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이야기
믿기 힘들어 믿지 못하는 것인지,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인지, 내 마음의 감동이 없는 것인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참된 것을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인지, 살고 싶은 것인지, 죽고 싶은 것인지,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 내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알 길이 없음은 그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인간과 자연의 역설을 완전하게 할 성경과 기독교를 설명한다. 다음은 내가 팡세를 읽으며 정리한 메모이다.
기독교는 바로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차례차례 하나의 말씀이 다른 하나를 증거해 높은 진리를 설명한다. 그렇기에 지식에 대한 저점은 낮지만 고점은 아직도 확인되지 않을 만큼 높다. 하지만 사람들에 따라 처음 믿게 만드는 첫 단추가 다르고 이후 단추도 다 다르다. 그렇기에 믿음에 대한 가이드북이 없고 정답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창세기를 시작이라 정하고 천지창조를 자신의 믿음의 첫 단추라 멋대로 정하고 이것이 제일 낮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기독교는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종교라 단정짓는다.
하지만 내 생각에 창세기는 요한계시록만큼 수많은 믿음의 기반을 필요로 하며 첫번째 단추라 받아드려지기에는 무리가 있다. 첫번째 단추는 성경에서 찾을 것이 아닌 그 밖에 창조주가 보게 하신 진리의 그림자에서 찾을 것이요 파스칼은 그것을 인간의 비참과 위대한 설명한다.
성경 또한 굉장한 믿음의 기반을 필요로 하기에 자체적으로 첫 단추로 꿰매기란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가능성이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또 자연에게서 믿음의 증거를 처음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성경 뿐만이 아닌 자연과 인간도 포함한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전문서적이라 한다면 자연과 인간은 가이드북이다.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에서 자신 이상에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동시에 이 자연과 자신의 양극단을 설명할 것을 찾고 또 해결책을 제시할 것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실존할 것이라 믿게 된다. 플라톤은 이것을 수와 자연에서 발견하여 이데아 라고 칭하였다.
이데아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 이제 그것을 더 자세히 설명할 성경을 발견하게 되고 성경에서도 자신이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성경은 예수를 설명하고 그를 위해서, 의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마지막날에 그 이데아가 쥐어 쥘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뜰자는 뜨게 하고 멀다는 멀게하려 하셨다. 그러기에 성경은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믿는데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확실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신과 인간이 조금이라도 동일한 관계성을 띄우는 순간 기독교는 망한다. 그렇게 신자들은 겸손해 야하고 그를 높여야 하며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다만 은총으로 이해를 주실 수 있으시며 도우시는 신의 놀라움 또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동일한 관계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겸손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기에.
글을 메모하기도 하고 글에 대해 생각하여 나의 생각을 쓰기도 하여 마음에 동의가 생기지만 정작 이 모든 사실들이 나의 목을 조르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내가 눈이 먼 자이며 신이 되려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성경과 메시아를 더 자세히 설명하려 구약과 신약, 율법과 새 계명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표징적 율법은 신약의 메시아를 설명하고, 찾는 자에게 보이시게 하고 찾지 않는 자에게는 그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한다.
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영혼의 목이 조이는 것 같다. 숨 쉬기가 힘들고 이제 손에는 다음 글을 읽을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 내 마음이 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자꾸만 주변을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믿습니다. 아멘” 말만 하는 죄인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신실하게 살게하소서” 마음에 없는 기도를 하는 죄인이 얼마나 더 큰 죄인인가. 신앙의 말솜씨는 느는데 신앙 자체는 줄어드는 죄인이 얼마나 암울한가. 바뀌지 않는 삶 속에서 바뀌라는 말을 들으며 알겠다 답하는 죄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으며, 그 자신이 얼마나 역겹게 보이겠는가. 주변의 칭찬으로 얼마나 숨이 막히겠으며, 그 칭찬을 또한 좋아하는 역한 마음을 얼마나 죽이고 싶겠는가.
내가 성경을 믿고 이해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진리에 있어서 뜬 자가 아닌 먼 자 임은 왜 일까? 항상 성령의 동행함을 보고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음은 어째서 인가?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니 내 자신이 이해가 안된다. 그 존재가 얼마나 분명하며, 신실하며, 내가 경험했는가? 그런데 그 인생은 제자리 걸음으로 믿지 않는 자와 다름없음이 곧 내가 믿지 않는 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거짓된 기적, 거짓된 계시, 마법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하고 생각해 본 즉, 그 진짜 원인은 세상에는 그중 진실된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18편478)
“우리의 종교는 지혜롭고도 어리석다. 지혜로운 것은 가장 싶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기적, 예언 들의 가운데 가장 견고한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은 것은 이 모든 것이 우리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게 하되, 우리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믿게 하지 않는다.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은 십자가다(18편469)”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이 세상에는 분명히 거짓된 기적이 있다. 이것은 곧 진실된 기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 기적은 곧 참된 기적이고 나는 그것을 분명 기독교를 믿게 하는 십자가라 생각한다. 십자가는 존재 만으로 기적이다. 신이 자신에게 등 돌린 인류, 아니 그 각 개인 위하여 희생하신 사건이며 그것을 믿는 것 만이 구원으로 연결된다. 기독교는 분명 설득할 만한 지식을 두고 있고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직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하고 믿는 자에게는 능력과 지혜가 되는 십자가만이 유일한 믿음의 통로가 된다. 그 십자가가 크고 놀라워 아무리 미련하다 욕하여도 그 무엇보다 지혜롭고, 그 아무리 나약하다 낮게 보아도 그 무엇보다 강하다.
나의 십자가는 미련한 십자가이다. 어찌 신이 날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으며, 그곳에 인생을 바칠 수 있는가? 내 생각으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니 생각과 마음은 분명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는 이성이고, 하나는 영혼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만 영혼은 동의하지 못하니 행동에서 들어 난다.
그 믿지 못함은 어디서 오는가. 신이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인지, 믿고 신을 위하여 내 인생을 받치기 싫어서 믿지 않는 것인지, 더 이상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고도 감동할 수 없는 것은 그저 감정의 메말라서 인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선하신 성령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인지, 하나님 거부하는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 분명한데 정작 이것은 살고 싶은 것인지, 죽고 싶은 것인지, 이런 나의 행동과 생각은 믿는 것인지 믿지 않는 것인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모든 부분에서 동의가 됨은 이 모든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십자가가 이해가 되지 않아 믿지 않지만 동시에 이해가 된다. 그 증거는 내가 믿기로 한다면 날 위해 죽으신 하나님을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또한 믿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이것은 사실 죽기를 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도다 그의 공의와 정의를 사람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편33편4-5,34편1-2,4).”
그 말씀은 정직하시어 다시 다를 돌려 세우시니 단 한번도 나를 포기하신 적이 없다. 항상 같이 계심이 분명하니 오늘도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를 붙잡으셨다.
기독교는 바로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다. 차례차례 설명하며 놀라운 신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이해시킨다. 그 말씀은 성경 뿐만이 아닌 자연과 인간에게 있으니 나를 돌아보게 하심으로 다시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안에서 비참이라는 이데아를 찾았으며, 위대라는 이데아를 찾았다. 그 비참과 위대는 사랑 안에서 하나 되었으며 그분이 눈이 먼 자이며, 멀고 싶어하는 나의 눈을 띄게 하셨다.
내가 내 숨이 막혀도 팡세를 읽기 동안 마음이 평안 한 것은 내 영혼이 있던 어둠의 목이 졸리고 있던 탓이며 그로 인해 내 영혼은 생기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나의 모습, 누구보다 죄인인 나의 모습, 역겨운 나의 모습, 찢어진 나의 마음을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으니 그로 인해 남들보다 저 좋은 환경과 사람과 공간을 허락하셨다.
그분은 나를 십자가 사랑으로 이끄시며 동기에 내 삶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생각하게 하시니 믿지 않을 수가 없게 준비하신 그 놀라우심이 보인다. 나의 영혼은 원해 믿고 있었으며 그저 내가 나 자신을 속였다. 나의 구원자가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나를 그 사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으며 이성으로 행동하기를 막았는가?
눈물 흘리지 않는 것이 어찌 믿음의 증거이며 이따금씩 넘어 지는 것으로 어찌 나의 인생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항상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항상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바로잡는 것인데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넘어진 것으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그 참된 기적, 참된 사랑을 그저 받아드리면 될 것을 내 분에 못이기고 내 이성에 못이겨 믿기지 않는다고 단정짓는 것이 불쌍하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넘어진 것이 아닌 일어날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오늘도 말씀을 허락하시니 요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내가 도망쳐도 그는 나의 상상을 뛰어 넘어 증거하게 하실 것이며 놀라운 역사 하심으로 나를 바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드리니.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다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요나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