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의 나아갈 방향
1.야학의 역할
2.각 야학단체의 기능과 역할
3.전야협의 운영 방향
1.야학의 역할
1)야학의 변천
지난 2005년은 야학 100년의 역사를 맞이한 해였다 물론 1880년대부터 야학이 태동했다는 근거는 있으나 별도로 그 고증 절차는 진행되어야 하지만 1906년 함흥땅의 보성야학, 경성의 보성야학, 중앙고 전신인 중앙학교가 같은 해에 민족교육을 위해서 야학으로 출발했다.
그때의 역할은 자명하였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민족정신과 항일사상, 농민들의 문자교육이 목적이었고, 해방후와 군부독재를 거쳐 오는 동안 민주화 교육과 근로청소년들의 노동교육이 뚜렷한 교육목표였다.
그런데 야학으로 시작하여 정규학교로 발전?한 야학이 이외로 많다.
5.16 군사쿠데타 후에 김종필의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든 재건학교는 그 후에 새마을학교로 간판이 바뀌고 또 사회교육법이 제정된 1981년에 모두 학교형태사회교육시설로 학력인정학교로 되거나, 전수학교로 운영되다가 학교법인으로 된 학교가 많다.
국가의 제도적 지원으로 야학을 모두 변화시켜 제도화한다는 기치에 잘 적응한 야학은 지금 모두 학력인정학교로 변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렇지 못한 야학이 160여개 가까이 되고 문자교육 혹은 중·고등검시교육을 하고 있다.
2)지금의 위기 -제도가 마련된 것이 오히려 위기
야학은 언제나 위기의 중심에 서있었다.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위기적 상황이지만 사회의 환경변화와 야학의 특성이 충돌하는 가운데 많은 혼란을 겪고 결국에는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지금-시간적 의미지만-우리가 선택을 할 중대한 사항이라면 어떤 것일까?
우선 국가적 제도권에 대한 변화이다. 1981년 일부의 야학(서울 한림학교외 5개교, 부산 김동영, 전남1개교)들이 이루어낸 사회교육법, 그리고 27년 후의 전야협, 전문기연, 한문기협의 공동성과인 평생교육법 전면개편, 이 두 제도의 변화는 그 양상이 똑 같다. 둘 다 현장의 소리와 청구에 의한 변화이다.
그런데 과연 저마다의 야학현장들이 얼마만큼 이 제도에 필요성을 느끼며, 또 접목이 가능할까?
지난 연말 정부관계자와 교수, 현장대표들이 시행령과 장관령(규칙)에 대한 밀고 당기는 회의를 거듭 하면서 이 제도가 모든 야학이 혜택을 받는, 그리고 모든 학습자들을 위한 법령이 되도록 최대한 고수하고 요청한 것이 이 법령이지만 담을 수 없었던 점이 많았다.
곧 문해교육 지원에 대한 학습자 학력과 시설지정이 이루어 진다. (후반기)
이에 대해 야학들의 작업해야 할 사항을 말한다면 우선 지역별 네트웍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시도단위와 시군구단위의 네트웍으로 공동대책과 정보의 공유, 그리고 학습자에 대한 또 다른 일들이 있다.
두 번째로 개별야학 전담자의 전문화가 시급하다. 이 전담자는 야학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전담인이어야 하며, 또한 행정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이제 문자해독교육은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야학보다 다른 경제적 요건을 갖춘 새로운 기관의 몫이 될 것 같다.
세 번째로는 야학이 곧 문해교육기관이라는 등식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처음 야학이 급속히 퍼져나간 때는 문자해독을 위한 수요자가 많았고 그래서 문자해독을 한 야학이 많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사회적 모순에 의한 대상과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청소년 대안교육, 홈 스쿨링, 주말학교, 계절환경학교, 주민학교, 청년학교 등 일부 간간히 시행되는 교육형태들이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상과 내용이다.
유비쿼터스에 의해 교육방법의 획기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과 영국, 미국에선 홈스쿨링으로 인해 학교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게제합니다.>
3)야학의 위기-정체성의 문제
야학은 교육소외계층을 비롯한 민중들과 함께 깨우침을 나누는 곳이며 사회제도적 모순에 대한 대항력을 갖는 중요한 교육기관이다 라는 것이 야학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야학교사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내하며 봉사하는 성자처럼 그 의무를 지우고 있다.
어떠한 사회변화에도 큰 줄기는 이러한 정신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 과연 우리 모두가 야학정신만으로 살아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떳떳하게 그렇다. 라고 감히 대답할 수가 있는가?
그 물음 자체가 넌센스라고 할 수도 있다. 고단하기 그지없는 야학정신 만으로의 생활을 고집한다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연한 생활인으로서 동떨어진 야학정신이 참으로 초라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이유로 무슨 명분으로 야학을 계속 할 것인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역사 속에 명멸하는 인물과 성자들 그리고 의로운 일을 꾸준히 해왔던 이들은 시대를 따지지 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지금은 더욱 더 특별히 희생하는 선구자가 필요하고 봉사자가 필요하고 성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어느 시대건 말없이 희생해 온 값진 의인이 있었고 참스승도 있었다.
차제에 제안하고 싶다. 차라리 영달을 바라지 못할 바엔 값진 봉사를 먹고 사는 야학인으로 야학정신으로 야학현장에 있는 동안은 철저하게 지키자고 강조하고 싶다.
뒤에 오는 또 다른 야학인에게 떳떳하자.
야학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학자가 정의를 내리려니 어렵다고 한다.
위의 정의에서 더도 덜도 붙일 말이 필요가 없다.
야학의 위기에는 정체성을 잃어 버리는 것이 곧, 최악의 위기라고 할 수가 있다.
문자해독, 검시, 시민기초교육 등, 모든 영역에 야학정신이 깃들지 않으면 보따리 장사치라고 본다.
국가의 제도 완비와 학습자를 위한 정부의 충분한 지원 등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지원과 제도마련은 어디까지나 주체가 학습자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 사업의 수월성을 확보하는 이상의 무엇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야학교사는 학습자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왕 야학은 무료봉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직업인이 아니다. 바로, 봉사자며, 지도자다.
봉사자로서 자신의 정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2008. 5. 21.
- 2008. 5. 18. 김동영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