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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사 산책 (2)
글/ Bhikkhu Buddhapāla
buddhapala@hotmail.com
이슬람의 침입과 인도불교의 멸망
BCE 20세기 무렵부터 카스피 해 주변 중앙아시아에 살던 아리아인이 인도대륙으로 이주해오던 길을 따라 이슬람이 인도대륙으로 들어온다.
인도에서 이슬람 왕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가즈니(Ghaznavid, 977 ~ 1186) 왕조가 인도대륙에 진출한 시점부터이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흥한 투르크(Turk) 계통으로 최전성기인 마흐무드(Mahmud, 재위 998 ~ 1030) 시대에는 서북부 펀잡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인도대륙으로 침공한다.
가즈니 왕조 이후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고르(Ghorids, 1011 ~ 1215) 왕조이다. 이 왕조는 무하마드(Muhammad, 1173 ~ 1202) 시기에 펀잡지방을 확실히 장악하고 지속적으로 인도대륙을 공략한다.
당시 이들의 진출은 구자라트 지방에서 번성하던 힌두왕조 차우한(Chauhan, 532~1182) 왕국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지만 이를 물리치고 서북인도에서 동인도 벵골 만까지 히말라야 산맥 남쪽을 흐르는 강가(Ganga, Ganges) 강을 따라 비하르와 서부 벵갈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이슬람이 인도대륙에 침입하고 힌두왕조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불교승가를 파괴하면서, 북인도에서 힌두교는 역사무대에서 소수로 전락하고 인도대륙에서 불교승가는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후 서부 벵갈지역을 중심으로 불교승가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소수였고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승가가 무너지는 과정은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단편적인 자료나 파괴된 불교유적의 복원과정에서 그 대략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 측 기록으로 당시 불교승가 지도자의 행동과 심리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단지 불교와 다른 학문을 함께 가르치는 대규모 종합대학 형태의 불교대학이 파괴되는 과정은 남아있는 유적과 이슬람 측의 자료를 통해 일정부분 상상할 수 있다.
불교승가는 서북인도 간다라 지역에서부터 동부의 벵갈지역까지 2000km 정도의 거리를 대략 백년에 걸쳐 이슬람에 의해 차례로 파괴된다. 이 루트는 과거 마우리아(Maurya, BCE 320~BCE 185) 제국을 무너뜨린 슝가(Shunga, BCE 187~ BCE 73) 왕조의 참모총장이던 푸샤미트라(Pushyamitra Shunga, 재위 BCE 185~ BCE 149)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 불교왕국인 마우리아 제국을 파괴하고 힌두교의 부흥을 내세우며 슝가왕조를 세워 동인도 비하르에서 서북인도 간다라에 걸쳐 산재하는 3만개 이상의 사찰을 파괴하고 30만 명 이상의 스님을 학살한 길과 대부분 일치한다. 단지 이번에는 불교를 파괴한 주체가 힌두교에서 이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불교탄압의 영향으로 대승 불교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슬람의 침입과 불교승가의 파괴 과정에서 불교도는 승가를 파괴하는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갠지스 강을 따라 동쪽으로 피난하다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망명하거나, 수행도량을 지키다 목이 잘려 죽거나, 승복을 벗고 세속으로 돌아가 민중 속으로 스며드는 길밖에는 선택할 게 없었다. 그리고 8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 티베트로 망명했던 인도불교가 중국의 탄압으로 설산을 넘어 북인도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때의 지도자가 14대 달라이라마(Dalai Lama, 1935~)이다
12세기 말 인도대륙에서 이슬람에 의해 불교가 파괴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대부분의 대형사찰이 고대인도 6개 대학들에 속한다.
(1)현장(玄奘, 602~664)과 의정(義淨, 635~713)도 구법 길에 방문했고 유식학파의 덕혜(德慧, Gunamati, 420∼500경)와 안혜(安慧, Sthiramati, 470∼550경)가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오늘날 구자라트 사우라쉬트라 지역에 설립된 와라비사(Valabhi Vihāra),
(2)법현(法顯, 337?~420)과 현장(玄奘, 602~664)도 구법 길에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오늘날 탁실라 지역에 설립된 탁샤실라사(Takshashila Vihāra)와 담마라지카사(Dhammarājika Vihāra, 法王寺),
(3) 현장이 수학하고 수많은 수행자를 배출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기라성 같은 수행자를 배출하며 인도불교를 이끌었지만 1193년 투르크의 박티아르 킬지(Muhammad Bin Bhaktiar Khilji, ?~1206)장군이 동인도까지 진출하면서 파괴한 나란다(Nalanda Vihāra, 那爛陀寺),
(4)1193년 나란다사로부터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단타뿌리사(Odantapuri Vihāra)도 파괴된다. 팔라(Pala, 750~1174) 왕조의 고팔(Gopala) 황제가 8세기 무렵 설립해서 파괴될 때까지 400년 동안 활동한 오단타뿌리사에는 12,0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며 불법을 배웠다고 한다.
(5)1203년 강가 강 하류 바갈뿌르 지역에 있던 비크라마실라사(Vikramashila Vihāra)가 파괴된다. 이곳은 금강승 불교의 중심지로서 유명하다. 이 대학출신 가운데 유명한 스님은 벵갈지역 샤호르 국의 왕자출신으로 1042년 티베트에 가서 금강승을 전해준 아티사(Atisa, 980~1054) 스님이다. 그는 금강승 불교에 기초해서 점진적 수행법(道次第)에 기초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Bodhipathapradīpa)을 저술하여 오늘날 티베트 불교수행의 초석을 놓는다.
(6) 자갓달라대사(Jagaddala Mahāvihāra)는 방글라데시의 북쪽 벵골지역 바렌드라 지역에 위치한 불교대학이다. 이곳은 주로 바즈라야나(Vajrayāna, 金剛乘) 불교를 연구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의 공부방법론이 티베트 불교승가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료된다. 이곳도 다른 불교승가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탁샤실라 대학 터
인도불교의 멸망원인
인도불교 멸망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불교 측의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상태에서 그 어떤 이론도 가설에 불과하고 인도불교 멸망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인도불교 멸망설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불교외부 사회적 요인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내부 요인이다. 이 두 요인과 더불어 다른 요인도 적절히 결합해 불교승가는 무너지고 파괴되고 다시는 역사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불교의 멸망요인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은 이후 인도불교를 복원하는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외부 요인으로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이슬람의 침공과 불교사원의 파괴로 인해 불교승가가 몰락하고 불교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설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타당하고 중요한 가설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내부 요인은 좀 더 복잡하고 스펙트럼이 넓은 것 같다. 첫째는 수행공동체인 불교에 수행이 사라지고, 교학을 연구하는 강당불교가 득세하고, 수행보다 수행 외적인 것에 더 많이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수행과 불교가 민중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행은 머리로 하지 않고 몸으로 하는 것으로 실제수행이 지혜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Buddha와 제자는 대부분 수행을 최고단계까지 경험한 전문가이다. 그런데 서서히 출가수행자가 직접 몸으로 수행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수행을 기록한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것, 수행할 수 있는 사찰을 건립하는 것, 일반민중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사회활동을 하는 것 등도 수행을 직접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수행이나 스님의 생활규범 등은 수행과 불교를 창안한 Buddha가 계실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사 문제가 발생해도 Buddha와 직계제자가 나서서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Buddha와 직계 제자가 입멸한 후부터는 수행이나 계율에 관한 문제가 등장하면 누가 얼마나 논리를 갖추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느냐가 대중을 설득하는 힘으로 등장하게 된다. 드러난 사실의 실체적 진실 못지않게 경전이나 계율에 기록된 것에 대한 해석문제로 귀결되고 자신의 행동과 해석이 얼마나 진실처럼 보이게 하느냐가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런 필요성은 수행을 몸으로 직접 하는 것 못지않게 수행을 학문적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재해석하고 책으로 서술하는 것을 중시하게 된다. 그런 결과는 수행을 점차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특수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것으로 포장한다. 진짜 수행자는 단순하고 간결하게 핵심만을 가르친다. 그러나 수행을 직접 해보지 않고 문자나 말로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수행을 고상하게 포장하고 어렵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답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Buddha가 중아함경에서 수행에 대한 이설이 불교승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너뜨리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오늘날 대학강당이나 출판사 목록에서 즐겨 등장하는 인도에서의 부파불교와 논장(論藏, Abhidhamma), 중국에서의 선종과 조사어록(祖師語錄) 등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대개 수행의 참고서 내지 보조 수단으로써 수행의 방향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에서 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95%라면 수행이 빠진 경전해석은 5%의 비중도 차지하지 않는다. 경전은 수행 안내서이고, 수행 이론서이고, 수행기술 지도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강당에서 행해지는 불교연구를 봐도 부파불교시대 범함 오류를 그대로 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강당불교나 명상운동이 불교와 수행을 대중화시키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만 불자들을 직접 몸으로 하는 수행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많이 부족한 것도 현실이다.
최근 혜민스님과 현각스님의 고민에서도 목격하듯이 명상과 힐링에 기반한 불교활동은 불교와 수행의 확장성에는 분명 많은 역할을 하지만 또한 그런 활동으로 부처를 못 이룰 것도 없지만 오늘날 시중에서 행해지는 명상과 힐링만으로 Buddha 수준의 수행을 완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 자는 부처수준으로 수행해야 부처를 이룰 수 있다. 평범하게 수행해서는 평범한 수준의 수행만 성취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고민은 전문성과 대중성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전문성을 갖춘 수행을 경험하고 그 유효성과 편리성을 이해한 바탕으로 수행이 인류의 자유와 진보에 기여하게 하기 위해 불교의 대중화가 필요한데,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 도리어 전문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불교의 정체성까지 희석시키는 일까지 생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갓달라 대사원 터
둘째는 불교와 수행을 창안한 Buddha는 인간의 지혜를 강조하면서, 주장과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를 사견(邪見), 오염법(汚染法)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강하게 거부한다. 기존의 힌두교가 가진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신과 윤회를 부정하였다. 창조신중심의 세계관에서 연기(緣起)와 업(業)을 강조하며, 자연법 중심의 세계관을 주장한다.
태어난 가문의 계급에 의해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는 세습제를 부정하고 개인의 행위(業)를 통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능력제를 주장한다. Buddha는 신의 은총을 구걸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관점을 가진다. 그 중심에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인 지혜(paññā, 般若, 慧)가 있고 행위(業, kamma)와 가치판단의 기준인 인과(因果, hetuphala)가 있고, 존재를 대하는 태도인 자비심(慈, mettā)가 있다.
마음공간에 존재하는 잘못된 관념과 마음오염원인 욕망과 이기심, 분노와 적의, 편견 등의 3가지 독가스(三毒心)을 수행으로 제거하고 마음공간을 맑히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존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解脫) 삶의 질이 향상(淸淨)된다고 믿었다. 그 중심에 수행과 지혜가 있다.
그러나 Buddha 입멸 후부터 서서히 힌두 관습이 불교 속으로 습합되었다. 불자들의 사회적 활동인 관혼상제를 불교식으로 행사하는 것이 정착되기는 했으나, 힌두 측에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 점차 힌두식으로 변해갔다. 이는 왕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써 불교승단을 지원하기 보다는 힌두관습을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힌두 왕조의 종교정책에 기인한다. 호법왕이었던 아쇼카 대왕이후에는 힌두교를 추종하는 왕조들이 대거 득세하여 종교사회문화적 위치에서 힌두세력은 불교세력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세가 약화됨으로 말미암아 힌두 문화 관습이 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승가는 왕족의 지원을 받던 우월했던 지위를 잃어버리고 큰 절에 모여 집단 거주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는 마치 권력층으로 유리되어 산중에 유폐되었던 조선시대의 산중불교의 형편과 비슷한것이었다. 이는 Buddha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수행공동체가 종교공동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일반민중의 입장에서는 불교와 힌두교의 차별성이 체감되지도 않았을 것이니, 힌두신상이 집과 마을 가까이에 있으니 거기에 복을 빌고 기도하면 그뿐이었다. 대승불교의 불보살과 힌두교의 신이 그 기능면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다면 민중입장에서는 힌두 신을 믿던 불보살을 믿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힌두측에서도 Buddha를 힌두 신인 Vishnu비쉬누의 9번째 화신으로 믿고 따르게끔 민중을 세뇌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불교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외부에서 이슬람의 침입이라는 강한 충격이 가해지자 불교승가는 인도대륙에서 자연적으로 소멸하게 되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
보드가야 대탑
셋째로는 불교승단이 비대해지고 타락하면서 민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인도불교가 소멸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상당히 타당한 관점이다. Buddha는 중아함경에서 승단이 비대해지면 번잡한 일이 많이 생기고 타락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수행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고 Buddha의 세상 보는 관점이 삶에 유용하다고 믿어지자, 무엇보다 최상류층 왕족출신의 엘리트 수행자인 Buddha를 추종하는 것이 자신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으로 상징조작 되자 수행못지 않게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많은 사람들이 사찰로 모여들게 되고 사찰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거대해지게 된다.
사찰이 거대해지고 수행자가 많이 모이게 되면 사찰유지 비용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그 결과 일반민중에게 십시일반 소액모금보다 소수의 정치지도자나 재력가에게 의지하는 편이 사찰경영면에서는 한결 수월하기도 할뿐더러 민중이 대규모로 조직화해 모여 있는 곳을 정치지도자나 재력가는 자신의 덕성을 보여주기 좋은 장소로 적극 활용하게 되고 상징 조작하는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그 결과 불교승가도 점차 왕족이나 장자의 시주에 의지하게 되고 이것은 출가수행자나 사찰이 소수의 힘 있는 재력가에게 의탁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일반민중과는 멀어지게 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그 결과 불교승가는 자생력을 상실하고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차단되자 곧바로 소멸하게 된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종교는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치이듯 인도에서 불교승가도 자연스럽게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고 본 것이다.
스님들의 공양
나머지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슬람 측의 기록이다. 호사카슌지가 『왜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했는가』에서 지적하듯이, 인도 이슬람의 오래된 자료인 『Chachnāmah』에 따르면 이슬람군대가 불교도에게 “개종, 공물, 죽음 셋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자, 불교승려는 왕에게 항복을 선택하도록 조언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기는 해도 불살생을 지향하는 출가수행자가 왕에게 전쟁을 피하라고 조언한 결과는 왕조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교승가 또한 역사무대에서 소멸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인도대륙에서 신흥강자인 이슬람이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영화 대부에서 그랬듯이 “화해를 주선하는 자가 적이다.”란 명언이 생존이 달린 현실세계에서는 그대로 통한다. (원담 주:김성철 교수의 유투브 강의에서 호사카 슌지가 이슬람 측 자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드린다는 점을 비판한다. 불교를 파괴한 이슬람 측에서는 불교 내부에서 자진해서 이슬람 쪽으로 전향하거나 개종했던 승려나 불자가 많았다고 보고 싶어할 것이다. 호사카슌지의 주장은 불교사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분명한 역사적 진실은 1203년 이래 대부분의 인도대륙에서 불교승가는 자신의 역할을 이슬람에게 넘겨주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힌두교는 이미 깨어나 이슬람에게 내어준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불교승가는 아직도 9백 년 동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도에서 불교승가가 망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Saṅgha(僧伽)가 주도하던 불교가 유효성을 상실하고 소멸했다는 것이지 운동형태의 불교와 수행은 소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교와 승가는 파괴되고 소멸할 수 있지만 누군가가 Buddha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고 있다면 운동형태의 불교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이 러시아로 바뀔 때 많은 매스컴은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가 망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던 사회주의의 유효성이 소멸한 것이지 사회주의가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출가수행자의 모임인 승가는 소멸할 수 있지만 어찌 Buddha 가르침이 소멸할 수 있겠는가? 법은 법일 뿐. 법에는 오고 감이 없다.
[저자인 붓다빨라 스님의 글 내용을 원담이 상당부분 수정했다]
첫댓글 머지않아 부처님의 법도 소멸하겠지요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구요
사라질조건이면 사라지는게 당연하죠
한국불교도 윤회를 부정하는스님들도
많은걸보면 머지않아 사라지겠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갈애와무명에 묶이고 치달리는 존재들은
이법을 알기도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말씀하셨죠
수행의목적이 존재하지않기라는걸
다수의존재들이 이해할수있을까요