & 파리 세느강 퐁데자르다리'.,사랑의 자물쇠.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던져버리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난 널 원해' 소설 때문.
2006년 이탈리아 작가 페데리코 모치아(51)의 소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폰테 밀비오.
그곳 다리 가운데 가로등에 자물쇠를 채우고
테베레강에 열쇠를 던지며 사랑을 약속한.,연인.
그후, 파리, 모스코바, 서울 남산 등
세계 주요 도시로 번지며 크게 유행.
'연인의 언약' 명소로 자리매김한.,남산 정상.
남산타워 앞 광장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다양한 전통 민속놀이 체험행사 개최.
대보름 행사는 오후 3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부럼 나누기, 제기차기, 오곡나물밥 시식, 투호놀이
윷놀이 등 체험 행사와, 달맞이 사물놀이 한마당 구성.
남산 봉수대는 조선 초~갑오개혁 전까지 5백년간 존속.
매일 거행되는 봉수의식은 순찰의식, 수위의식, 봉수의식으로
'11시~12시 30분'에 봉수대 1거(炬) 연기를 매일 정오에 올린다.
매일 오후 3시 남산타워 앞 공연장
사물놀이, 전통 무예공연이 진행된다.
무예공연은 조선 정조 때 무예24기 공연
5월~6월, 9월~10월 매주 일요일 국악공연 등
봉수의식 및 사물놀이, 전통무예 공연과 더불어
남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문화공연도 제공.
1960년대 초, 남산에 팔각정이 있었고
남산과 연이어진., 용산(龍山) 정상에는
미군의 통신부대 및 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1950년생 필자가 용산중학교에 다닐때
후암동에서 남산에 올라 송충이 구제 작업.
1960년대 초, 남산 정상부는.,온통 소나무숲.
그무렵, 한강을 건너는 다리는
용산에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뿐.
..........한강대교 & 한강철교.......
한강대교는 1917년 10월에 준공 후,
1925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가설공사를 실시하여 1929년 9월 완공.
1936년 10월 아치 강판형교로 증설된 후
6·25전쟁때 일부 파괴된 후 1958년 5월 준공.
한강철교는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조선 정부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얻어 1897년 착공 후 자금난으로 공사중단
일본이 경인철도부설권을 인수하고 공사를 재개해 1900년에 준공.
1913년 한강철교 B선이, 1944년에 C선이 완공
6·25전쟁 때 폭파되었으나 1950년부터 A선 가복구.
1952년 B선의 가복구공사를 실시해 임시로 사용하다가
1957년 C선 복구, 1969년 6월에 A, B C선 모두 완전 복구.
............................................................................
1950년 1월 2생 필자는 1960년대 초
영등포에서 전철을 타고 노량진을 거쳐
남양역에서 내려 통학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당시 버스요금은 2원 50전이고,
전철 요금은 1원 50전이었던 것 같다.
1원을 아끼려고 버스보다 느린 전철을 탔고
귀가할때는 1원50전을 아끼려고 걸어서도 다녔다.
용산~ 한강다리~노량진~ 흑석동~
사륙신묘~대방동~ 신길동~영등포.
당시 영등포 공단지역이
오늘날, 구로공단의 전신.
일제강점기에 영등포공업단지지역은
피복 맥주 등 태평양전쟁 군수물자 공장.
이곳 군수품을 만주로 신속히 이송하기 위해
마포, 영등포에 신작로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
오늘날, 강남 전체가 그당시.,영등포구.
1960년대 초, 서울은 강북과 영등포구 뿐.
일제강점기 서울 심장부는 남산이었으리라.
.........................................
.........................................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화를 위해 남산에 신사를 세웠다.
당시 신사는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밖에 없었으나
식민지 수도 중에서 가장 격이 놓은 조선신궁을 세운 것.
'1904∼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1910년 한일합방 후, 세운 조선신궁.
조선신궁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삼아 숭배.
제신 후보로는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거론.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총독부가 신궁 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인이 해체 10월 7일 남은 시설을 소각.
한국에 신사들이 한국인에 의해 태워진데 비해
조선신궁은 일본인들 스스로 폐쇄행사를 하였고,
그 터에 남산공원 조성,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
현재, 힐튼호텔 맞은편 어린이 놀이터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식물원 터를 아우르는
43만 m² 면적을 차지했던.,일제강점기 조선신궁.
탑골공원에 이어 남산도 시민공원으로 개발되어.,한양공원.
'漢陽公園)' 고종 친필 석비가 구 통일원 청사 옆에.,남아있다.
구한 말,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를 용산에 두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해왔다.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평택으로 이전.
용산구에서 한남동 다음으로 많은 외국인 주거지 이태원.
노르웨이, 덴마크, 세네갈, 스리랑카 대사관이 위치.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은 조선시대 한강물길.,교통 요지.
'한양의 관문' 용산 이태원은 조선시대부터 외국군 주둔지.
주한 미군을 비롯한 외국인, 외국 상품, 외국 문화의 집결지.
조선시대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다.
현재, 용산고 정문 앞에 위치, 배나무가 많아.,이태원.
역원은 조선시대 관리 및 길손들이 머물던., 공영숙소.
용산은 고려 말, 몽고군의 병참기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보급기지로 이용.
청일전쟁 전후 청나라군과 일본군 주둔.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의 근거지가 되었다.
.
해방과 함께 미24사단이 일본군 기지 접수.
용산기지는 미8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만초천(蔓草川 : 덩굴풀내)은 자연스러운 선형.
용산팔경 중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 만천의 게잡이 불빛).
미8군사령부 터에 300m 가령 만초천 홍예교 원형이 남아있다.
둔지산 자락, 용산구청 맞은 편에는,
미팔군 터에 수령200년 느티나무 군락.
만초천은 '무악천(毋岳川)'으로도 불렸는데,
인왕산 옆 무악에서 발원한 것에서 유래한 것.
남산~부어현(夫於峴)과 이어지는 산세.,둔지산.
조선시대 '한양 도성~ 마포나루' 물길.,만초천.
'마포나루~서대문~ 남대문'까지 작은 배가 다녔다.
마포나루 큰배 새우젓을 작은 배로 옮겨 실어 날랐다.
현재, '남영역~용산역' 100m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복개.
용산구는 "복개된 곳은 두고 인공하천을 만들겠다."는 계획
만초천 복개도로는 용산전자상가 한복판을 가로지른.,청파로.
조선시대 남대문 밖에 있던 모화관 남연지.
그 규모는 서울역 일대를 포함한 드넓은 연못.
일제 때 서울역을 건설하며 사라진듯 추정된다.
조선 개국 초, 남대문을 숭례문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도 모화관(명,청 사신.,영빈관)이 있기 때문.
오늘날, 남대문(숭례문)이 '국보 제1호'인 요인.,만초천.
만초천, 봉원천, 선통물천, 아현천 등
모두 복개되어 사라진.,조선시대 하천들.
조선시대 한양을 관통했던 중요한 물길이다.
만초천은 '마포나루~ 남대문' 물길
중량천은 '뚝섬나루~ 동대문' 물길
홍제천은 '양화나루 ~ 서대문' 물길.
조선시대 서강· 마포· 두모포· 송파와 함께
한강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한.,용산.
'남대문~ 동작진~ 시흥~ 군포~ 수원'.,남행길.
남산은 한성의 대표적인 물길 청계천과
한강 물길이 섬처럼 감싼 군사적인 요충지
...............................청계천.............................
한양 도성을 동서로 관통하여 흐르는 청계천(淸溪川).
청운동 백운동계곡에서 발원한 한강에 속한 중랑천 지류.
청계광장 부근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 도심을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캠퍼스 옆 중랑천으로 유입.
청계천 길이는 10.92 km,
개천 유역 면적은 50.96 km²
조선시대 22개 다리가 있던 개천.
.............................................
한양 천도 후, 용산은
군량미 조달을 위한 둔전(屯田),
군수 식품 저장· 출납기관 군자감(軍資監),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만리창(萬里倉),
기와· 벽돌을 만들던.,와서(瓦署) 터.
남산(목멱산)의 산세와 연결된 용산은
삼각산(三角山)과 관악산(冠岳山)을 연결하는
녹지축 역할과 한강수운으로 강북이 연결되는 지역.
.............................
.............................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 종남산.·
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
마뫼 등으로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하였다.
남산 북쪽 자락에는 남별영(南別營)이 있었고,
훈련도감 무예훈련장이었던.,비파정이 함께 있어
수도 한성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석호정 활터는 조선 인조 때 지어졌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간 사정(射亭).
2015년 11월 7일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남산 석호정 활쏘기 페스티벌 145'.
사대에서 과녁판까지의 길이는.,145m이다.
'석호정, 남별영, 비파정'.,훈련도감 무예훈련장.
일제강점기 경무총감부는 남산 필동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구내에 두고,
헌병대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임하여
1910년 6월 한국 정부의 경찰권을 박탈.
1910년 6월~1919년 3월 1일까지
헌병경찰제를 실시해 독립운동을 진압.
현재, '남산 한옥마을'이 헌병사령부 옛터.
필동에 있었던 '수도경비사령부' 터가
헌병사령부 옛터(현재, 남산 한옥마을).
현재, 중부경찰서가 일제 경무총감부 옛터.
1919년 3월 3일에 남산 경무총감부에 수감되어 있던
민족대표들이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는 등 광복 전까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민족정신을 탄압한 남산 헌병사령부.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태화관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요릿집으로 명월관(明月館)의 분점격.
이때 한용운(韓龍雲)의 식사를 듣고 “대한독립만세”를 제창.
이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3.1 독립운동>.
춘외춘(春外春)이란 기생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警務摠監)으로부터
배일파(排日派) 정보제공 조로
돈을 내밀자 '전쟁터에서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 며 단호하게 거절.
구한 말, 일제강점기 해체된.,장악원.
궁중음악, 무용, 제례의식을 맡았던 관청
각종 행사 음악교육, 악공·악생 관리를 담당.
이원(梨園)·연방원(聯芳院)·함방원(含芳院)·
뇌양원(蕾陽院)·진향원(趁香院)·교방사(敎坊司)·
아악대(雅樂隊) 등으로도 불리웠던.,장악원(掌樂院).
조선시대 관청에 속한 중인들이 살던.,명례방.
오늘날 , 서울 중구(中區)에 해당되는.,지역이다.
'중인들의 거주지'를 위미하는.,소 형태의 중구 지도.
중구(中區)는 서울 도심에 위치한 중앙부 자치구.
북쪽으로는 종로구, 남쪽으로는 용산구 닿아 있다.
남산은 중구 중앙에서 중구 각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조선 초, 한양 5부 중 남부에 해당하는.,중구.
"북촌은 떡이 달고 남촌(명동)은 술이 달았다."
조선시대 남촌은 풍광 좋은 남산 아래.,"남산골".
"남촌"은 한성부 북부.,명례방.
조선시대 명례방이 오늘날 "명동".
"남산골" 아래 충무로 옛지명은 "진고개."
비온 후에는.,장화 없이 다닐 수 없던.,진흙길.
'충무공 이순신 생가' 인근이라 하여 명명된.,충무로.
벼슬에서 물러난 양반이나
하급관리들이 살던.,"남촌"
상의원(尙衣院), 사복시(司僕寺), 군기시(軍器寺),
사섬시(司贍寺), 군자감(軍資監), 장악원(掌樂院),
관상감(觀象監), 전의감(典醫監), 사역원(司譯院),
훈련원(訓鍊院) 등에 속한 중인들이 살았던.,명례방.
..........조선시대 명례방.,"남촌"..............
조선 초부터 있던 한성부 남부 11방 중 하나,
동현계 동현동・사정동・박궁동・조동, 명동계 명동,
장악원계 장악원동, 소룡동계 소룡동, 대룡동계 대룡동,
남산동계 남산동, 종현계 종현동, 저동계 저동, 등이.,남촌.
현재 남대문로1・2가・을지로2가 ・명동1・2가・
충무로1・2가・회현동2・3가・장교동・저동1가
각 일부와 남산동1・2・3가 각 일원에 해당.
.......................................................
서울특별시, 중구.,남산동,예장동, 필동, 장충동.
용산구.,후암동, 용산동, 한남동에 걸쳐 있는.,남산.
한강 둑이 없었던 조선시대 남산은 풍광 좋은 경승지.
마치, 바다처럼 광활했던.,한강.
한강 동호(東湖)에는 갈매기가 날고
한강 서강(西江)에는 고기배들이 오가고
한강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었다.
오늘날 서울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한강에는 10여 섬들과 넓은 백사장.
한강은 유구한 세월을 거치며 자연퇴적과 침식을 반복.
새롭게 섬이 만들어졌다가 또 하나 둘씩 사라졌고
평소 육지와 백사장으로 이어져 있다가 강물이 넘치면
섬이 되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육지와 연결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한강의 큰섬으로는 팔당 하류부터 당정섬(미사리),
석도(무학도), 잠실, 뚝섬, 저자도, 율도(밤섬), 여의도, 난지도
부리도, 무동도, 반포도(서래섬), 노들섬(중지도), 백마도 등이다.
조선 영조 때 정선 겸재.,송파진도.
한강은 현재, 용산구 동쪽 경계를 따라 크게 곡류.
남산 자락의 용산구는 한성과 가까운., 한강 전망대.
한강 수운 뱃길을 이용한 인천과의 교통이 편리한 곳.
1946년 마포나루.
남대문 밖 남연지는 한양에서 가장 넓은., 남호(南湖)
그 범위는 남대문 앞 서대문 앞을 포함한.,드넓은 연못.
일제 때 서울역을 건설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사신 영빈관 모화관 앞까지 펼쳐진 남호.
남호 위로 홍재동 안산 자락은.,소 말 돼지 닭.,방목장.
남호 곁 만리재는 성안 주민과 성밖 주민 간.,석전놀이 터.
안산 두 산줄기 중 하나가 만리현을 지나
한강변을 향해 구불구불 내려간 모악의 산세가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간 형태와 같다 하여.,용산.
조선시대 용산구 서빙고동 동빙고동은.,얼음창고.
동빙고는 처음에는 두모포(현 옥수동)에 설치되었다.
연산군 10년(1504) 서빙고 동쪽으로 옮겨져.,동빙고동.
조선시대 국가의 여러 제향에 사용했던 얼음창고.
남산은 우리나라 수도권 심장부에 해당하는.,위치.
근래, 미8군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 중앙정보부 터.
현재, 국방부, 육군본부 등이 함께 있는 군사적 요충지.
남산은 한강이 감싸안고 흐르고
남대문 앞 넓은 남호(南湖)가 있어
마치, 육지 속에 떠있는 섬 같은.,위치.
용산구(龍山區) 지명이
그 사실을 대변해준다.
한양에 도읍이 들어서기 전까지
남산은 이름 없는 야산에 불과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산신제'를 지내면서부터
목면산 지명을 갖게 된 남산.
1395년 (태조 4년)에 북악 아래 경복궁에서
바라보이는 '남쪽에 솟은 산'이라 하여.,남산.
남산에서 목멱대왕을 모시고 산신제를 지냈다.
그해 12월에 목멱대왕(木覓大王) 칭호로
봉작하여 국가제사를 받들게 했던 곳.,남산.
목멱산신 시원은 고구려 목멱대왕에서 유래.
개성 목멱대왕을 남산 국사당에 모신.,이성계.
고구려, 고려, 조선의 적통성을 부여하려 한 것.
남산을 '호국의 신'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던 곳.
그후, 고려 공민왕, 무학대사, 나옹선사를 비롯
민간신앙에서 숭상하는 신상들을 걸어놓은 기도처.
국가적으로도 민간 기도객들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한다.
조선 개국 초, 도읍 개경에서
모악천도론(母岳遷都論)에 의해
조선왕조 5백년 도읍지가 된.,한양.
고려시대 몇 차례 한양천도론이 활기를 띠었으나
최영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우왕 8년(1382) 9월에
잠시 한양천도 후, 이듬해 2월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
남산 국사당은 나라에서 굿을 행하던 사당.
조선시대 산천제 기능을 하던 곳이.,국사당.
훗날, 무당과 민간신앙 기도처로 사용되었다.
원래, 국사당은 나라의 스승을 모신.,사당.
불교와 유교, 선교 등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민족의 얼과 국격을 함유하는 상징적인 기도처.
1397년 국사당을 짓고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
영적인 스승을 모신 남산.
남산 정상에 5개 봉수대를 설치하여
한양도성 방어의 중추적인 역활을 수행.
조선시대 남산은 수도권 방위 군사 요충지.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연습훈련장 예장이 있던 곳.
그 훈련장을 '예장' 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된.,예장동.
1894년 갑오개혁 때
南署 훈도방 주동계 주동,
성명방 주동계 남학동이 되었다.
..........................예장동(藝場洞)........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연습 훈련장 '예장' 터였다
조선 초기, 한성부 남부 훈도방과 성명방 일부에 속.
영조 27년(1751)에 남부 훈도방 주자동계에 속하였다.
.......................................................................
조선 개국과 함께
왜구 침입에 대비해
전국 8도의 봉수대를
남산 봉수대로 연결하는
'통신 시스템' 봉수제 구축.
고려 말, 왜구들이 자주 출현하여
조운선 세곡미를 자주 탈취한 것이
고려왕조 멸망에 중요한 요인인 때문.
고려 말,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명장 이성계.
조선 개국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 이전 직후에
왜구 침입에 대비해 한성 수비를 튼튼히 하는데 주력.
...................
...................
조선시대 남산은
시대적인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남산(南山)은 명나라 진령(秦嶺) 주봉 중 하나.
서안(西安) 현성 남쪽 '종남산'에서 유래된.,남산.
서울 ‘남산(南山)’을 달리 이르는 말.,인경산(引慶山)
조선 한양천도 후, '밝은산' '광명의 산'.,인경산.
'안장을 벗어놓은채 달리는 말과 흡사하여.,열경산.
산세가 주마탈안장(走馬脫鞍形) 또는 누에머리 모습.
조선시대 태조 때 쌓은 성벽이 남아 있고,
구한 말까지 남산봉수대와 국사당이 있었다.
현재, 봉수대는 복원, 남산 팔각정은 국사당 터.
남산에 올라서서 탁트인 사방을 바라보면,
서울 시가지가 눈 아래 한폭의 동양화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풍류문인들이 즐겨찾던 곳.
...................남산팔영....................
운횡북궐, 수창남강, 암저유화,영상장송,
삼춘답청, 구일등고, 척헌관등, 연계탁영.
.......................................................
조선시대 시인 정이오 作
'구름은 북쪽 궁궐을 가로지르고
남쪽 한강의 물은 가득하게 흐르고
바위 아래에는 그윽한 꽃
고개마루에는 높은 소나무
춘삼월의 봄나들이
중앙절의 등산놀이.
언덕에서 구경하는 관등행사,
선비는 남산계곡물에 갓끈을 빤다.'
...................
....................
경도십영 중 하나.,'목멱상화'로 유명하며,
현재는 꼭대기에 서울타워와 팔각정이 있고,
그 밑에 오르내리는 삭도가 있어 관광지로 유명.
중종 때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문인' 당고.
남산의 풍경에 반해 쓴., <여지승람>에 보면
한양 8경 중 '목멱상화' 목멱은 남산의 다른 이름.
'신선이 사는 그곳 진세와 어찌 같으리
청학의 울음소리 언제나 공중에 들린다네.
밤이 깊다. 적막하오리. 산 위에 달 밝은 것이
봄이 간들 무엇이 다르리. 바위 아랜 꽃 아직 붉다네.‘
남산은 조선 말까지 '성저십리' 군사보호지역.
구한 말, 고종 때 까지도 수림과 잡초가 무성했고
인가 드문 곳이라 조선시대 사적 유물이 별로 없다.
.........................
.........................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분노한 군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명성황후는 상궁으로 위장해 장호원으로 피신.
얼마 후, 명성황후를 찾아왔던.,한 무녀(巫女).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알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깜짝 놀란 명성황후는 그 무녀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지금은 때가 아니니 몇 달 후 돌아갈 것입니다”
흥선 대원군이 베이징으로 끌려가고나자
명성황후는 무녀의 예언대로 한양으로 복귀.
이때 명성황후가 궁으로 함께 데리고간.,무녀.
이후 중전이 질병을 앓고 있을 때마다
무녀가 손으로 어루만지면 증세가 사라져
명성황후는 그 무녀 말이라면 무조건 들었다.
어느 날, 무녀가 자기는 관우 딸이라고 하면서
관우 사당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자고 청했다.
명성황후는 관왕묘를 짓고, 무녀를 진령군으로 봉.
관악묘 & 무녀 진령군.
무녀가 봉군을 받은 조선 최초 사건이었다.
무녀 진령군은 관우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자신을 신비화했고, 국정에 두루 간여했다.
그녀 말에 따라 관리와 장수들이
임명되기도 하고 파직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령군 아들 김창렬이
조정 대관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 숨은 실세.
조정 관리들은 진령군과 남매를 맺기도 하고,
의자(義子)가 되기도 하는 등 촌극이 빚어졌다.
무녀 진령군 모자로 인해
조정은 더욱 더 망가져 갔고,
구한 말, 국운은 기울어만 갔다.
임진왜란 왜장이 남산 중턱에 진지구축.
왜성 터가 남아 있어 '왜성대정'이라 했던 곳에
1914년 4월 1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일본공사관, 헌병사령부, 조선총독관저 등이 들어섰다.
.....................
.....................
조선 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했을 때
풍수지리 상 안산(案山) 겸 주작에 해당되는 산.
도성도 한양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성.
,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
남쪽의 남산(南山 : 265.2m)
북쪽의 북악산(北岳山)
국기를 튼튼히 하고자 천도를 결심해 계룡산 천도론
신도안에 6개월간 새도읍지 기초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다.
그당시 하륜(河崙)과 정도전(鄭道傳),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개국 초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한양이 조선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한강을 끼고 있어 교통 상 편리한 점을 고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한양이 조선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고,
또한, 조선개국 당시 풍수설(風水說)도 한몫.
조운선 세곡미 운송이
고려 도읍지 개경보다는
한양이 비교적 안전한 때문.
한강은 전국의 세곡미를 운반하는 조운선 물길 중심.
한성부 내에서 남산(용산)에서 동쪽 한강은.,동호(東湖)
한양 한성부 내에서 남산(용산) 서쪽 한강 일대는.,서강(西江).
한강을 좌우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용산진을 설치.
조선시대 용산진 건너편에 위치한 노량진과 더불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길목이자.,동호와 서강의 중심.
남영동(南營洞)은 한강로 따라.,직사각형 지형.
남영동 지명은 한양 남쪽에 있던 군영 터에서 유래.
조선시대 한강 변에 군사훈련장 병영을 설치했던 곳.
오늘날, 국방부, 육군본부가 그 흔적들.
남영동 남쪽은 주한 미8군 주둔지였던 곳
해방 전, 일본군 주둔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
조선시대 남산은.,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
'경복궁.,한성~남대문~용산진~노량진~과천.'
통행 길목을 제외하고는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
조선시대 한성으로 왕래하는 도로변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군사보호지역이자 성저십리 지역.
조선 왕조 묘역이자 특권층 만 출입이 허용된 풍류처.
그리하여, 남산골 일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은
조선시대 인적이 드문.,우범지대.
조선시대 삼남지방 선비들의 경복궁 과거시험 길목.,남산.
그들이 도적떼에게 노자돈을 털린 곳도.,남산골 으슥한 산길.
그들이 귀향길에 낙방의 시름을 달랬던.,남대문 밖 남산골 양동.
1960년대 남산 기슭 양동은.,불량주택 판잣촌.
조선시대 유명 점술가와 명기들이 운집했던 남산골.
조선시대 과거응시 선비들이 한양을 오가며 들렀던 곳.
유감동은 조선 세종 때 양반 출신 부녀자였으나
남산골에서 포졸 행세하던 김여달에게 강간당한 후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스스로 남산골에서 창기 행세.
39명과 간통죄를 범한 유감동.
그녀가 털어 놓은 불륜 상대는
모두 당대 조정 권신 세도가들.
유감동은 간통죄로 110대 곤장을 맞고 노비가 된 이후
1428년(세종 11년) 석방되었으나 음탕한 여인으로 낙인
조선시대 그녀에 관한 기록 대부분 인멸되고, 실전되었다.
1480년(성종 11) 어우동은 이와 유사한 행각으로 교수형.
노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 혐의 부인.
그녀와 통정한 인물들은 사면되어 동정여론이 일기도 했다.
시문과 작품을 남겼으나 음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멸실.
유감동, 황진이, 이구지, 허난설헌,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조선시대 부도를 어긴 여성의 대명사로 매도 당하고 지탄 받았다.
또한 희빈 장씨, 장녹수, 문정왕후 등과 함께
조선사회의 악녀의 한사람으로 비판받아오다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되었다.
고려시대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던 성풍습.
조선시대 유교관에 의해 억압된 여성 성윤리.
한양에서 풍류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남산골.
'북촌은 떡이 달고, 남촌은 술이 달았다.'
조선시대 '술이 달았다.'는 남산골.,남촌.
지금도 남산 주변에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남산은 조선 중기까지 봄·가을 초제(醮祭)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國祀堂)'이 있었다.
'약 10 평 남짓 규모의 사당'.,남산 국사당.
1925년.,남산 국사당.
...................조선시대 국사당(國祀堂)...................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 기우제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
그러나, 국사당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볼 수 있다.
거기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말, 국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다.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
먼저 이곳 국사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만 전해져 온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이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국사당은 뒷날 무당의 기도처로 바뀌었고,
1925년에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을 지을 때
인왕산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까지 존속한다.
............................................................
1392년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1395년(태조4)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이를 모시는 사당을 국사당이라 명명했다 전해온다 .
남산 팔각정은 남산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도성이 한눈에 보이는
한양 성곽과 나란히 이곳에 '국사당(國師堂)'을 건축.
당시, 무학은 5백년 도읍 '한양 천도설을 주장한 풍수지리 대가.
그가 스승 청학거사를 만나 풍수지리학 기초를 닦은 곳은..지리산.
'무소유론'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섬긴 목적의 숨은 뜻은.,불교 중흥.
무학의 호국불교론은
사찰에서 승군을 양성해
불교를 중흥하려 했던 것,
고려 말까지 성행했던., 호국불교.
조선 개국과 함께 무너진.,호국불교.
무학대사의 인왕산 국사당 건설 주장은
국태민안을 위한.,호국불교 승군 양성론.
고려 말까지 국사가 시행한 승군 제도였다.
무학의 인왕산 국사당 건설 주장은 정도전에게 밀려 좌절되고 만다.
당시 조선개국 공신세력은 유림이었으므로 무학이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조선왕조 500 년 운명과 200년후, 국란을 예언하고 물러난.,무학.
결국, 조선개국 200년 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조선 중기에 사명대사 등에 의해 호국불교 중흥.
그러나, 조선후기 국가 통치이념은 여전히 유교관.
호국불교 명분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사찰들까지 조선 말, 폐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그후, 약 500년간 유지되어왔던 국사당.
1925년 일제때 헐려 인왕산으로 이전했다.
원래, 인왕산 국사당 건설은
무학대사가 조선개국 초.,주장.
무학대사는 조선8도 봉수대'의 중심을
경복궁에서 가까운, 인왕산 국사당으로
하여, 국태민안을 주장했던듯 여겨진다.
즉, 조선 8도의 봉수대를
고려시대 국사가 관장하는
사찰 승군들이 지키려 한 것.
고려 말까지 봉수대는
사찰에서 보수 유지했고
국사가 8도 봉수대를 관장.
국사 무학은 전국 해안 봉수대까지 운영하려 한 것.
무학의 수도처였던.,서산시 부석면., 간월암(看月庵).
왜구에게 부모를 잃은 무학이 젊은 시절에 수도한 곳.
'물이 들어오면 섬, 물이 나가면 육지'.,간월도(看月島)
해안과 연결되는 섬으로 '달빛을 본다.' 뜻이름.,간월도.
무학이 도를 깨우친 곳이라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섬.
결국, 무학대사 불교중흥 꿈은 좌절.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은.,유교관념.
조선왕조 519년 역사가 마감된 이후
남산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돌아온 것.
남산.,조선 신궁.
일제가 남산 중턱,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신궁을 만들면서 국사당을 '조선신사'보다 위쪽에
둘 수 없다며 국사당을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버렸다.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을 위해 건설했던., 남산 조선신궁.
일제강점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곳도 이곳이었다.
결국,'1941~1945'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야욕은 꺾인다.
'1904∼1905'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남산 아래 남영동(南營洞)에 일본군을 주둔.
1945년 8.15 해방까지 일본군 주둔지.,남영동.
남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
내부는 11평에,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인왕산 국사당.................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이다.
구조가 단순하지만 규모는 민간 건물보다., 큰 편.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듯 추정된다.
국사당은 굿하는 곳만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며, 당굿은 크게 세 종류.
첫째는 상인이 사업 번창 경사굿,
둘째는 병자가 (病)굿 또는 우환굿,
셋째는 사령(死靈) 극락왕생 진오기굿.
그외, 몇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고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졌다.
..........................................................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었는데,
회현동 노인성당, 불광동 할미당, 자하문 서낭당 등.
자하문 서낭당은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민속자료로 지정.
.............................
.............................
남산 국사당은 해방 이후에도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대신 이승만 정부는 1959년 이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 모양의 정자를 지었고
이승만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4.19 혁명으로 파괴되었고
1968년 재건된,이름도 그냥 '팔각정.
오늘날, 서울 시민들에게는 해맞이 명소.
조선시대 남산의 국사당은
민간신앙, 8도 무당 진원지.
남산(南山 : 265.2m)은 비록 낮은 산이지만
8도 중심에 있어 전국의 명산을 거느리는 위치.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성지(聖地) 같았던.,목면산.
조선 통신제도 봉수제(烽燧制)의 종점.,남산.
봉수대가 있어 국방 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와 연결되었던.,남산 봉수대.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강원도·함경도와 연결되었다.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하여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와 연결되었다.
제3은 무악 동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연결되었다.
즉, 제1· 2· 3은 육로로 이어지는.,봉수.
제4와 5는 해로(海路)로 이어지는.,봉수.
오늘날, 등대 역활을 겸한.,정보 통신시설.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황해·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
제5는 양천현 개화산(開花山)에 응하여
경기·충청·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다.
1902년 구한 말, 해안등대국이 설치되었고,
1903년 팔미도등대 최초 점등 후. 해방 전까지
등대가 32기 들어서면서.,조선시대 봉수제 폐지.
오늘날, 우리나라 해안가 등대는.,총 562 기.
등대 건설로 수많은 봉수대가 멸실된 것 같다.
우리나라 '유인등대 43기, 무인등대 519기.' 중에서
봉수대 터일 가능성이 높은 곳은.,유인등대 43기 인근.
조선시대 상당히 중요한 역활을 했던 봉수대가 있었을듯.
봉수대가 옛 모습으로 다시 복원 된다면,
등대와 더불어, 관광자원 가치가 높아질듯.
.
조선시대 통신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남산.
현재, 방송탑이 정상에 세워져 전망대 겸 관광자원.
남산은 각지로 매스미디어 전파를 발송하는 중요한 곳.
1975년 건립된 남산타워는.,조선신궁 터.
조선신궁은 규모가 여의도 2배 정도였다.
높이 236.7 m(해발 479.7 m).,남산타워.
전망대에서 서울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은 서울의 발달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교통장애 지역이었으나 일주순환도로가 건설되고,
1·2·3호 터널이 뚫려있어 교통 장애를 극복하고 있다.
'남산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애국가.
원래, 남산(南山)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아카시아 등 잡목을 심어 경관이 변했다.
오늘날, 남산의 동·서·북쪽 사면 일대에는
남산공원이 설치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
또한, 학생들 교육을 위한.,자연 학습장 설치.
남산이 시민공원으로 처음 개발된.,1910년.
당시 공원 표지로 세운., 漢陽公園(한양공원).
고종의 친필 비석이 옛 통일원 청사 옆에 있다.
산정에 '서울타워' 방송탑과 팔각정.
이곳은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다.
산 서쪽 사면에 국립과학교육원,
안중근(安重根)의사기념관 & 동상,
백범광장(白凡廣場)과 김구(金九) 동상,
남산도서관· 용산도서관· 식물원, 소월시비.
'이황· 황희·정약용'의 동상 등이 설치되어 있다.
북쪽 사면에는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 리라초등학교.
동쪽 사면에는
동국대학교· 국립극장·
한국자유총연맹, 장충단공원.
장충단공원은
조선시대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이며, 고종 때
장충단(奬忠壇)을 세운 뒤, 유래된.,공원 명칭이다.
장춘당공원에는
청계천 복개 당시
옮긴 수표교가 있다.
장충단공원 부근에는
리틀야구장·테니스코트·수영장 등
시민들의 운동 시설로 제공되고 있다.
남산 봉수대.
봉수대.
오늘날, 서울 남산 정상은.,봉수대 관광명소.
조선시대 봉수대 전통문화공연을 그대로.,재연.
남산 팔각정에서 매일 15시(월요일 휴무)에 공연.
우리나라에서 약 120년 전까지 사용했던
봉수는 과학적으로 잘 갖추어진 통신 방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남산 봉수대'.
구한 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서양인들에게
산봉우리마다 연달아 솟는 횃불(烽), 연기(燧).
그 봉수대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자체였단다.
낮에는.,산봉우리마다 연기가 연달아 솟고
밤에는., 산봉우리마다 횃불이 연달아 타고
때로는.,구름 속 안개 속에서 연달아.,북소리.
부산 다대포에서 새벽녘 첫 봉수가 붙여지면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초저녁쯤 한양
목멱산(남산)에서 마지막 봉수가 연이어진.,장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위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전했다.
호남 쪽에서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충청 서부로 올라가며 북쪽에서는
함경도, 평안도 등 모두 3개 경로를 통하여
8도 변방에서 서울로 봉수가 모여들었던 것.
봉수가 지나가는 길목
곳곳 일대에 펼쳐진 장관.
개화기, 조선은 봉수의 나라.
봉수대는 15리(약 4km~6km) 간격으로,
조선시대 8도의 봉수대는 673개가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봉수대는 약 610개소.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제주목의 63개를 합치면
약 673개소가 된다.
봉수는 조선시대 국가적인 기간통신망 역할.
횃불(烽)과 연기(燧)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특정 신호전달 체계로 조정에 전하던.,통신수단.
시야가 탁 트인 섬이나 해안,
내륙 산 정상에 봉수가 있었다.
봉수제도가 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시기는
1149년 고려(의종 3) '서북면병마사' 조진약.
그의 상주(上奏)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평상시 하루에 한 번.
2급(二急)에는 두 번,
3급(三急)에는 세 번,
4급(四急)에는 네 번.
봉수대에는 방정(防丁) 2명, 백정(白丁) 20명을 두고
생계수단으로 각각 평전(平田) 1결(一結)을 주도록 규정.
봉수소에 배치되는 봉졸(烽卒:烽軍)은
천역(賤役)으로 국가관리가 죄를 범했을 때
봉졸로 봉수대에 배치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세종 재위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
평상시 횃불을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적이 국경을 넘어 침범하면 네 개,
접전을 하면 다섯 개를 올리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봉졸들이
파발마다 파발마로 연이어 달려 보고.
서울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 진장(鎭將)에게 보고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봉수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지역 별 관광자원으로 활용 계획 중.
봉수의 간선(幹線)은
직봉(職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慶興),
동남은 동래(東萊),
서북은 내륙(內陸)으로는 강계(江界),
해안 지방으로는 의주(義州),
서남은 순천(順川)의 5개처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木覓山: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직봉 외에도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어
본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
국경 방면의 전선초소(前線哨所)로부터 본진·
본읍으로 보고하는 단거리 것도 있었다.
봉화가 서울에 연락되면
병조에서는 사람을 지정해서
다음날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
승정원은 이를 임금에게 보고 하고,
만약 급할 때에는 밤중이라도 즉시 보고.
각 봉수대에 소속된 인원은
남산에는 군사 4인, 오원 2인,
연해와 변경지방은 군사 10인, 오장 2인,
기타 내륙은 군사 6인 오장 2인을 배속.
이들은 봉화대 근처의 거주자라야만 했다.
봉화대에 배속되는 봉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봉화대는 표주(標柱)를 세워서 경계를 설정하고
거짓 봉화(烽火)나 단순한 방화(放火)를 막론하고
그것이 경계선의 백보(百步) 이내에서 일어났을 때는
병조에서 관할 단속했고, 백보 외에서 일어났을 때는
해당 진영에서 단속하게 했는데 이들은 대개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봉화대 근처에서는
무당, 토속 잡신제사를 금했다
요즘도 통신사 기지국과 군부대 근처 등 요지엔
예외없이 봉수가 발견되거나 그 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1895년 우편과 전신 제도가
본격 도입되며 기억에서 잊혀진.,봉수.
1894(고종 31) 동학운동 이후, 갑오개혁때 폐지.
'1897년 10월 12일~1910년 8월 29일'.,대한제국.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봉수가 자취를 감췄다.
경상남도 창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봉수 폐지 120주년인
2016년 올해 완료를 목표로 3년 전부터 '조선봉수제'를 연구 중이다.
이주헌 소장은 "문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주로 주민들의 구전에 의존해 답사하다 보니
애초의 계획보다 조사가 많이 늦어지고 있다."
"우선 봉수 1차 조사를 올해 마무리하고
미흡한 부분은 내년부터 추가로 연구할 것.".
.......................
........................
조선시대 횃불과 연기로 적의 상황을 전달하는 봉수는
구름, 안개가 짙게 끼면 전달되지 않는 등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봉수제의 기능을 보완하자는 논의가 거론되다가
1583년(선조 16)부터 급주(急走)인 보발(步撥)을 실시하였다.
1592년에는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
경상도 발마(撥馬)인 기발(騎撥)이 실시되었다.
파발제는 송나라 때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려고
설치한 군사첩보기관 ‘파발’에서부터 유래된 것이다.
전달방법에 따라
보체(步遞)· 급각체(急脚遞)·
마체(馬遞) 3가지로 구분되었다.
보체와 급각체는 사람이 뛰어 전달하는 것,
마체는 포졸이 말을 타고 전달하는 제도로서
원·명 시대에 '고려 ~조선'시대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중 조선에 파견된 명군이 파발제를 이용하자
이의 필요성을 느낀 조정은 1597년 5월 집의 '한준겸'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의 제도를 본떠 파발을 설치하였다.
인조 때 서발·북발·남발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가 완성되었다.
옛 파발 터로.,지하철 3호선 역 이름.,구파발(舊把撥).
조선 중기부터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 역참이 있어.,유래.
구파발동 동명을 따서 지하철 개통 후, 역 이름으로 붙였다.
파발은 긴급을 요하기에 주야(晝夜)로 달렸다.
파발의 속도는 1주야(24시간)에 약 300리 정도로
산이 많아.,중국의 500~400리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파발의 전송방법은 기밀문서를 봉투에 넣어 실봉.
관인을 찍은 다음 피각대(皮角帶)에 넣어 체송하였다.
일의 완급에 따라 방울을 달았는데
방울 셋을 달면, 3급(急: 초비상 사태),
둘은 2급((特急), 하나는 1급(普急)을 표시.
전송을 지체한 자,
문서를 파손한 하거나
절취한 자는 법규에 따라 엄벌.
외적 및 도둑에 대비하게 하기 위하여
발군은 창과 방패, 회력(廻歷)을 갖췄다.
회력은 도착시각과 문서의 분실 여부를 기록한 것으로
대력(大歷)과 소력으로 구분하여 대력은 참에 비치하고
소력은 발군이 지참해 근무실태를 확인하는 증거로 삼았다.
.....................파발 조직.............................
전국에 194개 (대동지지 205개)의 참(站)을 설치.
(경기 19, 황해 18, 평안 6, 함경 65, 충청 5, 전라 20)
이를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3대로에 편성.
지역에 따라
직로(直路)와 간로(間路),
기발(騎撥)과 보발 조직으로 전달.
기발은 말을 타고 체송(遞送)하는 기마통신(騎馬通信).
25리(理)마다 1개의 참을 두고 참마다 발장(撥將) 1명,
색리(色吏) 1명, 군사 5명과 말 5필을 배치하였다.
보발은 속보로 전하는 도보통신으로
30리마다 1참을 두어 발장 1명, 군사 2명을 배치.
직로는 3개 노선에 136개 참(서발 38, 북발 64, 남발 34)이 연결.
간로는 5개 노선(대동지지)에 58개의 참(서발 48, 북발 10)이 연결.
파발은 공조가 총괄하고 발군(撥軍)은 양인(良人)으로 편성하였다.
속오군(束伍軍)· 정초군(精抄軍)·장무대(壯武隊: 기병)의 정병.
왜란·호란 때 궤군(潰軍)·노잔군(老殘軍)·한잡인(閑雜人)들도 배치.
발장(撥長)은 글을 해석하고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참의 장으로서 군사 5명을 거느려 업무를 수행하게 하되
체아직(遞兒職) 정6품 사과(司果)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
≪만기요람≫에 의하면 파발제 조직은
지역에 따라 직발(直撥)과 간발(間撥)이 있고,
전달수단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발은 말타고 전송(傳送)하며
25리마다 참(站)을 두었으나 곳에 따라
그 간격이 20리 또는 30리인 경우도 있었다.
파발로에는 5리마다 오리나무를 심어
기발이 파발로에서 벗어나지 않게 했고
수고 20m 오리나무가 파발로에서 랜드마크.
참에는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파발군(擺撥軍) 5인과 말 5필이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했고 보발은 사람이 달려서 전달.
30리마다 참을 두고
이곳에는 발장 1인과
군정 2인을 배치하였다.
전국의 발참 수는, ≪만기요람≫에는 194곳,
≪대동지지≫에는 213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수록된 파발의 조직망을 보면,
서발은 의주에서 한성까지 1,050리의 직로(直路)에
기발로 41참을 두었고, 그 밖 간로(間路)에 보발로 45참.
북발은 '경흥~한성' 2,300리
직로에 보발로 64참을 설치하고,
간로에 역시 보발로 32참을 두었다.
남발은 '동래~한성' 920리
직로에 보발로 31참을 설치.
파발 운영에서 중요한 것은 발마, 파발군 확보.
발참의 말은 역마· 목장마· 군마로 보충했지만,
민간에게서부터 차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파발군은 발장(撥長)과
발군(撥軍)으로 구성되었다.
발장은 권설직(權設職)으로서
정6품 이하의 체아록(遞兒祿)을 받고
900일 근무하면 정6품의 사과(司果)에 승진.
발군은 양인정군(良人正軍)인
기보병(騎步兵)으로 편성되었다.
파발의 주요 임무는 관문서 전달이지만,
그 밖에 외국 사신의 내왕에 따른 편의제공.
또한 파발은 사문서 전달도 담당하였는데
전송방법은 기밀문서를 문서봉투에 넣어 실봉하고
관인을 찍은 다음 다시 피각대(皮角帶)에 넣어 체송(遞送).
일의 완급에 따라
방울〔懸鈴〕을 달았는데,
방울 셋을 달면 3급(急 : 초비상),
둘은 2급, 하나는 1급을 표시하였다.
늦게 전송한 자나
문서파손 또는 훔친 자는
법규에 따라 엄벌에 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서 전송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점.
발전(撥傳 : 파발로 전하는 것)이 지체된 이유는
발마의 남기(濫騎)와 그로 인한 피폐, 심지어는
사문서의 전달까지도 파발을 이용하여 발군이
고역에 시달리고 급기야 도망치는 일이 빈번.
.
한편, 국가기밀이 엄수되어야 할
공문서를 훔쳐보는 사례가 있어
기밀이 누설되는 폐단도 많았다.
이러한 파발제는 역(驛)과 봉수제와 함께
조선시대 군사 통신체제의 골격을 이뤘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전화전신 통신체제의 발달로
제도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파발은 봉수제도보다
속도가 늦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의사소통 전달수단 중에서
가장 빠른 수단인 봉수를 주로 이용.
갈두산봉수대
조선시대 전라남도 영암군 해안 지역에서
긴급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던 군사 통신시설.
갈두산 봉수(葛頭山 烽燧)는 영암군에 속했는데
1906년 행정개편으로 해남군에 편입된 후.,해남군.
'해남 땅끝마을 땅끝선착장은
조선시대 제주 유배.,귀양지 항로였다.
제주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곳.
제주민들은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뭍으로 나올 수도 없었던.,조선시대.
제주도는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지명이.,해남 땅끝마을.
18세기말 제주에 5년간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도민을 구호한 의녀 김만덕.
정조는 그녀에게 내의원 의녀반수 직을 제수.
조선시대 정조의 부름을 받아 공식적으로
제주에서 한양을 다녀간 유일한 여인이었다.
제주에서 배 타고 나와 '땅끝마을'에서부터는
파발마다 역마를 갈아타며 한양으로 달려온 그녀.
'갈두산봉수대~한양 남산봉수대' 횃불과 연기로 환영.
그녀의 한양 입성길을 가는곳마다 알렸던.,봉수대길.
그녀가 한양에 입성하자 사대부까지 연도에 나와 환대.
도성 장안에서는 구름 같은 인파가 그녀의 입성을 환영.
그녀의 육지 입성을 처음으로
한양 조정에 알린.,갈두산봉수대.
...................갈두산봉수대..................
갈두산 봉수는 서남 해안지역 해로 상 요충지.
수군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갈두산 봉수가 운영되었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
영암군 달량진 ~-갈두산 봉수 ~어란진 ~
해남현 화산 봉수 및 관두산 봉수’ 순서로 분포.
갈두산 봉수는 동쪽의 달량진과
어란진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면서,
이들 수군진과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육지 최남단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땅끝(土末)의 해발 109.6m 사자봉 정상부에 위치한다.
갈두산 봉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암군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강진 좌곡(佐谷)에 준하고,
서쪽으로 해진 화산(花山)에 준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갈두산 봉수는 동쪽 강진현 좌곡산 봉수에서 연락받아 서쪽의
해진군 화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고
적고있어 서쪽 경우 관두산 봉수로 명칭이 달라진다.
이와 관련해 화산 봉수의 정확한 위치는
2013년 현재로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
1451년(문종 1) 4월 민가 연기가
봉수의 연기와 섞이기 때문에
서로 구별이 어려움으로
관(館)[관두량] 근처로
옮기도록 함으로써
봉수의 위치가 옮겨진데
따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문종 이후 봉수의 서쪽은
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의
관두산 봉수로 위치가 바뀌었으며, 이후 17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에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전라남도 여수 돌산도 봉수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의 해안과 충청도 내륙, 경기도 해안을 거쳐
서울의 목멱산[남산] 봉수로 이어지는 제5거 직봉 노선의
연변 봉수로서 연대(煙臺)는 직경 15m 내외의 둥근 형태이며,
바윗돌과 할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갈두산 봉수는 여지도서부터는
기록에 보이지 않은 점으로 보아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 사이에 폐지.
이후 달마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한듯 하다.
1985년 조사당시 연대는 1~2단 정도의
석축 흔적만 남고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유구와 주위에 무너진 석재들로 보아
연대 하부는 바윗돌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막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후 파괴되어 있던 연대는
전망대 앞쪽에 막돌을 이용하여
직경 4.5m의 원형(圓形)으로 복원.
완도와 해남· 진도를 연결하는
해로 상의 요충지에 설치하고 운영.
봉수로서 왜구 침입경로 상 요충지.
조운로 운영 상 중요한., 갈두산봉수대.
....................................................
해남 갈두산.,사자봉 봉수대.
'봉수대길'
조선시대 전국 봉수대 횟불과 연기 신호는
제1~5 로를 통해 한양(서울)으로 연결된다.
제 1로 : 함경도 경흥 → 강원도 → 경기도 → 양주 아차산봉수
제 2로 : 동래 다대포 → 경상도 → 충청도 → 경기도 → 성남 천림산 봉수
제 3로 : 평안도 강계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동봉수
제 4로 : 평안도 의주 → 황해도 → 경기도 → 서울 무악 서봉수
제 5로 : 전남 순천 → 충청도 → 경기도 → 서울 개화산 봉수
장차, '제1~5로' 구간들은
'봉수대길' 등산로를 개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해도 좋을 곳.
한양.,목면산(남산) 봉수대.
이렇게 모인 봉수는 최종 한양 목멱산(남산) 봉수대로 집결
그 소식이 조정에 보고되었고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민족 침입을, 제2로, 5로는 일본의 침입을 경계.
봉수에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
직선봉수는 기간선로 것이 있고
간선봉수는 그 보조선을 말한다.
봉수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남산에 설치한 경(京)봉수와
바닷가나 국경의 해안선을 따라
전달되는 연변(沿邊)봉수 그리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잇는 중간봉수.
17C 후반 조선전역 봉수대를 볼 수 있는 지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국립과천과학관
'봉수대 전시물 & 조선시대 5대 봉수로'.
봉수는 밤에는 횃불[烽]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燧]로써 변경의 위급을
중앙에 전달하던 통신 수단으로 이를
봉화, 봉수대, 봉화대 등이라고도 한다.
봉수 신호방식을 보면 평상시.,1개의 홰(봉수 신호),
적 출현 2홰, 접근 3홰, 경계침범 4홰, 접전 중이면 5홰,
적 침입때 안개, 구름, 비바람으로 봉수가 전달 안될 경우
화포, 각성(나팔), 북, 깃발 또는 봉수군이 달려가서 알렸다.
동서남북 어느 변경에서든지
12시간 내 도착하는 것이 원칙.
봉수군 태만, 봉수대 관리소홀 등으로
전달 소요시간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성실한 봉수군은 승진, 표창을 하였으나
적이 나타나 경계에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거화를 하지 않은 경우, 또는 사변이 있는데
봉화를 중간에서 끊어 다음 봉수대에 연락을
하지 않은 경우 볼기(60~100대), 파직 또는 변방.
또한 적과 접전 중
거화를 하지 않았거나
적 침입때 보고를 않은 경우
봉수군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봉수는 밤에는 횃불(㷨, 봉),
낮에는 연기(燧, 수)로 신호를
전달하였던, 통신 시스템이었다.
이 봉수는 군대의 이동 상황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보를 임금이 있는
조정에 전하던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는 변방의 위급상태를 중앙에 알려주는 기능
외에도 국가의 치안상태를 알려주는 역할도 하였다.
1홰(炬)의 봉수 신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
한양 사람들은 통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조선시대에 한양 목멱산(남산) 봉수가 올라가면
하루가 무사하게 지났음을 알고 잠자리에 들었다.
남산 봉수군.,'24반' 무예공연.
1790년 4월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지상무예 18기와
마상무예 6기를 합한.,'24기 무예'를 '24반'이라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예서 편찬이 절실히 요구.
1594년(선조 26) 훈련원이 만들어지면서 선조의 명을 받아
한교의 무예 6기((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상수도)가 완성.
영조 때 12기.,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왜검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을 더하여 18기 무예서 '무예신보' 완성.
1790년(정조 14) 정조의 명을 받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마상 6기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 등 더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무예24기는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구한 말, 구식군대의 해산 이전까지
조선의 국방무예로 훈련, 활용되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장창(長槍)·
죽장창· 기창(旗槍)· 당파(鏜鈀)· 기창(騎槍)·
낭선(狼筅), 쌍수도(雙手刀)·예도(銳刀)·왜검(倭劍),
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쌍검·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마상월도·협도(挾刀) 및 등패(藤牌)의 요도(腰刀).
표창(標槍), 권법(拳法)·곤봉·편곤(鞭棍)·마상편곤·격구(擊球)·
마상재(馬上才) 등 24가지 기술이 수록된.,조선군사 무예교본.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봉수는 신호를 보내는 곳과 받는 곳
상호 간 약속된 신호 규정에 따라 통신.
이러한 신호방식은
횃불이나 연기의 개수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신호.
............................
............................
우리나라 봉수제는 기록상 12세기 중반
1149년(의종 3)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曹晉若)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나타난다.
여기서 봉수의 격식이 규정되어
야화(夜火)와 주연(晝烟)으로 구분
적과 근접하는 변경 지역과 해안 지방의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 거화 수를 정하였다.
강화., 망산봉수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것을 바탕으로 하고
중국 봉수제를 참고로 체계적인 봉수 제도를 확립.
세종 때 이르러 봉수대 시설 기준, 봉군(烽軍) 신분과
봉화 홰수를 새로 정했고, 봉수 노선을 5개로 나눠 확정.
1446년(세종 28)에는 봉수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1447년 3월 연변 연대(沿邊煙臺)와 복리 봉화(腹裏烽火)
내지 봉화(內地烽燧)를 동시에 설치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르면 연변 봉수(沿邊烽燧)의 연대는
높이 7.8m(25척), 둘레 21.8m(70척), 직경 6.95m,
연대 밑 사면은 9.1m(30척), 외부 참호 깊이와 넓이는
각기 3.1m(10척), 둘레 100m로.,영조척(營造尺)을 사용.
또, 갱참(坑塹 ; 깊고 길게 파 놓은 구덩이) 외면에
길이 0.91m(3척)의 나무 말뚝을 껍질을 깎아 버리고
위를 뾰족하게 하여 땅에 심고, 넓이는 3.1m(10척) 규모.
연대 위에는 가옥(假屋)을 만들어
병기와 아침저녁으로 사용하는 물과
불을 담는 그릇 등 물건을 간수하였다.
망보는 사람은 10일간 서로 번갈아 지키게 하고,
새로 온 사람과 그전 사람 사이에 양식이 떨어질 때
해당고을 관원과 감사(監司)와 절제사가 보충해 주었다.
조선의 봉수 제도는 노선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으로 구분하고,
다시 경봉수(京烽燧), 내지 봉수(內地烽燧),
연변 봉수(沿邊烽燧)로 구분하며,운영하였다.
이 밖에 연변 지역에서 수군진이나 각 고을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권설 봉수(權設烽燧)가 있었다.
전국 5개 노선 직봉과 간봉을 합쳐.,모두 623개소.
이중에 제5거(炬)는 순천 돌산도 봉수에서 시작하여
전라도 해안을 거쳐 서울 목멱산 봉수로 이어지는 노선.
전남 통과구간의 직봉 봉수는,
여수 돌산도 봉수→백야산 봉수→
고흥 팔령산 봉수→마복산 봉수→
천등산 봉수→장기산 봉수→
보성 전일산 봉수→장흥 천관산 봉수→
강진 거차산 봉수→해남 좌곡산 봉수→
영암 갈두산 봉수→ 화산 봉수→
진도 첨찰산 봉수→해남 황원 봉수→
목포 유달산 봉수→무안 군산 봉수→
고림산 봉수→옹산 봉수→
해제 봉수→영광 차음산 봉수→
고도도 봉수→홍농산 봉수이다
조선시대 영암군은 현재와 달리
서남 해안의 바다를 끼고 있었다.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의 북평향(北平鄕)과
해남군 송지면의 송지부곡(松旨部曲)을 영역으로
이 지역에는 달량진(達梁鎭)·이진진(梨津鎭) 수군진 2.
갈두산 봉수(葛頭山 烽燧)·달마산 봉수(達磨山 烽燧) 봉수 2.
이들 시설은 왜구침입 대응목적 군사시설.
조선전기 갈두산 봉수와 후기 달마산 봉수는
모두 제 5거 연변 봉수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봉수.
갈두산 봉수는 동쪽의 강진현 좌곡산 봉수
(해남군 북일면 내동리 원동마을 봉대산)에서
연락받아 서쪽의 화산 봉수로 전달하는 자리였다.
화산 봉수는
'관두산 봉수'로
그후 위치가 바뀐다
갈두산 봉수 운영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
영암군 달량진→갈두산 봉수→어란진→
해남현 화산 봉수 및 관두산 봉수 순서로 분포.
갈두산 봉수는 이들 수군진과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운영
갈두산 봉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
기록에서 나타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17세기 중반~18세기 후반 사이에 폐지.
이후 달마산 봉수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달마산 봉수는 완도(莞島) 봉수
(전남 완도군 군외면 숙승봉)로부터
연락받아 관두산 봉수에 전달하던 연변 봉수
(전남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성좌동 관두산)
제5거 직봉(直烽) 노선으로서,
영암군 읍지(靈巖郡邑誌)에 의하면
오장 12, 봉군 20, 총 32명 봉수군이 소속.
달마산 봉수는 갈두산 봉수 대신 그 기능을 하였던 점과
수군진과의 밀접한 관계 등으로 보아 이진진이 설치되는
17세기 중반 무렵 설치된듯 추정되며, 1895년 폐지되었다.
달마산 봉수가 운영되던 시기에는
동쪽으로부터 강진현 좌곡산 봉수→
영암군 이진진→달마산 봉수→어란진→
해남현 관두산 봉수 순서로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달마산 봉수는 동쪽 이진진과
어란진 사이에 이웃하고 있는 봉수를
연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운영된듯.
갈두산 봉수는 육지부의 최남단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
해발 109.6m의 사자봉 정상부에 위치한다.
갈두산 봉수는 1985년 조사 당시
연대가 1~2단 정도의 석축 흔적만
남아 있었을 뿐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그후 파괴되어 있던 연대는
전망대 앞쪽에 막돌을 이용하여
직경 4.5m의 원형(圓形)으로 복원.
달마산 봉수는 전남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해발 481m
달마산 정상에 위치하여 조선시대까지 운영.
연대는 산 정상부 평탄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
1985년 조사 당시 규모는
높이 3m, 상부 직경 4.3m,
하부 직경 15m로 파악되었다.
현재, 봉수 하단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위부분의 원형 석축 연대는 후에 복원한 것.
...............................
...............................
우리나라 봉수 시원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언제부터 봉수를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BC 9년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봉현 봉산 봉산성 등 봉수에 관련된
기록이 있으나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유천간과 신귀간을 시켜
망상도 앞바다에서 붉은 돛을 단 배를 발견하면
봉화를 피워 알리도록 했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가락국에서는 서기 48년에 연안 섬들과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미 국방에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에 나당연합군과
전투를 벌린 후, 왜에 들어가 방어를 위하여
성곽과 봉수를 664년부터 설치한 기록이 있다.
이때, 성곽과 봉수와 같은
군사시설의 전반적인 것은
백제인들이 맡았고 왜인들은
인력을 제공하여 쌓았다는 기록.
삼국시대 성곽과 봉수에 관한 기술은
상당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부터 지속되어온 봉수제도는
고려시대 더욱 발전하여 국가방위에 이용.
.
1123년(원종 원년)에 송 사신이 남긴 기록인
고려도경에는, 송사신이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
들어올 때마다 불을 이용해 신호를 하였다고 한다.
.
그 불빛이 차례로 전달되어 고려 왕성(王城)까지
도착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봉수가 변방과 중앙을
연결하는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49년(의종3년) 봉수의 신호규정을 정했는데
연락방법은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여
'봉수대' 홰(횟붕)의 수(數)로 상황을 전달하였다.
평상시에는 1홰.
적이 국경에 출현.,2홰.
적이 국경을 넘으면.,3홰.
접전이 일어났을 경우.,4홰.
적과 접전이 계속되면.,계속 봉화.
중앙까지 도달하는데 12시간 미만.
시간 당 100km 이상 속도로 상황전달.
하급장교 방정 2명과 근무병 보초병 20명
봉수소에 배치된 이들에게는 인근 평지에
평전(平田) 1결(結) 씩 주어 생활대책을 마련.
임무에 충실하게 하여 국방에 큰 역활을 하였다.
이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고려는 독자적인 봉수제도 대신
몽골의 봉수 조직에 의해 편성된다.
그후, 몽골이 차츰 세력이 약화되고
고려 연안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늘자
고려의 봉수제도는 다시 강화 정비된다.
.....................
......................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수와 관련된 지명이 보이고 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에
흑치상지가 당 고종에게 발탁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토번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70여 개소 봉화대를 설치.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 8년(514)에는
반파가 자탄(子呑),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에 연결하고, 봉화를 올리는 곳과
식량을 두는 창고를 만들어.,방어 대비한 기록.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삼국 시대에는
이미 군사 통신상 목적으로 봉수가 빈번히 사용.
.............봉수대(烽燧臺)..................
우리나라 봉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한 시기는 고려 시대 중기부터이다.
1123년(고려 인종 1) 중국 송의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송의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번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산 정상 봉수에서
순차적으로 횃불을 밝혀 왕성까지 인도하였다는.,사실.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봉수제가 운영되었음을 대변해 준다.
1149년(고려 의종 3) 서북 병마사 조진약 상소에 의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써., 신호를 전하게 하고,
평상시 1회, 위급함에 따라 4회까지 봉수를 피운 봉수식.
각 봉수에는
방정(防正) 2명과
백정(白丁) 20명씩을 두어
봉수를 제도적으로 운영한 것.
그후 원나라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의 봉수제는 일시적으로 와해.
다만, 고려사에는 1272년(고려 원종 13) 삼별초가
합포에 침입하여 몽고 봉졸을 잡아갔다는 내용이 확인.
원나라가 고려 봉수를 점령하여 자체적으로 재사용한 흔적.
고려시대 봉수는 고려후기 왜구 침입이 잦아
다시금 복구· 재편되는데, 1351년(고려 충정왕 3)
당시 고려 수도 개성의 송악산에 봉수소를 설치한다.
장교 2명, 봉수군 33명을 배치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어지는
봉수로를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고려시대 봉수제를 이어 받은 조선은
세종 때 제도적으로 완전한 봉수제 확립.
당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419년(세종 1)에는
병조 상소에 의해 2거 봉수체제를 해상과 육상으로 나눠
위급함에 따라 5거체로 개편, 봉수군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
또한 1422년(세종 4)에는 ‘경상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
(慶尙道水軍都安撫處置使)’의 상계(上啓)를 받아 들인 후
각도 봉수처에 연대를 높이 쌓고, 그위에 화기 병기를 비치.
주야로 간망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및 육조와 더불어 봉수를 확정.
1433년(세종 15)에는 한양에 목멱산 봉수를 설치.
더불어 지방의 5거 노선이 중앙에 집결도록 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북방의 4군 6진 설치와 병행해
야인에 대한 방어책으로써 다수의 연대를 축조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각도 연변의 경계 지역에 있는
봉수에 연대 시설을 설치하여 봉수의 방어력을 높였다.
1447년(세종 29)에 이르러서는
봉수의 거화수와 봉수의 시설 및,
봉수군의 상벌 제도 등을 경국대전
봉수조(烽燧條)에 규정해 봉수제도 확립.
그러나 이러한 봉수제는 봉수군의 고역으로 인한
근무 태만, 시설 미비, 보급 부족 등으로 말미암아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478년(성종 9)에는
경상도 남해현 적량에서 사변이 일어났으나
순천 돌산포 봉수는 평소처럼 1거만을 하였다.
1491년(성종 22) 함경도 경흥 조산보 여진족 침입.
1495년(연산군 1) 8월 전북 남도포의 왜적의 침입 및
삼수군에 야인이 침입했을 때도 봉수를 올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봉수제도는
1504년(연산군 10) 11월에 일시 폐지.
1506년(중종 1)에야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봉수의 폐단은 나아지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거나 대응봉수로 연결이 되지 않는 등
문제가 매우 빈번하게 발생되었고 특히 선조 때 이르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도 봉수를 올리지 않는 경우가 발생.
1605년(선조 38) 파발제를 도입
봉수제와 함께 실시하게 되었다.
봉수는 경비가 덜 들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
반면에 적정을 오직 5거의 방법으로만 전하여 그 내용을
자세히 전달할 수 없어 군령의 시달이 어렵고, 또한 비와
구름· 안개로 인한 판단 곤란과 중도 단절 등 결점이 있었다.
그 반면에 파발은 경비가 많이 소모되고
봉수보다 전달속도가 늦은 결점이 있으나
문서로써 전달되기 때문에 보안 유지는 물론
적의 병력 수· 장비· 이동상황, 아군의 피해상황
등을 보다 상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파발제는 봉수가 군사 목적 이외에는
이용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관리들의 사목적 추구에
파발제가 자주 이용되어 사회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봉수제는 점점 복구되었으며, 숙종 이후에는
기존 폐단을 없애기 위해 ‘봉수 변통론’이 제기.
봉수 변통론의 주된 내용은
각자 거화론, 봉수의 이설& 가설,
마발 배치, 화포 설치론 등으로 구분.
.
각자 거화론은 1677년(숙종 3) 호조 참판
여성제 건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봉수가 비·바람
등의 자연 장애로 차례 차례 전달할 수 없을 때에는
최초 거화 봉수에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거화하자는 것.
봉수의 이설과 가설은 봉수의 설치간격이 너무 넓어
보고에 어려움이 따라 봉수와 봉수 사이에 간봉을 설치.
마발 배치는 봉수제와 더불어 기존의 파발제를 동시에 실시.
1686년(숙종 12) 영의정 김수항 건의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
화포 설치론은 1702년(숙종 28) 북병사 이홍술 주장.
봉수에 화포를 설치해 소리로써 신호를 전달하자는 것.
그러나, 봉수 변통론은 봉수의 거리 문제, 보급의 문제 등
그로 인해 일부 봉수만 실시되었을 뿐, 봉수제 개혁은 실패.
이후 봉수제는 파발· 역참 제도와 병행해 설치와 폐지를 거듭.
개항 이후 전신 전화 가설로 기능이 약화.
1894년(고종 31)에 팔로 봉수가 폐지되고,
다음해 각 지방의 모든 봉수가 폐지되었다.
우리나라 봉수대에서 지내는 고사나
동제는 대부분은 봉수제도가 폐지된 후
일제강점기 전후 어수선한 시기에 행해졌다.
대체적으로 무속인들이 봉수대에 올라가
굿판을 벌이면서 토속신앙이 파고든 것이다.
원래, 봉수 주변은 국법으로 민간접근 통제구역.
조선 세종 때부터 표석을 세워
거짓 횃불이나 방화가 일어나면
관할병조가 단속하고 위법자는 사형.
세종 29년 3월 4일 '세종실록' 기록에는
'봉수대 상단에 가옥을 지어 병기를 보관.
아침 저녁으로 공급하는
물과 불을 담는 그릇을 보관.
또한 무당이나 토속신 사당건립을
법으로 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대리마을 고사도
일제 강점기 때 행하여 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에는 새벽닭이 울면 출발했는데
손전등이 없던 시절이라 벼 짚단에 불을 붙여
봉화산으로 올라가면 반나절이 걸렸다" - 박 이장 -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던 봉화산도 지난 2000년 산불
진압용 임도가 개통되자 반나절에서 두어 시간으로 줄었다".
봉수대가 축조된 봉화산은 북쪽으로 영양,
봉화로 이어지는 태백산줄기가 겹겹하고,
동쪽은 백암산 줄기가 영해까지 이어졌다.
봉수터는 봉우리를 마당처럼 판판하게 다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산짐승이나 적의 침입에 대비
돌로 축대를 쌓아 올렸는데, 둘레 60m에 1m 높이.
봉화를 올리던 연대는 방호벽과
암벽을 이용해 둥글게 쌓았는데,
둘레가 약 25m, 높이는 4m 정도.
연대 위에 횃불을 피우던 아궁이는 흔적만 남았다.
오지인은 연대 돌계단에 제물을 차리고 고사지낸다.
연대와 맞붙은 암벽아래는 동굴이 뚫려있는데
봉군이 근무 중 비바람을 피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
봉수대 입구는 방호벽 남북방향에 개방형으로 뚫렸고
집터와 우물위치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연대주변에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어 이곳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산봉수 초기설치는 언제일까?
우리나라 대분의 봉수처럼 기록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초에 축조된듯.
동쪽 해안 방향에 있는
영덕 '대소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 진보
신법산봉수로 전달했던
제2노선 간봉.,내지봉수.
광산봉수대는 마을주민들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돼 왔으나 최근 태풍이 잦아지면서
연대석축에 배불림 현상이 언제 붕괴될지 알 수 없을 정도.
영덕군청 관계자는 광산봉수 문화재 지정을 추진 중이다.
산성, 봉수대는 문화재지정 유무를 떠나 보존해야 할 유적지.
한번 붕괴된 호국유적은 복구경비보다 민족정신이 무너지는듯.
부산 사상.,종남산 봉수대.,막사 유허지
2014년 9월 2일에 경상남도 김해시는
진영 봉화산 자암봉수대 복원계획 발표.
2014년 4월∼7월 봉화산.,봉수대 터(4천435㎡).
자암봉수대는 1425년(세종 7년) 이전에 축조되어
1895년(고종 32년) 사용중지된 연변봉수(부산∼밀양)
자암봉수대 터에서는 봉수대 중심 시설인
연대(煙臺)가 확인됐고 봉수대 내부에서는
조선시대 백자와 옹기편, 기와편 일부가 출토.
............................
............................
2006.11.10. 경북 울진군 지역에 산재해 있는
봉수대를 복원, 동해안 관광명소로 개발할 계획.
2006년 3∼10월 7개월간 6개소 봉수대를 확인 조사.
기성면 봉산리 표산봉수대를 비롯해 정비·복원을 발표.
울진지역에는 7개소 봉수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후포면 후리산 봉수대는 광산개발로 완전소멸된 것으로 조사
울진군 봉수대는 '통일신라∼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후리산(후포면) ~표산(기성면)~
사동산(기성면)~ 전반인산(근남면)~
죽진산(울진읍) ~ 죽변곶(죽변면)~
항출도산(북면)으로 연결된.,봉수대.
울진지역의 봉수대는 남으로는
영덕군 대소산(축산면) 봉수대와
북으로는 강원도 삼척시 가곡산
봉수대(원덕읍)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울진군의 봉수대 유적은 해변 봉수대로
모두 해안선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산봉우리나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곶 정상부에 위치한 조망권.
경치가 아름다워 문화역사 관광지로
개발하면 각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군은 문화유적의 훼손을 막고 유적지를 보존하며
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번에 조사된 6개 봉수대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 양호하고 접근성 용이한 봉수대부터 정비·복원.
........................
........................
대소산봉수대는 1960~80년대까지 군 작전장소.
1989년 가을 봉화산(282m)에는 KT 기지국 시설물.
철조망 옆 기지국 초소에 올라가 볼 수 있었던.,봉수대.
그후, 대소산봉수대가 사라지고 멸실된 유적은
다시 복원은 했지만 원형대로 복구가 되지 않았다.
멸실된 유적은 원형복구가 어렵다는 교훈을 남긴 곳.
차라리, 복원하기 이전의 원형 그대로 두고
주변에 울타리로 보호하여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 더 낳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진다.
유적지는 눈으로 바라볼때
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그 진가가 돋보이게 되지 않을까?
봉수대 옛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놓고 복원하면 더 좋았을듯..
오늘날, 해파랑길 지킴이.
조선 초기.,대소산봉수대.
....................남해., 금산 봉수대..................
고려 의종(毅宗, 1147~1170 재위) 때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최남단 봉수이며 '동래~서울'로 연결되는.,제 2봉수로.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 등을 거쳐 한양으로 전달되었다.
금산봉수대는 금산(681m) 정상부에 위치.
둘레는 26m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 4.5m.
...........................................................
남해 금산을 가면 제일 먼저 찾게 되는.,보리암.
보리암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한.,금산봉수대.
경상도읍지 남해현 남해읍성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평산진, 곡포보, 상주포, 미조진이 내려다 보이고
'모든 수군의 보와 진' 뒤편에 위치한.,금산봉수대
국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지만, 인적이 뜸한.,곳.
남해 금산은 조선 개국 전, 이성계 백일 기도처.
이곳 금산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구상을 한후
조선 개국을 결심한 곳이며, 훗날 조선 태조로 즉위.
'비단 錦' 자를 하사하여
금산(錦山)이라 명명한 곳.
태조에 즉위 후, 옛 '백일기도처' 금산을
비단으로 산을 감싸 보은하고 싶어.,금산.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대비했던.,요충지.
한려해상국립공원.,금산(錦山 : 681m).
경상남도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개국 초, '이성계가 명명한.,금산(錦山).
조선개국 전까지 고려 말, 이곳은
혹시, 당산이라 불리웠던 곳 아닐까?'
'마을이나 토지의 수호신'이 있다고 여겨지는
마을 근처 산이나 언덕을 총칭하는.,당산(堂山).
우리나라 해안가 등대가 위치한 곳은 대부분.,당산.
조선 개국 초, 통치이념인 유교관에 의해
숭유억불 정책으로 폐허화 된., 8도 사찰들.
그리고, 당집 무녀 무속신앙 등도 탄압의 대상.
그러나, 도서지역의 당산과 당집 무녀들은
오늘날까지 전통 민간신앙으로 명맥을 유지.
일제때 등대가 들어선 곳 대부분.,당산 당집 터.
일제때부터 현재까지 등대가 들어서고 난 이후에
봉수대는 등대 숫자 만큼, 멸실되었을듯 여겨진다.
조선시대 봉수대 축조때 당집도 많이 멸실 되었을듯.
오늘날, 조선시대 남아있는 봉수대 유적 대부분
높은 산 정상부 외딴 곳 또는 인적 드문 도서지역.
그외 대부분, 도시화되면서 상당부분 멸실된듯 싶다.
영흥도, 대부도 가는 길목에.,탄도 & 불도.
구한 말, 탄도에서 참나무 땔감으로 불도의
등대를 밝히던 곳인데.,봉수대 터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왜구의 수탈이 빈번했던 해역으로
불도는 횟불 등대를 겸한 봉수대 터가 아닐까?
불도 '불탄도리'가 봉수대 터, 탄도는 땔감 공급원.
.......................
.......................
울산 대왕암을 바라보는.,주전봉수대
'고려~조선'시대 사용되었던.,봉수대.
조선 세종(世宗) 때, 봉수 체제가 정비.
.
오장(伍長)과 봉군이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烽),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 접근때 세 홰, 국경을 넘으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올렸다고 하는데,
1894년(고종 31년)에 전화가 보급되면서 폐지되었다.
천내(川內)에서 봉수를 받아 유포(柳浦)로 전했다.
이곳에는 돌로 둥글게 쌓은 연대(煙臺)가 남아있는데,
대(臺)의 지름은 5m, 높이가 6m이며 지금 봉호사 터가
봉수대의 부속 건물인 봉대사(烽臺舍)가 있던 곳이었다.
울산 을왕암은 신라 문무대왕비가 죽어서
문무왕처럼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이바다에
잠겼다고 하여 대왕바위(일명 댕바위, 용추암)
남해 금산 보리암 비구니 사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운 남해전망대로.,소문난 곳.
...........................
............................
신안앞바다를 내려다보는.,광제산 봉수대
조선 초, 세종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안앞바다 '증도~ 임자도' 해역.,해저유적지.
여의도 50배 규모 염전이 있는.,증도.
신석기시대에 6섬을 하나로 이은.,임자도.
대홍수때 신석기인들이 생존을 위해 쌓은 뚝.
신석기시대 유적지.,임자도.
신안 보물선이 발굴된
두 섬 사이에는.,갯벌 해역.
'1004 섬' 신안군 해저유적지.
망진산봉수와 연결되며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봉수에
보고하였으며 서로 간 거리.,40리.
................................
.................................
2011.9.20. 남한에서 가장 오랜 고려때.,봉수대.
고려시대 봉수대 유적이 부산 기장군에서 발견.
'매장문화재조사기관' 울산문화재연구원은
최근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야산의
남산봉수대 터를 발굴해 연기를 피우던 연소실,
연기를 올리던 연대(煙臺), 딸림 건물 터 등 확인.
봉수대 터는 동해를 바라보는 산기슭에 있다.
조사 결과 지름 14m, 연대 높이 5m, 둘레 220m.
남한에서 발굴된 옛 봉수대 유적 가운데 최대급.
"유적 부근에서 전형적인 고려시대 유물인
생선뼈 무늬의 어골문 기와와 청자 등이 발견.
봉수대를 쌓은 시기가 고려시대 임을 확인했다"
고려시대 봉수대 건물 터는
남한에서 확인된 예가 없었다.
그러므로, 기장 남산봉수대는
고려시대 유적지로 가치가 높다.
고려 의종(1160년대)때 천관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한 후로 천관산정을 봉수봉
연대봉(烟臺峰)이라 불리워 지금에 이른다.
전남 '강진' 항로를 지키는.,천관산봉수대.
강진 칠량에는 '옹기 원료' 점토 매장이 풍부.
강진 봉황리에서는 옹기.
강진 송정리에는 지석묘군,
영동리에는 152기 남방식 고인돌.
삼흥리에는 삼흥도요지가 있다.
인접한 대구면은 고급 청자를 생산.
그에 반해, 칠량 도요지는 서민용으로
질이 떨어진 분청자를 생산했던 곳이다.
고려가 망하고 고려청자 제조가 사양길에 들자
강진군 도공들의 후예가 옹기제조 기능공으로 활동.
칠량은 강진만에서 깊숙히 들어온 내해.
선박을 이용한 옹기 수송이 용이하였다.
인접한 대구면에는 고려청자요지가 많았고,
자기(瓷器) 및 옹기 제조에 관한 기술이 축적.
칠량옹기는 원래 표면에 광명단을 바르지 않고
흙과 재를 섞어 만든 자연 잿물을 발라 만들어왔다.
그래서
칠량옹기에는
사람 몸에 해로운
납 성분이 들어 있지 않고,
또 그 안에 음식물을 담아놓으면
음식의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다른 지방보다 가마 온도가 높게
옹기를 구워내기 때문에 훨씬 단단하다.
그래서 6·25동란 전까지만 해도
칠량옹기는 전국적으로 판매되었다.
최근,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이 보급됨에 따라
옹기의 판로가 축소되어 현재는 옹기 생산에 참여하는
가구도 격감했고, 판매권도 남해안 일대로 한정되었다.
천관산 봉수대에서 내려다보이는.,강진앞바다 항로.
옛부터, 고려청자, 이조백자를 실은 무역상선들.,항로.
'고려~조선'시대 수많은 무역선들이 침몰한.,해저유적지.
고려와 송나라 간
무역상선들의 항로.
주변 해역의 항로 상에서
천년간 수많은 배들이 침몰했기에
한반도에서 '청자 백자' 최대 해저유적지.
.
항로 상에서., 해저 갯벌 7m 속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많을 곳.
바다는 넓지만, 항로는 정해져 있으므로
옛 문헌 상 난파선 기록들을 확인 한다면
해저 유적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 해역이다.
서남해는 무역상선들이
기후와 물때에 맞춰 출항 후
정해진 항로로 왕래하기 때문에
몇군데 난파 다발구역이 정해져있다.
도서지역 당산 당집에서 보이는.,항로.
당집이 사라졌다면, 등대가 보이는.,항로.
난파 기록, 물때를 참고하면.,확률은 십중팔구.
난파지점 위치까지.,추적이 가능.
뭍에서 가까운 수심 얕은.,갯벌지역.
항로에서 큰배가 다닐 수 있는.,3 큰물길 .
고려 초에는 먼바다.,큰물길 항로.
조선 초에는 중간바다.,큰물길 항로.
구한 말까지는 뭍 인근.,큰물길 항로.
.
조상대대로 어부인 도서지역 주민들은
인근 해역의 해저지형을 손금보듯 안다.
'고려~조선'시대 봉수대 인근.,해저유적지.
..........................................
현재, 군산 지역에는 도서 지역에 6개소,
연안에 5개소 등 모두 11개소 봉수대까지 확인.
그러나, 연안 봉수들은 수량, 명칭 등 일부 차이점.
조선시대 문헌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여지도 등.
조선시대 '순천 돌산도~ 한성 남산'까지
연결하는 5봉수로 5거 루트에 해당된다.
군산 봉수대 중 사자암· 점방산 봉수 등은
15세기의 문헌기록에서는 확인되고 있으나,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고지도와 문헌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에
봉수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폐지된 것으로 추정.
일반적인 연안 봉수의 봉수간 거리는 대체로 12~16㎞.
타지역 연안 봉수 및 내지 봉수들보다 대응거리가 짧다.
이는 서해안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군산지역 봉수의 입지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는
높이가 낮으면서 시계양호한 산 정상부.
특히 군산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나 포구와 인접한 산 정상부를 택해
해안가에 봉수대를 축조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변방의 급보를 중앙에 전하는
봉수의 주기능과 함께, 해안 선박 감시와
'안전 항해' 등대 기능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
현재 대부분 연안 봉수는 허물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며,
일부는 군사지역이라 진입이 힘든 상황.
반면에 군산 오성산 봉수(도진 봉수)는
훼손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기초부가
잘 남아있기에 향후 학술적 고증을 거쳐
복원되면,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산 도서지역에는 6개소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파악되었다.
도서지역 봉수들 중
어청도 봉수들 제외하고는
문헌 기록에서 찾아볼수 없다.
어청도 봉수는 17세기 비변사 등록(備邊司謄錄).
그것을 그대로 옮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두 문헌 기록에 의하면.
외안도(보령시 외연도), 녹도, 원산도 봉수와 함께
충청 수영의 본거지였던 보령시 오천면 망해정 봉수로
신호를 전달하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19세말,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어청도 봉수가 충청 수영과 관련된 권설 봉수
(수군진, 수영 등에서 임시로 운영한 봉수)로 기록.
전신 전화가 도입되어 우리나라의 봉수제가
폐지된 19세기 말까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
도서 지역 봉수들은 그 대지가 매우 협소하여
연안 봉수처럼 5개 연조(불을 직접 피우는 시설)를
시설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 주변에서 고려 시대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어, 축조시기가 더 올라갈듯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편찬한
선화 봉사 고려 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여기에는 서긍 일행이 이용한
항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
특히, 고려때 서긍 일행이 흑산도에 다다랐을 때,
개경까지 불을 피워 뱃길을 안내한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이 항로 상에 있는 섬들에서 봉수대를 확인.
또한, 야미도, 십이동파도 등 해저유물.
고려시대 침몰선의 위치를 통해 보았을 때,
고려 조운로도 서긍 항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시대 선박의 항해에 있어서
봉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 것.
..........................
..........................
조선시대 화폐가 발달하지 않아
조세를 곡물 등 현물로 조달했다.
이는 물량이 많고 무거웠으므로
조운은 대규모 운송작업이었으며
그당시에는 수레가 발달하지 않아
세곡 운송은 대개 선박에 의존했다.
즉, 전국 각지의 고을 단위로 징수한 세곡을
그 인근 강변이나 해안 창고에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선박을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의 경제기반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조선 개국 초, 조운 제도의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곡의 운송은 국가 재정과 직결되어 있었기에
항상 정부가 직영하는 관선 조운체제를 따랐고
조선 조정에서는 조창정비와 함께 조선·조군의
확보에 힘을 기울여 선박의 건조·관리를 위해
'사수감' 또는 '전함사'라는 관청을 두었다.
........................
.........................
사수감은 1392년 태조 원년에
군선의 건조와 수리를 관장하고
조운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
관원은 정2품의 판사 2명, 종3품의 감(監) 2명,
종4품의 소감(小監) 1명, 종5품의 승(丞) 1명과
겸승 1명, 종6품의 주부(主簿) 3명과 겸주부 1명,
종7품의 직장(直長) 2명, 정8품의 녹사(錄事) 2명.
사수감은 선박을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선박을 건조하고, 군선의 개량도 도모.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잔세도 강성하여
수군을 강화하고 군선도 많이 건조했기에
조선 개국 초 사수감은 중요한 관청이었으나
1394년 관제 개편으로 사재감(司宰監)에 병합.
1403년(태종 3) 6월 사수감을 사재감에 합쳤는데,
사재감 업무가 하해산택(河海山澤)에 관한 일이라
합병 이후에,전함건조 등을 전담하는 기관이 없어졌다.
1432년(세종 14) 사수색(司水色)을
다시 설치하여 전함건조를 전담하게 하고
송목배양(松木培養)· 선척수조등사(船隻修造等事)도
간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도제조 1명, 제조 2명, 별감 2명,
녹사 2명을 항상 두어 중외(中外)에 출입하며 고찰하도록 했다.
1436년 다시 사수색을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으로 개편.
단종 때 수성전선색에서 성 관리담당 수성도감이 독립되었다.
1470년(성종 1) 이미 전선색이 전함사로 개편되어 있었고
사재감의 선박도 전함사로 이속시켜 잡물수납에 쓰도록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4품 아문으로 관원은
도제조·제조 각 1원(員)씩, 제검 이하는 5원을
두었으며, 수운판사 2명과 해운판사 1명이 배속.
'속대전'에서 수운판사 만
'전함사'에 소속시켰다가
'대전통편'에서 판사를
모두 폐지되었다.
덧 말.
2000년 이후 우리나라 영해에 침몰된 채
인양하지 않은 선박은 약 800척에 달한다.
유조선, 가스운반선, 케미컬탱커 등 화학물질
운반 선박들도 포함되어.,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막대한 해양환경 피해가 우려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조사 예산조차 반영되지 않은 때문.
침몰선박에 대한 조사 작업예산은
2014년에는 3억원, 2015년에는 2억원,
2016년에도 2억원에 그쳐 턱없이 부족.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영해 내 침몰한 선박은
어선 608척, 예선 54척, 화물선 39척 등으로.,총 801척.
남해가 363척으로 가장 많고 서해 270척, 동해 168척 순위.
첫댓글 선경나라님이 이렇게 역사에 대한 견문이 넓은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신년산행을 다녀온 남산에 얽힌 세세하고 역사적 의미가 담김을 알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산행전 선경님의 그고장의 얽힌 고증을 들은 다음에 산행을 해야 될것 같네요..
시력도 좋지 않으신데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