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가 스치고 지나간다. 왜 일까.... 요며칠 노예적 발언들 때문이다. 고용노동지청의 근로감독관의 '노예 발언' 과 중앙대 이사장 이었던 박용성의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목을 쳐 주겠다' 라는 발언 때문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책에서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세계가 노예가 되는 것임을 재차 역설하고 있다. 무엇인가... 자립하고 독립된 인간의 다른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보통은 직장 얻어서 돈 벌면 자립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자립이란 기업에 고용되는 것이 자립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을 찾아서 자기 일을 하는 것을 책에서는 뜻하고 있다. 일본이란 환경의 특수성 때문만에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발언 강도가 조금 쎄긴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성적 철학적인 접근을 강하게 발언 했을때 조금이라도 먹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요즘은 노예적 상태를 경험하기도 하고, 그런 말과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어느정도는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비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로감독관이라는 자가 대놓고 노동자를 노예 혹은 노예직이라고 발언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교 이사장이라는 자가 대놓고 고통스럽게 목을 쳐 주겠다고 발언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노예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도 학교도 모두 고용주와 돈의 노예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하찮다는 것이다. 주는 돈 받아가는 계약된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히 마루야마 겐지가 하고 있는 얘기도 이와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인문에 대한 통찰과 진리를 지혜의 원천으로 하여 철학적으로 풀어내어 사회에 의식을 이식 시키는 작업인데, 마루야마 겐지가 전해주는 말과 근로감독관과 중앙대 이사장이 하는 말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 말들은 과연 같은 말인 것일까...다른 말인 것일까...? 시작되는 관점의 문제가 대두 된다. 마루야마 겐지는 존재자의 관점에서 얘기를 한 것이고, 근로 감독감과 중앙대 이사장은 인식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했다. 시작점에서 보는 것은 주체적 사유이고. 결과론에서 보는 것은 시선적 오류이다.
같은 말도 이렇게 달라진다. 자신이 어떤 형태로 살때 노예로 예속되는가?를 자각하는 것과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노예로 규정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차피 기업에 고용되고 계약되어질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인권이 있다. 공짜로 기업이 주는 돈 받아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무슨일이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꾼다. 가장 눈에 드러난 것이 돈이다. 돈은 어차피 약속된 신용이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들과도 교환하기가 쉬워서 교환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같은 인문학을 읽어도 사람에 따라 적용되고 보는 법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왜곡된 관점을 교정함으로 인해서만 제대로 보게 된다. 관점의 변화를 획득하지 못하고서는 요원한 일이다. 양심적으로 혹은 반성한다고 해서 이런 왜곡된 관점이 바뀌지는 않는다.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마루야마 겐지는 지극히 이성주의자인거 같다. 나도 그렇다. 그의 이성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이 강해지려면 '사고력' 밖에는 기댈 것이 없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이성은 '생각하는 능력'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부분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아직 전적으로 다 동의되지는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철학이 강하게 주장되어져야 하고 사회비판에 인정을 두어서는 안되는 것과 가슴을 후벼 파고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센 발언들이 책에서 불필요 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강하고 날카롭고 냉철하게 파고들어올때 조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라는 제목은 역설의 역설이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립하고 독립되는 모든 것을 거부 했을 때, 그때야말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하며 한탄과 자괴와 비탄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하며 냉소적이고 비아냥적인 태도로는 정말 자신이 인생에서 엿먹는 상황에 처한다는 말이다.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며, 멋대로 살아도 좋을 것만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청춘에서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청춘이 낭비되어 정작 죽음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 그때에는 낭비된 시간에 의해 제대로 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 마음에서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약동감이 넘치는 그 삶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갈 때 드높이 외칠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마지막의 반전.... 부분적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씩 설명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는 자유로운 주체로 살지 못하면 정말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하며 좌절하게 됨을 의미하며, 마지막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거리낄 것이 없으니 좌절과 한탄 비탄은 모두 엿이나 먹어라!!인 것이었다.
첫댓글 문득 대학시절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르네요.^^ 누구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죠.^^
그렇지요...^^
그 엿과 이 엿 사이에
"엿장수 마음대로"가 떠오르네요^^
그래서 엿장수의 자질이 언제나 중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