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헌법 공포
← 7월17일 헌법을 공포하기 전 이승만 국회의장이 헌법에 서명ㆍ날인하고 있다.
1948년은 ‘대한민국호(號)’를 진수(進水)시키기 위해 전 국민이 숨가쁘게 질주했던 한 해였다. 5월10일 총선으로 198명의 제헌의원을 탄생시켰고, 5월31일에는 최고령자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한 역사적인 제헌의회가 개원을 맞았다. 첫 본회의는 18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이승만을 정식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3권분립의 한 축이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대한민국의 밑그림이 될 헌법을 제정할 차례다. 누군들 경험이 있었을까, 당연히 시행착오가 따랐다. 국회 내에 발족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유진오 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이 내놓은 헌법 초안은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던 이승만은 분노를 드러내며 압력을 가했다. 내각책임제를 강행할 경우 자신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것. 당시 이승만의 위치는 김구가 현실정치에서 한 발 빠져있는 상태에서 유일한 절대 강자였다.
6월22일 한민당이 이승만에게 먼저 굴복했다.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꾼 수정안을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것이다. 이래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뒤바뀌었다"는 말이 돌았다. 수정안을 놓고 12차례나 토론을 벌였지만 대세는 이미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7월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헌법이 가결됐고, 17일에는 이승만 의장이 국회의사당에서 헌법에 서명ㆍ날인하고 이를 내외에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그리고 사흘 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승만에게 실질적인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조선
[2009년]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沈思遜·)묘 도굴 사건 발생
← 훼손된 조선 중기 문신 심사손 묘
서울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중턱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심사손(沈思遜. 1493~1528)의 묘가 훼손된 사실이 알려졌다.
강서경찰서와 강서구청 등에 따르면 풍산(豊山) 심씨 종친 회원들이 묘 훼손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훼손현장을 목격한 한 등산객이 경찰에 신고한 지난 7월15일 무렵이었다.
종친회원들이 이틀 뒤인 17일 직접 확인한 결과 묘 봉분의 윗부분이 30㎝가량 내려앉고 잔디도 일부 패여 있었다. 함몰된 부분에서는 얕은 웅덩이도 발견됐다.
개화산에는 풍산 심씨 집안의 묘 60여기가 모여 있는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2천584㎡)'이 조성돼 있다. 이 가운데 심사손과 그의 부친인 심정, 아들 심수경의 묘 등 4기는 199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77호로 지정됐다.
심사손은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의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는 등 북방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쳐 이름을 알렸으며, 부친인 심정은 우의정과 좌의정 등 고위 관직을 지냈다.
한 종친회원은 "문헌 기록상으로 500년 가까운 기간 묘가 이렇게 훼손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훼손된 점으로 미뤄 자연적 훼손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문화재청에 이 사실을 알리고 수사에 나섰지만 뚜렷한 지문이나 발자국 등 딱 부러질 만한 단서가 없어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묘 부장품과 관련한 기록이 전혀 없어 도굴이 됐다면 무엇이 사라졌는지조차도 알 길이 없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야생동물이나 자연재해에 의해 훼손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도굴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본다"며 "도굴꾼이 국내에 몇 안 되는 만큼 이들을 상대로 탐문수사 등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01년]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지 회장 별세
미국의 권위지 워싱턴포스트지의 캐서린 그레이엄 회장이 2001년 7월 17일 타계했다. `미국을 바꾼 부드러운 힘`. 그를 압축한 표현이다. 그는 미국의 언론을 바꿨고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와 역사를 바꾼 인물이다. 그레이엄 여사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강인한 언론인의 사명의식과 추진력으로 미국의 부패한 정치를 바꿨고, 언론사 대주주는 어떠해야 하는지의 진정한 역할모델을 창출했다.
1971년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다룬 국방부 기밀문서(펜타곤 페이퍼) 폭로나 1974년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는 그레이엄 여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이엄 여사는 언론기업의 신경영전략을 선보인 뛰어난 언론경영인이기도 했다. `신문이 생존하고 나서야 공익도 있다`는 고인의 경영철학은 디지털 다매체의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언론사가 추구해야 할 경영가치를 잘 제시해주고 있다. 경영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언론의 독립도 보장되는 것이고, 기자의 신명난 취재활동으로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레이엄 여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1963년 매출액이 8400만달러에 불과한 일개 지방지였다. 그러나 30년 후인 1993년 그레이엄 여사가 아들 도널드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는 매출액이 14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워싱턴포스트 외에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다수의 지상파 TV방송사와 케이블TV 그리고 인터넷방송사까지 끊임없는 사업다각화를 했다.
포스트 역사처럼 그레이엄 개인사도 드라마였다. 1933년 뉴욕의 금융재벌이던 아버지 유진 마이어는 지방신문 워싱턴 포스트를 경매를 통해 82만5천달러에 사들였다. 시카고대 졸업 후 포스트 기자로 일하던 그레이엄은 신문사에서 변호사였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을 만났다. 1945년 아버지는 사위에게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면서 신문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남편은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했다. 그레이엄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나는 남편과 신문사를 모두 잃을 뻔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1963년 8월 우울증을 앓던 남편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신문경영을 맡은 46세의 그레이엄은 포스트와 독립언론의 성장에 자신의 후반부 인생을 걸었다. 1997년 그녀는 자신과 워싱턴 포스트, 그리고 자신이 교류했던 유명인사의 얘기를 담은 자서전 `개인사`를 펴냈고 이 책으로 그녀는 다음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조선
[1997년]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 별세
온몸에 퍼진 암세포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화가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90여점을 다른 환자들이 힘을 얻어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써달라며 병원에 내놓았다. 기증자는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다. 자신이 입원한 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노년의 작품을 아무 조건없이 기증한 원로 서양화가 한봉덕 화백이 1997년 7월 17일 끝내 별세했다.
평북 영변 태생으로 만주 신경미술학교 출신인 한 화백은 1950년대 말 우리나라 현대미술문화운동의 중요한 이벤트가 된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을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1970년대 초 스웨덴 의사의 권유로 스웨덴으로 이주해서는 붓글씨 쓰는 모필로 서양화를 그리는 독특한 작업방식으로 그곳 화단에서도 잘 알려졌다. 지난 1988년 귀국, 제주도와 용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국내 서양화단의 가장 원로그룹을 형성하며 작품판매보단 제작에만 몰두해왔다. /조선
[1996년] TWA 보잉747 여객기 공중폭발, 2백28명 몰사
승객 2백10명과 승무원 18명 등 2백28명을 태운 미국 TWA 항공사 소속 보잉 747 여객기가 1996년 7월 17일 오후 8시40분쯤 뉴욕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직후 대서양 상공에서 공중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인 TWA 800편은 오후 8시15분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지 25분만에 뉴욕주 롱아일랜드 남동쪽 24km 상공에서 폭발, 불길에 휩싸인 채 산산조각이 나면서 해상으로 추락했다.
생존자 구조작업에 나선 해안경비대는 헬리콥터와 보트 40여척, 잠수부 등을 동원해 밤새 구조작업에 나서 불에 심하게 그을린 1백여구의 사체를 인양했다. 사체들은 모두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돼 폭발과 침몰이 아무런 경고없이 순식간에 일어났음을 보여줬다. 사고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길이 28.2m, 높이 8.1m인 사고 여객기를 복원했지만 사고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미궁에 빠졌다.
TWA는 1946년 뉴욕∼파리 노선에 처음 취항하는 역사적 기록을 가진 미국의 중견 항공사로 `사고율은 낮은 항공사`로 인식돼왔으나 이번 사고로 물거품이 됐다. /조선
[1994년] 세기의 우주쇼,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들과 목성 충돌
슈메이커-레비 혜성의 파편이 1994년 7월 17일 목성과 충돌하면서 1천년 만에 한번 보는 우주쇼를 연출했다. 한여름밤의 무더위를 식혀줄 장대한 우주쇼가 17일부터 시작돼 7월 22일 오후 5시 마지막 21번째 파편(W핵)의 충돌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충돌은 전세계 천문학자들에게 목성의 신비를 풀어줄 수년간의 연구거리를 제공했다.
슈메이커-레비 혜성은 원래 거대한 하나의 얼음덩어리였으나 2년 전 목성 주변을 지나는 도중 목성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지름 1~3㎞ 크기의 21개 파편으로 조각이 났다. 이 가운데 10번째(J)와 13번째(M) 파편(파편들은 충돌 순서에따라 알파벳으로 번호를 붙힙니다 A,B,C,D,F,E,F,,,,)은 충돌 직전 얼음덩어리로 이루어진 핵이 증발하는 바람에 소멸됐으며, 17번째 Q파편은 다시 두개로 분리되기도 했다. 충돌이 6일 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21개의 파편이 총길이 10만㎞ 정도로 일렬로 늘어서서 차례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핵 파편들은 초속 60㎞의 무서운 속도로 목성과 충돌하면서 거대한 불기둥을 뿜고 최후를 마쳤다./조선
이 혜성은 충돌하기 1년 4개월 전 미국의 천문학자 레이비드 슈메이커와 데이비드 레이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의 이름을 따 슈메이커-레비 혜성으로 붙혀졌다.
[1986년] 권인숙씨성고문사건 조사 결과 발표
1986년 7월 17일 검찰은 권인숙씨성고문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에 다니던 권인숙은 1986년 대학생 불법 취업으로 검거되었다가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에 대한 집요한 수사를 받았다. 당시 조사관 문귀동 경장은 별다른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자 여성으로서 지니는 성적 수치심을 이용해 신체와 정신에 고통을 주는 성고문을 했다. 이 사건이 물의를 일으키자 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권양의 가슴을 몇 번 건드린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며, 문귀동을 파면 징계하고 부천서장을 직위해제하는 것으로서 마무리지었다. 변호인단은 검찰발표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냈고, 2년 뒤 문귀동에게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다. 성폭행당한 여성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회 통념과 싸워 이긴 권인숙은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해 손해배상금 4,000만 원을 받아 노동인권회관을 세웠다.
[1979년] 니카라과에 좌익정권 탄생, 소모사(Somoza) 대통령 미국 망명
←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린 에스텔리 항전 당시 자료 사진. 한 손에 총을 든 산디니스타 혁명전사가 소모사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려 하고 있다.
1979년 7월 17일 사임한 니카라과 소모사 대통령이 전용기 5대에 40명 이상의 가족을 태우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니카라과에서는 1934년 소모사 아버지가 정권을 잡은 이래 장남과 차남인 소모사 등으로 이어온 소모사家 독재체제가 계속돼 왔다. 반대파는 모두 경찰에 의해 사라졌다.
1977년 10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무력투쟁을 선언했다. 국내외로부터도 소모사 퇴진을 요구하는 압력이 높아졌고 소모사는 이에 저항했다.
1979년에 들어서자 쿠바의 지원을 받는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은 6월 16일에 인근 코스타리카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소모사가 망명한 후인 7월19일 혁명 축하행사가 거행돼 쿠바에 이은 2번째 사회주의정권이 중미에 탄생하게 됐다./조선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
← 양정모
1976년 7월 17일 오후3시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제21회 올림픽 개막식이 거행됐다. 개막식은 오일쇼크로 인한 건축자재값의 폭등, 노동자의 파업, 공사지연 등으로 메인 스타디움이 미완성인 채 열렸다. 럭비팀을 남아공에 원정시킨 뉴질랜드의 경기참가에 항의하는 22개의 아프리카 국가가 경기를 보이콧해 참가는 94개국 선수 6941명이 출전했다.
대회 최대의 스타는 루마니아 여자체조 선수 코마네치였다. 그녀는 7번이나 10점 만점을 얻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은 수영 13개 종목중 12종목에서 우승해 수영강국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경기는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 동독이 40개로 2위, 미국은 34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양정모 선수(레슬링)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해 전국민을 기쁘게 했다./조선
[1975년] 아폴로-소유즈 도킹 성공
미국의 아폴로 18호와 소련의 소유즈 19호가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에서 도킹에 성공했다. 아폴로에는 토마스 스태포드선장과 2명의 비행사, 소유즈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 선장과 2명의 비행사가 타고 있었다.
도킹 3시간후 아폴로의 패치가 열리자 스태포드 선장을 포함한 2명의 비행사가 기내를 유영하면서 소유즈에 옮겨탔다. 사상최초로 양국의 비행사가 우주에서 악수를 교환한 것은 암스테르담 상공에서였다.
이틀간 6인의 승무원들은 우주선 사이를 왕래하며 식사를 함께하고 과학적인 실험에 협력했다. 이 도킹은 양국이 우주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로 구조활동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72년 5월 미소정상회담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우주개발경쟁의 데탕트라고도 한다./조선
[1969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공식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에 있다. 의사당 본관은 정면에서 볼 때 나비 50m의 화강석 계단과 기단 위에 높이 32.5m의 기둥을 세워 건축되었다. 기둥에 받쳐져 처마가 있고, 그 위에는 밑지름 64m의 대형 돔이 있다. 총대지면적은 33만m²이고,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 지반에서 돔 상단까지 69.19m, 연건평은 8만 1444m²이다. 본회의장 의석은 이동식으로 400석까지 확장이 가능하고, 방청석은 350석, 기자석은 80석이다. 본회의장의 의석 배치는 의장단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되어 있고, 의장단 오른쪽에는 의석과 나란히 국무위원석이 있다. 현재의 의사당 건물은 1969년 7월 17일 기공식을 가져, 총공사비 135억 원, 연인원 100만 명이 투입되어 75년 9월 1일에 준공되었다. /yahoo
[1959년] 부산 공설운동장서 참사, 시민위안의 밤 진행중 폭우로 출구에서 67명 사망 150명 부상
부산에서 시민위안잔치에 참석한 관중 3만여명이 소나기를 피하려고 좁은 출입구로 쏟아져 나오다 67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959년 7월 17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부산시민위안회에는 가난과 실직에 찌든 3만여명의 부산시민들이 여름 오후 구경거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영화배우팀과 만화가팀 간의 야구시합에 뒤이은 시민위안공연이 한창일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당황한 군중들이 하나 뿐인 출입문으로 몰려들면서 앞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뒤에서 그대로 짓밟아 순식간에 남녀 67명이 목숨을 잃고 24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에서는 시체1구당 매장비 등으로 3천환씩 지급했을 뿐 아무런 보상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조선
[1959년] 美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 사망
← 전설적인 재즈 보컬리스트였던 빌리 할리데이.
재즈 역사상 최고의 가수로 일컬어지는 미국 흑인 여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마약 중독으로 뉴욕 재활원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던 중 1959년 7월 17일 숨을 거뒀다. 향년 44세였다. 마약중독으로 건강을 해쳐온 빌리는 5월 31일 수면상태에 빠져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빌리는 1915년 메릴랜드주(州)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초기에는 술집 가수로 활동했지만, 선천적인 작은 목소리를 특유의 감성적인 집중력을 사용하여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녀는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발성, 드라마틱한 창법,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인해 그 시대의 보컬리스트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이윽고 가창력을 인정받아 ‘베니 굿맨’과 함께 작업, 1930년대 후반에는 ‘카운트 베이시’ 등과 함께 공연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1939년에서 1945년에 걸쳐 ‘Fine And Mellow’,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그리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Strange Fruit’등 여러 곡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삶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 3번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등 불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1941년 결혼 후 마약에 중독됐고 1947년에는 마약 소지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해야했다. 1948년 3월 막 출소하고 나서 가진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가 대성공을 거두지만 1956년 마약 혐의로 다시 체포된 후 재활 치료를 받다 이날 생을 마감했다./조선
[1955년] 디즈니랜드 개원
창조력이 넘치는 세계 최초의 테마 파크 '디즈니랜드'가 1955년 7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개원했다.
이 '마법의 왕국'은 중앙에 19세기 미국의 거리를 재현해 이 곳을 통해 여러 상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개척의 나라로 구분되어 이는 상상의 나라는 방문자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물했다. 어린이에게는 꿈과 모험과 미래를 안겨주고, 어른들에게는 지난 날의 향수와 동심의 세계를 선사해 온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어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1983년에는 도쿄에 1992년에는 파리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져 맥도널드 햄버거,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조선
[1954년] 학술원-예술원 개원
대한민국학술원과 대한민국예술원은 지난 1954년 7월 17일에 학술 발전과 예술 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학자 및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연구 및 창작 활동과 국내·외 교류를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 학술과 예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학문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고 탁월한 연구 업적을 이룩한 150인의 학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학술원은 그 동안 학술 진흥에 관한 정책자문 및 건의, 학술세미나·정책토론회 및 국제학술대회 개최, 대한민국학술원상의 수여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학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우리나라의 학계를 대표하여 국제학술기구 가입 및 각국 학술기관과의 활발한 교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나라 학문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공헌해 왔다. 또한 대한민국예술원은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대표 기관으로, 일생 동안 탁월한 예술 창작 활동을 펼쳐 온 예술인 100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원 이후 예술 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 및 건의, 예술 창작 활동의 지원, 국·내외 예술가의 교류 및 예술 행사 개최,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여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1945년] 포츠담 회담 개최
← 트루먼(1945)
1945년 7월 17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들 간에 열린 이 회담에서는 패전국 독일의 분할 통치, 폴란드 서부 국경 결정, 오스트리아 점령, 동유럽에서의 러시아 역할, 배상금, 일본과의 전쟁 등이 논의되었다. 이 결과 동프로이센 지역이 폴란드로 귀속되었고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대신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개입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곧 항복했다./브리태니커
[1920년] 스페인의 외교관이며 제8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장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출생
← Samaranch at the 2007 World Championships in Athletics
제7대 IOC 위원장(1980-2001)을 역임했다. 바르셀로나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사업가로서 은행의 고문을 지냈으며, 바르셀로나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도 일했다. 또한 1977~80년 소련과 몽골 주재 스페인 대사를 지냈다. 1966년 이후 스페인 올림픽 위원회에 참여하여, 1977년 스페인 올림픽 위원장을 역임하고, 1980년 8월 IOC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0, 1984년 올림픽이 각각 서방측과 사회주의권의 불참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후, 스포츠 외교를 통한 국제적인 관계개선을 추구하여 올림픽을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다. 반면에 IOC 위원장 재임 중 올림픽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상업화시켰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에 공헌했고, 서울 올림픽 대회가 사상 최대의 참가국을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1988년 10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8월 28일 제1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했다. 2001년 7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신임 위원장에 자크 로게(벨기에)가 선출됨으로써 21년간의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브리태니커
[1917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기ㆍ예능보유자 명고수 김득수(金得洙) 출생
1917년 7월 17일 태어남 / 1990년 5월 21일 죽음
김득수는 소릿가락을 잘 아는 북잡이로 손꼽히는 판소리 명고수(名鼓手)이다. 7세에 진도명창 최두인에게서 창(唱)을 배웠고, 10세에 명창 박동준에게 5년간 소리를 배웠다. 1936년에 서울로 올라와 국창(國唱) 송만갑에게 <흥보가>·<심청가>·<춘향가>를 배우고, 김세준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조선창극단에 입단했으나, 자신의 소리가 부족함을 느끼고 극단을 그만두었다. 중년에 이르러 목청이 상해 1960년부터는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시립국악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북 솜씨는 널리 알려졌고,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이 소리를 알고 장단을 짚어 주므로 그의 북가락에는 절로 흥이 나고 소리하기가 편하다는 찬사를 받았다./브리태니커
[1907년] 작곡가 이흥렬(李興烈) 출생
1907. 7. 17 함남 원산~1980. 11. 17 경기 파주.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교회 전도사인 어머니 김자선을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음악과 접했다. 1927년 일본 도쿄[東京] 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인 광명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내합창단을 조직했으며 작곡을 시작했다. 1933년 홍난파의 주선으로 경성보육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1936년 홍난파와 같이 경성방송국 소속 방송관현악단을 창단했다. 또한 피아노 3중주단을 만들어 실내악운동도 벌였다. 배재중학교, 풍문여자중·고등학교,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었으며 서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또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예술원 회원, 한국작곡가회 회장, 한국음악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1934년 〈이흥렬작곡집〉을 출간했고, 〈음악의 종합연구〉(1958)·〈가서나 살고 싶은 곳〉(1971)·〈음악감상론〉(1976)을 출간했다. 유명한 작품으로 〈내고향〉(1926)·〈봄이 오면〉·〈바위고개〉·〈코스모스를 노래함〉·〈고향 그리워〉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02년] 에어컨 발명
1902년 7월 17일 에어컨이 처음 발명됐다. 발명자는 `에어컨의 아버지`란 별칭으로 불리는 미국인 윌리스 캐리어(Carrier). 캐리어는 1902년 코넬대학 졸업 후 바로 뉴욕주(州)의 한 기계설비회사에 입사했다. 입사 직후인 7월, 주급 10달러의 그에게 뉴욕 브루클린의 한 출판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 여름의 무더위와 습기로 종이가 멋대로 수축·팽창하기 때문에 도무지 깨끗한 인쇄를 할 수 없다." 20대 초반의 캐리어는 너무도 쉽게 해법을 생각해냈다. 뜨거운 증기를 파이프로 순환시켜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이 가능하다면, 차가운 물을 이용한 냉방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사실 이 발상은 로마제국의 것이다. 로마에서는 높은 산의 눈을 궁정으로 가져와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세기 들어서는 말라리아 환자들의 병실 천장에 얼음을 담은 그릇을 매달아놓고 부채 등을 이용해 바람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인공장치를 이용해 깨끗하고 습기없는 찬 공기를 내뿜토록 한 에어컨은 캐리어에 이르러서야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 냉수가 순환하는 냉각코일에서 물을 압축·기화시켜 공기로부터 증발열을 빼앗아 온도를 낮춘 후 바람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출판사 인쇄공장에 처음 설치된 에어컨은 오랜 기간 수요가 없다가, 1920년대 초 뉴욕의 극장과 백화점들이 도입하면서 비로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미 의회에는 1928년 에어컨이 설치됐다. 그러나 의원들 수준 때문에 "1년 내내 시원한 곳에 앉아 해악을 만들어낸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객기(유나이티드 에어라인·UA)에는 1936년, 자동차(팩커드·Packard)에는 1939년 처음 에어컨이 장착됐다. 백악관에는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환영 속에 1929년 입성했으나, 후임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한 번도 틀지 않았다. 에어컨이 대중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에 에어컨을 기본 사양으로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조선
[1865년] 독립운동가 임예환(林禮煥) 출생
1865. 7. 17 평남 중화~1949. 4.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천도교 도호(道號)는 연암(淵菴). 24세 때 동학에 입교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평안도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1904년 동학의 개화운동인 갑진개화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1912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평양에서 포교에 힘썼다. 1919년 2월 24일 최제우(崔濟愚) 환원(還元)기도와 고종의 장례에 참배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가, 2월 25일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천도교측 대표로 서명하기로 했다. 나인협, 홍기조, 나용환이 이때 임예환과 함께 참가한 평안도의 천도교 지도자들이었다. 2월 27일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일본정부 등에 제출할 선언서에 날인했으며, 다음날 밤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가서 독립선언식의 대책을 숙의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민족대표로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한용운(韓龍雲)의 식사(式辭)를 들은 후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천도교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790년] 영국의 경제학자 스미스(Smith, Adam) 사망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생애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친은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란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즈경의 후원하에 에딘버그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1년의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등지를 여행하며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국부론》을 발표하였다. 그 뒤 글래스고 대학 총장등을 역임한 뒤 1790년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1744년]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명자, 부통령 게리(Gerry, Elbridge) 출생
1744. 7. 17 매사추세츠 마블헤드~1814. 11. 23 워싱턴 시.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선거구를 자기 당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1762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창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했다. 매사추세츠 주의회 연락위원회 위원(1772~73)과 매사추세츠 지방의회 의원(1774~75)을 지냈으며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회의에 대표로 참석해(1776~81) 처음부터 미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또 연합헌장에 따라 구성한 의회 의원이었고(1783~85)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회의에 대표로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제헌회의에 제출된 새로운 헌법에 반대했으나 그것이 비준되자 입장을 바꾸어 지지했고 그뒤 미국 의회 의원으로 일했다(1789~93).
1797년 존 애덤스 대통령은 그를 존 마셜, 찰스 코티즈워스 핑크니와 함께 프랑스에 특사로 파견했는데, 이 특사 파견은 나중에 'XYZ 사건'이라는 프랑스로부터의 뇌물수수 혐의사건을 낳게 되었다. 특사들의 임무는 프랑스와 오랜 기간 계속된 여러 분쟁을 끝내기 위해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탈레랑과 그 수행원들이 미국 협상자들을 푸대접하자 마셜과 핑크니는 일찍이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게리는 그의 프랑스인 친구 탈레랑이 마셜이나 핑크니에게는 내놓지 않았던 조건을 자기에게 내놓을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파리에 남았다. 이런 행동 때문에 연방파들에게서 거센 비난을 받았고 그 비난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1800~03년 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선거에서 4번이나 떨어진 뒤 1810년 드디어 당선되었고, 1811년에는 재선되었다. 주지사로 있을 때 나중에 '게리맨더링'으로 알려진 선거구 조작방식을 이용해 유명해졌다. 게리는 1812년 영국과 싸울 것을 열렬히 주장했으며 다음해의 선거에서 공화파 후보로 매디슨과 함께 당선되어 매디슨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다가 재임중 사망했다.
[1674년] 영국의 비국교도 목사 와츠(Issac Watts) 출생
← Statue of Isaac Watts in Southampton.
1674. 7. 17 잉글랜드 햄프셔 사우샘프턴~1748. 11. 25 런던 스토크뉴잉턴.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런던 스토크뉴잉턴의 비국교도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며 1694년 졸업했다. 1696년 스토크뉴잉턴과 레스터셔 주 프리비에서 존 하톱 경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고, 프리비에 있는 이 가문의 가족예배당에서 첫 설교를 했다. 1699년 런던의 마크레인 조합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가 1702년 3월 담임목사가 되었다. 1712년 건강이 나빠져 하트퍼드셔에 있는 토머스 애브니 경의 집에 1주일 간 머무르러 갔다가 그곳에서 여생을 지내게 되었다.
마크레인에서 부목사로 일하면서 훌륭한 찬송가들을 많이 작곡했다. 1706년 찬송가의 노래와 가사를 모은 첫 모음집 〈Horae Lyricae〉를 출판했고, 곧이어 출판한 〈Hymns and Spiritual Songs〉(1707)에 수록된 〈놀라운 십자가를 바라볼 때 When I Survey the Wondrous Cross〉·〈순수한 기쁨의 땅이 있네 There is a Land of Pure Delight〉 등은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그가 작곡한 찬송가 중 〈Our God, Our Help in Ages Past〉(〈시편〉 90을 의역한 곡)·〈Jesus Shall Reign〉(〈시편〉 72에 붙인 곡의 일부)은 모두 유명한 곡으로 〈신약성서의 언어로 쓴 다윗의 시편들……The Psalms of David Imitated in the Language of the New Testament……〉(1719)에 수록되었다. 여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로 보냈으며, 특히 수세대 동안 프로테스탄트의 교과서로 사용하게 된 〈Logic, or the Right Use of Reason in the Enquiry After Truth〉(1725)의 저술로 수년을 보냈다.
[1453년] 백년전쟁 종결
1445년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가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家)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 ·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조선
[1392년] 태조 이성계 즉위, 조선왕조 건국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芳果:定宗)에게 선위한 뒤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事大主義)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naver
그 밖에
200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호텔 폭탄 테러
2009년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별세
2005년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오픈골프대회 우승
2005년 이은정(한영외고 3), US여자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챔피언십 우승
2005년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최용선 선생 숙환으로 별세
2005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두 아들, 제주 모슬포~마라도 횡단
2002년 정부, ‘외국 인력제도 개선대책’ 발표. 친척방문 입국 40세이상 중국동포 서비스업 2년간 취업허용
1999년 영화 ‘용가리’ 개봉
1997년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위버 사망
1989년 B2스텔스 폭격기 시험비행 성공
1983년 남북이산가족재회 촉진대회
1980년 볼리비아에 군사 쿠데타, 가르시아 집권
1980년 미국내 이상폭서로 1000여명 사망
1980년 일본 수상에 스즈키 젠코(영목선행) 피선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 쿠데타 왕정 폐지
1969년 3선개헌 반대 투위(鬪委) 발기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 발사
1955년 제1회 학ㆍ예술상 시상
1952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46년 38선 이북으로의 통행 금지
1917년 수리조합령 공포
1876년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 출생
1868년 일본 강호(江戶 えど 에도)를 동경(東京 とうきょう도쿄)으로 개칭
1790년 고전경제학 창시자 애덤 스미스 사망
1763년 미국의 모피 왕 애스터 출생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 승리
0661년 신라 장군 김유신, 고구려 정벌에 나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