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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이제이션/ 니얼 퍼거슨
5장 소비
소비사회의 탄생
- ‘우리처럼 옷을 입는다’는 것은 대중문화 전체를 받아들이는 문제(자유), 민주주의 문제, 자본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양 옷이 어떻기에 다른 민족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일까?
- 유럽에서는 공장에서 만든 저렴한 의류에 대한 욕구가 그것을 직접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훨씬 먼저 생겨났다. 기술적 혁신이 공급에 박차를 가했다면 산업혁명의 수요는 더 많은 옷을 갖고 싶어하던 인간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원동력으로 했다. 면과 다른 재화의 가격 하락은 서양 노동자들이 같은 주급으로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고, 그 파급 효과는 당시 서양과 비서양의 임금과 생활수준의 급작스러운 격차를 드러낸다.
- 1900년 이후 광저우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으나 쓰촨성 노동자는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다. 19세기 내내 보통의 중국인 노동자 생활수준은 떨어졌으며, 태평천국의 난 기간에 급격히 하락했다. 북서 유럽보다 낮은 최저생계비는 18세기에 2대1이었던 것에 비해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 1850년 싱어 재봉틀이 나왔다. 의류 생산의 기계화- I.M. 싱어 앤드 컴퍼니는 빠르게 전 세계에 보급되어 세계 최초의 진정한 글로벌브랜드가 되었다.
서양식으로
- 화물 요금이 급격히 떨어지고, 파나마운하, 수에즈운하로 세계 해상 경로가 급격히 단축되면서 가장 놀랍게 세계화된 것은 의복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서양식 옷차림이 세상을 휩쓸었고, 이들 나라의 전통의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로
- 미국은 무역이 침체되고 자본 수입이 동결된 상황에서 정부가 대출을 이용해 공공사업에 투자하고, 달러를 평가 절하를 통해 수출에 활기를 불어넣고, 금리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 독재 국가들은 실업률을 급속도로 낮출 수 있는 산업 확장, 재군비 정책을 택했다.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소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업 생산량 증대를 이룩했다. 1939년 4월에 일자리가 없는 독일인의 수는 10만명도 채 되지 않아 완전고용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나치의 선전은 잘 먹고 잘살고 좋은 옷을 입고 반짝이는 새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아우토반을 달리는 핵가족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통계치는 이와 다르게, 1934년부터 재무장이 한 단계 강화되면서 섬유생산은 침체되고 수입은 줄어들었다. 자동차를 소유한 민간인은 극소수였다. 해가 갈수록 커피 같은 수입 식품은 점점 더 구하기 어려워졌다.
- 전 후 미국의 도움으로 서유럽 국가들은 금세 대공황 이전의 성장 속도를 되찾았다.
- 일본을 비롯해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한국, 타이완, 타이는 진정한 경제 기적을 이룩했다. 1950년부터 1990년 사이 세계 GDP 중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14퍼센트에서 34퍼센트로 증가했으며, 1973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국가다.
- 일본을 본보기로 면제품 수출 등으로 산업화를 시도한 ‘아시아의 호랑이들’ 중 당시 민주적 제도를 채택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서든 경제적 성공 뒤에는 민주화가 뒤따랐다. 즉 동아시아가 소련 공산주의라는 중력장에서 벗어난 것은 미국의 소비사회 속 이해관계자가 된 덕분이었다.
- 소비사회의 대표적인 미국의 발명품은 작업복 바지였다.
청바지의 위력
- 청바지는 처음 광부와 카우보이들이 입는 실용적인 바지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옷이자 강력한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와 마케팅 덕분으로 20세기 패션계를 주름잡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리바이스가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1959년에 한 차례, 그리고 1967년에 한 차례 더 리바이스 청바지가 모스크바의 상점에 전시된 것이다.
- 원자폭탄도 복제한 소련이 왜 리바이스 501은 똑같이 만들어내지 못한 것일까?
- 이 공산주의 국가는 이 옷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청바지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은 극도로 강해져 소련의 사법 당국은 ‘진 범죄’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 1968년은 파리부터 프라하까지, 베를린부터 버클리까지, 심지어 베이징에서도 혁명의 해였다. 냉전의 양대 패권에 혼란을 안긴 모든 사회적 반란의 공통 요소는 바로 젊은이였고, 1968년의 혁명은 옷에 관한 것이었다. 미니스커트부터 비키니까지 성의 혁명은 곧 의복의 부재, 즉 노출에 관한 것이었다. 체코인들은 나라에서 청바지를 만들기 꺼리니 밀수라도 했다. 기장이 너무 짧아도 부러움을 샀다.
- 그렇다면 그들은 왜 체코슬로바키아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청바지와 로큰롤을 즐기게 놔두지 않은 것일까? 정답은 소비 사회가 소련 체제 자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시장은 프란넬 바지보다 청바지를, 버트 배커랙 보다 믹 재거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반응하게 되어 있고, 그러한 기호를 충족시키는 데 점점 더 젊은 자원을 투자한다. 이것만은 소련체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갈색 폴리에스터 정장) 국영 공장에 그것들을 주문했다. 그것이 아닌 대안은 체제를 전복할 위험을 품고 있었다. 어쨌거나 냉전 군비 경쟁에서 훨씬 더 잘사는 미국보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탱크탑보다는 탱크가, 기타보다는 전투기가 우선시되어야 했다.
- 다른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위성국들이 이룩하지 못한 것은 소비 사회였다. 2006년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독재 정권에 대항한 시위대가 모두 청바지를 입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파자마와 스카프
-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 혁명 이후 중국은 철저한 평등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회색 파자마와 아주 비슷한 옷을 지급받았다.
- 터키공화국의 설립자 아타튀르크는 모든 국영 기관에서 종교적 의복의 착용을 금지함으로써 터키인의 옷차림을 서양화하기 위해 힘썼다. 1982년 정권을 잡은 종교분리주의 군사 정권도 대학에서 여학생의 머리쓰개 착용을 금지하자 저항이 거세었다.(출석 거부, 자살, 사살)
- 한마디로 우리의 옷차림은 중요하다. 서양의 가장 위대했던 두 차례의 경제 도약, 산업혁명과 소비 사회는 의류와 관계가 깊었다.(의복의 더 효율적인 생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옷 입기)
- 서양식 옷차림의 확산은 서양식 생활 방식의 확산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서양 의상에 대한 반발이 곧 이슬람교의 세계적 부흥의 증거였다. 어쩌면 서양에 대한 궁극의 위협은 급진적 이슬람주의나 다른 외부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6장 직업
직업윤리와 언어윤리
- 막스 베버는 신교에 대해 “전통 윤리의 억압으로부터 부의 획득을 자유롭게 하여, 부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합법화하고, 그것이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여김으로써 그러한 노력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부수었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인간은 살기 위해 일했지만, 신교도들은 일하기 위해 살았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 바로 이 직업윤리라 주장했다.
-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신교도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들보다 분명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950년대 이후 신교를 채택한 전 식민지 국가들 또한 경제적으로 가톨릭 국가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 신교는 인쇄, 읽기와 쓰기 교육을 널리 장려했는데, 이는 과학적 연구와 경제적 발달을 촉진했다.
- 서양 문명 역사에 종교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신교가 서양 사람들을 일하고 저축하고 글을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흥분을 맛보아라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노는 사람은 유럽인이다. 유럽인들은 이제 일을 덜하는 것뿐 아니라 기도도 덜하고 신을 덜 믿는다.
- 영국의 비기독교화를 비틀스, 피임약, 미니스커트로 대변되는 ‘60년대’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미국 또한 이런 세속적 즐거움을 즐기면서도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 미국도 유럽인들이 겪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거의 똑같이 경험했으나, 부유해졌다. 과학지식 수준도 높아졌다. 게다가 유럽인들보다 정신분석학과 포르노에 더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의 개신교는 유럽처럼 신앙심의 쇠퇴를 겪지 않았다.
-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국가 차원에서 이뤄진 반면 미국에서는 언제나 종교와 국가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다양한 신교 종파끼리 개방된 경쟁이 가능했다.
- 미국 스프링필드에는 인구 약 1000명당 교회가 하나씩 있었다. 스프링필드에서 벌이는 경쟁은 교파 간이 아니라 개별 교회 간이고 신자를 모으기 위해 불꽃이 튄다. 승자는 바로 제임스 리버 하나님의 성회(James River Assembly)교회다. 유럽인이 보기에 이 교회는 쇼핑몰이나 오피스 지구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스프링필드에서 가장 큰 교회이자 미국을 통틀어 규모가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꼽힌다. 제임스 리버에서는 종교를 취미처럼 향유했고 베버가 본 프로테스탄트 윤리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의 예루살렘-윈저우
- 중국의 개신교도 수는 1949년 약 50만에서 오늘날 약 4000만으로 급등했고, 최대 1억1000만까지 보는 조사도 있다. 유럽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중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성경이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인쇄된다. 난징에 있는 아이더 인쇄유한공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경 생산 회사다. 30년 안에 기독교가 중국 전체 인구의 20~30퍼센트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 7세기 당나라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처음 파견된 이후, 1307년 최초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세워지고, 1700년대까지 중국에는 최대 30만 명의 기독교신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877년이 되자 중국에는 세 개의 성경협회뿐만 아니라 총18개의 서로 다른 기독교 선교회가 활동했다. 각 선교회는 신교 전통에 따라한 경쟁을 펼쳤고 그 중에서도 중국내지선교와 침례교선교회가 산시 성을 차지하기 위해 격돌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중국내지선교회는 선교사들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철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선교사들이 자취를 감추자 교회 대부분이 문을 닫거나 공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교회는 그렇게 30년 동안 닫힌 채로 있었다. 문화혁명(1966~1976) 와중에는 우상 파괴 바람이 불어 수많은 고대 불교 사원들이 파괴되기도 했다. 노동자의 구세주 마오쩌둥은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미치광이다운 개인 종교의 우상이 되었다.
- 저장성의 원저우 시는 전형적인 제조업 지대로, 인구 800만을 넘는 중국에서 가장 기업가적인 도시이다.
자유 시장의 지배를 받고, 국가 개입은 최소한인 지역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가부터 가장 하찮은 공장 노동자까지 직업윤리가 모든 사람을 움직인다.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은 원저우 사람들이 서양으로부터 단순히 근면이라는 직업윤리 이상의 것을 수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개신교도 받아들였다.
문화혁명 이전에 480개 교회가 있던 곳에 오늘날에는 1339개가 들어서 있다. 1877년 중국내지선교회가 세웠지만 문화혁명 도중에 폐쇄되었던 또 다른 교회는 오늘날 1200명의 신도를 자랑한다.
원저우가 중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것은 이미 2002년 원저우 인구의 약14퍼센트가 개신교를 믿었고 오늘날 이 비중은 분명 훨씬 더 높을 것이다.
- 세계 3대 펜 생산기업 중 하나인 아이하오의 회장 장 한핑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그가 보기에 중국에서 기독교가 성공하는 이유는 그것이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하는 사회적 과도기를 거치는 사람들에게 윤리적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기독교로 개종한 자오 샤오 교수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 신앙은 중국의 부패를 줄일 수 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며, 박애주의를 장려하고 심지어 환경오염까지 막을 수 있는 새롭고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제공했다.
- 장쩌민이 중국 주석과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 당의 고위 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국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가지 칙령을 내릴 수 있다면 기독교를 중국의 공식 종교로 만드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도 들린다.
불신의 땅
- 서유럽의 이슬람 인구에 대해 증가하니 그렇지 않니 추정치는 저마다 아주 다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슬람교도의 수가 아니라, 아랍권의 무슬림 형제단, 파키스탄의 자마아티 이슬라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원하는 세계 무슬림 연맹과 세계 무슬림 청년협의회 같은 조직들이 일부 이슬람 공동체들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즈브 우트 타리르는 영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히 세운다. 또 테러리스트들을 활발히 모집하고 있다고 알려진 알 카에다나 위험하기로는 그에 못지않은 하라카트 울-무자헤딘도 있다.
세상의 종말?
- ‘문명의 종말’이라 칭한 로마의 몰락은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에 벌어졌다. 우리의 서양 문명도 그렇게 급작스레 무너져 내릴 수 있을까?
- 남아메리카 국가들 뿐 아니라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서양과 나머지 지역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있고, 인류가 대재앙 같은 기후 변화를 맞닥뜨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시각에 수많은 과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종말론자와 미국의 복음주의파 신도들 중 어마어마한 수가 현재 우리가 세상의 종말에 다가가고 있거나, 어떤 이들은 시련의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대로 이 엄청난 시련의 마지막 날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신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올 것인가?
맺는말 라이벌
- 뉴욕 역사학회 갤러리에 걸려 있는 토머스 콜의 연작 [제국의 행로]는 문명의 주기를 잘 나타낸다. 모든 문명은 쇠퇴하고 몰락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문명은 정의상 매우 복합적인 복잡계다. 명목상 중앙 권력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계속해서 적응을 거듭하는 역동적 경제, 사회, 정치적 관계망이다. 로마제국도, 잉카도시도, 명나라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도 조용히 쇠퇴하다 몰락한 것이 아니다.
- 대분기는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1500년 세계에서 가장 큰 10대 도시는 거의 모두 동양에 있었고 그 중 중국이 단연 압도적이었다(런던의 열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00년이 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10대 도시는 거의 모두 서양에 있고 런던은 아시아 최대 도시인 도쿄보다 네 배나 컸다. 여기에는 지정학도 연관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훗날 근대 세계적 제국으로 변모할 열 개 유럽 왕국들은 1500년 세계 영토의 20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1913년이 되자 이 국가들에 미국을 더하면 모두 합쳐 세계 영토의 58퍼센트, 인구의 57퍼센트, GDP의 74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때 세계는 서양과 나머지 지역 사이의 거대한 간극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고, 백인종 우월 이론이나 백인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발전을 막는 공식적 비공식적 장애물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 왜 서양이 나머지 세계를 지배했는가? 그 반대가 아니라?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은 서양이 나머지 지역에서는 갖지 못한 여섯 가지 비장의 무기를 개발한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1. 경쟁. 유럽 자체가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있었고, 각 왕국이나 공화국 내에도 경쟁을 펼치는 다수 조직이 있었다.
2. 과학혁명. 17세기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분야의 주요 혁신
3. 법치주의와 대의제.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세울 최적의 체제
4. 현대 의학. 공중 보건에서 19~20세기 거의 모든 혁신을 이룸
5. 소비 사회. 산업혁명이 일어난 곳에는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기술 공급과 면제품을 비롯해 더 많고, 좋고, 저렴한 상품을 원하는 수요가 있었다.
6. 직업윤리. 서양인은 집중적인 노동을 높인 저축 금리와 결합시켜 꾸준히 자본을 축적했다.
- 일본은 서양 문화와 제도 중 어는 요소가 정말 중요한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서양식 의복과 헤어어스타일부터 식민지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모방하는 길을 택했다.
- 중국의 산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속도가 빨랐다. 2년 동안 중국의 GDP는 10배 높아졌다. 현재 속도로 간다면 중국 경제는 국내 구매력 면에서는 2014년, 현재 달러 기준으로는 2020년 미국을 넘어설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아시아의 시대는 이미 당도했다.
- 2007년 여름 시작된 금융위기는 이미 확립되어 있던 유럽의 상대적 쇠퇴를 한층 가속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거의 대공황에 가까웠다. 2009년 미국의 재정적 지위는 그리스보다도 심각했다.
- 권력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면 중대한 갈등이 일어날 것인가? 새뮤얼 헌팅턴은 21세기가 ‘문명의 충돌’로 얼룩질 것이고 이로 인해 서양은 ‘중화’ 동양과 범중동의 이슬람, 그리고 전 러시아제국의 정통파 문명의 도전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문명의 충돌이 세계 정치를 지배하고, 문명 간 경계가 곧 미래의 전선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냉전 이후 문명 간 전쟁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 비상하는 중국 용은 무슨 문제를 겪게 될까? 부상하던 일본도 실패(프라자합의)했었고, 중국이 여러 번 겪은 시위, 인구, 노인, 남녀성비불균형도 걸림돌이 될 것이며, 중상층 부상은 정치적 발언권을 더 요구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이 이웃국가들의 화를 돋워 미국 편에 서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서양 지배 500년 역사의 끄트머리다. 이번에야말로 동양의 도전자는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 문명이 약해지고 다른 하나가 강력해진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문명이 충돌할 것이냐가 아니라 약해진 문명이 곧장 붕괴로 넘어갈 것이냐다.
- 역사가들은 그러한 와해 과정이 느리게 일어나고 다양한 인과관계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문명은 환경에 순응하는 다른 복잡계처럼 움직인다. 예측 불가능한 기간 평정 상태를 유지하다가 갑작스럽게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 한때 서양을 나머지 지역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주었던 것들은 더는 독식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이 자본주의를 가졌고, 이란은 과학을 얻었으며, 러시아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아프리카도 느리지만 현대의학의 힘을 빌리고 있고 터키에는 소비 사회가 존재한다점점 더 많은 세계 나머지 지역 사람들이 서양 사람처럼 자고, 씻고, 입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고, 이동하고 있다.
- 서양 문명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의 잔혹함부터 소비 사회의 경박함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문제와 오류를 겪었다. 심각한 물질주의는 온갖 병폐를 낳았다. 베버가 그리도 존경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절약과 금욕정신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 하지만 지난 500년 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숨겨진 천재들을 찾아내고 교육하는 데 서양 문명보다 더 훌륭한 역할을 해낸 문명도 없었다. 오늘날에도 서양 문명을 향해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은 다른 문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 그리고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역사적 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