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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방화사건
1596 가을
여름에 있었던 이몽학의 난은 두번의 전투로 사실상 종결되어버렸다. 기습작전이 실패하고 투입된
병력이 거의 몰살된 상황에서 공주성으로 향하던 이몽학은 공주목사 이시발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문을 열어주지 않자 곧이어 닥친 진압군에 의해 벼랑끝으로 내 몰렸다.
이어 반란군에 스며들었던 관군이 야음을 틈타 이몽학과 김덕령의 목을 베어 진영을 빠져나오자
오천명의 반란군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여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천군부에서도 뜻하지 않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어 구식군대와의 접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방부에 감금되어있던 장수들과 사병들은 모두 하옥되었고, 각지의 협조자들 역시 모조리 하옥되어
그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효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번의 난으로 전국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언제 불통이
자신에게 떨어질지 몰라 밤잠을 설쳤다. 설사 연루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천군부의 눈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또한 국방부는 완전히 해체되고 모든 군권은 천군부에 귀속되었다.
옛 조선병들은 해체되었고 선별된 자만이 훈련과 교육을 거쳐 천군부에 흡수되어갔다.
그 해 가을 하옥되어 있던 죄인들은 모든 재산을 국가에 상납하고 만주로 이민 가서 만주를 개척한다는
조건 하에 사면을 받고 제2기병사단이 주둔하는 함경도로 떠났다. 그 수가 무려 이만에 달하여, 그들이
함경도 혜산에 도착한 후 압록강을 넘었을 때는 그 수가 삼만이 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을 따라 장사 길에 떠난 자들과 그들을 감시하기위해 붙여진 관병들과 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무작정 떠난 이들이 합쳐졌기 때문인데. 그들을 수용하기위해 때 아닌 공역에 투입된
2기병사단 병력들은 겨울을 날 준비를 다 마칠때까지 투덜대며 죄인들을 욕하곤 하였다.
명으로 떠난 오하이마 다마스를 기다리던 이에야스는 일년이 지나도록 그가 돌아오지 않자 내심
그의 신변이 걱정이었다. 여름에 조선에 큰 난리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더 이상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큐슈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병들의 움직임도 없어서 소문처럼 조선왕이 몽진을
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김 없이 올 가을에도 백미 삼십만석을 준비해야만 하는 그로서는 지방의 다이묘들과 영주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비록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는 있지만 얼마나 오래갈지 모를 일이였고 해마다
막대한 양의 곡식을 조선에 조공으로 보낸다는 것도 그로서는 힘이 부친 일이였다.
요즘 심심찮게 조선병들이 혼슈를 헤집고 다니며 임진년때 잡아온 조선인을 찾는 다며 돌아 다니는
바람에 각지방마다 작은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 또한 심히 괴로운 일이였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조선병들이 왜에 들어와 살상을 하지 않았고 또 사무라이들의 공격을 받지도 아니하였다;
하지만 올 가을에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생각하면 위태위태하기만 했다.
그에게 10만의 병사가 있고 조총을 꾸준히 사들여 총병을 일만 가까이 확충시켜 놓았지만,
임진년에 보여준 천군의 무위로 보건데 이 역시 안심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선이 사용하는 포의 위력이 대단하여 한곳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배치하지 못하고
분산시킬수 밖에 없는 그로서는 그들이 만약에 2-3만명의 군사를 앞세우고 포병이 뒤따른다면
막을 재간이 없었다.
1596 오사카항
폭격의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한 오사카성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고 조선으로 가는 배에
쌀을 싣는 인부들이 빠르게 배와 부두를 오가고 있었다.
벌써 선적이 끝난 배들은 오사카항을 떠나고 있었고 줄줄이 빈 배들이 항구로 들어 왔다.
오사카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옆에 칼을 차고 있는 심상치 않은 무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풍신수길가문의 문장을 새기고 있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그들이 이곳 오사카에 나타난 것이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까무라는 요즘 그나마 살만했다. 조선인에게 고용되어
쌀을 실어주는 일을 하면 하루에 쌀 두되를 노임으로 받았다.
한 열흘동안 계속 일을 하면 두말이었는데, 쌀을 다른 곡식으로 바꾸면 능히 자신의 식구가 두 달은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었으니 이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큐슈지방은 조선인이 통치한 후로 백성들이 학교를 의무적으로 다녀 글을 깨우치고 살기도 편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천민에게 글이란 가당치도 않았던 그에게 있었어 큐슈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몰래 가족을 대리고 큐슈로 갈까하는 생각을 하던 나까무라는 일단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언듯 조운선이 정박해 있는 부두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 여긴 조선병이 없군 아주 쉽겠는데”
“ 빨리 불을 지르고 나가자고 시간이 없어, 발각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배를 불질러 버려야돼.
나쁜 조선놈들. 개만도 못한 이에야스. 가자.”
조선 판옥선으로 들어간 그림자는 한참 있다가 나와서는 다른 판옥선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몇 척을
돌아다녔을까. 처음 불을 놓았던 배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내일 아침부터 선적을 시작할 요량으로 부두에 메어져 있던 배들에서 차례차례
불이 치솟아 올랐다. 항구 밖에는 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지만 거기까지 헤엄쳐갈 수는 없었다.
이미 사람들이 불이 난 것을 알아채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머지않아 병사들도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그들은 소리없이 오사카항을 벗어나 달렸다.
낮에 오사카를 바라보았던 언덕에 올라온 그들은 불타는 항구를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짖어 보였다.
너무도 쉬운 일이였다. 판옥선에서 보초를 서던 조선병사는 기껏해야 두명이었고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최고의 사무라이가 할 짓은 아니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 말고는 없었다.
시모노세끼를 기항지로 두고있는 함대사령관인 이순신제독은 다음날 아침 어제 오사카항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을 보고 받고는 노발대발하여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그의 휘하에는 전선이 100척 있었는데 오사카에서 당한 판옥선은 그의 함대소속이었다. 이순신제독은
일단 남도군 사령관인 주경환 장군에게 보고를 하고 그 명을 기다리지 않고 함대를 움직여 오사카로
향했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혼합함대는 혼슈와 시코큐를 갈라놓는 내륙해를 따라 오사카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오사카성을 점령해 버렸다.
오사카성주는 일찍이 이에야스의 명으로 조선으로 가는 조공을 책임지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 되자 조선수군의 오사카성 진입을 막을 수 없었고 막을 만한 병력도 없었다.
성주는 그저 근황을 이에야스에게 급히 보고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오사카성이 점령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에야스는 모든 조공의 수송을 중단하고, 각 지방영주에게 영을 내려 출병을
지시하였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야금야금 먹히면 언젠가는 자신이
설 땅이 없어질 거라는 위기감에 그는 몸소 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여 오사카로 진격해 들어갔다.
“ 장관님. 오사카에서 사소한 방화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격분한 이순신장군이 함대를 이끌고 가
오사카를 점령해 버렸답니다.”
남도군 사령부에서 올라온 보고를 읽고 있던 조준옥장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가웃뚱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작전명 봉황의 약진을 실행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내년 봄이나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이순신제독의 불 같은 성격 때문에 조금 빨리 다가오게 된 것이다.
“ 현재 남도군소속 병력이 얼마나 되나.”
“ 네. 남도에 1/2보병사단 그리고 우베에 1공수여단과 저격여단, 남도군직할 해포병여단 그리고
대마도에 3보병사단, 병력으론 3만 5천입니다. 거기다 이순신제독의 함대에 수군이 약 만명이고
대마도 함대엔 약 5천 정도입니다만 현지 치안에 필요한 인원을 빼면 대략 수군을 합쳐서 삼만정도가
즉시 가용 병력입니다.”
“ 음 생각보단 적은데. 일단 강력한 화력으로 밀어 붙여야겠는데 전군에게 봉황의 약진을
이 시간부로 발동한다고 명하라. 난 천황폐하의 제가를 받아 올 테니까.”
장관의 명령을 들은 허소장은 깜짝 놀랐다. 그가 생각하기론 아직 그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았다. 오사카 문제는 이쯤에서 물러서는게 유리한 듯 보였다.
“ 장관님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내년 봄까지 기다리심이 어떨지요.”
“ 아니야, 이에야스가 칼을 뺏다. 그걸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거야. 우리가 아무리 물러난다고
해도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이에야스가 쉽게 내려올 거라 생각하나 ? 이미 이순신제독으로 인해서
약진은 시작되었다. 초반의 출혈도 거의 없었고, 이미 반이상이 성공했다고 볼수 있어.
지금쯤 대부분의 부대들은 훈련을 마치고 훈련 평가단계야. 최종훈련계획서를 작성하고 있을 테지.
그건 실전에서 하도록 하지. 일단 저격여단은 그곳에서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을 만주로 투입 시켜서
여진족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하고, 1기병사단이 그들의 보급을 맡도록 하지. 내년 봄에는 동경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으려나,…”
원산항입구에는 강원도 일대에서 일반 군사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영영1/2/3호와 많은 판옥선에
승선과 하선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이몽학의 난에도 군사훈련을 계속해서 받았다.
육지에서 사용할 견인포들이 올라오고 소형 화포들이 판옥선에 올라오자. 길 안내를 맡은 정찰선을
시작으로 원상항을 빠져 나갔다. 증기기관 굴뚝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 세줄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훈련은 벌써 세번을 넘고 있었다.
대마도주 이항복은 어제 내려온 봉황의 약진이라는 전문를 떠올리며, 언제쯤 전쟁이 이땅에서 끝날
것인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것은 대마도에 주둔하고 있는 천군이 떠나면 이곳의 치안에
구멍이 뚫린 다는 것이다. 필수 인원만 빼고 약 팔천명이 사수나항을 남종석장군이 이끄는 대마도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떠날 준비로 부산했다.
부산에서 다행히 1개 연대규모의 지원군이 출발한다니 큰 걱정은 없었지만, 대마도 주민만 십만이
넘는네 수천명으로 십만을 통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저들을 빨리 흡수하는 것이 시급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만은 않았다.
시모노세끼에 정박중이 이순신함대는 이미 주력이 오사카항으로 떠나 있었지만 잔여함정은
남종석함대와 연합하여 에도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시에 바다가 텅비어버릴 우려가 있었지만,
적 수도의 공격을 할당 받은 그들은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요즘 유성룡은 정신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1/2보병사단이 이미 시모노세끼에 집결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고, 사세보를 통해서는 제주연대소속 병력들이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남반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일시에 이만이상의 치안 병력이 빠져나가는 틈을 매꾸기위해서 들어오고
있었으나 그 수가 태부족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왜병을 모집하여 시코쿠도를 점령하도록 영을 내렸지만, 뜻대로 병사모집이 되지
않았다. 한해 농사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이여서 농사 일손도 부족한 마당에 아무도 위험한
전쟁터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선의 허가를 받아 유성룡도주는 시코큐도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 자에겐 누구를
막론하고 하급관직을 무조건 하사하고 그자의 능력과 희망에 따라 더 높은 관직을 주겠다는 방을
써 붙였다. 아울러 올해의 세금도 탕감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 걸었다.
방을 붙이고 열흘이 지나자 떠돌이 무사출신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도 짓을 수
없고, 조선병의 눈치를 보면서 각지를 떠돌고 있었는데 이번이 확실한 신분을 조선으로부터 부여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얼추 오천명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여들어 그나마 하나의 부대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이 병력으로
시코쿠를 점령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정규군을 투입하기엔 조선에게 여유병력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역할은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았기에 우베에서 출발한 보병사단이 오사카에 도착할
때까지만 시간을 벌고 시코큐번주들이 자신을 방어하느라 이에야스를 지원하지 못하도록만 하면
되는 것이댜.
유성룡은 그나마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들을 사가노세끼에 집결시켜 연합함대가 지나갈 때
잠시 배를 빌려 도하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에 대한 병참지원은 이순신함대가 담당할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지만.
에도를 출발한 이에야스는 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에도를 나와 고큐현을 지나고 있을 즈음 야먀구치에
파견된 전령으로부터 남반도에 주둔한 조선병이 도하를 시작하여 야마구치현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사카는 야마구치나 고큐에서 거의 중간에 위치한 성이였지만 조선병이 배로 이동하지 않고
육로로 이동한다면 자신보다 한참 늦게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조선군은 안전한 배로 이동하는 것을 포기하고 위험한 육로를 택했다. 조선병은 오는
도중에 여러 번들의 공격을 물리쳐야 하지만 자신은 밤을 도와 행군한다면 이미 오사카는 평정되고
남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후의 일이 문제였다.
조선과 전면전을 치른다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어 보였다. 천군이 하늘을 열어 또 불벼락이 떨어진다면
그나마 유지하던 자신의 막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만일 자신이 조선을 물리친다면 왜에서
더욱더 확고한 위치를 점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도박이다. 이미 각지로 전령이 나가 각 번들은
출병준비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군을 모아 적을 치느냐가 관건이었다. 시간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그의 후미에는 동북번들의 병사들이 이만 이상 따르고 있고 오사까에 도착하면 십만에
육박할 것이다. 그정도면 저 오사카성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남도에서 올라오는 조선병을 밀어 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이 시코큐번들의 군사를
큐슈에 진입시키면 대마도를 제외한 모든 국토를 회복할 수 있다.
한번 시작된 희망찬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조선을 다시 침략하여 점령하고
만주와 명을 쳐서 대 제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잘만 되면 러시아를 넘어 저 서쪽을
도모할 수 있었다.
“ 드디어 제국의 시작이 나에게서 비롯되는구나. 히데요시의 꿈을 내가 이루리라.”
옆에서 이에야스의 말을 듣고 있던 타이로우인 야마다 나이시마는 심히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각 번주들은 조선의 조공 때문에 모두들 발벗고 조선을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테지만
아직 막부의 힘은 조선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년 전쟁에서 거의 이십만에 가까운 대군이 귀환하지 못했고 귀환자 대분분도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이번에 출정하는 군대는 실전 경험이 풍부하지 못했다. 과거 히데요시의
군대는 내전에서 비롯된 풍부한 실전경험으로 똘똘 뭉친 역사상 최강의 군대였는데 그런 군데가
천군에겐 몰살되다시피 했다.
서로 다른 상념에 잡혀있던 이에야스와 나이시마는 아키다.니가카현에서 삼만의 군대가 항구에
집결하는대로 미야주를 향해 떠난다는 전령의 소식을 접하고 상념에서 깨어났다. 앞으로 10여일후면
그들은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 가야만 했다.
“ 후위에 있는 영주들에게 속도를 내라 이르고 남쪽의 번주들에게는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며 조선군의
북상을 저지하라 하라. 시코큐에 있는 번주들에게는 앞으로 정확히 열흘후 큐슈를 공격하라 전하라.”
야마구치현에 집결한 남도군 전 병력은 주경환장군의 지휘아래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1 보병사단은 동해의 포구들을 연결하는 점을 이어 쓰가루까지 진격하게 되어있었고, 2 보병사단은
내륙해를 끼로 오사까까지 진격하게 되어있었다. 공수 여단은 내륙을 관통하여 후위를 따를 경상도에
주둔지를 둔 3기병사단의 진격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았다.
3기병사단은 그 병력이 아직 시모노세끼에 도착하지 않았고 닷세후에나 강화함대의 도움을 받아
도착할 예정이였다. 이미 부산에 집결해 있었으나 그들을 싣고 갈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작전을 시작하지 못했다 일부병력은 보급선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지만, 공수여단은 그들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1/2 보병사단은 2기갑여단의 두개 대대씩을 주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약 오백명으로 이루워진 기병과
4천의 창병과 검사, 1천의 궁병 그리고 이천명의 신식소총으로 무장된 총병 그리고 포병여단에서
지원 온 포병대와 지원부대로 이루워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전쟁은 이천명의 총병과 포병이 담당하고
창병과 궁병은 주둔지 방어에 치중할 예정이었지만, 봉황의 비상 작전은 적진 점령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오사카에 다다르는 게임이었다.
그들의 진군은 여름에 있었던 삼각전투를 교훈 삼아 포병대를 진영 중간에 두고 사방을 창병으로
1차 저지선을 구축하고 궁병으로 2차 총병으로 삼차 저지선을 구축하며 전방에는 초병을 배치해 두고서
전진했다. 그 진영은 이동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왜병 무기의 사정거리안을 모조리 수색하며 안전을 확보하고 이동하고 있었다.
다만 중앙을 돌파하는 공수여단만이 직선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북상 및 좌우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은 게릴라 전을 펼치며, 1/2사단의 진출로의 적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었다.
별 어려움없이 오사카를 항해 가던 2사단장은 히로시마현을 지날 때 전방에 약 5천의 왜군이 진영을
구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전 부대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정확한 정탐을 위해 수색대를 투입하고 전투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수색대가 가져온 정보는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전방 2KM지점에 목책으로 진영을 갖춘 왜병이 약 3천정도 이며, 그들의 무장은
조총과 구식 무기이며, 포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초발견시 오천이였는데 그 나머지 이천은
분명히 어디선가 매복을 하고 있던가 우회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점령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뚫고 나가면 되었지만 뒤에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었다. 2사단장
박옥환 소장은 난감했다. 그는 공병 여단장이였지만,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2사단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이런 대단위 야전 경험이 부족하여 처음으로 봉착한 난관을 슬기롭게 뚫을 만한 지혜를
짜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장이 누군지 모르지만 저놈들은 조선의 포병에 대한 소문을 거의 무시하는
듯한 진영을 유지하고 있어서 의외로 쉽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사 불여 튼튼이라.
“ 일단 포병의 전개가 끝날 때까지 주위에 참호를 파고 중기관총을 후방과 전방에 집중시킨다. 매복이
아니고 우회라면 기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빠르게 사라진 것을 보면 기병 밖에 없다.”
“전방으로 치고 나갈 때 후방을 칠 생각일거야.”
“ 만약 기병이 돌격해오면 우린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기관총사수에게 이를 저지시키라고 해. 시간이 없다 빨리 뚫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적은 시간이다. “
포병의 전개가 끝나고 사격준비를 마치는데 근 한시간이 흘렀다. 전방의 왜군은 이쪽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초탄이 날아가고, 수정치를 거쳐 2개 포대의 일제사격이 1분간 계속되었다.
“ 꽈광 꽈과ㅏㅏㅏㅏㅇ”
히로시마의 지방 번주인 나오스케는 지난번 조선원정에 병력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워낙 영세한
번주이고 마땅히 보낼 병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많은 지방영주들이 조선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기에 이에야스 막부에 빌붙어서 제법 큰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조선에 대해 아는 영주들은 대부분 잡혀서 조선에서 공역을 치르고 있었고, 그나마 있던 소수의
영주들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조선에 대한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에게
정보의 부재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그는 그가 아는 상식대로 병력을 중앙에 집중 배치시키고, 적은 종심 타격을 막고자 하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의 기동을 억제하는 것이지 싸워서 물리치는 것은 아니였다.
“ 영주님. 조선의 포격이옵니다. 어서 피하시옵소서”
“ 아니 어찌 포탄이 이곳까지 온단 말인가. 말이 되는가 ?”
“ 풍문으론 저들의 포가 100리를 날아간다 하옵니다. 저 또한 그 소문을 믿지 않았아오나
사실인 것 갔습니다. 주군 ! 어서 피하시오소서. 시간이 없사옵니다.”
진격과 후퇴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우왕좌왕하는 병영을 바라보며 후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가신인 사이고 우따모리의 진언이 더해지자, 히로시아는 말에 올라 빠르게 자신의 성으로 회군을
지시하였다. 이제 믿을 것은 저들의 포격이 시작되기전 우회시킨 시하라의 기병 이천기에 희망을
걸여야만 했다.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본 히로시아는 그만 놀라 말을 세웠다. 따라오는 병사가 천여명이 되지 않은 듯
했다. 그가 있었던 진영에는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고 지금도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 기병은 출동하여 도망가는 영주를 잡아와라. 단 깊숙히 진격하진 마라. 매복이 예상된다.”
박옥환소장은 적들이 단 몇분간 실시된 포격에 지리멸멸하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저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병력을 집중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깃발이 후퇴하는 것을 본 사단장은
급히 직할대 기병을 출동시켜 적들을 섬멸하도록 명령했다.
포격을 멈추고 창병과 궁병을 전진시켜 적 진지를 접수할 무렵 좌우에서 기병 이천기가 들이 닥쳤다.
전방의 기관총은 이미 적 진지로 이동중이었고, 후방의 기관총은 몰려드는 기병을 전부 제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포대에 심각한 위험이 닥치고 있었다.
처음 직사로 포격하려던 포대장은 포 발사를 포기하고 각 포대원들에게 지급된 소총을 꺼내 들도록
하였다. 포를 방패 삼아 적 기병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였다. 포대 호위를 맡은 총병들 역시 사방으로
총을 쏘아댔지만 빠르게 접근하는 2천의 기병을 다 맞출 수는 없었다. 진영 중앙에 들어온 왜군
기병들은 포대원들을 하나 하나 사냥하기 시작했다.
포대 사이에 끼어든 기병들이 이리 저리 날뛰고 있었다. 그때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하던 기관총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영 중앙에까지 힘겹게 끌고와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 타타타타타타ㅏ”
순식간에 기관총 사거리에 들어온 적 기병은 말과 함께 피떡에 되어 날아가고 말위에 떨어진 왜군은
이리저리 날리는 말 파편에 맞아 죽어갔다. 급히 달려온 창병들은 왜 기병과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기관총은 창병과 기병이 뒤엉키는 바람에 표적을 잃고 사격을 멈추었다. 만여명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적 기병 이천은 총병이 전투에 투입되고 나서야 겨우 전멸 시킬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벌판에 벌어진
광경은 처참했다.
“ 어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전장을 수습하라.”
창병1연대장의 고함소리에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말의 시체와
사람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판을 메웠다.
창병들은 가벼운 부상을 입은 자들은 포박하고 중상자들은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렇게 끝난 전투는
2사단장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적의 기습으로 인하여 적잖은 아군의 사상자와 부상자가 생기고
말았다. 그렇게 기습과 매복에 신경을 기울였음에도 잠시 외곽 방어망이 틀어진 틈을 타서 감행된
자살작전은 2사단에게 큰 충격이었다.
“ 대충 정리했으면, 기병이 돌아오는데로 진격한다. 부상자들은 해안가로 이동하여 이순신분함대에
도움을 요청하고, 수거된 무기는 한곳에 묻고 간다. 어서 서둘러라.”
원산에는 대규모 인원이 승선을 완료하고 출항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원정의 핵심인
4/5/6사단이 원산에서 출항하여 일본에 상륙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함대 사령관인 김병국 소장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는 영영3호에 승선하여 함대를 지휘했다.
이번 작전에는 구축함이 지원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앞으로 얼마나 구축함이 가용될지 몰랐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증기선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영영3호에 승선하고 있었다.
VHF로 연결된 함대 통신망에 김병국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 전 함대 쓰루가를 향해 출발하라.”
기다란 기적소리를 울리며 영영1/2/3호가 출항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로 판옥선들이 줄을 지어
출발하였다. 대부분의 인원은 영영호에 실려 있었고 판옥선에는 장비와 보급품들이 실려 있었다.
구축함 1척에, 증기선 3척, 판옥선 10척으로 이루워진 비교적 작은 함대가 동해를 지나 예정된 상륙지점으로 움직이고 있을 무렵, 대마도에서도 출항명령을 받고 함대가 대마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대마도 함대는 시모노세끼에서 제2이순신함대와 합류하여 사가노세끼에서 왜인부태 5천을 태우고
수사끼에 야음을 틈타 잠입시킨 후 에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에도를 초토화 시키고, 에도성을 함락한 후, 추가 지원병이 도착할 때까지 에도성을
사수하는 것이다. 빈집털이나 마찬가지여서 함략은 비교적 쉬운 일이였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지원병을
기다리며 고립지역을 사수한다는 것은 누구나 맡기 꺼리는 임무였다. 에도 공격후 이순신2함대는
병참지원을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야 하기 때문에 대마도 함대만으로 적의 수도를 지켜야만 했다.
오사카성의 지척인 나고야성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히로시마에서 있었던 히로시아가 올린 전투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상자 3천 부상자 오백, 적사살 2천. 과장된 전과 보고에 그는 고무되어 있었다.
고착 5천으로 적 일만과 대적하여 대패했지만 적 사살 2천은 큰 의미였다. 지금껏 적들은 세 갈래로
고작 3만을 나눠 진격시키고 있었는데 속터지게도 지방영주는 번번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여
사로잡히거나 도망쳐서 이에야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하지만 히로시아의 보고를 받고,
그는 어쩌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장군 지금 미야주에 아키타군 3만이 도착하여 앞으로 이틀후면 오사카에 도착한다 합니다. “
“ 그래 그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우리도 이제 그만 떠나야겠군, 아키타군을 기다리느라
나고야에서 너무 쉬었군. 자 가자고.”
아키다 함대는 미야주에 병력을 내려놓고 다시 북상했다. 그들은 니카타현에 모여있는 북방의 다른
병력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와 큐슈에 병력을 내려보낼 예정이었다.
막 쓰가루를 지나 푸쿠이에 진입할 무렵 전방에 약 십여척의 조선함대가 나타났다. 멀리서부터
긴 연기를 내뿜는 거대한 3척의 선박과 그보다 더 튼 철선이 빠른 속도로 아키다함대와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뒤에는 십여척의 판옥선이 따르고 있었다.
“ 사령관님 전방에 왜 함대입니다. 백척이 넘는 대 함대입니다. 이대로 부딛치면 우리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듯 합니다.”
“ 일단 판옥선과 영영1호를 함대 후위로 돌리고 구축함과 영영2/3호는 전원 전투준비를 하라.
갑판에는 전 포를 방렬하고 총병을 갑판 난간에 배치하라. 단 세척으로 적 함대를 괘멸시킨다.
빠른 기동성으로 적과의 거리를 벌리고 싸운다. 판옥선은 이 지역을 이탈하라고 전하라. “
명령이 전파되자 판옥선이 선수를 바꿔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영영1호가 빠른 속도로
선회하여 판옥선을 따라갔다. 각 판옥선은 전원 전투준비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기함이 위태로워지면, 자신들이 나서야만 했다.
“ 전 함대 빠른 속도로 접근하여 포격전을 전개하라.”
“간만에 미사일을 구경해 볼까나.”
“ 전방을 향해 미사일 발사. “
아키타함대 사령관인 아키모리는 처음에 조선함대의 출현보고를 받고 적잖이 놀랐지만 그 수가 채
20척이 되지않는다는 것과 10여척이 도망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번 기회에 조선함대를 꺾어
버릴 결심을 했다. 과거 조선 수군을 과소평가한 왜수군은 연전 연패하였고 그 덕분에 지상군에
대한 적절한 보급을 하지 못하여 부산까지 후퇴하고 나아가서는 큐슈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에야스는 수군의 강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바다로 둘러쌓인 왜가 수군이 약하면
밖으로의 진출은 몽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배와 마찬가지로 대략 삼사백명을
태우고 포를 삼십문을 올릴 수 있는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고 장갑을 두르기조차 했다.
하지만 포의 사거리에는 변함이 없어서 천보를 넘지 못하고 있었고, 전장식 장전포라 한번 쏘고 나서
재장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속도를 중시하였기에 선바닥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평평하지
않아서 선회하는데도 판옥선에 많이 뒤떨어졌다.
하지만 200척대 3척의 싸움은 누가 생각해도 싸움이 되지 않았다. 설사 후미의 판옥선이 가세한다고
해도 말이다. 몇척의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그냥 들이 받으면 조선함대는 끝장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의 3척은 겁도 없이 자신의 함대로 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맨 앞에 있는 배는
너무 크고 강력해보여서 일순 침몰시킬 수 있을까 싶었지만, 자신의 함대숫자를 믿기로 했다.
이번에 새롭게 장착한 포는 충분이 적의 철판을 깨부실수 있을 것이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키모리는 전방의 조선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졌다곤 하나 대략 만보이상 떨어져있는 거리였는데 저렇게 먼거리에서도 포격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머리를 갸웃뚱하던 아키모리는 전함대에 분산하여 접근하라는 신호용 깃발을
내 걸었다. 자신의 함포 사거리 안으로 빠르게 접근하여 함포를 퍼부어 줄 생각이었다.
“ 조각배로 감히 이지스함을 공격하려하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전함포 발사하라.”
선수에 장착된 함포 두문이 불을 뿜고, 개조된 대공포들이 포신을 낮추어 사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야 한방에 한놈씩이다. 포탄 허비하는 놈은 나중에 한시간 동안 뱅뺑이다.”
마치 전자오락을 하는 기분에 사로잡힌 구축함의 포술장들은 느긋하게 불타오르는 왜선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속사로 쏟아내는 포탄에 정확히 가격당한 왜선은 두동강이 나며 물속으로 가라않았고
파편을 뒤집어 쓴 배들은 선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온 바다는 불타오르는 왜선이 내는 연기로 가득차서 가까이 다가오는 선박을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주위에 왜선에서 쏘고있는 포탄이 함 전방에 떨어져
물보라를 내었다.
“ 전함대 일제사격후 급속 후진하라.”
“ 꽝”
“ 장군님 조선함이 멀어집니다. 포를 계속 쏘고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이러다가 전멸입니다.”
“ 아니 이럴수는 없다 어찌 단 3척에 200척이 패한단말이냐. 말도 안돼.”
울부짓는 아키모리는 눈물을 머금고 온전한 50여척의 배를 미야주쪽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 적들이 후퇴합니다.”
“ 후위의 판옥선대를 불러라. 전함대 급속 접근하여 적을 전멸시킨다. 전진. 대공미사일 저들의
머리로 발사.”
십여척의 함대에 쫒긴 왜선 50척은 전장을 이탈하지 못하고 미야주 북쪽해상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첫 포격개시후 두시간만에 적선200척이 수장되어버렸는데 조선에게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왜에게는
큰 충격이었으며, 더 이상의 해전을 치를 전선을 확보하지 못해 사실상 완전히 왜는 재해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육로의 이동이 극히 제안된 왜의 지리적 특성상 그것은 각섬과 각지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조선함대는 쓰루가를 통해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병력 일만을 내려놓고 그날 저녘에
다시 원산을 향해 출항했다. 그들은 이차 병력과 보급품을 싣고 다시 이곳에 일주일후 올 예정이었고
일부는 아카다에 병력을 상륙시킬 예정이었다. 원산함대가 쓰루가에 도착하여 병력을 한창 내리고
있을 즈음 대마도 함대는 에도를 공격하고 있었다.
적의 저항이 강하여 본격적인 공성작전을 개시하지 못하고 육지로 끌어올린 함포를 에도성에 쏟아 붇고
있었지만, 한 나라의 수도인 에도는 쉽사리 성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에도항을 봉쇄할 선대만 남겨
놓은 이순신함대와 대마도 함대는 혼슈 남쪽에서 싸우고 있는 육군을 지원하기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인 대마도 함대는 일주일 후 아키타에서 원산함대를 지원하고 보급품을 수령하기위해 바다에
떠있는 선박이란 선박은 모조리 파괴시키며 쓰가루해협을 향해 북상했다.
이에야스의 군은 아키타수군이 전멸당한 것을 모른체 아키타군 3만과 자신과 후위의 병력 5만을 더하여
팔만의 병력으로 오사카를 포위하기 위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직 혼슈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선군은 이곳까지 오려면 칠일이상이 소요될 것 같았다.
저들이 지나쳐온 성과 마을을 점령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저들의 저의가
궁금했으나, 그만큼 오사카가 저들에게는 중요한 곳이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저들이
지켜야 될 백미 십만석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미 일이 터지기전 십만석이 조선으로 갔고 십만석이
오사카성에서 선적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배로 증원군을
보내면 쉬웠을 것을 조선군은 이상하게도 육군으로 험한 길을 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 오사카를 포위하고 조선수군 이순신을 포로로 잡으면, 앞으로의 일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리라.
왜수군에겐 공포의 대상이였던 이순신을 육지에서 잡을 수 있다니. “
1596 가을 어느때
“ 장군님 사방에서 왜군이 오사카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어찌하오리까. ?”
정탐병의 정보를 취합하여 이순신에게 보고하는 정보장은 얼굴이 편하지 못했다. 사소한 방화사건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버린 상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지만, 상관은 상관인지라 어쩔수 없었다.
지금 오사카성에 들어와 있는 수군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은 배를 타고 있어야 용감하지 육지에서는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오사카성을
함락시킬 때는 성주가 문을 열어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그가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펼쳤다면
자신들은 성벽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정보장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 역시 내심 괜한 짓을 해서 일만 꼬이게 만들었구나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부하들에게 내 비칠순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쳐밖혀 있는 동안 자신의 2함대는
에도를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답답하기 그지 없었지만, 수성하라는 명령만 내려오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하여 정보장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둥하고 있는데 누가 급하게 방문을 두들겼다.
” 누구냐 ?”
“ 예 통신장입니다.”
“. 들어와. 뭐야. ?”
신경질적인 제독의 물음에 당황한 통신장은 급히 전문을 이순신에게 읽어 가기 시작했다.
“ 발신 : 천군부
일시 : 1596년..
“ 이리줘봐 에이 빨리.”
답답하던 이순신은 통신장에게 화풀이를 하며 들고 있던 전문을 홱 나꿔채고는 읽어 내려갔다.
시시각각 안도의 표정을 짓던 이순신은 통신장에게 전문을 돌려주며 그만 나가보라고 손짓을 했다.
“ 이봐 부관 전 지휘관을 소집하고 각군에 철군 준비를 하라고 지시해.”
“ 네 ?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소집된 각전대장들과 함장들은 이순신 집무실에서 장군의 명령을 접수하고 있었다.
“ 금일 해질 무렵 우리는 이 성을 비우고 모항으로 돌아간다. 돌아갈 때 곳곳에서 낙오된 육군을
합류 시키고 시코큐에 투입된 왜인 여단을 지원한다. 귀관들은 최대한 빨리 군사를 소집하여 각함에
승선시키고 출항명령을 기다리도록. 이곳으로 거의 십만에 가까운 적이 몰려오고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철수해야 한다. 각 병사의 짐을 최소화 한다. 이상. 수색전대만 남고 모두 해산.”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해질녘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안에 출항준비를 마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올라 올 때는 며칠을 걸려 날랐지만 나갈 때는 그렇치 못했다. 야반도주하듯 몸만
빠져나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어딘가 쳐박혀서 술판을 벌이고 있을 놈들도 문제였지만 함포를 배에
다시 싣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 자네는 할일이 있네”
혼로남은 수색전대장은 긴장하고 있었다. 후퇴작전에서 홀로 특명을 받는 것은 죽음으로 시간을
벌라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장군의 명령은 색달랐다.
“ 지금 즉시 모든 화약을 각 성벽 및 성내의 주요 부분에 박아놓고 지도에 표시해두도록. 은밀하고
정확하게 해야 하네. 만약 적들이 이곳에 들어온다면 어디에 병력을 배치할 까를 생각해서 집중적으로
매설하고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나가봐 시간이 없으니까. “
그날 저녁 이순신함대는 오사카를 서서히 빠져나가 모항으로 전속 항진했다. 자신들의 철군 소식은
이미 왜군에게 들어갔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들은 최고속도로 오사카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함대가 항구를 무사히 빠져 나오자 비로서 이순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없어 가져오지 못한
쌀과 함포 수십 문을 파괴시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쌀이라도 배에다 실어놓을걸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였다.
오사카에서 온 전령의 급보를 받고 밤새 달려온 이에야스는 허탈한 마음으로 먼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은 모조리 도망가 버렸다. 어쩐지 찝찝했지만,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이제 여세를 몰아 혼슈 남부로 진격하여 적을 물리치고 큐슈를 다시 찾으면 되는 것이다.
오사카에는 십만석이 넘는 곡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기에 군량미는 넘쳐나고 있었다. 오사카성으로
들어가 이순신에게 성문을 열어 준 성주의 목을 댕강 짤라서 성문밖에 내걸고는 그날 밤 전 주민과
팔만의 병사를 위해 술판을 벌렸다. 흐드러지게 술에 취해 있던 이에야스는 한 통의 전갈을 받고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 조선의 함대 에도 공격으로 에도성 위험”
“ 나고야성 함락”
“ 미야주함대 전멸”
“ 조선군 일만오천 쓰루가에 상륙”
오사카성을 포위하여 섬멸하기위해 몰려들던 이에야스 대군은 거꾸로 조선의 대병에 의해 오사카에
몰린 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고야의 함락은 그의 군대가 에도성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아키타 수군의 전멸은 그들의 유일한 통로인 바다를 통한 탈출도 불가능하게 했다.
적의 포위방이 두터워지기전에 북방에 지원병을 요청해야만 했다. 정신이 든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더니 전령에게 니카타에 집결해있는 북방군대를 에도로 보내 에도를
지원하라 하고 나머지 병력은 나고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령은 뱃길이 열렸기 때문에
빠른 연락선을 타고 움직였고 일부는 육지를 통해 움직였다.
공수여단의 뒤를 따라온 3기병사단과 2 보병사단이 고베에서 합류하여 오사카 서쪽을 점령하고
원산함대에서 내린 4 보병사단이 1보병사단과 함류하여 북쪽을, 4보병사단과 같이 나고야를 함락하고
내려온 5보병사단이 동쪽을 맡아 오사카를 완전히 포위한 조선군은 포신을 오사카성으로 향하게 하고
긴 여정에 누적된 피로를 풀고 있었다.
공수여단은 조선군의 최정예답게 짧은 휴식을 거쳐 시코큐로 다시 투입되었다.
시코쿠에는 왜인부대가 시코큐 지방군과 치열한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병력에서 열세인 왜인부대는
함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거점으로해서 시코큐섬을 돌아다니며
지방군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조선병처럼 포병단이 없는 그들로서는 힘겨운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조선함대에서 보급을 제때 해주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의 오천병력은 그 수가 많이 줄어 이제 이천이 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제시한 당근에 혹해
지원한 수많은 떠돌이 무사들이 죽어나갔다. 자신들을 좀더 지원해주시 않는 조선국이 원망스러웠지만
모두들 자원한 자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발을 뺄 수 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자신이 무슨 작전에 동원되었는지 모르는 그들로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전투를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다. 다행이 조선군이 드디어 지원군을 보내준다니 한동안은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그들의 소박한 희망이었다.
1596. 10. 6
이날은 조선군에 있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날은 오사카를 포위하고 있던 조선군의 전 포대가
불을 뿜었고 전날 니가타에 상륙한 6보병사단이 니카타에 집결해있는 왜 잔여병력을 몰살시켰으며,
대마도 함대 수병과 3보병사단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총 공격을 감행하여 에도를 함락시켰다.
“콰과”
“피웅 꽈아아아앙 꽈광”
오사카성내로 뿌려지는 포격은 처음엔 산발적으로 일어나더니 점차 그 숫자가 더하여 연속폭발을
이르키고 있었다. 며칠 전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매설된 화약이 연쇄폭발을 이르키고 있었다.
그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포병대에서는 정확히 매설지점에 초탄을 날렸고 그다음에는 다른 지점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실제로 동원된 포는 채 포병여단의 전포 50문이 되지 않았으나, 그 효과는 백문의 포격과 비슷했다.
단 30분 실시된 오사카성을 향한 포격은 과거 오사카를 폭격한 것보다 더 심하게 상처를 남겼다.
성벽을 포함하여 성한 가옥은 한 채도 남지 않았고 팔만의 병사와 그 보다 많은 성에 거주하는 왜인이
죽어나갔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오사카성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신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화력.
이제까지의 전술개념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조선의 군대에 대항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보다 못해
보였다. 그는 장렬히 할복 자살을 함으로서 생을 마감한다.
우두머리를 잃은 왜는 쿄토의 천황일족을 모조리 척살함으로서 조선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각지에서 영주들의 작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그들은 진압군에 쫒겨 산으로 밀려들어갔고, 산속에서
그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조선군은 점령 후 많은 유화정책을 폈다.
그 유화책이 너무도 파격적이여서 농민과 평민중에서 반란군을 돕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타를
때렸다. 막부시절 평민들은 사무라이라는 무사계급의 노예나 다름없었기에 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그해 겨울 임진난이 있은후 4년만에 조선에서는 명에 보낼 동지사 일행이 한양을 떠났고,
일본 각지방의 영주들이나 번주들을 포함한 귀족들에게 만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패전국의 귀족으로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그들은
그 옛날 이몽학의 난에서 처리된 절차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성의 국무회의에서는 이번 일본점령에 큰 공이 있는 주경환중장을 새롭게 편입된 혼슈부를 통괄하는
부주로 임명하고 시쿄큐도주에 왜 낭인무사출신 김영일을 임명했다.
이로서 조선은 대마도를 포함한 한반도부와 남반도 ,서반도, 중반도를 합친 일본부를 두었고, 왜인들과
반란인들이 개척하는 만주부를 합치면, 조선은 3부에 24도 2특별도를 행정구역으로 갖추게 되었다.
천군부에서는 이번 봉황의 비상의 발동에 투입된 병력의 검토와 세로운 행정체제에 맞는 병력배치에
힘을 쓰고 있었다. 사실 이번 왜 점령에 투입된 병력은 1/2기병사단을 제외하면 조선군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병력을 쭉 뽑아보던 하소장은 앞으로 있을 만주정벌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남반도의 제 1/2 보병사단 이만명, 공수여단 이천명 포병여단 이천명
대마도의 제 3 보병사단 팔천명
급조된 제 4/5/6보병사단 삼만명
대마도 함대 전선 50척에 사천
원산함대 전선 14척에 삼천,
강화함대 전선 50척에 만명
이순신함대 전선 100척에 삼만
제주연대 일천
부산여단 삼천
왜인여단 오천
도합 전선 214척에 인원 십일만팔천명 중 사상자 오천에 부상자 일만명이었다.
대부분의 사상자와 부상자는 시코큐에서 발생했고 나고야성과 에도성전투, 히로시마와 아키다전 에서도
부상자가 꽤 많았다. 적은 수로 공성전에 투입된 병력의 부상자는 모두 중상이여서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워보였다. 그들에 대한 처리도 문제였다.
만주족은 다행히 3백만이 채 되지 않았고 그들은 해서, 건주, 야인 이렇게 3부로 나뉘어져
명의 분열정책에 심한 견제를 받고 있었기에 왜보다는 쉽지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전쟁을 통하지 않고 흡수해야만 했다.
계속되는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만도 엄청나서 기간산업에 투입되어야 할 막대한 자원이 전쟁에
투입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점령전을 수행할 경제력이 한 없이 부족했다. 2기병사단에 내린
명령이 차질없이 수행된다면 그나마 군부로서의 다행이지만 시일이 더 길어진다면, 그 역시도
문제였다. 조선에서 나는 천연자원으로는 천인단에서 보유한 기술을 100% 활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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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얼음이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고 만주부에 작은 마을을 형성하며 흩어진 이주민들은 제각기
농사에 알맞은 땅을 찾아 농사지을 준비를 했다. 일단의 무리들은 좀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사냥을
주업으로 삼는 자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천인단에서 추위에 강한 종자들이 제공되었고 주로 콩과
옥수수등이 재배될 예정이었다.
척박한 곳에서 알맞은 작물을 찾는데 애를 먹은 천인단에서는 일단 무난할 것으로 보이는 두 작물을
심고 시기에 따라 감자, 고구마등 뿌리식물을 재배할 생각이었다.
농업용수를 끌어오기엔 아직 부족한 만주에서 벼농사는 시기상조였다. 만주부에서 한해의 농사준비가
한창일 때 2기병사단 병사들은 천군부의 밀명을 받고, 만주 안쪽에 있는 한 지점을 향한 도로건설에
착수했다. 그 지점은 무산에서 약 800KM떨어진 지점으로 유전이 있는 곳인데 도로가 놓이면 천인단에서
과학자들의 채굴공사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며, 올해안으로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이 사업을 위해
이주해온 왜인 포로들이 투입되었다.
대동강포구에는 수많은 상선에 소금을 싣고있었고, 한쪽에서는 인삼과 기타 물품을 싣고 있었다.
조선의 물산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잉여품을 조정의 허가를 받은 송상이 중국상해와 남만으로
가기 위해 출항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전국을 관통하는 육로가 개통된 후 전국적인 유통망을 정비한 송상과 만상 왜상 한양의 경상들은
치열한 상권 싸움을 시작했고 그 장을 해외로 넓히고 있었다, 조정에서 해외무역을 적극권장하고
지원을 해주고 있어서 일단 해외 판로만 개척하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쌀만은 조정에서 수출을 불허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급할 수 없었지만, 기타 물품은 대부분
허가되고 있었다. 중국과는 아직 사무역이 금지되어 있어서 모두 밀수를 해야만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상단이 꾸려지면 그들을 호위할 호위함대를 조정에서 붙여주기 때문에 해적걱정을
피할 수 있었고, 밀무역이 명의 관리에 발각된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함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상단에서는 보호비 명목으로 얼마간의 경비를 지불하기만 하면 되었다. 작년 가을에 있었던 한차례의
상단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 송상의 소문이 퍼지면서 각 상단들은 명과의 밀무역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의 항로에 대한 정보는 천인단에서 자세한 지도를 보내와 큰 어려움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 출발하는 상단은 중국 남쪽인 해남도 근처까지 갈 생각이었다.
해상무역과는 별도로 육로를 이용하는 상단들도 크게 늘어 전국의 물산이 빠르게 유통되고 있었는데
변변한 해외 거래처를 마련하지 못한 한성의 상인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나라의 동맥인 왜도를 관리하고 다른 도로를 건설하기위해 도로 통행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부산을 기준으로 구간별로 마차 한대당 일원에서 10원의 통행세를 부과하였다.
오직 상단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10개 항구를 무역항으로 지정하고 그곳을
드나드는 상단의 선박에 한하여 입항세를 물렸다.
이렇게 마련된 재원은 모두 도로망건설과 항구 시설확충에 쓰여지고 있었다. 이런 저런 공사로
전국은 연일 토목공사가 한창이고 그에 따른 주민들의 이동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해 여름에 천군부는 대대적인 군개편작업을 발표하였다. 그 근간은 각 부별로 사령부를 두고 예하에
10개의 정규 사단을 편성하고 해군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1/2/3기병사단과 두개의 보병사단을 북방에 배치. 5개의 보병사단을 남쪽에 배치.
제주도와 대마도에 각각 특수여단을 배치. 사령부직할로 2개의 포병사단과 저격여단과 해병대등
특수부대를 배치했다. 일본부에는 남반도에 서반도에 일개 기병사단을 주둔시키고, 중반도에 2개의
기병사단과 2개의 보병사단을 주둔시켰다. 사령부 직할로 포병여단과 공수여단이 배치되었다.
만주부에는 일개 보병사단을 창설하고 추후 추가로 배치할 예정이었다.
수군은 해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일본부에 이순신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창설된 일본함대를 맡겼다.
일본 함대에는 판옥선과 거북선 150척을 배정했다. 일본함대는 동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 전역을
관할하게 되어 있었다. 한반도부는 진해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강화, 원산, 제주에 분함대를 두며
예하에 영영1/2/3호와 기타 증기선 및 21세기 함대로 구성된 세계최강의 함대를 구성하였다.
고구려함 함장이였던 김영세준장을 승진시켜 사령관직을 수행하고, 통합해군사령관에 김지영 대장이
임명되었다. 통합사령부소속 기동함대가 편성되어 대양함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무역로 및 무역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로서 육군 이십만에 해군 5만의 전력을 구비한 조선은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2기병사단의 주도로 행해지는 도로사업이 진행되면서 그 소문이 여진족에 급속히 전해져
많은 젊은이들이 공사에 인부로 고용되기 위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는 가장 후한 대접을 해주었는데 왜인 포로와 격리시켜 공사구간을 시행했다.
조선의 만주진출이 가시화되면서 여진족장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명조정에 알려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였다. 마침 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낀
명은 사신을 보내 경고를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그것을 묵살하고 만주에 5개 보병 사단병력을 증파했다.
이에 명은 조선을 징벌하기위해 십만의 병사를 조선으로 출병하였으나, 산해관을 넘어 요동으로
진입하자 마자, 대양하에서 조선군의 포위 공격에 지리멸멸하여 다시 산해관으로 쫒겨가야 했다.
만주에 대한 확고한 지위와 명과의 사무역을 요구하던 조선은 명이 거절하자 산해관 공격을 감행하고,
서해에서 함대지 미사일을 발사하여 그 중 딱 한발이 산해관을 박살내자 겁먹은 북경과의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조약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남하하지 않으며, 사무역을 허락하고, 명과 형제의
예를 취하며 매년 일정양의 조공을 명에게 받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로서 장성 이북에 대한 권리를 명에게서 이양 받은 조선은 저격여단을 투입하여 일시에 모든
적대세력의 여진족장들을 암살하고 드넓은 만주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건주를 통일한 누루하치가 가장 심하게 반발하였으나 송하강전투에서 모든 병력을 소진하고
저격여단의 총탄에 누루하치가 암살당하면서 사실상의 적대세력이 사라지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5개 사단중 2개사단을 계속 몽고로 진출시키고, 1개 사단을 시베리아
벌판으로 진출시켜서 사냥꾼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영토확장을 꾀한다.
산해관 공격이 한창이던 그해 여름 일단의 천인단소속 과학자들이 하얼빈 서북쪽 지방에서 유전을
발견하였다. 유전개발에 성공한 천인단은 송화강지류를 이용한 원유를 수송로를 정비하고 의주에
원유 정제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 처리시설이 하루에 불과 1000톤을 넘지 않았지만,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와 건설기계를 운영하는 데는 충분한 양이였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의주에는
내연기관 연구소가 들어서서 군의 기계화에 필요한 기초적인 장비개발에 착수한다.
중국에서 가져온 목화는 석탄에서 뽑아낸 탄소섬유와 결합하여 새로운 섬유로 탈바꿈되어 갔고
이는 다시 명 각지로 수출되었다. 멀리 인도까지 진출한 조선의 상단은 중국의 차를 인도에 대량으로
중계하였고, 일부는 아라비아반도까지 그 무역선을 넓혀가고 있었지만, 조선의 함대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어서 대상들은 명과의 무역에만 치중하고 있었고 중소 상인들이
해양무역을 담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올해 한성에 있는 황립사범학교를 1회로 졸업한 김세진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과 부산을 왕복하는 배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함과 정부에서 사용하는 연락선이
전부였는데 부산에 들어오는 연락선은 대마도와, 시모노세끼, 동경, 아키타가 전부였다.
그는 시모노세끼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륙으로 좀더 이동하여 관청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로 부임하고 있었다. 이년동안
사범학교에서 하루에 한시간 군사훈련을 받은 것을 끝으로 군대징집을 면제 받은 그는 유사시에
육군하사관으로 징집되지만 현재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장병에 대한 처우가 일반 관리 못지
않아서 너도나도 군대에 자원 입대하는 실정이라 자신에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 6개월과정의 기초 과정을 이년 동안 가르치고 나서 나머지 이년을 초등학교장이나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나면, 그가 원한다면 도교육청이나 그밖의 교육기관에서 높은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의무복무기간을 마치면 돈을 모아 가지고 노후선박을 한 척 구 매한 후
여객선 사업을 할 생각이었다.
부산에서 일주일 넘게 배를 기다리다가 주위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본 그는 그게 꽤
돈이 되는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사년 사이에 누군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나저나 일년동안 사천명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6개월에 천명씩 그가
담당해야만 하는 학생수가 4천이였다. 그들 중 반에 반절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 할 것이 틀림없었는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키는지 모를 일이였다.
중반도에서 마련한 오카야마 군청의 대 강당에는 천명이 넘는 인원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이번에
나라에서 온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천주학의 기본인 한글을 깨우치고 나면, 관직이나 군대 모집의 시험에 응하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동안 사무라이의 물건취급을 받던 평민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김세진은 짤막하게 일본말로 자신의 소개를 한 다음, 앞으로 할 교육에 대해 설명을 하고 나서,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연설을 하였다.
본격적인 수업은 내일부터 오전 오후 각각 두시간씩 강행되어질 것이지만,
지금 모인자 들중 얼마나 많은 이들의 한글을 익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육개월이 흘러 김세진은 자신의 첫번째 제자들을 졸업시키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수결한 수료증을
일일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나눠주고 있었다.
아직 개명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내려지지 않아서 그는 일본이름을 한자식 발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 산전목하, 앞으로 “
그의 거명에 한 나이가 꽤들어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 네 선생님 “
“ 여기있네 수료증. 이것이 있으면, 자네는 일본부 어디서든지 면청 관리로 일을 하거나, 군대에
입대할 수 있네, 그동안 고생했어.”
김세진이 주는 수료증을 받고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자리에 않은 군청에서 나온 관리와
병무청에서 나온 관리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자네는 어디에서 일하고 싶은가?”
“ 아닙니다. 저는 동경에 있는 중등학교에 입학하길 원합니다. “
“ 그래 그것도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곳은 입학 시험을 보기 때문에 좀더 공부를 해야할 텐데,
가능하겠는가 ?”
“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내년 봄에는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 그럼 그러도록 하게나. “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먼 산을 바라보던 김세진은 열흘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육개월의
교육을 실시해야만 했다. 1300명이 입학했었는데 수료증을 받은 자는 고작 3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천인단에서 운영하는 황립의료원에 다니는 허준은 그동안 배운 한의학과 천군부 군의관들의 천의학을
접목하여 새로의 대의학을 집대성하고 있었다.
그는 천의학의 많은 의학을 배우고 익히며, 그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옛날 스승의 배를 갈라
여러 장기들의 효용을 직접보긴 했으나 천의학을 배우고 나서는 그것이 조족지혈임을, 자신이 우물안의
개구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천의학이 다 옳게만 생각되지는 않았는데, 충분히 한의학만으로도 고칠 수 있는 병을
천의학에서는 몸에 칼을 대어 몸을 상하게 하곤 하였다.
천의학에서는 기의 흐름을 중요시 하지 않고 있었다. 황립의료원에는 전국의 의생들이 모여들어
천의학을 익히고 있었고, 전국으로 흩어져 백성의 건강을 돌보고 있었는데 황립의료원출신 의원은
백성들에게 일원 이상의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의원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봉을 받고 있었는데, 치부하는 자는 의원으로서의 인격이 수양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여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학교 선생과 마찬가지로 의원을 존경하고 있었다.
천인단이 운영하는 모든 단체는 모두 그 앞에 황립이라는 말을 넣었고 관에서 주관하는 곳에는
그 곳 관명을 붙었고, 개인이 사사로이 하는 곳은 임의대로 그 이름을 지었다. 전라도 정읍에 있는
정읍의료원은 군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그곳에는 10명의 의사들이 보건복지부의 명을 받아
전라도에서 발생한 이질에 대한 역학조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이질이 발생한 마을인 감곡마을을 돌아보고 온 오명진은 그곳에는 흐르는 하천이 없고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외지인의 왕래가 드문 곳으로 그 감염경로를 추측할 수 없었다.
작년 황립의료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이질은 물에 의해서 전염되는 이질균에 의해 발생하며,
열이 나고, 복통이 있으며, 코처럼 끈끈한 점액이 섞인 곱똥이나 피가 섞인 혈변이 나오고,
대변이 자주 마렵지만 적은 양이 나오는 후중기를 호소하고 심한 경우 사망한다.
그 전염성이 강하며, 매우 위험한 질병이였다. 일단 증상이 심한 아이들에게는 한양에서 공수된
수액제를 주사하고, 가벼운 사람들에는 계속 보리차물을 먹이면서 그 증상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에 보고된 감곡마을의 이질은 그 주변 고을로 빠르게 전파되었으나, 정읍의료원과 황립의료원에서
파견된 의사들이 정읍군내의 모든 이들에게 물은 반드시 끓여 먹고, 손과 발을 흐르는 물에 반듯이
씻고 음식을 만들거나 먹을 것, 마을간의 이동을 금지하고 발생 마을의 모든 가옥과 우물을 불태우거나
폐쇄하고 환자들을 완전히 격리시키고 나서야 이질의 전염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파견된 의원들은 환자를 맨손으로 만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만지게 되면 바로 소독약으로
소독하도록 의무화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기미가 보이자, 오명진은 감곡마을에서 그 감염경로를
파악하는데 며칠을 허비하고 있었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 보고서 쓸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황립의료원에서 내려온 의원들은 이곳에서 앞으로 6개월 이상 생활해야만 했는데
전염지역을 진료나간 자는 그 감염여부를 확인 받기 전까지는 상경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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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쓰신다고 고생 많으셧겠어요 ^^&
제가 쓴 것 아닙니다...오해 마시기를^^;; 제거 이런 정도 글을 쓸 줄 안다면 왜 직장 생활합니까? 전압 작가로 먹고 살지요~~~
일일이 타이핑 하는것도 만만치 않은작업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감사합니다.....인터넷에서 불법 다운 받은 것을 읽기 좋게 정리한 것 뿐이지요....오타, 맞춤법, 띄어쓰기가 너무 많아 수정하다가 그냥 올려버렸습니다....한글은 참으로 어려운 글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아니면 배우기가 매우 힘든 글자라고 생각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