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본주의에 물든 오병이어(요6:9-13) - 성경은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글 : 윤석준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오늘날의 성경해석 현상 중 두드러지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사실 제가 이 일련의 글을 쓰려고 생각한 이유도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을 보는 시각이 이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몹시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해석은 너무나 인본적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교회들에서 설교의 주제나 제목을 보십시오. 닮아야 할 위인들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 갈렙”, “바울의 끈기를 본받자”, “위험을 무릅쓴 믿음의 여인 라합”....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려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고, 온통 “사람들, 사람들”의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마치 로마교의 그것과 같습니다. 저는 한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말투가 약간 불경스럽지만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 주님을 보내 주셨는데, 사람들이 ‘마리아’를 저렇게 믿으려 하게 될 줄은 하나님조차 상상하지 못했을테다!”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전혀 의도하시지도 못했을 것 같은 악들로 하나님을 기만해 왔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수많은 위인들을 우리의 본으로 섬기고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울이 자기가 이렇게 한국교회에서 위인이 되어 있는 줄 알면, 천국에서도 통탄할 것입니다. 그가 철저하게 바랐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인물 설교는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자주 이런 표현을 씁니다. “다니엘을 가지고 모범설교를 할 수 있다면, 이순신이나 백범 김구를 가지곤들 왜 못하겠는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날 횡행하는 설교 제목들을 생각하면, 난중일기나 백범일지의 한 토막을 가지고도 충분히 설교가 가능해집니다. “의로운 사람 이순신”,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사람 이순신”, “김구의 청렴결백을 본받자”..... 시중에 유통되는 많은 설교가, 사실은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있다 뿐이지 이렇게 바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들이 많습니다. 결국 성경은 필요없는거나 매한가지입니다. 인본주의 설교는 설교를 망가뜨리고, 성경의 필요성을 망가뜨립니다.
이런 인본주의 설교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예들이 있고(그 일선에 선봉장 격으로 ‘내적 치유’ 등의 목회를 하는 심리학적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에서의 소년이 널리 회자되고 인기있는 사람입니다.
이 본문 역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분들이 이 오병이어에 대해 무슨 설교를 듣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요즈음의 대부분의 설교에서 오병이어 본문은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소년”이 그 주인공입니다. 제가 요 앞의 글에서도 이에 대해 썼지만,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것이 사람들에게 동기유발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관심 가지기보다, 자신에게 관심 가지도록 하는 것이 교회에 일하는 사람을 늘리기에 몹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이 이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과연 이 오병이어 본문이 이 소년의 헌신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씌어진 본문일까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 본문에서 소년의 중요성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14장에, 마가복음에서는 6장에, 누가복음에는 9장에, 요한복음에는 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본문들에 소년이 등장할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베푸신 이유가 “저 소년처럼 너희도 헌신해야 한다”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본문에 소년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는 오병이어의 출처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14:17)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단순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막6:38)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역시 소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같이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눅9: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소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 소년이 나타나는 것은 요한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조차 이 소년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이 소년은 단지 떡과 물고기의 출처를 말하기 위해서 딱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요6:9)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베푸실 때도, 베푸시고 나신 이후에도 이 떡과 물고기를 희사한 소년에 대해 전혀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이 소년이 어디서 와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성경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과연 성경이 이 소년의 헌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대답은 “전혀”입니다.
성경은 이 소년을 단지 배경으로 언급할 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오병이어의 주제가 “소년의 헌신”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설교자들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어린이 주일 등에 이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자녀교육”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여기에서는 성경에 아예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소년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이 소년이 이렇게 바치게 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이 소년을 잘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소년의 어머니는 아침에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싸서 이 아이에게 들려 보냈지만, 이 아이가 정말 주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에는 아낌없이 도시락을 드리도록 잘 교육하였다!”
이쯤되면 완전히 소설입니다.
성경에 소년의 어머니가 나옵니까?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농담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그 도시락이 어머니가 싸 준 게 아니고 옆집 할머니가 싸준 거면 어떡할테냐? 그럼 설교 전체가 거짓말이 되는 거 아니냐? 아니, 어쩌면 이 소년이 아침에 나올려고 하니 배가 고파서 자기 손으로 직접 싸온 것이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니, 조금 더 나아가.....부모를 떠나서 이 소년이 도시락을 줄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옆에 있는 아저씨가 ‘야 임마! 도시락 내놔! 주님이 쓰신단다’ 라고 말하면서 뺏아가서 제자들에게 드렸으면 어쩌겠느냐? 소년은 도시락을 뺏기고 뒤에 가서 울었으면 어쩌겠느냐?”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성경에다 무언가를 덧붙이기 시작하면 여기에는 한도 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소설을 써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가르치는 것도 힘든 마당에 무슨 수로 소설을 쓰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지, 자기가 원하는 내용을 이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면이 이미 많이 할애되었지만,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참 뜻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이 사건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습니까?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는 바는 사실 매우 명백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물타기를 하지만 않는다면, 선입견을 갖고 읽지만 않는다면, 성경은 매우 명백합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바도 매우 명확합니다. 가장 잘 설명된 내용을 읽기 위해 본문을 요한복음으로 선택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오병이어의 사건 자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들도 이 사건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의도하고 시행된 일인지에 관하여는 다른 모든 성경들이 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신학적으로 이 사건이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었던 떡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와, 엘리야가 동일한 기적을 행한 적이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것을 반복하고 계신 것이다...라는 정도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에는 이 사건의 의미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왜 일으키셨으며,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고오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셨는지가 분명히 설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이튿날 예수님께서 나가신 사건을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6-27)
여기에서 오병이어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무엇이라고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표적”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표적이 나오는데 오병이어는 이 표적 중 하나입니다. 표적이 무엇입니까? 표적은 “Sign”입니다. 즉,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지판 역할을 하는 기적이었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땅의 떡과 하늘의 떡을 비교하십니다. 이것이 뒤에 나오는 설명의 서론 정도가 되겠습니다.
몰려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에 대하여 힌트를 주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광야에서의 만나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1)
왜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만나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이 말은 쉽게 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어제의 오병이어 사건을 “만나사건의 재현”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썩는 양식과 썩지 않는 양식’ 이란 신명기 8장에 나오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즉,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오병이어 사건이 “만나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오병이어를 만나로 인식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만나=오병이어”를 가지고, 자신에게 연결시키시기 시작합니다. 32절부터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참 떡’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이 ‘참 떡’ 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 만나, 곧 생명의 떡” 이심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늘의 떡의 모형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참 생명의 떡의 원형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떡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기적으로 각각 풍족히 먹을 만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음으로써, “아!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것으로 사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과 같이, “아! 사람은 물질적 떡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 속에서 이 만나, 혹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재현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그리고 교회 위에 영원한 의식으로 남기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통해 살게 되는지(땅의 양식 때문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때문인지)를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주일의 성찬예식을 통하여 우리를 진실로 살게 하는 생명의 떡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오병이어는 이렇게 풍요로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지면상, 출애굽기 16장의 만나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서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부분은 생략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대신에, 하찮은 한 소년에게 집중하는 우리의 성경해석은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출처] 인본주의에 물든 오병이어(요6:9-13) - 성경은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작성자 행복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