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 헤밍웨이, 제발트와 「왕좌의 게임」, 최신 영화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이면과 인생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비평의 정수
『죽음을 이기는 독서』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저자가 만년에 쓴 비평집이지만, 결코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신랄하고 생명력 넘치는 문장은 클라이브 제임스의 청·장년기를 연상하게 할 만큼 번뜩이고,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는 글에 깊이를 더한다. 특히나 그의 문학적 우상이자 평생의 수수께끼라 할 만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분석은 유독 남다르다. 그뿐 아니라 일흔여섯(출간 당시의 나이)의 노장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편견 없고 광범위한 관심사는 이 책에 색다른 매력을 더한다. 대학 시절에 지루하게 읽었던 콘래드의 책이 돌연 새로운 각도에서 흥미롭게 보이는가 하면,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연작 소설이 마르셀 프루스트, 올리비아 매닝 등 거장들의 작품과 어깨를 견주며, 벌써 가득 차 버린 새 책꽂이를 위협해 오는 「왕좌의 게임」 DVD와 씨름하기도 한다.
콘래드의 예술적 본능은 초자연적이고 정신적인 위로에 반대한다는 증거였고, 우리의 예술적 본능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학살의 시대는 지적 사기꾼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솔직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콘래드는 동시대 다른 작가들보다 먼저 정치적 성인기에 접어든 작가였고, 다른 작가들이 정치적 성인기에 접어들었을 때도 그들은 겨우 콘래드의 무릎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 -본문에서
안타깝게도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면 시각화의 지속적인 힘 밑에는 치유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성적 본성에 들어 있는 이중성을 한 번도 정면으로 파헤치지 못하고 오로지 암시만 했다. 다른 모든 제약에 저항하는 작가에게도 자신의 내면만큼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에게 최고의 비극은, 그토록 오래도록 회자되며 그 자신의 위대한 주제가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의 최후에 대해서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대중 매체의 기생충 같은 인간들은 솔직함을 약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고, 헤밍웨이에게 그들은 너무 두려워서 피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미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에 반대했어야 옳았다. 그의 자살로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고, 그가 사랑한 사람들, 그 스스로 그들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던 사람들이 그가 남긴 난장판을 치워야 했다. 그것은 당당하지 못하고 용기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최후를 이토록 안타까워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본문에서
클라이브 제임스의 날카로운 눈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현대 미국 정치와 할리우드의 뒷이야기, 이스라엘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공간과 주제를 초월해 종횡무진 파고든다. 또 우리나라 독자에겐 다소 낯선 앤서니 파웰, 필립 라킨, 리처드 윌버, 스티븐 에드거 등 거장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작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독서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이에겐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그리고 비평 곳곳에서 예술과 도덕,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견지에서 정교하게 해명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인간에게 ‘재치’란 어떤 의미인지, ‘상식에서 벗어난 창작’이 어떠한 운명을 떠안게 되는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유추가 작품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작가에게 ‘자기 비평’이 (창작 못지않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매우 논리적이고 명쾌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끝으로 저자 클라이브 제임스는 마치 자신의 한평생을 총결산하듯(이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피날레」다.) 비평가의 책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는 “비평가는 ‘내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보라.’가 아니라 ‘이걸 보라.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젊은이들이 당신의 무덤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려면 거기에는 뭔가 좋은 글이 쓰여 있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하며, 이 글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비평이 이젠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의연히 선언한다. ‘클라이브 제임스’라는 한 인간은 분명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과 맞서 싸우며 완성해 낸 이 절절한 기록만은 영원히 살아남을 터다. 이 책은 하나의 위대한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