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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09
12월19일[대림 제3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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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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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8ENb9FxkE8
[살레시오회 심재현 치릴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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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60, 70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어 의기소침해 살아가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던지, 처음에 그들은 도무지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을 넘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고,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속으로 헛웃음까지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그들 내면의 표현이 이랬습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즈카르야의 반응은 오늘 이 시대 많은 노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어, 대부분 사람이 원치도 않은 긴 노년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품위 있고 고상하고 삶의 질이 높은 노년기라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대다수 노인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 없이 살아가는 노인은 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희망을 둘 곳이 없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좌절이요 환멸이고 지옥 같은 현실입니다.
이렇게 신앙 없는 노인들, 세상의 노인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지루해 죽습니다. 산보나 등산도 하루 이틀이지 즉시 싫증이 납니다. 그 어디서도 오라고 손짓하는 데가 없습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면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닌 노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몇몇 노인들을 뵐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연세가 70, 80인데도 새벽부터 밤늦도록 바빠 죽습니다.
기상하자마자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한 시간 두 시간 자녀들과 손주들을 위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10시 미사 가기 위해 꽃단장을 하십니다. 성당에서 만난 절친한 교우들과 나누는 이야기꽃이 무르익으면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레지오 회합, 연령회 회합, 반 모임, 일주일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신앙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 살아가는 노인들은 정녕 행복합니다.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세상 정녕 멋진 세상이지만, 이 세상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불행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병고나 노화나 죽음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다른 희망을 간직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막 87세 생신을 지내신 노인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행복한 노인의 모델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병약한 노구를 이끌고도 세상과 인류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활활 소진하고 계십니다. 노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신 안에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한다면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노인이라고 포기하거나 낙담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후손들에게 달릴 곳을 다 달린 훌륭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얼굴과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온유와 친절의 교사가 되어 주십시오. 자신에게 다가오는 병고나 노화 죽음조차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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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Nqh5Fmhr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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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받고 싶으면 손에 쥔 그걸 내려놓아라!>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믿지 못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벙어리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조용하고 순응해보라는 뜻입니다. 해보면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게 되자 정말로 그 일이 실현됩니다. 만약 계속 자기 생각을 말하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믿어서 손해 볼 게 전혀 없는데도 믿지 않을까요? 믿는다고 크게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죽고 나면 알 일입니다.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믿은 게 얼마나 다행일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버립니다.
『한 번이라도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란 책을 쓴 전성민 씨가 있습니다. 그는 20대를 게임 중독으로 날려버렸습니다. 행정 고시를 위해 공부하다가 게임에 빠져 젊은 시절을 폐인처럼 날린 것입니다. 군대에 다녀오니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자신에게 묻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후회 없이 모든 걸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부모님에게 한 번만 더 믿어 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2년 만에 5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행정 고시와 입법 고시까지 동시에 합격합니다.
우리는 왜 믿지 못할까요? ‘자존심’을 지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었는데 하느님이 없으면 창피할까 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자기 자존심과 맞바꿉니다. 사이비에 들어가서 이건 아닌가 싶어 나오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 자존심이 그만큼 믿음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관계입니다.
노태권 씨는 중졸 막노동꾼이었습니다. 난독증이 있어 글도 읽을 줄 모릅니다. 두 아들은 중학교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둘 다 자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들을 대학에 보내겠다고 먼저 공부를 시작합니다. 난독증임에도 막노동하며 틈을 내어 공부한 끝에 2006년 수능 모의고사를 일곱 번 만점 받습니다. 12과목 모든 과목 만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가르쳐서 맏이는 서울대 경영학과 4년 장학생, 둘째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수석으로 입학 시킵니다.
노태권 씨가 꿈꿨던 세상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가 자존심을 내려놓는 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MF 구제금융 시절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였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사흘 동안 한 명의 손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흘을 꼬박 굶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때 구두를 신은 발 한쪽이 자기 앞에 올려졌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구두에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려고 울면서 엄청 열심히 구두를 닦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구두를 열심히 닦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1,000원이나 2,000원을 주며 나에게 구두를 닦아 달라고 발을 내미는 사람에게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사람의 자존심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물로 다 빠져버린 것입니다. 더는 자존심이 없어서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기 쉬워집니다. 이런 사람은 누리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전성민 씨가 처음에 게임 중독이 되었던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창피함을 이기기 위한 자기 합리화가 더 컸습니다. 핑곗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표징’을 달라며 핑계를 댑니다. 사실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이 강해서 믿지 못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느님이 없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기 싫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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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가족계획’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입니다. 가족계획이라는 말의 의미는 “부부가 생활 능력이나 건강상태에 맞추어 자녀의 수나 출산의 간격을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일을 가리키는 가족학용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미는 ‘출산억제 정책’입니다. 정부에서 발표했던 가족계획의 구호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표어는 이렇습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1960년대)→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71년)→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78년)” 이렇게 강력한 가족계획의 결과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적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구감소라는 위기 앞에서 정부는 다른 의미의 가족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바로 ‘출산장려 정책’입니다. 이는 2,000년대에 정부에서 발표했던 가족계획의 구호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표어는 이렇습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정부에서 출산장려 정책을 실시하고, 다자녀 가정에 대해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가족계획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앞으로도 더 좋아질 가능성은 적습니다. 정부의 혜택이 있을지라도, 다자녀를 키울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나온 아이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 하시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여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많은 자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 하느님의 자녀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사제 즈카르야에게 보냈습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하느님 구원사업의 정점은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이란 하느님이 창조사업에 함께하는 숭고한 소임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족계획이란 하느님이 구원사업에 함께하는 거룩한 소임입니다. 사제는 혼인성사를 앞둔 배우자들에게 혼인의 목적을 특별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다음 사항을 알려줍니다. “가톨릭 신자 배우자는 혼인한 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자녀들도 모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 교육을 받게 하도록 노력할 것을 서약해야 합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에게는, 신자인 배우자가 혼인 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하며 자녀들도 세례를 받게 하고 종교 교육을 시켜야 할 중요한 의무를 약속하였음을 알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이 나의 영광과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이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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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25: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의 이름에 대해 예고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 한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 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을 선포한다.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 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둘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아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엘리사벳은 요한을 잉태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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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을 마련한 선구적 인물입니다. 네 복음서 가운데 특히 루카 복음서는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번갈아 배치하며, 두 인물이 출생 때부터 서로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은 먼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의 특별함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1,35 참조), 그분의 선구자도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출생의 배경에서 드러납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었고 나이도 많았습니다. 이는 이사악과 삼손, 그리고 사무엘의 출생과도 매우 비슷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들이었으나 주님의 특별한 은총과 보살핌으로 이 위대한 인물들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하나의 ‘큰 인물’, 곧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닌’ 세례자 요한의 출생도 마찬가지로 척박한 환경에서 오로지 당신의 놀라운 권능으로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권능에 의심을 품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였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엘리사벳이 자기에게 아들을 낳아 주리라는 천사의 소식을 의심합니다. 아내도 자신도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즈카르야는 결국 천사에게 표징을 요구한 셈인데, 그 표징은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가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런 표징이 주어졌을까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 그가 침묵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엘리사벳도 임신한 뒤 무려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 지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이들 부부가 침묵하며 지낸 기간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묵상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침묵 가운데 주님께서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신비에 머무르며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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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ㄴ-17)
이 말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메시아께서 이제 곧 오신다고 예고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루카복음서에서는 첫 번째 복음 선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께서 너의 청원을 받아들이셨다.”라는 뜻인데, ‘즈카르야의 청원’은 무엇이었을까? 뒤의 18절에, 자신은 늙은이고 아내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믿지 못하겠다는 즈카르야의 말이 있기 때문에, ‘즈카르야의 청원’은 아들을 갖게 해 달라는 청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청원’은 ‘메시아 강생’과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을 텐데, ‘메시아 강생’과 ‘이스라엘의 구원’은 즈카르야 혼자만의 소원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너의 청원’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너희의 청원’입니다.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은, “그의 출생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그는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이제 곧 오실 메시아를 잘 맞이하려면 회개하라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 선포’를 겸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위해서 ‘큰일’(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일이고, 그 사업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일’(위대한 일)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라는 말은,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힘으로 수련과 수행을 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요한이 한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린 일입니다.> 17절은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한 것인데, 이미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의 일’을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의 ‘그분’과 ‘주님’은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8-20)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즈카르야의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제가 무엇으로 그것에 관해 알 수 있겠습니까?”이고, 이 말은, “표징도 없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어떤 표징을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였고,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루카 1,6), ‘상식의 한계’ 라는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라는 말은,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한 것이고, 천사의 말은 곧 하느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이라는 말은, 즈카르야가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메시아 강생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는 태어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까지입니다(루카 1,57-64)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에, 즈카르야가 말을 못 하게 된 것을 ‘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가 요구한 대로 ‘표징’을 준 일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말을 못하게 된 것’이 표징이 아니라,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아기가 태어난 뒤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표징입니다.>
왜 그런 표징을 주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임무가 ‘선포’ 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상징적인 경고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믿음이 없으면 선포 자격도 없다는 것, 즉 확실하게 믿음을 가질 때까지는 어떤 말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특히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점 때문에, 그의 사제 직무가 정지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제 자격도 없고 말씀을 선포할 자격도 없습니다.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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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삼손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에 남편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의 탄생을 전합니다.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사람이므로 관련법에(민수기 6장 참조) 따라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그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먼저 관련 규정을 지키고 이어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부모의 청원은 받아들여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통하여 신앙과 연관된 희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삶의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그 시련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였지만,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때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천사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고 말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믿음이나 믿음 없는 희망이 사라진 즈카르야는 새 시련을 맞이합니다. 말씀이 실현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는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진 희망을 돌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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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뻬드로 신부님]
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으로 특출한 사제 가문에 속하였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가문에서 후손이 태어나지 않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유다인에게 출산은 하느님의 축복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버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사라, 마노아의 아내, 한나처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낮추어졌으나,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으로 높임을 받은 사람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신적 체험에 따른 두려움은 중립적이어서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믿음과 불신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도록 지시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지만 그는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아들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고,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늙은 나이의 즈카르야는 그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갇혀 하느님께 마음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능력과 판단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영적 벙어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업적을 전할 확신이 없어 그분의 자비를 선포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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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치욕>
살다보면 말 한마디가 서운하게 들릴 때도 있고,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지 화살처럼 가슴에 팍하고 꽂힐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듣고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표정이 밝지 못하고, 쌀쌀맞게 대한다거나 차가운 말을 던지기도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심리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이 많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마도 무의식중에 자리 잡은 열등의식이 틀림없으리라고 봅니다.
오늘 평생토록 약점과 열등의식에 아파해온 부부를 만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하느님 안에서 아무런 흠 없이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왔건만 이 부부에겐 아이가 없다는 설움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식이 없대’ 하는 소리를 듣고 평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오랜 바람을 잊지 않으시고, 치욕을 씻어주십니다. 주님은 가슴 시린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드러낼 가장 적절한 시점을 찾고 계셨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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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1,18)
대림 시기는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와 12월 17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2월 17일부터 ‘대림 감사송’이 바뀌며, 복음 내용도 구체적으로 족보와 요셉 그리고 즈카르야에게 발현하고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껏 탄생 예고를 들었던 세 분 중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 예고를 믿고 수용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한 즈카르야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왜 믿지 못했을까요. 그의 나이가 요셉과 마리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았기에 그랬던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즈카르야는 분명 훌륭한 신앙의 가문에서 성장한 신앙이 깊은 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들려주는 아내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을 처음엔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 삶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우리 부부는 젊었을 때도 아이를 갖지 못했고, 더욱 출산능력을 잃은 지 오래된 노인인데, 무슨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할까? 지나가는 개도 웃을 것이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느껴집니다. 다만 신앙적인 응답이라기 보다 인간적인 판단에 따른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즈카르야처럼 인간적인 앎과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경계해야 하며, 하느님 섭리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직면할 일을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함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린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나이 드신 분들보다 사람들도 잘 따르고 사람들의 말도 잘 믿으며, 특별히 자신이 좋아하는 부모의 능력도 잘 믿는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물론 나이 드신 분들도 어린아이와 다른 면에서 더 잘 믿기도 합니다. 특히 가짜 뉴스! 제 주변에도 나이 드셔서 그런지 판단력이 많이 떨어지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함은 즈카르야가 단지 늙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그 넘어’의 신비, 성령의 활동과 활력을 믿지 못했던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즈카르야는 즉각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선 그 신비스런 신앙의 영역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에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1,18)라고 의문을 제기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천사 또한 즈카르야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1,20)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천사가 언급한 ‘벙어리가 되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는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벌을 주신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의도를 포함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요한이 태어나자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고 즈카리야에게 손짓으로 묻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 때에 즈가리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1,62~64) 는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 곧 기쁜 소식을 전하였는데도 자신 안에 이루실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듣고도 의심만 했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즈가리야가 하느님께 찬미 드릴 수 있는 말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처럼 신앙으로 ‘네’라고 응답하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즈카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저와 제 아내는 나이가 많지만,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도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을 하느님께서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즈카리야의 태도를 교훈으로 삼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총을 믿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벙어리로 만들기보다는 우리의 불신앙이 바로 우리를 영적 벙어리가 되게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과 그 은총에 감사하며 찬미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가장 올바른 태도이며 자세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 끝에, 즈카르야가 아닌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1,24~25)라는 고백을 들으면서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그녀와 벙어리가 된 즈카리야의 모습이 교차 되어 다가옵니다. 아울러 그녀의 고백이 바로 그의 남편인 즈카리야에게 요구되는 찬미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점은 바로 매 순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 주시는 놀라운 일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1,64) 소리 이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매일 처음으로 입을 열 때마다 즉시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제가 1971년 대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학년들은 공동 침실에서 생활했습니다. 기상 종이 울리면 당번이 먼저 ‘주님을 찬양합니다. Laudate Dominum’이라고 선창하면, 다 함께 소리를 모아. ‘주님께 감사합니다! Deo Gratias’ 하고 합창하면서 기상하였습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땐 왜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는지, 그 시작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여러분도 매일 아침 기상할 때마다, 하루의 첫 순간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합니다.’하며,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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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여행을 갔습니다. 이렇게 과거행을 쓰는 이유는 이제 여행을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좋은 여행을 위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 여행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즐길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풍요로운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여행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공부할 필요 없이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쉼에만 집중하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갑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한 만큼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의 연관성, 그곳 성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성지에 다녀왔어도 어디 다녀왔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알려고 노력할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어떤 신부가 제게 “너희 동네의 그 집 가봤어?”라면서 맛집을 물어봅니다. 처음 들어보는 집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그런 곳이 있었어?”라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셔도 주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늘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을 보는 순간에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천사가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성전은 예루살렘에만 있었기에, 사제들을 조로 나누어서 차례로 한 주일 동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면 복음에서 보듯이 제비뽑기하여 분향할 사제를 정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중에 주님의 천사를 만났던 것이지요. 이 상황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루카 1,12)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13)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온 존재, 결국 주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뻐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정작 주님 알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기쁨의 감정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을 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큰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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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려워하지 말고 하세요>
루카 1,5-25(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3.14-15ㄱ.20)
하느님의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세요
비록 그 기쁨
아직 그대의 것이 아니어도
기쁨을 낳을 사람이니
지금여기에서 기뻐하세요
하느님의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희망하세요
비록 그 희망
아직 그대의 것이 아니어도
희망을 낳을 사람이니
지금여기에서 희망하세요
하느님의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세요
비록 그 믿음
아직 그대의 것이 아니어도
믿음을 낳을 사람이니
지금여기에서 믿으세요
하느님의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세요
비록 그 사랑
아직 그대의 것이 아니어도
사랑을 낳을 사람이니
지금여기에서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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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의 별은 여전히 있다>
밤하늘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기온은 뚝 떨어졌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어서 상쾌했습니다.
가끔은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주님을 찬미할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먹구름에 가려져 별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별들은 별의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지, 모든 별이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내가 그분의 은총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풍요로움으로 여전히 있습니다.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으면 언제든 충만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기대하는 바가 채워지면 호들갑을 떨고,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넉넉함으로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은총이 왜 꼭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어져야 하나요?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손을 털고 주님께 맡긴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요한3,16) 그분께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을까요?
즈카르야는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3)고 하였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하며 보이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사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루카1,20) 하느님 앞에서 의롭고 흠 없이 살아온 즈카르야, 엘리사벳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시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닐까요? 예기치 않은 처지, 상황을 접하게 될 때 나의 믿음의 현주소가 드러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의 은총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건만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왜 그리 힘이든지요! 간절히 청하고는 그저 그분의 처분을 바라는 삶, 그리고 그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에 갇힌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별이 없는 것이 아니듯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은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이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한 후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은총은 언제나 넉넉히 우리를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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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天國)-
“오 옛세의 뿌리여, 만민의 표징이 되셨나이다.
주 앞에 임금들이 잠잠하고 백성들은 간구하오리니
더디 마옵시고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오 옛세의 뿌리여’로 시작되는 대림 제2부 셋째날 “O후렴”이 참 애절하고 간절합니다. 바로 대림시기 ‘어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주님께 바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워, 보고 싶어, 선물처럼 찾아오시는 주님을 설레는 기쁨으로 깨어 기다리며 마중 나가는 대림시기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날 설레는 마음, 설레는 기쁨으로 한밤중 일찍 일어나 강론 쓰기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시처럼 찾아왔네!” 라는 시처럼 날마다의 강론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날로 깊이 깨달아 갑니다. 그러고 보면, 비단 특정의 대림시기뿐 아니라 하루하루 일년 열두달 모든 날이 오시는 주님을 설레는 기쁨으로 기다리며 마중 나가는 대림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불암동 수녀원 아랫집 수녀들이 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요셉수도원 보수공사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참여하고자 합니다. 저희의 사랑과 정성으로 받아주세요. 감사합니다.
2023.12.16.불암동수녀원 11명 가족 드림
*<3백만 원>선물하셨습니다. 용돈 모으고, 도토리 팔아서 번 돈이랍니다.-
수도원 알림판에 붙은 수녀님들의 참 좋은 선물 내용에 감동했습니다. 눈만 열리며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도토리가 무수히 열리는 수도원 정문옆 수녀원 뜨락의 거대한 참나무를 보며 쓴 “욕심 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22년 전 시도 생각납니다. 지금도 여전 거기 그 자리, 정주의 참나무입니다.
“울타리 부근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 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욕심 없으면 어디나 꽃자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참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맛보니 만족이다
배밭 전지된 배나무들 하나 부럽지 않다
열매 탐내는 나무 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가 집자리가 됨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은은한 미풍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어쩜 저리도 늠늠할 수 있나, 초연할 수 있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참나무!”-2001.3.23.
이 시는 21년전 2002년 12월에 돌아간, 수도원을 참 사랑했던 레나타 자매님이 참 좋아했던 시이고 자매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외아들 엘리야 신부를 수도원에 선물로 남기고 갔습니다. 아, 바로 이 참나무 열매 도토리를 모아 건축 헌금으로 선물한 수녀님들이고 참나무를 닮은 진인(眞人) 수녀님들의 겸손한 사랑이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요 옛날에는 재목으로 쓰는 참나무를 진목(眞木)이라 불렀습니다. 나무가 단단하여 가구로, 참나무 숯으로, 또 가뭄시에는 그 열매 도토리는 구황작물이 됐으니 얼마나 고맙고 겸손한 “수도승들의 모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진목(眞木), 참나무인지요!
참나무 진목뿐 아니라 제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 참 좋은 선물중의 선물인 참사람 진인(眞人)인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부부 마노아와 그 아내요, 복음의 부부 즈카르야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입니다. 이들부부에게 선물처럼 찾아 오신 주님의 천사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부부들에게 참 좋은 선물인 아기의 탄생이 예고됩니다. 자식들이야마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지요!
“네가 아버지 없이 어디서 나왔니?”
예전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이 한마디 말씀으로 제입을 닫아버린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와 사는 동안 아버지 비난하는 말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고 늘 아버지를 두둔하셨고 편들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음 깊이에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깊고 지혜로운 처신이었던지 감동합니다. 이제 수도사제가 되어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어릴 적 부르지 못했던 아버지 이름을 날마다 평생 원없이 불러보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섭리 은총에 늘 감사, 감격합니다.
간혹 어쨋던 과오를 저질렀거나 일찍 세상을 떠난 불쌍한 남편들이라도 좋은 자식들을 아내에게 선물로 남기고 홀로된 아내를 돌보게 한 남자들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그 깊은 섭리에 감동하게 됩니다. 남자없이, 남편없이 이런 자식 선물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나요! 남녀 부부들을 통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자식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은 참 좋은 부부에게 주신 참 좋은 아기를 선물하십니다.
주님 천사로부터 잉태의 기쁜소식을 들은 마노아의 아내는 즉시 남편 마노아에게 사실을 모두 알립니다. 가난하나 참 사이좋은 부부임이 감지됩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하였고 아이가 자라나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리셨고 마침내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말에서 유래했으니 말 그대로 태양같은 자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새삼 아이들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선물한 태양같은 귀한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가난한 노부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을 통한 세례자 요한의 잉태과정의 묘사도 참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앞서와는 달리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아기 잉태의 기쁜소식을 엘리사벳이 아닌 즈카르야에게 전합니다. 믿지 못해 반신반의하는 즈카르야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앞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갔던 진인 부부에게도 이런 옥의 티같은 실수가 있었네요. 잠정적으로 벙어리가 되어 일정기간 대침묵피정을 통해 즈카르야도, 또 부인인 엘리사벳도 깊은 성찰 시간을 갖게 되니 말그대로 전화위복입니다. 다섯달 동안 숨어지낸 엘리사벳은 희망과 기쁨이 가득한 마음으로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 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주셨구나.”
마리아와 요셉 부부의 구원자 아기 예수님 탄생에 앞서, 이렇게 참 좋은 부부들의 잉태과정을 소개한 말씀의 배치가 참 치밀하고 섬세하고 오묘하니 이 또한 가톨릭교회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겠습니다. 점차 가까이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앞서 더욱 깨어 지내야 할 남은 대림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중의 선물이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역설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의 기쁨으로 가득한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남은 대림시기 우리 모두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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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슴이>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고 얘기하고, 이어서 그것이 그의 기쁨일 뿐 아니라 많은 이의 기쁨이 될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즈카르야는 아이를 달라고 청원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그 청원은 소싯적 청원이었을 것입니다. 설마 70 넘어서까지 자식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주책바가지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니 이 청원은 젊었을 때 한 것이고, 그야말로 묵은 청원이 이루어진 것인데, 그렇다면 응답이 주어졌을 때 기뻐 날뛰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불신의 태도를 보입니까? 진정 늙은이가 애를 낳는다는 것은 아무리 하느님이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런 것은 아니고 그래서 즈카르야의 불신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일이 자기에게 생긴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너무 엄청난 일이 닥치면 순간은 믿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그래서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곤 하는 것이 보통이지요.
어두운 데 있다가 바로 밝은 데 나가면, 반대로 밝은 데 있다가 바로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너무 눈이 부셔서 또는 너무 캄캄해 감각 기능이 순간 망가지듯 우리의 믿음 기능도 순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불신의 말은 입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기에 구원의 찬미가 제대로 터져 나올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영적인 냉가슴을 앓아야 합니다.
그리고 냉가슴을 앓는 동안 늙은이의 가슴은 젊은이의 가슴처럼 다시 그리고 점차 끓어올라야 하고, 고작 자기 소원이 이루어진 것을 기뻐하는 작은 가슴이 아니라 인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찬미하는 큰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는 너도 기뻐할 테지만 많은 이가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즈카르야처럼 늙은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고작 젊어지거나 젊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구원을 살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구원의 도구가 됨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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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1,13)
<협조자들!>
오늘 복음(루카1,5-25)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를 묵상하면서 '예수님 탄생에 앞서 파견된 협조자들'과 '하느님 구원 사업에 필요했던 협조자들'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 곧 인성(人性)을 지니신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필요했던 '협조자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을 낳으실 모태로 선택된 '나자렛 처녀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의로운 요셉'이고, 마리아를 낳으신 부모 '요아킴과 안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되어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닦으러 온 '세례자 요한'이며, 그의 부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판관13,2-7.24-25)에 나오는 '삼손'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많은 판관들', 그리고 '예언자들', '열두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 구원 사업의 협조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했고, 하느님 구원 사업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이렇게 이사이의 아들 여덟 명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막내 '다윗'이 하느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뽑힙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부르심에 당당하게 "예!"라고 응답하고, 해야 할 일에 기쁘게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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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VKBcH7gs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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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 17)
우리의
간절한 청원이
하느님 안에서
마침내
받아들여집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세례자 요한의
탄생입니다.
많은 이가
기뻐할
탄생입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을 위한
삶을 세례자
요한은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주님 말씀을
부여잡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하느님의 계획은
결코 늦은 법이
없습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우리의 마음을
돌려놓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주님께서 이루실
주님의 일들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표징들을 우리는
생생히 보게 됩니다.
맞아들임도
받아들임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응답들입니다.
그냥 던지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모두를
살리시는
약속의
말씀들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을 믿기에
우리가 겪는
모든 여정은
주님을 맞이할
기쁨의 여정이
됩니다.
늦은 믿음이
아닌 날마다
삶으로
화답하는
새로워지는
믿음입니다.
엘리사벳도
즈카르야도
우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 안에
오롯이 응답한
믿음의 가족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끝까지 이어주는
가장 맑은
힘이며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은총은
또 다른 은총으로
이어지며
하느님의 탄생을
알립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탄생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명을 통하여
시잡됩니다.
말씀의
받아들임이
성탄의
시작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는
기쁜소식의
오늘을
맞아들입니다.
기쁨으로
기쁜 말씀을
받아들이듯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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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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